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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18세기 전열보병은 어떻게 싸웠는가? ㅡ 2부.앱에서 작성

ㅇㅇㅇㅇ(116.37) 2019.10.16 01:16:03
조회 6400 추천 51 댓글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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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전열보병들은 사회의 쓰레기들, 즉 갈 곳 없는 무소득 계층이나 범죄자들 중에서 주로 징병되었다. 실용성이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거추장스런 제복과 명중률은 극악 수준인 머스켓 총을 지급받은 병사들은 숙련도가 낮았기에 택할 수 있는 전술이 제한적이었다. 때문에 이들은 한데 밀집하여 개별 조준 없이 구령에 따라 일제 사격을 초근거리에서 주고받은 후 백병전에 돌입하는 전열 전술을 채택하였다. 전열보병들이 명령 없이 개별적으로 사격하거나 산병처럼 전열을 벗어나 싸우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뛰지 않고 일부러 천천히 상대방 전열까지 다가간 후에야 사격하는 전열 전투는 인간의 본성에 어긋났고, 장교들은 병사들이 고개를 수그리거나 엄폐물 뒤로 몸을 숨기는 것을 막기 위해 혹독한 형벌을 도입해 병사 개개인의 공포를 거세하려 꾀했다. 그러는 탓에 군대의 사기는 저조했고 탈영자의 수는 종종 하늘을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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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어서 6-10번 이의제기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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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구령 없는 개별 사격은 얼마나 잦았는가?

일단, 18세기 전열보병의 FM 교전 방법은 구령에 맞추어 일제사격을 하는 게 옳았다. 몰위츠, 데팅엔, 프라하, 설리반 원정, 라이헨바흐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지역의 전투들에서 전열보병은 정교한 소대별, 대대별 순차 사격을 수행해 낼 수 있는 등, 정말로 “기계처럼” 매끄럽게 작동하는 경우도 결코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병사들은 종종 다른 방식의 사격, 일명 자유 사격을 하기도 했다. 18세기 저서에서 영어로는 straggling fire​ ​혹은​ running fire,​ 불어로는 fue de billebaude, 독어로는 plackerfuer라고 부른 이것은 그냥 장교의 명령 따위 없이 개별적으로 되는 대로 장전하고 쏘는 것이었다. 18세기 군사 이론가들은 이런 방식의 교전을 혐오했지만, 그럼에도 대다수의 전장에서 종종 모습을 비쳤다. 가장 유명한 경우로는 사격 통제에 심혈을 기울였던 영국군의 근위대 장교, 러셀 중령의 1743년 데팅엔 전투 묘사가 손꼽힌다.

“영국군 보병은 영웅적으로 행동했으며, 그날의 승리의 큰 부분은 전적으로 그들에 의해서였다. 하지만 병사들은 하이드 파크에서 훈련하는 것처럼 사격하지 않았고, 삼 열 전체가 running fire(자의적인 자유 사격)에 임하며, 동시에 훌륭한 판단력과 실력을 보이며 몸을 아래로 수그렸다. 아군 사격을 예상하는 적은 바닥에 납작 엎드렸고, 그걸 본 아군 병사들은 적이 다시 일어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발포했다. 이는 실로 그들의 용기 뿐 아니라 침착함을 여실히 증명하였다. 프랑스군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자유 사격에 임했다.”

이 묘사는 많은 역사가들의 논쟁거리가 되었다. 러셀 중령은 데팅엔 전장과 2마일 떨어진 곳에 있었으며, 전투가 일어난 지 두 달 후에야 이 편지를 본국에 저술했다. 하지만 편지 내용의 나머지를 훝어 보면, 러셀은 해당 묘사를 데팅엔 전투 당시 근위대를 지휘했던 스테어 경에게 듣고 있다. 일단 적어도 영국군의 running fire의 실체가 불분명하더라도 프랑스군은 통제 없이 사격전에 임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 이건 데팅엔에서만 일어난 단발성 현상인가? 아니, 1750년에는 아예 이론서의 틈에도 해당 전술이 비집고 나온다. 샤보 백작은 그의 저서에서 병사들에게 자유 사격을 허가하는 것이 다른 어떤 사격체계의 도입보다 유입하다고 논쟁하였다. 샤보는 이러한 사격의 이점에 장교들의 부담 경감, 신병이 대대의 작전을 망쳐 놓을 수 있는 확률의 감소 등등을 손꼽았다.

때때로, 병사들은 자유 사격과 함께 사격 자세도 자유롭게 취한 듯하다. 1734년 파르마와 구아스탈라 전투에서 프랑스군과 오스트리아군은 대체적으로 무릎쏴 자세에서 전투했다. 카를 엠마누엘 드 바르네리는 해당 사건에서 “보병은 흙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크로아티아인처럼 전투했다.”라고 서술하는데, 여기서 “크로아티아인”은 오스트리아 국경지대에 살던 경보병, 일명 그렌저를 의미함이다. 1770년에는 투르핀 데 크리세 백작이 feu de billebaude에 대해 서술하며 이를 “모든 사격 방식 중 가장 우월한 방식”이라 찬양했고, 장교들은 후열의 병사들에게 장전을 전담시키고 전열은 사격만 하게 함으로서 해당 사격법을 보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오스트리아군에서 복무한 야코프 드 코니아초도 “통제되지 않은 사격”의 장단점을 논했고, 1786년 출간된 토비아스 스몰렛의 군사사 저서도 1758년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자유 사격”을 다뤘다.

프랑스의 저명한 군사학자, 자크 드 기베르 백작은 1772년 전술 논문에서 다양한 보병 사격 전법을 다뤘다.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마지막으로, 자유 사격(feu de billebaude)는 머스켓 화력전에서 벌어져야 할 유일한 사격법이다. 두 번의 규율 있는 일제 사격 이후에는 어느 엄격한 군율도 복잡한 사격법이 자유사격으로 퇴화하는 것을 막을 방도가 없다. 이 사격법은 가장 빠르고, 가장 치명적이다. 특히나 프랑스의 전쟁에 어울리는 전법이다. 유일하게 필요한 통제는 사격 정지를 알리는 구령이다. 예전에는 해당 사격법의 적용이 불가능하리라 여겨졌다. 지난번 전쟁[7년 전쟁]의 한 전투에서 나는 어느 연대가 작은북 박자에 맞추어 자유사격을 개시하고 종결하는 걸 보았다.”

물론 모든 군대가 자유사격을 긍정적으로 여긴 건 절대 아니었다. 어떻게든 병사 사격을 통제하려 했던 프로이센군은 끝까지 소대별 사격을 고집했고, 실제로도 소대별 사격으로 그나마 가장 재미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프로이센군 장교 카를 드 바르네리는 1782년 다음과 같은 한탄을 남겼다.

“전 세계가 우리의 소대별 사격 전술을 부정하는 것 같다. 실전 전장에서는 고작 두 번 구사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나는 이 체계를 현재보다 더 나은 규칙으로 개선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로 잘못된 점은 소대의 규모다. 소대 인원은 너무 많고, 담당하는 전열은 너무 넓다. 소대 오른쪽에 서 있는 소대장의 지시가 어떻게 전장의 소음 속에서 들리겠나? 포성, 총성, 다른 소대들의 함성, 부상자들의 비명, 눈과 입에 스며드는 연기. 모든 게 소대장과 그의 소대를 분리시킨다. 설령 장교가 천둥같은 목소리의 소유자라 할지언정 제대로 명령을 내리기엔 무리일 것이다. 또한, 우리는 보병이 사격을 개시하자마자 전열에 일기 시작하는 소요의 원인을 제대로 규명해야 한다. 장교들은 교전이 시작하면 병사에 대한 통제력을 잃는다고 입을 모아 동의한다.”

다시 말하지만, 전장에서 병사 통제에는 프로이센군이 가장 성공적이었다. 1790년 장교를 위한 책자에서 요한 폰 샤른호르스트 장군은 아예 장별 제목 중 하나를 “항상 기피해야 하는 자유사격”으로 지어 두었다. 그는 엄청나게 자세하게 자유사격의 문제점, 통제의 부재, 지휘관의 난색을 늘어놓는데, 이렇게 속속들이 비판할 수 있다는 건 샤른호르스트가 이론적으로 자유사격에 접근한 게 아니라 실전에 복무하면서 직접 목격한 사건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1798년에 한때 프리드리히 대제의 참모장교였던 게오르크 하인리히 폰 베렌호르스트 장군이 쓴 묘사가 자유사격의 함정에 빠진 보병 대형을 가장 잘 묘사한다.

“전투는 일제 사격으로 시작한다. 어쩌면 소대별로 두, 세 번 쏠 수도 있겠지. 그런 후에 지속적으로 사격을 지시하는 장군은 부하들이 장전하는 즉시 총을 쏘며 무질서하게 사격하는 것을 보게 된다. 점차 열과 오가 섞이고, 덩어리진 대형에서 일 열은 무릎 꿇고 싶어도 무릎을 꿇을 자리가 없게 된다. 그리고 가장 낮은 위관부터 장군에 이르기까지의 장교들은 이 처참한 광경이 앞으로 전진하거나 뒤로 퇴각하기 전까지는 그저 관망할 뿐이다.”

나폴레옹의 시대에 프로이센군 육군소장이었던 요한 고트프리트 호이어 장군은 18세기의 다양한 보병 사격술을 묘사하다가 이런 문구로 묘사를 끝마친다.

“사실 이러한 사격술은 평화 시에 연병장에서 꾸준히 연마되었지만, 진짜 실전에서 병사들에 의해 사용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전장 위의 병사들은 기존의 훈련 사항들을 전부 망각한 것처럼 자유사격(plackenfeuer)만 수행했다. 일백 년을 훈련해 왔는데도 아직 사병들을 통제할 수 없다, 그래서 감정을 느끼지 않는 사격 기계로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은 부끄러운 일이다.”

북미에서도 경우는 똑같았다. 영국군은 이러한 통제 불능 사태를 피하기 위해 종종 일제 사격 직후 착검 돌격하는 충격전술을 구사하곤 했다. 한편, 미숙한 신생 대륙군은 자유사격을 줄창 해댔다. 그렇다고 영국군이 안한 것도 아니니, 부르고인 장군 휘하에 종군한 영국군 장교 토마스 앤버리는 전투에 돌입한 이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전투에서, 나는 모든 규범에 따른 훈련은 장식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느꼈고, 오로지 중요한 건 장전, 사격, 그리고 착검 돌격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한편 나는 병사들이 스스로를 지키려는 일환인지, 아니면 본능인지는 모르겠지만 배운 걸 능가하는 광경을 보았다. 그들은 공이를 뒤로 젖히고 탄포를 총열에 넣은 후, 꼬질대로 쑤시는 대신 개머리판을 바닥에 세게 찍은 후 곧바로 총을 견착해 사격했다. 전투 시에 사람의 마음이 창의성을 발휘하는 정도는 과연 이리도 굉장하다.”

앤버리가 묘사하는 이 약식 장전 과정, 일명 “탭 로딩”은 속사를 가능케 했지만 총구 속도를 굉장히 낮추는 효과를 낳았으며, 일종의 “가라”로 치부되기도 했다.

출처.

Historical Manus Commission, Report on the manus of Mrs. Franklin-Russell-Astley, of Chequers Court
Blackmore, Destructive and Formidable
Webb, History of the 12th (The Suffolk) Regiment
Chabot, Réflexions critiques sur les differens systêmes de tactique de Folard
Duffy, Military Experience in the Age of Reason
Warnery, Des Herrn Generalmajor von Warnery sämtliche Schriften
Crisse, Commentaires sur les memoires de Montecuculi
Cogniazzo, Geständnisse eines Oesterreichischen Veterans
Smollet, The History of England
Guibert, Essai général de tactique
Scharnhorst, Handbook für Officiere
Berenhorst, Betrachtungen über die Kriegskunst
H​!oyer, Geschichte der Kriegskunst
Simcoe, Simcoe's Military Journal
Anbury, Travels through the Interior Parts of America


7. 전열보병이 전열을 이탈해 산병전을 벌이는 일은 없었나?

산병전을 전문적으로 수행한 경보병들이야 워낙 유명하니 빼고, 전열보병은 한 번도 경보병처럼 싸우지 않았을까? 나폴레옹의 시대와 비교하면 프리드리히 시대에는 전열보병의 산개가 별로 보이지 않고, 단순히 flanquer, flanker 등으로 서술된 유격 부대의 소속은 불분명할 때가 많기에 쉽사리 대답할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검증이 가능한 묘사들이 있다.

1759년 4월 13일 베르겐 전투를 치른 브라운슈바이크 공 페르디난트는 전초에 교전을 시작한 방식을 이렇게 밝혔다.

“나는 아군 척탄병들과 엽병들로 하여금 개별 소대로 전개해 적군과 교전하며 시간을 끌고, 그럼으로서 본대의 도착까지 시간을 벌었다.”

민덴 전투에서도 그는 비슷하게 “보병 소대들은 적 척후와 교전했다”고 서술한다.

프랑스군 또한 7년 전쟁에서 보병을 산병으로 교전하게끔 지시한 것이 확인된다. 빅토르 프랑수아 드 브로글리 공작의 서신에서 1759-60년 겨울 기간 동안 프랑스 보병연대들이 대대당 50명의 보병을 산병 전술에 훈련시켰다는 사실이 나타난다. 동일 인물이 작성했을 가능성이 높은 1764년 프랑스군 교범에서는 진격이나 후퇴 시에 반개 소대를 차출해 대대 정면에 흩뿌려 놓으라는 구절이 있다.

헤센군 또한 전열보병을 경보병으로 자주 운용했고, 1776년 롱아일랜드 전투는 18세기에서 전열 경보병이 운용된 가장 모범적인 예시이다. 롱아일랜드에서 헤센군 총사령관을 맡은 헤이스터 장군 뿐만 아니라 수없이 많은 위관 장교들의 보고서가 검증하는 사례다.

“산병전을 담당한 소대들은 대대에서 분리해 임무를 수행하고, 주 대대들은 산병들을 머스켓 사거리 하나 간격으로 뒤따른다.”

이들은 대대에서 분리한다는 구절에서 보다시피 전업 경보병이 아닌 전열보병들이었다. 크닙하우젠 연대의 베르너 폰 페리 소위의 트렌턴 전투 경험담에서도 헤센군의 산병 전술이 드러난다.

“나는 폰 비젠로트 대위의 명령으로 산병을 거느리고 언덕을 올랐다. 산병들은 언덕 위의 민병대의 사격을 받았고, 스털링 경의 여단은 즉시 언덕을 등반하기 시작했다. 적의 세가 강성했기에 우리들은 연대로 후퇴를 감행했다.”

한편 북미에서 전열보병을 나폴레옹마냥 산병으로 운용한 건 헤센군만이 아니었다. 영국군 제71보병연대에게는 후술할 명령이 내려졌다.

“대대가 삼림에서 교전할 시, 각 중대의 앞에는 하나 혹은 그 이상의 분대가 차출되어야 할 것이다. 분대는 장교의 지휘를 받아야 하며 적의 방향에 있는 나무, 그루터기, 수풀, 바위, 틈새, 울타리, 벽, 간단히 말해 모든 종류의 엄폐물을 기용하여 몸을 숨겨야 할 것이다. 전투 신호가 내려지면 분대의 모든 병사는 그의 정면에 있는 가장 적절한 표적에 총을 겨누고, 장교의 지령 없이 임의로 사격을 개시할 것이다. 장전, 조준, 사격의 과정은 전투 중지 명령이 내려질 때까지 방해받지 않고 계속될 것이다.”

해당 분대들을 지휘할 위관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지침이 내려졌다.

“분댜를 지휘하는 장교들은 각각의 분대가 잘 퍼져 있는지, 그리고 분대원들이 적절한 엄폐물 뒤에 안전히 몸을 숨겼는지 각별히 확인해야만 할 것이다. 병사들에게 어느 방향이건 이동 명령이 내려지면 그들은 엄폐물에서 엄폐물로 날렵하게 움직이며 계속해서 장전, 사격을 이어 나갈 것이다. 적군의 와해가 확인되면 착검 후 돌격 지시가 허가된다.”

출처.

Westphalen, Geschichte Der Feldzüge Des Herzogs Ferdinand
Colin, L'Infanterie au XVIIIe siecle
[Broglie], Ordonnance du roi, pour régler l'exercice de l'infanterie
Piel, Defeat, Disaster and Dedication: The Diaries of the Hessian Officers
"The Affair at Trenton," M.L.
Spring, With Zeal and With Bayonets Only
Order Book, Standing Orders of the 71st Regiment


8. 전열보병은 적 총구 앞에서도 뛰지 않고 천천히 걸어서 전진했을까?

패트리어트 같은 영화들을 보면, 전열보병들은 항상 고수의 북소리에 맞추어 흥겨운 군악 가락에 발 맞춰 나아간다. 적 총구 앞에서 어쩌면 저렇게 태연하게 걸어갈 수 있었을까?

1730년 폴란드 왕위계승 전쟁에 참전한 자크 드 불리외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해당 승전들에서, 피카르디 여단은 마치 경주하는 듯 잽싸게 움직였다. 가장 민첩한 병사들이 먼저 도착했고, 그들의 도착은 이미 교전하는 중인 전우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었다.”

빠른 움직임, 어쩌면 아예 달리는 것도 속도가 필요할 때면 곧잘 이루어진 행위였던 모양이다. 한편, 연병장에서의 칼 같은 기동으로 가장 유명한 프로이센군이 실전에서 가장 중시하던 건 빠른 이동이었다. 융-브라우슈바이크 퓨질리어 연대의 공식전사가 이 점을 확실히 보여준다. 1757년 프라하 전투에서 프로이센 연대와 그들의 오스트리아 적군은 모두 빠른 기동을 벌였다.

“진격 지점에 닿기 위해서 우리는 긴 제방을 지나야 했는데, 그로 인해 시간이 지연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정 시간에 맞추어 도착하려면 아른헴 마을은 질주해서 지나야 했고, 연대는 제대로 정렬되지 않은 채 달렸습니다. 적군은 이미 속보로 진격해 오고 있었고, 아군은 교전을 시작했습니다.”

프리드리히 2세의 군대에서 복무했던 병사 요한 야코프 도미니쿠스 또한 프라하에서 달린 것을 기억한다.

“아군 좌익이 할 일은 명백했고, 우리는 적 포병 지척까지 접근하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달려야 했다.”

프로이센군은 정해진 시간에 올바른 위치에 있는 걸 발 맞춰 움직이거나 대형을 완벽하게 유지하는 것보다 우선시했다. 게오르크 폰 베렌호르스트 장군은 “전장은 연병장이 아니기에,” 대열을 정비하느라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는 지휘관들을 처벌했음을 기록한다. 루드비히 마티아스 폰 로소우 장군도 사격이 시작되는 즉시 “어차피 지형 사정상 부대 대열이 밀집된 채 유지되는 경우는 드물었기에 대형 유지는 부차적인 문제로 치부되었다. 부대들은 전체적인 전열을 유지하는 임무만 수행하면 족했고, 프리드리히 2세의 숙련된 군대는 능숙하게 임무를 수행했다”고 회고했다.

위관급 장교들에게 자율권을 상당히 부여한 미국 독립전쟁의 영국군 역시 빠르게 움직였다. 사실 경우에 따라 빠르게 움직이는 정도가 아니라 항상 속보로 뛰어다녔다.

국왕의 군대는 롱아일랜드의 적에게 ‘재빨리 다가섰고(briskly marched up to)’, 채터튼 언덕을 ‘재빨리 등정했으며(briskly ascended)’, 브랜디와인에서는 ‘겁 없고 신속하게 진격(advanced fearlessly and very quickly)’하는가 하면 베미스 고지에선 ‘경보(quick step)’로 진격했다. 클린턴에서는 ‘지면이 허락하는 한 최고의 속도로(with as much velocity as the ground would admit)’ 약진했고, 몬머스에서는 ‘아주 빠른 행군 후 재빨리 다가가(after a very quick march moved up briskly)’ 적과 교전했다.

가장 구체적인 표현으로, 카우펜스 전투에 참전한 한 반란군 민병대원은 나중에 ‘영국 전열은 일종의 재빠른 속보로 진격하며 큰 환성을 질렀다’고 회고했으며 다른 이들은 왕의 군대가 ‘승리를 확신한 듯 신속하게’ 다가왔다고 증언했다.

위의 괄호는 전부 다 전투에 참가한 인원들의 실제 증언이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듯, 미국 독립 전쟁 동안 영국군은 상황을 봐 가며 속도를 올린 게 아니라, 원래 빨리 움직이는 게 기본 교리였다.

출처.

Duffy, Military Experience in the Age of Reason
Beaulieu, Campagnes
Dominicus, Tagebuch
Berenhorst, Betrachtungen
Lossow, Denkwürdigkeiten zu Charakteristik
Dundas, Principles of Military Movement
Spring, With Zeal and With Bayonets Only


9. 고개를 수그리거나 엄폐물을 찾는 건 지탄받았을까?

전열보병을 다룬 영화에서 또 다른 흔한 장면은 양측이 뚝심 있게 꼿꼿이 서서 포화를 주고받는 광경이다. 그런 거 보면서 총 쏠 때 엎드리거나 하지는 않는 이유를 생각하며, 전열보병을 병신 같다고 비하해 본 적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 내내 영국군은 허구한 날 전장에 납작 엎드리고 다녔다. 먼저 1743년 데팅엔 전투에서 앞에 서술한 러셀 중령에 의하면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고개를 숙여 서로의 총화를 피하고, 그렇게 수그린 병사들이 장전하거나 발포하려고 일어서길 기다렸다가 개별적으로 적병을 제거했다는 전투 방식을 묘사한다. 러셀 중령은 전투에 직접 참전하지 않았고, 동료들에게 전투에 대해 들은 게 다기에 그의 묘사로 전투 양상을 섣불리 재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의 다음 주요 교전, 퐁트누아 전투에서는 영국군이 엄폐를 찾았다고 확인되는 사례가 여러 가지 존재한다. 첫째 사례는 로버트 먼로 대령이 지휘하던 왕립 하이랜드 연대로, 하이랜더들은 연대장 허가 아래 “그들 고유의 싸움 방식”으로 전투할 것이 허가되었다. 프랑스군이 일제 사격을 준비할 때마다 스코틀랜드 보병들은 “땅바닥에 납작 붙어서” 적 총격을 회피한 후에 “적 사격이 이루어진 즉시 도로 일어난 후 적에게 가까이 다가가 일제사를 날렸다.” 고유의 싸움 방식 운운은 이게 스코틀랜드만의 별종 전투법임을 시사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만도 않다.

제20보병연대의 일병이었던 샘슨 스타니포스는 그가 경험한 퐁트누아를 이렇게 서술한다.

“우리는 용맹히 진군했지만, 퐁트누아 마을 지척에 다다르자 대규모 포대가 우리를 향해 전개되어 있는 광경을 보았다. 대포는 작은 탄환과 못과 낡은 쇳조각 따위로 장전되어 있었다. 우리에겐 바닥에 엎드리란 명령이 내려졌지만 그럼에도 많은 수가 사상을 당했다. 포격 직후 일어난 우리는 첫째 참호를 향해 진격했다.”

굳이 하이랜더가 아니더라도, 그냥 일반적인 전열 연대에서도 적 포화가 극심할 시에 바닥에 드러누우라는 지시가 내려진 걸 볼 수 있다. 전쟁의 후반에 벌어진 로쿠르 전투에도
참전한 스타니포스 일병은 이번에도 엄폐물을 끼고 전투한 사례를 들려준다.

“우리 영국군은 아주 조금의 엄폐를 제공해 준 정원과 과수원 주변에 포진했고, 해당 위치들을 흙을 쌓아 보강하려 노력했다.”

프랑스군이 방어하는 영국군을 향해 다가오자,

“우리는 엎드린 채로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기를 쥐고 양 팔을 땅에 댄 채 숨죽여 기다리는 동안 나는 살면서 저지른 죄악을 참회하며 기도했다. 이제 프랑스군은 아주 가깝게 다가왔고, 대포알 하나가 우리를 향해 곧장 날아왔다. 하지만 우리는 엎드리고 있었기에 포탄은 우리들의 머리 위를 지나갔다. 그제야 우리에겐 일어나 총을 쏘란 명령이 내려졌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의 주요 회전 세 경우에서 영국군이 엎드리는 사례들을 확인했다. 이는 영국군의 습관 비슷한 것이었던 듯하다. 1758년 셰르부르 기습전에 참가한 제12보병연대의 토드 상병은 아군 오사를 방지하기 위해 해변에 엎드렸다고 증언했고, 1759년 퀘벡 전역의 참전자 존 녹스는 적을 상대로 한 기동, 공성전, 적 포병 사격을 받을 때, 적 보병을 상대로 야전에서 교전할 때의 모든 경우에서 으레 엎드리곤 했던 것을 이야기한다.

미국 독립전쟁에서도 이 습관은 지속되었고, 할렘 고지 전투에 참전한 제49보병연대의 토마스 설리번은 제2여단 장병 전체가 인디언들의 옥수수밭 한복판에서 적 포격을 피하기 위해 엎드리고 있었던 걸 회고한다. 설리번은 비슷한 짓을 1777년 브랜디와인에서도 또 했다고 저술하고 있다. 또한 1777년에 저술된 근위여단 소위 토마스 글린의 보고서는 다음과 같다.

“두 문의 대포를 보유한 적은 진격해 우리를 포격하기 시작했고, 아군에게는 땅에 바싹 엎드려 엄폐하라는 지시가 내려졌습니다.”

그리고 북미 전역에 국한된 일도 아니었다. 1778년 세인트루치아 섬의 라 비지에 전투에서 영국군은 프랑스군 화력을 피하기 위해 종종 엄폐했다. 제5보병연대의 조지 해리스 소령은 작고한 전우를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이제 고인이 된 내 용감한 친우, 4중대장 쇼 대위는 내 명령을 받아 중대원들을 엎드리게 했고, 표적으로 보이지 않도록 수풀로 자신들을 덮게 하였다.”

제55연대의 콜린 린제이 중위 역시 전투 내내 엄폐물을 지속적으로 활용했다고 증언한다. 이 정도면 엄폐가 당대에도 결코 낯선 개념이 아니었다는 게 충분히 드러났기를 바란다.

출처.

Russell, Reports on the Manus
Doddridge, The Life of Colonel Gardiner
Jackson, The Early Lives of the Methodist Preachers
Todd, Journal
Knox, Journal
Brumwell, Redcoats
Sullivan, Journal
Glyn, Journal on the American Service
Lushington, The Life and Services of General Lord Harris


10. 18세기 군대에서 탈영은 빈번했을까?

이건 그냥 통계자료로 때움.

# 장기간 탈영률

프로이센군(1713-1740) : 연당 3.2%
프랑스군(1716-1749) : 연당 4.4%
작센군(1717-1727) : 연당 7%

평균 탈영률 : 4.9%

# 7년 전쟁의 시대

하노버 선제후국군 : 전군의 14%
오스트리아군 : 연당 6-7% 혹은 전체 손실인원의 20.49% (약 6만 2천여)
프로이센군 : 전군의 18%, 전체 손실인원의 28% (약 7만여)
  - 하케 연대를 기준으로 보면 연당 탈영률은 평균 6%
프랑스군 : 전군의 20% (1700-1763년도 기준)

평균 탈영률 : 17.3%

# 미국 독립전쟁의 시대

영국군 : 4% (약 3700여)
헤센-카셀 공국군 : 11.5%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국군 : 11.7%
대륙군 : 20-25%

평균 탈영률 : 12%

혹독한 체벌과 군율로 악명 높은 프로이센군은 막상 탈영률이 그리 높지도 않았음을 관찰할 수 있다. 반대로 병사들의 자원 이유도 확고했고 초반 의지도 드높았던 대륙군은 전장에서의 패배와 보급 부족에 시달리며 만성 탈영에 시달렸음이 보인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평균치고, 1744년의 한 전역에 프리드리히 2세의 야전군 15%가 탈영하는 등 탈영은 아직 18세기 지휘관들의 골머리를 썩히는 존재가 맞았다. 하지만 이는 예외적인 기현상으로 보이며, 군대가 매 전역 때마다 전력의 1, 2할씩을 전투 한번 없이 탈영으로 날려먹는 일은 거의 없었다. 병사들은 생각보다 군 복무를 이어나갈 동기가 많았던 모양이다.

출처.

Duffy, Instrument of War
Berkovich, Motivation in War
Duffy, Army of Frederick the Great
Krebs, A Generous and Merciful Enemy
Corvisier, L'Armee Francaise
Frey, British Soldier in North America
Edmonson, Desertion in the American Army during the Revolutionary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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