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다소 무질서한 부대들이 어떻게 싸웠는지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중세 전투에 대한 거의 모든 현대적 인식을 지배해온 신화myth, 즉 기병의 신화, 그리고 "서유럽의 군인들은 중무장 기병의 충격 전술이라는 하나의 전술에만 집중했다"는 신화에 대해 먼저 논의해야 한다.
1898년 초판이 출간된 찰스 오만의 책은 1066년경 서유럽의 전장이 카우치드 랜스 전술을 사용하는 중무장한 기병들에 의해 완전히 지배당했다는 편견에 일부 책임이 있다.
그는 헤이스팅스 전투와 디라키온 전투에 대한 논설에 "보병의 마지막 저항"이라는 제목을 붙였고,
비잔티움 군대에 대해 짧게 논의한 다음, 그의 관점에 따르면 '서유럽의 중기병과 터키의 경기병의 대결'인 십자군 전쟁에 대한 긴 논설로 이동했다.
그는 종종 보병의 가치에 대해 관심을 보였지만, 그의 분석에 따르면 보병은 14세기에 장궁이 도입되고 나서야 비로소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1923년 출간된 한스 델브뤽의 저서는 14세기에 보병이 대두되기 전까지 전장에서 기사들의 기병 전술이 지배적이었다고 주장함으로써 기사의 역할을 크게 부각했다.
베르부르겐은 1954년 출간된 저서를 통해 기사들의 전투 방식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심화시키는 데 기여했지만, 보병들에 대한 그의 세밀한 연구마저도 14세기 이후의 변화를 강조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중세 전쟁에 대한 매혹적이며 일관된 관점을 제시받았다:
-중세는 카우치드 랜스 돌격을 중시하고 '충격 전술'에 의존하는 기마 전사들에 의해 지배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전술이 대두된 근본적인 원인은 등자 등 중기병에 적합한 기술들의 도입이었다.
-기병의 우위를 가져온 이러한 기술들은 14세기에 등장한 장궁이라는 새로운 기술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이런 깔끔한 발전 단계 같은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
전쟁과 군사작전에 대한 모든 세밀한 연구들은 훨씬 더 다양한 전투 상황을 보여준다.
더 이해하기 쉬운 예로, 우리는 지휘관들이 자주 많은 수의 보병을 모집해서 신중하게 계획된 진형으로 그들을 배치하는 데 큰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10세기 후반의 연대기 작가 랭스의 리샤르는 군인의 아들이었고, 군사적인 주제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892년 몽팡시에 전투에 대해 기록했는데, 이 전투에서 외드는 전방에 보병과 궁병 부대를 배치하고 후방에 기병 부대를 배치한 진형으로 북부인 군대와 대치했다고 전해진다.
북부인들은 먼저 화살 세례를 받은 다음 기병대의 지원을 받는 보병들의 공격을 받았다.
이것은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노르만인들이 사용한 전술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 전투에서도 윌리엄은 다수의 중무장 보병을 운용했다.
알랑송 전투나 이탈리아의 사례들도 다양한 병종의 조합이 확실히 유효한 전술이었음을 입증한다.
1106년 탕슈브레 전투에서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는 보병 부대와 기병 부대를 한번에 돌격시켰고,
헨리 1세는 보병대와 하마기사들로 이를 저지한 다음 르망의 엘리가 이끄는 기병대로 측면을 공격했다.
1119년 브레뮬 전투에서 기사들은 말에서 내린 채 대열을 이루고 기병 돌격을 저지했다.
1124년 부르그테룰드에서는 궁수들이 승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1139년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한 스코틀랜드 군대가 노샐러턴에서 잉글랜드군과 대치했다.
스코틀랜드군은 데이비드 왕의 아들이 이끄는 소규모 분견대를 제외하고 모두 보병으로서 싸웠고, 잉글랜드군도 기사들을 하마시켜서 징집된 보병들과 궁수들 사이에 배치해 대열을 강화했다.
스코틀랜드군은 야만적이지만 무장이 빈약한 갤러웨이인들을 앞세우며 동시에 돌격했고, 궁수들의 화살 세례에 선봉대가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하면서 전군이 혼란에 빠졌다.
데이비드 왕의 아들은 기병대를 돌격시켜서 군대를 재집결할 기회를 만들려고 했으나, "그러나 그의 기사들은 갑옷을 입고 말에서 내린 채 서로 붙어서 단단한 대열을 이룬 잉글랜드 기사들을 돌파할 수 없었다."
보병대는 바르바로사의 전쟁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았고,
1214년 부빈 전투에서도 활약했으며,
1237년 코르테노바 전투에서 롬바르디아 동맹군 보병대는 카로초 수레(carroccio) 옆에 집결한 채 프리드리히 2세의 군대를 막아냈다.

이전부터 주장되어온 충격 전술 이론들은 모두 "무기체계"로서의 기병의 가치를 지나치게 과장한다.
기병의 진정한 가치는 기동성, 그리고 그들이 직업적인, 또는 적어도 반쯤 직업적인 숙련된 전사라는 사실이었다.
고드프루아 드 부용은 16살 때부터 군인으로 살았다.
군인 집안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전투 훈련을 받았으며, 이 훈련은 매우 잔혹할 수도 있었다.
에쇼푸의 지루아 가문의 형제들 중 하나는 레슬링을 하다가 계단 모서리에 내동댕이쳐지는 바람에 갈비뼈가 부러져 죽었고,
다른 하나는 창술 훈련 도중 잘못 조준된 창에 찔려 죽었다.
기사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웠다.
정복왕 윌리엄과 로버트 2세는 뛰어난 궁수였고,
고드프루아 드 부용은 1099년 예루살렘 공성전에서 쇠뇌를 사용했다.
리처드 1세도 쇠뇌를 사용해서 큰 성과를 올렸다.
부빈 전투 삽화를 포함해, 마상에서 활을 쏘는 기사를 묘사한 그림들이 남아있으며,
1150년 토롱의 옹프루아는 활로 무장한 채 무슬림 궁기병들을 추격했다고 기록돼 있다.
말의 기동력은 기사의 가치를 높이고 그들을 동시대 최고의 군인으로 만들었다.
빠른 이동 능력은 소규모 교전과 습격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대규모 전투에서도 빠르게 이동해서 타격할 수 있는 기병의 능력은 그들이 전장의 주도권을 가졌음을 의미했다.
13세기 이후에나 큰 집단을 이루고 동시에 돌격하는 기병 충격 전술이 전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4세기 중반부터 15세기 초까지는 다시 하마기사들의 시대]

13세기는 정말로 기병의 시대였다.
하지만 이것은 기병이 무소불위의 패권을 누렸다는 의미가 아니라 기병대의 운용이 전황을 좌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보아온 것처럼, 보병들도 이전 시대보다 더 잘 무장돼 있었다.
그리고 이탈리아, 웨일스, 스코틀랜드, 그밖의 다른 지역들에서도 보병들이 자신들의 무서운 능력을 보여주었다.
코르트레이크와 배녹번에서 승패를 결정한 요소는 현명한 지휘관과 의욕적인 군대였다.
이 전투들을 새로운 형태의 전쟁이 기존의 기사도적인 전쟁을 대체하기 시작한 전환점으로 보는 것은 유혹적인 일이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접근법이 될 것이다. 부빈 전투에서의 프랑스 기사들의 승리 역시 현명한 지휘관과 의욕적이고 규율잡힌 군대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John France, Western warfare in the age of the Crusades, 1000–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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