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병장에서 횃불을 피우고 서로에게 아쎄이의 탈영이라는 중대사안을 두고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면서 누구를 죽이네 살리네 하며 떠들썩한 유사인류들의 소란과는 별개로 황룡이 도착한 유류창고는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다. 황룡은 좌우를 살피며 조심스레 이제는 녹이 슬다 못해 누렇게 떠버린 철문을 열었지만 예상 외로 그 곳에는 퀘퀘한 먼지 덩어리와 거미줄로 뒤엉킨 유류통들만이 굴러 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일까. 사실 황룡의 기준에서는 이 곳 말고도 숨을 곳은 많았다. 부대의 시설들 중 저 악마들이 찾는 곳은 어차피 자신들의 생활터전인 해병성채를 제외한 그 외의 이용시설인 주계장, 의무대 정도였기에 그 외의 장소들은 훌륭한 은신처가 될 터, 황룡은 자신의 경험에 기반하여 한 때 자신의 싸제음식들을 숨기고는 했던 우측의 교보재 창고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어쩌면 그 아쎄이는 감금되어 있던 수용소에서는 제법 가까운 편인 유류창고도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한정된 짧은 시간 범주 내에서 좀 더 이격된 곳을 찾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유류창고로부터 불과 50m 남짓한 곳에 위치해있던 교보재 창고는 이제는 거진 허물어 가는 폐가를 연상케 했다. 하기사, 근출의 등장이래 지난 오랜세월 동안 이 교보재 창고는 한번도 누군가의 관리를 받지 못했으니 그럴 법도 했다. 황룡이 이제는 문이라 부르기도 뭐한 목재문을 열자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그보다 더한 냄새에 익숙해져 있던 황룡에게는 그것은 차라리 향기에 가까웠다.
후레쉬로 오래된 훈련 교보재들 사이를 비추면서 아쎄이의 흔적을 찾던 황룡의 뒤에서 무언가 달그락 하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황룡이 뒤를 돌아 다시 발걸음을 옮겨 주위를 살피던 그 때였다.
"사...살려주세요!"
후레쉬의 불빛을 애써 손으로 가리며 다급하게 외치는 이 당돌한 아쎄이의 얼굴 빛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쉬잇—!
황룡은 황급히 다가가 아쎄이의 입을 틀어막았다.
"괜찮아요, 난 당신을 해치진 않을 겁니다."
아쎄이의 커진 두 눈은 어지러이 황룡을 이리저리 훑어보고 있었다. 아마도 자신을 발견한 이가 포식자인지 아니면 구원자인지를 빠르게 판단하려는 생존본능에서 비롯된 반응이었으리라.
"난 오늘 당신을 붙잡아온 저 악마들과는 달라요. 그러니 안심해요."
황룡은 아쎄이의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을 조심스레 떼었지만 아쎄이는 여전히 겁에 질린 눈이었다.
"다..당신은 누구죠? 당신도 저들과 같은 해병이 아닌가요..?"
"아.. 해병은 맞는데, 음... 그냥 나도 이곳에서 제정신을 갖고 갇혀있는 사람이라고만 해두죠."
아쎄이에게 이 인외마경에서 살아가는 자신을 소개하자니 운을 떼기도 어려울 뿐더러 새삼 성찰하게 되는 자신의 처지가 우습고 기가 막혀 장황한 설명은 포기하기로 한 황룡이었다.
"아... 그렇군요..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비로소 조금이나마 마음을 놓은 듯한 아쎄이가 한시름 놓았다는 듯 고개를 떨구며 말을 흐리자 그의 조잡하지만, 제법 길이가 있는 스포츠 스타일의 머리가 황룡의 눈에 들어왔다. 어렴풋이 군인 스타일의 느낌이 떠오르는 듯한 머리를 한 아쎄이였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라고, 이 아쎄이는 필시 현역 군인이거나 혹은 전역한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모양새였다.
"저어... 혹시 군인이세요?"
황룡의 물음에 아쎄이는 고개를 들어 황룡을 보았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2주 전에 전역했습니다..."
"그랬군요... 전역하자 마자 이 무슨 참담한 일이랍니까. 근데 어디서 뭐하시다가 붙잡혀 오신거에요?"
혀를 끌끌 차며 묻는 황룡에게 아쎄이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얼머부리듯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냥... 친구들이랑 술 한잔 하고 늦은 밤에 귀가하는 길에 갑자기 이렇게 붙잡혀 왔어요.."
"운도 지지리 없으시지...쯧쯧..."
"저기 근데.. 여기서 나가는 것 좀 도와주실 수는 없나요?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황룡의 다리를 붙잡고 애원하는 아쎄이의 여전히 하얗게 질려 있는 앳된 얼굴은 후레쉬의 불빛을 받아 더 하얗게 보이다 못해 이제는 창백하게까지 보였다. 황룡은 물끄러미 아쎄이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길은 다소 무미건조했고 그 속에는 이제는 오랜 세월을 겪으며 말라 비틀어진 지침과 포기, 그리고 체념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아쎄이의 애원에 다시금 발걸음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었기에, 황룡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난 당신의 탈출을 도울 수 없어요. 아니, 도운다고 한들 오히려 그게 당신의 명을 재촉하는 길이 될 겁니다. 혼자 탈출한다고 하면 말리지 않겠어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저 악마들에게 당신의 탈출을 고발하지도 않을 겁니다. 난 그저, 당신이 무엇을 하든 그냥 내버려둘 겁니다. 단, 당신을 위해 먹을 것 정도는 가져다 줄 수 는 있어요."
아쎄이는 어안이벙벙한 얼굴로 황룡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그 앳된 얼굴에는 좌절과 공포가 떠오르고 있었다.
"아니, 그럼 지금 나를 왜 찾으러 온 거죠?! 당신 말대로 어차피 내가 무엇을 하든 상관하지 않겠다라고 한다면 굳이 내가 숨어 있는 곳까지 찾아와서 나를 찾아낸 이유가 뭐냐 이겁니다!"
이유. 사실 황룡 또한 이 아쎄이를 찾으러 생활관을 나설 때부터 끊임없이 자문하던 질문이기도 했다. 어차피 이 인외마경에서 자신의 보신에만 신경쓰기로 마음 먹은지 오래였건만, 그럼에도 이 아쎄이를 찾아 친히 찾아 나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어쩌면 오롯이 가해자들만이 득시글 대는 이 지옥에서 애써 제정신을 부여잡고 살아가는 한 명의 참된 사람으로서 마지막까지 지키고 잃지 말아야 할 최소한의 인간다움이라는 최후의 보루를 지키고자 하는 본능에서 비롯된 행동이었을까?
황룡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그 인간다움을 갖추고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긴 시간 동안 홀로 외로이 사투를 벌여왔던가!
알아주는 이는 없는 고독하고도 고된 긴 싸움의 끝에는 늘 자신의 패배와 무력감, 그리고 좌절 뿐이었고 이에 체념한 나머지 극단적인 보신책이라는 방식으로 어느새 이 악마들과도 타협 아닌 타협을 하게 된 황룡이었다. 더 이상의 싸움을 이어나가기에도 지쳤고 질릴 대로 질린 터였다.
그저 발걸음을 돌려 저 악마들에게 다가가 교보재 창고를 향해 손가락 짓 한번이면 자신을 고뇌하게 만드는 귀찮은 저 아쎄이는 삽시간에 사지가 찢겨나갈 것이고 자신은 어쩌면 그 보상으로 싸제 라면 한봉지라도 받아 그 일신 또한 편해질 터,
그러나....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황룡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일단.... 있어봐요... 나중에 다시 찾아 올께요."
그러고는 품 속에서 아껴두었던 초코바 두어개를 꺼내 아쎄이의 손에 쥐어주고는 발걸음을 돌려 떠나는 황룡이었다.
- 下에서 계속 -
댓글 영역
획득법
① NFT 발행
작성한 게시물을 NFT로 발행하면 일주일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최초 1회)
② NFT 구매
다른 이용자의 NFT를 구매하면 한 달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구매 시마다 갱신)
사용법
디시콘에서지갑연결시 바로 사용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