남베트남 지방군은 각 성의 지원병으로 이루어져 해당 성에서 활동하는 군대였으며, 소총중대들, 수상정중대들, 그리고 지원부대들로 이뤄져 있었다. 그들의 주 목적은 국가 내부 치안 업무에서 정규군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었으며, 추가적으로 각 지역 첩보임무와 대파괴전 임무를 수행했다.
1950년대 후반 내내 준군사 시민군과 자기방어군은 정규군의 가난한 별종에 불과했다. 1955년 4월 시민군이 대통령령으로 창설되었는데, 이들은 전시에만 활동하는 준군사조직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병력은 1956년 말에 6만 8천명 정도였다. 지방군은 원래 대통령 직속이었으나 1958년 9월부터 내무부 휘하로 옮겨갔다. 중대 및 소대로 구성된 시민군은 각 성마다 2~8개의 중대가 있었다. 이에 더해 각각 500명의 병력이 있는 8개의 기동대대가 사이공에 있는 사령부의 통제를 받으며 각지 지원임무에 파견됐다. 시민군과 자기방어군은 수행해야 하는 임무에 비해 훈련 수준과 장비 수준이 열악했으며, 1959년에 그들의 숫자는 각각 46000명과 4만명으로 줄어들었다.
1960년과 1964년 사이, 이 지역방위군들의 훈련도가 상승했으나 여전히 팽창하는 남베트남군의 내놓은 자식에 불과했다.(역주: 원문의 사전적 의미는 의붓자식이긴 한데 여기선 윗대가리들로부터의 대우가 형편없다는 뜻이라 이리 번역함) 기본적인 문제 중 하나는 조직 쪽 문제였다. 이 부대들은 원칙적으로는 각 성과 구의 지휘를 받았지만 이들을 훈련시키는 건 육군의 몫이었다. 그럼에도, 1960년 초에 시민군과 자기방어군의 군사력과 작전수행능력에 많은 노력이 가해졌고, 훈련 정도와 무기 및 통신장비 보급이 향상되었다.
시민군의 훈련 속도를 향상시키기 위해 새 훈련소가 창설되었고, 훈련기간이 24주에서 20주로 줄어들었다. 이에 더해, 합동 군사고문단의 훈련 부대가 시민군과 자기방어군의 작전 기지에서 이들을 교육시켰다.
1964년 이전까지는 일정한 지방군(전 시민군) 모집 및 훈련 절차가 존재하지 않았다. 많은 부대들은 그저 무장한 일반 젊은이들의 모임에 지나지 않았다; 일부는 베트남 중앙정부하로 편입된 사병들과 깡패들이었다. 베트남 군사원조사령부는 1964년에 4천명의 신병들을 훈련시키는 계획을 제안했지만, 이 계획이 4월에 승인되고 4월에 시작되기로 했음에도 불구, 훈련은 잘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모병 자체에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6월에는 지방군은 14000명의 목표치를 채우기 위해 징병을 시작했다; 하지만, 우선순위가 베트남 정규 육군에 맞춰져 있었던지라 신병의 숫자는 적었고 그 해 말에도 고작 2000명이 훈련을 마치고 700명이 훈련을 받고 있었을 뿐이다. 지방군의 신병 훈련은 9주로, 베트남 정규 육군의 신병 훈련 체계와 같았다. 이 방식으로 최소한 지방군 훈련소가 정규군 훈련소의 성과가 시원찮을 때 그를 벌충하는 효과는 있었다.
지방군의 규모가 늘어나고 필요성도 커졌기에, 지방군 훈련 규모 역시 1964년부터 커졌다. 5월에는 지방군 중대의 숫자가 473개에서 523개로 늘어났으며 11월에는 640개까지 늘린다는 계획이 수립됐다. 1964년 365일동안의 계획에는 전 지방군 중대에 대한 부대 단위 훈련과 전 부대의 60퍼센트 정도에 재훈련을 한다는 것이 포함됐다. 이 해 말에, 533개의 지방군 중대가 조직되었으며 이들 중 494개는 훈련이 완료됐고 20개는 훈련중이었으며 19개는 아직 훈련이 시작되지 않았다. 533개 중대 중에 196개는 4주의 재훈련 절차를 마쳤으며 7개는 재훈련중이었다.
1965년과 1966년의 회계 연도는 지방군 전력은 137,187명의 병력이 759개 중대로 조직되는 것으로 정리됐다; 1966년 회계연도에 121개의 중대 추가 편성이 기획되면서 1967년 회계연도에는 888개 중대가 승인됐고 이들의 총 병력수는 155,322명이었다. 호놀룰루 회의에서 열린 혁명 발달 지원회의 발표는 베트콩이 토벌된 지역이나 국가의 주요 지역들에 남베트남 정부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더 많은 지방군 중대가 필요하다는 점에 촛점이 맞춰졌다.(역주: Civil Operations and Revolutionary Development Support는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남베트남 정부랑 미국 정부가 공동으로 조직한 지원회인데, 남베트남의 농촌 지역들에서 베트콩과 북베트남의 영향력을 일소하고 완전한 정부 통제력을 높히기 위해 기획되었다고 함.)
Combined action program(역주: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대 베트콩 작전을 위해 미 해병대가 만든 민병대 지원 프로그램)이나 다른 일부 프로그램의 예외를 빼고는, 직무간 훈련이나 대부분의 통합작전절차도 각 지역 부대들을 향상시키는 데 실질적인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주베트남 미군의 숫자가 줄어들고 베트남 정규군이 그 자리를 메움에 따라, 각 지방군과 시민군들의 능력이 안정화에 더 중요해졌다. 1968년까지 이 지방군들에게는 고문관이 없었으며, 베트남 군사원조사령부에게는 이들의 상태나 병력수효에 대해 잘 몰랐다. 수천개의 이들 부대가 나라 전체에 분산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정식 고문관을 배치해주려는 어떤 시도도 미군의 인력으로는 힘이 부치는 일이었다.
이들을 향상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은 처음엔 군단 선임 고문과 미군의 각 군단 작전구역에 있는 자원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1967년 모든 미군 군단 사령부는 베트남 지방군 및 시민군 훈련 절차에 3명에서 10명으로 구성된 기동 훈련단을 활용하기로 발의했는데, 이들은 각 지방군과 시민군 부대에 순환배치됐다. 그들의 임무는 일일 현지 훈련에서 5주 재훈련 절차까지 다양했다. 훈련단의 이름은 각기 달랐는데, 합동 기동 훈련단, 합동 기동 개선훈련단, "빨갱이 사냥 및 타격" 훈련단, 지방군 중대 훈련단 등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노력들은 진짜 심각한 문제들을 해결하기에는 너무 분산되어있고 조정도 부족했음이 증명되었을 뿐이다.
제한된 수준의 성과에 힘입어,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은 베트남 지방군 훈련단들의 개념에 대한 전국적인 평가를 했다. 기본적으로, 이 평가는 해병대의 Combined action program과 비슷했다. 3명의 위관급 장교와 3명의 부사관으로 구성된 훈련단이 지방군 중대와 베트남 육군훈련소에서 합류해서 그들의 훈련을 돕고, 각 중대 주둔지까지 동행해서 자대 훈련과 작전 임무까지 도와줬다. 이 훈련단은 해당 부대가 단독작전이 가능할 때까지 부대에 잔류하는데, 대체적으로 6개월에서 9개월이 걸린다. 이 훈련단이 직접 부대를 지휘하는 건 아니지만 지방군 지휘관들은 훈련단의 감독을 받는다. 지방군 중대 훈련단은 단순한 조언이 아닌 훈련과 고문 업무 양쪽을 담당하며, 따라서 고문단으로써 좀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 훈련단 구성원들은 본국으로 돌아가기까지 9개월 정도를 남겨둔 숙련된 전투 지휘자들이며 일부는 베트남어로 지휘를 할 줄 알았다.
1967년 말, 고문관들의 보고상으로 지방군들의 눈에 띄는 발전은 없었다. 하지만, 이 훈련단의 개념이 유효하며 심지어 훈련단의 숫자가 늘어나야 한다는 데에는 모두가 동의했다. 1967년 10월 26일에 있던 회의에서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은 지방군과 시민군의 지원에 초점을 맞춘 고문단을 354개 더 창설해야한다는 제안을 했다. 다른 제안으로는 기술자들 및 개인 단위 고문관들을 44개 성에 지원하는 것이 있었다. 최종적으로 내려진 결정은 기동 고문단과 기동 고문 보급단의 창설이었다. 이 훈련단들은 지방군의 모든 행정, 보급, 전술 작전에 대한 대규모 전력향상 계획의 핵심이었다.
1969년 남베트남군은 심각한 인명손실을 겪었으며, 적에게 가장 큰 병력손실을 강요했던 이들이 바로 "러프 퍼프", 즉 391000명에 달하는 지방군 및 시민군들이었다. (역주: 테트 공세에서 베트콩들 및 북베트남군들에게 가장 큰 타격을 준 게 민병대였다는 건 처음 알았음)
지방군은 123개 중대를 각 성장 휘하에서 운용했지만, 작전 지휘는 때때로 그 아래의 구 단체장이 하기도 했다. 원래 러프 퍼프들은 경비병으로 간주되었다. 지방군은 대체로 개런드나 카빈으로 무장하고 각 성의 시설들이나 다리들을 방어했고 자신들의 성의 도로를 개척하고 작은 작전들을 수행했다.
1969년에 이르자 이들은 더 이상 경비 임무만 수행하는 군대가 아니었다. 이전보다 더 잘 무장된 지방군들은 중대 단위의 베트남 정규군들과 거의 같은 임무를 맡았는데, 장기 대 베트콩 작전이나, 마을 안정화 임무, 동맹군들과의 연합작전, 그리고 대규모 사단들에서의 헬기 및 포병 운용 임무도 맡았다.
베트남 정규군만큼 잘 훈련받거나 무장되거나 봉급을 받지는 못했지만, 러프 퍼프들은 모병된 농부들로써, 징병 연령이 된 그들은 지방군에 입대해서 그들의 고향 성들을 지키거나 시민군에 입대해서 그들의 가족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의 고향 마을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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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www.globalsecurity.org/military/world/vietnam/rvn-civil-guard.htm
어제 새벽에 이은 남베트남 민병대에 대한 글 하나 더 퍼와서 번역함.
정말 거지같은 상황에서 미국 고문관들, 진짜로 수고 많이 했음. 고작 부사관 3명이랑 위관 3명짜리 훈련단이 각 중대를 돌아가면서 훈련을 시켜줬다니 이 무슨;;;;;
여하튼 구정 공세 당시에 바로 이 사람들이 베트콩 및 북베트남 놈들한테 가장 큰 피해를 입힌 게 사실이면, 이들의 노력이 아주 헛된 건 아니라고 하겠네. 저렇게 대우 형편없이 받으면서 미군들이 똥꼬쇼하면서 간신히 훈련시킨 부대가 북베트남이 팍팍 밀어주는 게릴라놈들 및 북베트남 정규군 상대로 선전했다는 이야기가 되니까...
불행히도 이 사람들이 1975년 남베트남이 최종 붕괴될 때까지 어떻게 싸웠는지는 이 글로는 알 수 없음. 하지만, 솔직히 들어가는 돈이랑 훈련도를 생각해보면 종합적으론 이 민병대가 베트콩 상대로 오히려 정규군보다 더 잘 싸운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듬. 최소한 테트 공세에서는 이 사람들의 전과가 가장 컸다고들 하니까.
사실 이 사람들이 정규군보다 더 잘 싸웠어도 이상할 건 없는 게, 정규군은 징집병들이고 이 사람들은 베트콩 때려잡으려고 모인 민병대니까... 게다가 나중으로 가면 이 사람들도 장비 아주 거지같이 지급받은 건 아닌 거 같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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