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아쎄이의 '탈영소동', 아니 정확히는 은신이 있은지 어언 3일째.
근출을 위시한 휘하의 해병들은 어느새 아쎄이의 탈영소동도 까맣게 잊고 언제 그랬냐는 듯 여느 때와 같이 평소의 짐승의 삶으로 돌아가 있었고 황룡 또한 태연하게 숨겨준 아쎄이에게 필요한 식량과 물을 가져다 주며 이 위험한 동거를 이어가고 있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해병성채의 지척에 위치한 교보재 창고였음에도 그 곳으로는 일절 발걸음을 향할 일이 없던 해병들이었기에 역설적이게도 아쎄이는 비교적 안전한 은거생활이 가능했다. 평소에도 아껴두던 라면이나 과자, 물 등을 물심양면으로 가져다 주며 자연스레 교보재 창고에서 아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 황룡은 아쎄이에 대해서도 알게 된 터였다.
아쎄이의 이름은 국어 교과서 속의 등장인물을 떠올리게 하는 김철수. 또한 나이는 공교롭게도 황룡과 같았기에 둘은 편하게 말을 놓기로 하였고 오랫만에 마주하는 정상인이었기에 비록 자신과 같은 정상인들에 대한 관심을 끊었다고는 하나 식욕과 성욕 등과 같이 오롯이 원초적 욕구에만 점철된 이 인간의 탈을 쓴 이 악마들과의 대화에 신물이 나던 황룡으로서는 간만에 사람 다운 대화를 나누게 된 반가움은 당연했을터, 이 둘은 자주 접선하여 이야기를 나누고는 하였다.
"근데, 여기는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거야?"
교보재 창고를 찾은지 4일째 되던 날, 철수는 황룡에게 물었다. 황룡은 철수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쓴 웃음을 지으며 피우던 담배를 털며 한숨을 쉬었다.
"하... 얘기하자면 길긴 한데, 너가 믿을라나 모르겠네..."
황룡은 철수에게 그간 있던 일들에 대해 들려주었다. 근출과 황룡 자신의 관계, 그리고 모든게 정상적이었던 시절의 부대, 그러나 김덕팔로 대표되는 부대 내 부조리와 악행, 그에 의한 근출의 고통과 타락, 그리고 변해버린 근출의 등장과 부대의 비정상화 등, 일련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난 철수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듯 잠시 말이 없었다.
"에휴... 다 지난 이야기이고 이젠 더는 어쩔 도리가 없네..."
이야기를 끝마치고 씁쓸한 웃음을 다시금 지으며 다시 담배를 꼬나물던 황룡을 바라보며 철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기회가 있진 않았을까?"
"무슨 기회?"
황룡은 담배에 불을 붙이며 물었다.
"너가 말한 황근출이라는 동기 말이야, 너말대로 김덕팔이라는 선임이 갈구고 성폭행해서 그것 때문에 사람이 미쳐서 저렇게 되었다면서. 그러면 누군가가 그걸 막아주었거나 혹은 황근출을 도와주었더라면, 지금의 상황에 이르는 걸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황룡은 담배를 물고 입을 뻐끔거리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철수를 바라보았다.
"김덕팔 그 새끼가 근출이 저 새끼를 갈궈서 이리될 줄 알았나 뭐... 나도 몰랐지."
"그래, 내 말이 그 말이야. 그 당시에는 너는 물론이고 주위의 선임이나 후임, 혹은 동기들도 아무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겠지. 결과론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 때 어느 단 한 사람이라도 그런 부조리를 막고 혹은 위에 신고해서 그걸 막고 황근출을 지켜주었더라면? 과연 현재의 황근출이 있을 수 있었을까?"
철수는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하는 듯한 눈치였다. 황룡은 말없이 머리를 수그리고 연신 담배만 빨 뿐이었다. 그리고 몇 분이 흘렀다.
"뭐야, 너 지금 근출이 저 새끼가 저 지랄난게 내 잘못이라고 말하고 싶은거야?"
황룡의 어조에는 반감이 서려있는 듯했다.
"아니, 너의 잘못이라는게 아니라 동기였던 너든 혹은 다른 사람이든간에 어느 누구라도 그런 부조리를 신고하고 막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과 미련이 남는다는거야. 난 그저 제3자의 입장에서 볼 때 그런 생각이 들어. 그 당시 어느 누구라도 피해자로서 고통 받는 황근출에게 다가가서 위로해주고 그리고 그 고통을 함께 나누면서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었더라면, 아니면 황근출을 도와 다른 곳에 도움을 요청했더라면, 과연 결과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고 말이지."
황룡은 피우던 담배를 벽에 지지며 말했다.
"나도 근출이 그 새끼가 지금의 정신병자가 될만큼 그리 힘들어하는 줄은 몰랐어, 전혀 몰랐다고. 그 때 근출이가 김덕팔 그 새끼한테 당하면서 뭔가 표정이 안좋고 약간 힘들어 한다라는 느낌은 받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고 또 나도 내가 도와주고 싶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어. 근출이 새끼도 평소에는 태연했고 또 그런 덩치의 새끼라면 김덕팔이 전역할 때까지 충분히 버틸 줄 알았지. 그리고 너도 군필자이니 알겠지만, 후임의 입장에서 선임새끼한테 덤비고 대들 수 있어? 너가 있던 육군은 어떤가 모르겠는데, 이 지랄맞은 해병대는 완전 격이 달라, 다르다고. 나도 선임 새끼들 등쌀에 죽어나갔는데 나도 근출이를 도와줄 여력이 없었다고!"
저도 모르게 점점 격앙된 어조로 말을 이어가는 황룡을 보며 철수는 씁쓸하게 웃었다.
"피해자들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힘들어하고 훨씬 오래 버티지 못해, 룡아. 피해자가 당하는 것을 보기만 하고 직접 그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우리 같은 제3자의 입장에서는 알 수가 없으니 그것까지 헤아려 달라고 할 수는 없겠지. 다만, 너도 말했듯이 직접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제 3자인 우리가 봐도 저건 아니다 싶은게 있으면 그걸 지켜만 보지 말고 무언가 도움을 주는게 맞지 않을까? 도와줘야 한다라는 생각만 하다가 시간은 시간대로 흐르고, 심해져 가는 가해자의 폭력에 노출된 피해자는 결국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다라는 것은 예정된 수순일거야."
이제는 다소 인상을 구기고 듣고 있는 황룡을 보며 철수는 슬픈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너는 나와 같은 또 다른 방관자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룡아."
"너랑 같은? 그게 무슨 말이야? 너가 있던 곳도... 이런 경우가 있었어..?"
황룡의 물음에 철수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철수가 현역이던 시절, 갖은 부조리를 저지르던 어느 맞선임이 있었다고 했다. 그 맞선임은 어느 한 후임을 매일 괴롭혔고 때로는 성폭행에 가까운 짓, 그러나 그 맞선임의 표현에 따르면 '한낱 장난' 이라 부르는 짓도 서슴치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철수는 그런 광경을 보며 그 후임을 도와주지 못하는 것에 대한 내심 한가닥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이를 말리고 제지하고 싶었으나, 상대가 선임이라는 사실도 그렇거니와 그에게 반기를 든 것으로 인하여 자신 또한 또다른 희생양이 될까 두려웠다고 했다. 게다가 부끄럽게도 그 당시의 그 부조리는 엄밀히 말해 자신이 아닌 '남의 일' 이었기에 하나의 유쾌하지 않은 주변의 일로 치부해왔다고 했다. 거기에 자신이 아니더라도 남다른 투철한 정의감으로 무장한 또다른 누군가가 가엾은 그를 도와줄 것이라고 여기는 안일하고도 위험한 망상에 가까운 막연한 희망을 품었노라 했다.
그러나 곪고 곪은 상처가 결국에는 터지듯, 갖은 악행과 부조리에 시달리며 철수의 막연한 기대와는 달리 어느 누구에게도 구원받지 못했던 그 후임은 일병진급을 한달 앞둔 어느 야심한 밤, 근무지인 야간 경계초소에서 빼돌린 실탄으로 장전한 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는 것으로 지난 장장 3개월 간의 고통과 향후 기약없을 고통의 굴레에서 스스로 벗어나게 되었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때가 철수의 병장 1호봉 시절. 철수는 다른 것도 아닌 이 '병장' 이라는 작대기 4개가 그토록 원망스러웠다고 했다. 비록 사회로 나가기까지는 아직 3개월 정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 남았지만, 그는 분명 병장으로서 아무리 맞선임이라 할지라도 그 악행을 저지하고 막을 수 있는 충분한 힘과 여력이 있을 법한 때였다. 까짓거 남은 3개월 간 그 맞선임과 척을 지게된 들 어떠하겠는가, 어차피 그는 자신보다 2개월 앞서 영영 사라질 사람인 것을. 자신 또한 그 후임병을 가련히 여기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며 충분히 그 후임병을 도와줄 힘과 여력이 있었음에도 그가 최악의 선택을 하게 '방관' 한 점이 철수를 괴롭고 후회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비록 그 맞선임은 전역을 불과 한 달 앞두고 군사재판을 받는 처지가 되어 권선징악에 의거한 최소한의 조치는 이루어졌다고는 하나, 희생자의 죽음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음은 자명했다.
"내가 그 날 술 마시고 늦게까지 길거리 배회하던 것도 내 군대 동기들이랑 한 잔하면서 그 얘기 하다보니 늦어진거야. 그 녀석 그리된 거 안타까워하고 후회하는건 나 뿐만이 아니었거든. 근데 이미 죽은 마당에 후회하고 안타까워하면 뭐하겠어. 이미 그 녀석은 죽고 없는 것을..."
황룡은 말없이 철수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 당시에도 덕팔의 폭정에 끊임없이 시달려왔음에도 자신 앞에서는 마냥 사람 좋은 미소만 지어보이던 근출이었다. 근출의 미소 때문에 그가 겪었을 갖은 가해와 고통에는 무심하고 무감각해졌던 것일까. 그 당시에는 왜 그걸 몰랐을까. 아니 왜, 녀석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헤아려주지 못했을까. 덕팔에게 맞서지는 못하더라도 근출의 옆에서 함께 유일한 동기이자 친구, 나아가서는 구원자로서 그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더라면, 그에게 방관이 아닌 일말의 관심을 주었더라면, 지금의 근출은 과연 존재했을까.
황룡은 과거의 정상적이었던 근출을 떠올렸다. 유난히 축구와 운동을 좋아하고 쾌활하며 긍정적이었던 한 쾌남을. 그리고 그에 대한 무관심과 방관으로 인하여 비롯된 작금의 상황을 새삼 돌이켜 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의 도움이라면, 조그마한 관심과 노력, 그리고 도움만 있다면 다른 누군가의 인생을 바뀌어 놓을 수도 있음을.
"룡아, 너에게는 아직 기회가 있어."
"무슨 기회...?"
"이곳에 붙잡혀 온 사람들을 구원하고 도와줄 기회. 비록 이전의 피해자 황근출은 구하지 못했지만 또 가해에 노출된 다른 피해자들은 아직 네가 구할 수 있고 너는 충분히 그럴 힘과 여지가 있어. 너만이 이곳에 대해 잘 알고 누구보다 저 해병들의 습성에 대해 잘 알고 있잖아. 이곳에 붙잡혀 온 사람들은 네 도움이 절실한 사람들이야."
철수의 말에 황룡은 매번 외면하며 지나가던 수용소 안의 희생자들을 떠올렸다. 지난 몇개월 간 일관된 무관심과 체념으로 응수하며 날려보내온 구원과 도움의 기회들. 그리고 주계장의 가마솥에서 사그러져간 수많은 목숨들. 그 목숨 하나 하나에는 모두 근출의 과거의 모습이 녹아 있는듯 했다. 과거 근출이 지어보인 쾌활한 미소와 수용소에서 울부짖는 수많은 희생자들이 교차하듯 지나갔다.
이윽고, 황룡은 주머니 속에서 몽키스패너를 꺼내들고 말없이 품 속에서 초코바를 꺼내 철수에게 주었다.
"먹어둬, 배가 든든해야 나갈 때 뜀박질도 잘하지."
빙그레 웃어보이는 철수와 함께 창고 문을 열고 나가는 황룡의 모습은, 여간 기합이 아니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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