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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중국공산당은 한민족 최초 중원 침투 사례

장흥군수리스온냐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3.05.26 12: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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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공내전과 조선인, 우리가 모르는 그들의 역사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1945년 8월 1111.0pt">일 소련군이 전격적으로 만주 침공을 시작하고 일본의 스즈키 내각이 포츠담 선언의 수락을 제안하면서 태평양전쟁의 종결은 초읽기에 들어갔다. 이 정보는 그동안 산시성 옌안의 토굴에 은둔한 채 숨을 죽.이고 있었던 중공도 놓치지 않았다팔로군 총부는 총사령관 주더의 명의로 전군에 작전명령 제1호부터 제7호까지 긴박하게 하달하였다주요 내용은 국민정부군보다 한발 앞서서 일본군을 신속하게 무장 해제 시킬 것과 도로, 철도, 요충지를 탈취할 것, 그리고 소련-몽골군과 협력하여 동북의 주요도시를 장악하라는 것이었다.

그 중에는 조선의용군 옌안총부에 하달된 명령도 있었다. "조선의용군 사령 무정武亭, 부사령 박효삼朴孝三, 박일우 朴一禹는 즉시 소속부대를 이끌고 팔로군 및 구 동북군 부대와 함께 동북으로 출병하라. 동북지방의 조선인민들을 조직화하여 조선을 해방하는 임무를 완성하라."

미국의 강력한 중재와 국내외 여론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국공의 협상이 결렬되어 전면전으로 확대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다름아닌 동북에 있었다. 전통적으로 중국의 변방이었던 동북은 청말까지만 해도 대부분 미개발지의 황무지였다. 하지만 일본이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라오둥반도 남단에 이른바 "관동주"를 만들어 만주에 한발을 내딛었다. 또한 중국의 내전기에는 만주 군벌 장쭤린을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한편, 만주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하여 사실상 경제적 반식민지로 만들었다.

 

특히 대동맥에 해당하는 철도는 대부분 일본의 수중에 있었다. 따라서 장쉐량이 부재한 상황을 이용해 만주사변을 일으킨 관동군은 신속하게 남만주 전역을 장악할 수 있었고 베이핑에 있었던 장쉐량은 속수무책이었다. 만주 사변과 러허사변으로 동북4성을 장악한 일본은 만주국을 세워 동북을 중국 본토로부터 분리시킨 다음, 곳곳에 철도와 대규모 공업 지대를 건설하고 탄광을 개발하였다시베리아와 중국 본토를 침략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동북의 공업화에 앞장 선 사람이 전후 일본 총리를 지냈고 아베 신조(安倍晋三) 현 총리의 외조부이기도 한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였다. 1936년에 만주국의 경제 고문으로 부임한 그는 1939 3 "만주의 자급자족"을 목표로 『만주산업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의 주도로 일본은 만주국의 재정과 경제, 산업 전반을 장악하고 일본인들을 대거 동북으로 이주시켰다. 또한 배타적인 경제 블록으로 만들어 중국 본토와의 연결 고리를 끊는 한편, 군수 산업 중심의 거대한 병참 기지로 만들었다. 외화 확보를 위해 농민들에게는 콩을 강제로 심게 한 후 해외로 수출케 했다. 따라서 동북의 경제는 오직 일본의 전쟁 수행을 위한 철저한 수탈 경제로 변모하였고 대다수 농민들은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생활고에 허덕였다.

오카베 마키오()의 《만주국의 탄생과 유산》에 따르면, 만주 사변부터 일본 패망까지 일본이 동북에 투자한 금액은 총 1756백만엔에 달했으며 일본 전체 해외자산의 42%를 차지했다.(참고로, 조선이 23%, 타이완이 7%, 중국 본토가 21%) 동북의 인구는 전체 중국의 8% 정도에 불과했지만농공업의 생산력은 중국 본토를 훨씬 능가했다석탄이 풍부하게 매장된 푸순(撫順)의 석탄 액화 연료 공장에서는 연간 4만톤의 생산능력이 있었고, 동북의 제철소들은 정점기였던 1943년에 선철 130만톤을 생산하였다.

또한 1943년 기준으로 동북의 콩 생산량은 중국 전체의 70%에 달했고 석탄 생산량은 36%, 철도는 41%, 전력 생산량은 61%, 시멘트는 71%, 철강은 91%, 중공업은 90%를 차지했다일본 본토의 피폐와 연합군의 대규모 전략 폭격으로 동북의 생산성이 급속도로 저하되는 1944년 이후에도 중국 본토에 비해 선철은 8.5, 전력은 2.5배에 달했다따라서 동북은 그 자체로 자립 역량을 갖춘 중국 최대의 공업지대였다. 중공업의 중심지라는 동북의 지위는 신중국 건국 이후에도 소련, 북한과 가깝다는 이점 덕분에 1980년대까지 변함이 없었다.

따라서 장제스나 마오쩌둥에게 동북은 그야말로 노른자위였다. 1945 4월 중국 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회의에서 마오쩌둥은 동북이 산업의 중심이자 병참의 요지임을 상기하면서 "동북은 특별한 곳이다. 만약 우리가 모든 근거지를 잃어도 동북만 있으면 중국 혁명의 기초는 견고하다. 물론 다른 근거지도 잃지 않고 동북도 있다면 중국 혁명의 기초는 더욱 공고할 것이다."라면서 동북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장제스 역시 "동북을 탈취하지 못하면 중국은 근대 산업국가로 발전할 수 없다"라면서 "동북이 없으면 화북도 없고 화북이 없으면 중국도 없다"라고 하였다. , 동북은 국공 어느 쪽도 물러설 수 없는 곳이었다하지만 동북으로의 레이스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한 쪽은 장제스였다. 중국의 서남부로 밀려난 장제스 정권과 달리, 중공의 근거지는 동북에서 가까운데다 만주에서 항일 투쟁을 하다가 관동군의 대대적인 토벌전에 쫓겨 팔로군에 합류한 구 동북항일연군 출신의 간부들도 있었다. 이들은 동북의 지리나 상황에 밝았다.

더욱이 선견지명에서 남달랐던 마오쩌둥은 5월부터 이미 한발 앞서 이들을 만주에 침투시켜 지하조직을 건설케 하였다. 소련군이 남하하고 일본의 항복이 코앞에 다가오자 린뱌오의 지휘 아래 산시성과 내몽골, 산둥성에 있는 병력을 화북을 거쳐 동북으로 진격시켰다. 또한 가오강(高崗), 장원톈(張聞天) 등 중앙 정치국 주요 멤버들과 간부들도 만주로 갔다. 8월 초부터 11월까지 만주로 진입한 공산군 부대는 간부 2만명에 병력은 13만명에 달했다. 그 중에는 김무정이 지휘하는 조선의용군과 조선군정학교 학생 300명 등 약 700여명도 있었다. 또한 이와 별도로 허베이성에서 활동하다가 일본 항복 직후에 중공군 선발부대 1 3천여명과 함께 진군한 450여명도 있었다.

중일전쟁 당시 광복군과 함께 중국에서 조직된 가장 큰 조선인 무장조직 중의 하나였던 조선 의용군의 기원은 1938 10월 창설된 김원봉의 조선의용대였다. 그런데 조선의용대는 이데올로기와 향후 투쟁 노선을 놓고 분열되었다. 김두봉, 박효삼 등 일부 지도부는 조선인들이 많은 화북으로 이동하여 항일 투쟁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들은 김원봉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충칭의 군사위원회의 명령을 무시한 채 북상했다. 산시성 타이항산의 팔로군 활동구역에 도착한 이들은 무정의 화북조선청년연합회에 가입했고 1942 7월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되었다. 한편충칭에 남은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총사령부 100여명은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창설하면서 여기에 편입되어 서로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1945 8 9일 조선의용군이 개편되어 무정이 사령관으로, 전임 사령관인 박효삼은 부사령관 겸 참모장이 되었다. 또한 부사령관 겸 정치위원에는 박일우가 임명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 제2군단장을 지냈고 옌안파의 거두로서 박헌영과 함께 김일성에게 가장 위협적인 정적이었던 무정의 본명은 김무정이다. 그는 1905년 함경북도 경성에서 태어났다. 중국으로 넘어가 바오딩 군관학교를 졸업하였고 국공분열 이후에는 장시성 루이진(瑞金)에서 중앙소비에트공화국이 수립되자 노농홍군에 입대하였다. 장제스의 대대적인 토벌로 중공 지도부가 후난성과 장시성의 근거지를 버리고 대장정에 나서자 그도 함께 했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뒤 팔로군 포병연대장, 포병사령부 사령관 등을 맡았고 백단대전에도 참여하는 등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중공 지도부의 핵심 인물로 떠오르게 되었다.

 

🔼 중일전쟁 말기 옌안의 조선의용군. 앞줄 두번째는 일본군에게 격추 당했다가 이들에 의해 구조된 미군 조종사

 

중공에는 한족과 조선족 이외에도 다양한 소수 민족들이 참여하고 있었지만, 동북으로 향하는 부대에 포함시키고 주요한 임무를 부여한 것은 조선의용군 밖에 없었다. 그만큼 중공은 조선의용군에게 깊은 신뢰와 함께 매우 중요한 존재라고 본 것이다. 동북에 약 216만명에 달하는 조선인들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해방 당시  2 3백만명 정도였던 전체 조선인 중에서  9%에 달하는 숫자였다. 특히 조선인들은 지린성의 옌볜과 무단장  주로 소련, 북한 국경에 인접한 동만주 일대에 거주하고 있었다. 반면, 산하이관 이남의 중국 본토에 거주하는 조선인은 10만명도 채 되지 않았다. 조선의용군은 3개 지대로 나누어 제1지대가 랴오닝성, 3지대가 지린성, 5지대가 헤이룽장성을 맡아 토비 토벌과 현지 조선인들을 조직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소련군의 묵인 아래 동북으로 진입한 공산군은 현지의 만주군경과 무장세력들을 흡수하면서 빠르게 세력을 확대하여 1945 12월에는 10개 군구 약 27 5천여명에 달했다. 또한 소련군은 투항한 관동군으로부터 접수한 무기의 태반을 공산군에게 넘겼다. 동북으로의 레이스에서 마오쩌둥은 장제스보다 한발 앞서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유리한 것만은 아니었다. 장제스가 본격적으로 반격에 나섰기 때문이었다

 

장제스는 1945 10 18일 슝스하이를 동북행영 주임에, 전 중국원정군 부사령관이자 제5집단군 사령관 겸 윈난성 쿤밍 위수 사령관 두위밍을 동북보안사령관에 각각 임명하여 동북에서의 작전 총지휘를 맡기고 본격적으로 동북 탈환에 나섰다. 미국이 제공한 수송기와 수송함을 타고 친황다오에 도착한 국민정부군은 11 16일 동북의 관문인 산하이관을 공격해 점령하였다. 또한 11 26일에는 랴오닝성 서부에 있는 도시인 진저우(錦州)를 점령하는 등 병참의 불리함과 영하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파죽지세로 진격했다. 린뱌오는 연전연패를 한 채 동쪽으로 밀려났다.

 

1946 1 10일 마셜의 중재로 전 전선에 걸쳐 정전 명령이 하달되었지만 동북에서의 총성은 멈추지 않았다. 2월에는 "5대 주력"이라 부르는 최정예부대인 신1(50사단, 신편 제38사단, 신편 제30사단)과 신6(14사단, 신편 제22사단, 지식청년군 제207사단)가 친황다오를 거쳐 동북으로 진입했다. 이 두개 부대는 버마 전역에서 활약했던 신편 제38사단과 신편 제22사단을 주축으로 각각 3개 사단으로 편성되었다. 각 사단은 3개 보병연대와 1개 포병 연대 등 약 14천여명으로 구성되었고 1개 전차 대대와 400여대의 차량을 보유하여 중국군 유일의 기계화부대이기도 했다. 또한 태평양전쟁 말기 버마와 즈장 전투에서 승리하는 등 풍부한 실전 경험을 갖추었고 사기도 충천했다장제스는 신1군과 신6군을 "천하제일군"이라고 불렀다. 5월까지 동북에 진입한 국민정부군은 약 13 7천명에 달했다.

 

또한 동북에서의 민심은 중공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들은 공산주의에 대한 아무런 이해도 없을 뿐더러, 마땅히 장제스 정권이 중국의 중앙정부라고 여겼고 앞으로의 내전에서도 장제스가 이기리라고 여겼다. 장제스 정권이 파견한 특무조직들은 현지의 무장 조직들 포섭에 나섰다. 당시 동북은 일본의 항복으로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소련군은 약탈에만 광분했을 뿐 행정이나 치안에는 관심도 없었다. 여기저기서 토비가 준동하면서 자경단이 조직되었고 일본군이 버리고 간 무기로 무장하였다. 이들은 국민정부측과 중공측으로 갈라져 서로 치열한 영역 싸움을 벌였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국민정부군이 동북으로 진입하자 대부분은 국민정부측에 포섭되어 "보안군"이니 "보국군"이라는 거창한 이름과 지위를 부여받고 공산군 토벌에 앞장 섰다. 일시적으로 중공측에 섰던 부대들 역시 국민정부측으로 깃발을 바꾸었다. 이 때문에 동북에서 중공의 형세는 더욱 불리해졌고 사방이 고립되었다.

반면, 동북의 조선인들은 처음부터 중공측에 섰다.(반면, 산하이관 이남의 국민당 통치구역에서 거주하던 조선인들은 대부분 장제스를 지지했다.) 가장 큰 이유는 현지 중국인들과의 갈등 때문이었다. 일제는 중국인들과 조선인들을 이간질 시킬 생각으로 중국인들의 농토를 빼앗아 조선인들에게 나눠주었다. 또한 법적으로도 조선인들을 우위에 놓고 중국인들을 차별하였다. 따라서 중국인들에게 조선인은 일본의 침략에 공동으로 대항하는 세력이 아니라 오히려 일본과 결탁하여 자신들의 생활 공간과 재산을 빼앗는 불청객들이었다.

일본이 항복하자 중국인들은 그간의 증오심을 폭발시켰다. 이들은 조선인 마을을 무차별로 습격하여 학.살과 약탈을 저질렀고 조선인들 역시 자경단을 조직하여 대항했다. 하지만 중국인 사회에서 소수민족이었던 조선인은 고립된 신세였다. 절반 가량은 해방 후 귀국했지만 1947년 말까지도 여전히 110만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었다장제스 정권은 동북의 조선인을 한교(韓僑)라고 불렀다. 이들이 동북에 거주한 것은 중국 정부의 허가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일본의 만주 침략에 편승한 것이므로 중국 공민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또한 조선인들이 형성한 재산과 토지는 대부분 일본의 비호 아래 중국으로부터 강탈한 것이라고 규정하여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임정 출신들이 주축이 된 한국독립당과 협력하여 남한으로 송환할 생각이었다. 반면, 중공은 이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하여 내전에 활용하려고 했다. 그리고 조선의용군이 그 첨병이었다.

 

조선의용군이나 조선인들 입장에서 국공의 싸움은 틀림없는 남의 나라 전쟁이었다. 그런데 해방된 조국으로 향하지 않고 자신들과 상관없는 내전에 참여한 것인가. 실제로 동북으로 들어온 조선의용군의 일부는 압록강을 건너 북한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북한에는 이미 김일성의 소련파가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조선의용군은 소련군에 의해 무장 해제된 채 도로 쫓겨나야 했다. 그들로서는 갈 곳이 없었던 것이다.

 

조선인을 적대적으로 대했던 장제스 정권과 달리, 중공은 조선인들을 습격하는 토비를 토벌하는 한편, 조선인들에 대해 중국의 정식 공민으로 일체의 권리를 보장하면서 동시에 한국인의 국적 또한 그대로 가진다고 인정했다. 이는 이중 국적을 부여한 것이었다. , 동북에 정착하든지 조국으로 돌아가든지 마음대로 하라는 의미였다. 또한 옌벤을 비롯한 조선인 밀집지대에 대해서는 조선인을 행정 책임자로 임명하고 자치권을 부여하는 등 민심 회유책을 썼다.

 

내전 초반 국민정부군의 우세한 공세 앞에서 선양과 창춘, 안둥을 연달아 빼앗기는 등 공산군이 압도적으로 밀리는 상황에서 조선인들의 협조는 큰 힘이 되었다. 1946 1 22일 동만주의 요충지인 무단장(牡丹江)을 놓고 벌어진 전투에서 중국국민당 동북정진군 제1여장 마시산(馬喜山)이 지휘하는 약 1천여명의 공격을 받은 중공은 일부 부대가 국민정부측에 매수되어 총부리를 돌렸음에도 조선인 부대의 활약으로 격퇴하기도 했다.

 

1946 2 3일에는 공산군의 점령 아래 있었던 지린성 퉁화(通化)에서 일본인 거류민들과 패잔병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이른바 "퉁화사건"이 일어났다. 이들의 진압에 앞장선 것은 이홍광(李紅光)이 지휘하는 조선의용군 제1지대였다이들의 활약 덕분에 중공은 퉁화를 지켜내었다. 또한 조선의용군은 북만주와 동만주 일대의 토비들과 국민정부군 지방부대를 격파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중공은 조선인 부대에 대해 간부들의 역량은 부족하지만 대체적으로 강인하고 복종심이 높고 학습 능력이 뛰어나 우수하다고 평가하였다.

 

1946 5 4일 중공은 "5.4지시(五四措置)", 이른바 《감조감식문제와 토지문제 청산에 관한 지시》를 발표하여 "10%의 지주가 70% 이상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상황을 해소하겠다"라며 전국에 대한 토지 개혁을 선언하였다. 물론 10%의 지주가 대부분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는 선전은 어느 정도 과장된 정치 선전이기는 했으나 오랜 내전과 혼란을 거치면서 농촌에서의 토지 집중 현상이 심각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중공은 토지 개혁을 내전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수단으로 삼으려고 한 것이다.

 

토지 집중 현상은 일본인들이 지배했던 동북이 가장 심하였다. 총인구의 3%에 불과한 지주가 전체 토지의 50%를 차지하였고 전체 인구의  90%를 차지한 빈농과 소작농은 모두 합해도 고작 30%의 토지를 가지고 있었다. 중공의 토지 개혁이란 그야말로 단순했다. 현장 조사나 충분한 준비도 없이 선동적인 구호만 앞세우면서, 토지와 재산이 많은 농민은 이유를 불문하고 인민의 적이라며 처벌하고 토지를 몰수한 후 빈농들에게 일괄 분배하는 식이었다. 이 때문에 사적인 원한이 있는 사람들이 서로를 고발하고 엉뚱한 사람들이 인민 재판에 올려져 참혹하게 살해되었다. 극심한 혼란과 예상치 못한 반발에 직면하자 중공 지도부에서 직접 나서서 "당의 뜻을 왜곡하지 말라"며 개입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땅을 부여받은 대다수의 가난한 농민들은 크게 환영했다.

 

물론 장제스 정권도 쑨원이 제창했던 평균지권(平均地權) 사상을 기초로 토지 개혁을 위한 법률을 제정하고 제도를 정비하는 등 나름의 대책을 마련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상몰수, 무상 분배를 했던 중공과 달리, 국가가 토지를 점진적으로 매수한다는 유상 매수, 유상 분배가 원칙이었기에 당장 이에 필요한 행정기구와 재원이 없었고 시간도 오래 걸릴 수 밖에 없었다. 또한 내전이 확대되면서 부차적으로 밀려나버렸고 슝스하이를 비롯해 동북으로 파견된 관료들은 민심을 수습하기보다는 일본인들의 자산을 몰수하여 자신의 부를 축적하는데만 혈안이 되면서 더욱 상황은 악화되었다.

 

중공의 토지 개혁 선언은 동북의 민심이 일거에 중공측에 넘어오도록 하였다동북에서만 500만명의 농민들이 평균 1천평의 땅을 분배받았다. 조선인들 역시 크게 환영하였다. 80%가 빈농 계급이었고 생계가 매우 열악했기 때문이었다. 토지 분배에서 중공은 한족과 조선인을 똑같이 대우했다. 당시 옌벤의 인구는 719천여명 정도였는데 그 중의 82%가 조선인이었다. 이들은 가구별로 900평에서 1400평의 토지를 분배받았다그동안 땅 한뼘 없이 살아왔던 가난한 농민들에게는 내 땅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큰 기쁨이었다. 조선인들은 앞다투어 공산군에 입대하였다.  

 

1946년부터 49년까지 국공내전 동안 동북에서 거주하다가 중공의 편에 서서 참전한 조선인은 62,942명에 달했다. 이는 약 8개 사단에 달하는 병력으로 중공군 내 여러 소수민족 중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또한 지방 무장 조직에 참여한 이들도 10만명에 달했고 그 외에도 수십만명이 물자 운반과 후방 병참 지원 등 각종 지원 사업에 참여하였다. 국공내전에서 조선인들은 가장 적극적으로 싸웠다. 만약 내전에서 장제스 정권이 승리하면 땅과 재산을 모조리 몰수당한 채 추방당할 것에 뻔했기 때문이었다. 내전이 끝난 뒤에도 조국으로 귀환한 사람은 타 지역에 비해 훨씬 적었다. 반면, 장제스 정권은 조선인들을 애써 회유하려고 하지 않았고 임정과 광복군을 활용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현지의 사정을 고려치 않은 억압적인 정책을 고수하면서 조선인들이 국민당 통치구역에서 공산당 통치구역으로 탈출하도록 방조했다. 국공내전 말기에 동북행영에서 올린 보고서에서도 "조선인 탄압은 정책상 가장 큰 오류"라고 인정하였다.

 

1946 6월 쓰핑전투를 시작으로 전면전으로 확대된 국공내전은 초반에는 국민정부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했지만 지나치게 전선이 확대되고 병참선의 부담이 가중되면서 1947년 초부터 교착 상태가 되었다. 장제스는 동북에 대해서는 수비를 명령하되, 관내의 작전에 주력하여 중공의 심장부인 옌안를 점령하였다. 하지만 승패는 동북에서 결정났다. 동북으로 향하는 철도가 공산군에게 장악되면서 병참선이 끊어졌고 두위밍이 지휘하는 국민정부군 주력부대는 고립되었다. 승기를 잡은 린뱌오는 1947년 가을부터 국지적인 반격에 나섰다.

 

1947 12월이 되자 국민정부군은 동북의 대부분을 빼앗긴 채 선양과 창춘, 진저우 세 도시만 간신히 지킬 수 있었다창춘에는 동북초비 총사령 웨이리황이 지휘하는 1개 병단 6개사단 10만명이, 선양에는 2개 병단 24개사단 30만명, 진저우에는 1개 병단 14개사단 15만명이 고립된 채 성벽으로 둘러쌓인 도시안에 틀어박혀 있었다모두 합해봐야 55만명(정규군 48만명, 비정규군 7만명)에 불과했다. 반면, 린뱌오가 지휘하는 지휘하는 동북야전군은 54개 사단 70만명에다 지방부대 33만명 등 100만명이 넘었다. 그 중의 태반은 투항한 국민정부군이었다.

 

상황이 급격하게 악화되자 장제스의 참모 중에는 동북과 화북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전선을 축소하여 기회를 엿보자는 주장도 있었으나 장제스는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그는 "동북에서는 안정을 구하고 화북은 수비를 공고히 하며 서북에서는 공비의 확산을 막고 화동과 중원에서는 소탕작전을 강화하여 적의 남진을 막으면서 때를 보아 적의 주력을 격파한다"라면서 기존의 방침을 고수했다.

1948 9월부터 시작된 랴오선 전역에서 장제스는 4번이나 선양까지 직접 날아와 반격을 지휘했으나 결국 포위망을 뚫지 못한 채 격퇴당했다. 10 15일 진저우가, 17일에는 창춘이, 11 6일에는 선양이 함락되면서 국민정부군은 완전히 전멸당했다. 이는 팽팽했던 국공의 균형을 단숨에 무너뜨렸다. 전력에서 우세해진 중공은 화동에서 대대적인 공세에 나섰고 국공 최대의 결전인 화이허 전역에서 승리하면서 승패를 결정지었다. 1949 1 21일 장제스는 총통 자리를 부총통 리쭝런에게 넘기고 하야를 선언했다. 다음날 베이핑을 방어하고 있던 푸줘이가 항복하면서 창장 이북 전역이 중공의 손에 넘어갔다. 11개월 뒤 장제스는 대륙의 마지막 거점인 청두를 버리고 타이완으로 도망쳐야 했다.

 

미국은 장제스의 패배에 대해 병참을 무시한 무리한 동북 출병이 가장 큰 패인의 하나, 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미국의 책임을 호도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동북이 전란에 휘말리게 된 근원은 얄타 회담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루즈벨트는 스탈린에게 대일 참전을 종용하면서 그 대가로 만주의 점령을 용인하였다. 이는 장제스 정권과 아무런 상의도 없이 멋대로 결정한 결과였다. 포츠담 회담 직전에야 그 사실을 안 장제스는 강력하게 반발했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루즈벨트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트루먼 역시 소련군의 참전을 막지도 않았고 소련군의 활동을 애써 제약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미국의 묵인 아래 무한한 자유를 보장받은 소련은 동북을 완충지대로 삼으려고 했다. 스탈린은 옌안에 밀전을 보내어 중공이 30만명의 병력을 동북으로 파견하라고 출병을 권고했다. 이는 장제스와 채결한 중소우호조약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이었다. 소련군은 국민정부군을 탑승한 미 해군의 수송선이 뤼순과 다롄, 후루다오(葫蘆島)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았고 국민정부군이 탄 수송기가 동북의 비행장에 내리는 것을 거부했다. 이 때문에 장제스의 동북 접수는 심각한 방해를 받았다바꾸어 말해서, 만약 소련군이 동북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중공 역시 동북에 들어올 수 없었을 것이며 동북은 자연스레 장제스 정권에 복속되었을 것이다. 내전 또한 벌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트루먼은 국공내전 내내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면서 장제스를 확실하게 지원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발을 빼는 것도 아닌 태도를 취하면서 결과적으로 장제스의 패배에 일조했다.

장제스는 군사적으로는 무리한 작전인 줄 알면서도 정치적인 이유로 동북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속전속결로 끝낼 생각이었다. 내전 초반 3개월 동안 동북의 70% 이상을 신속하게 점령했다는 점에서 적어도 이 시기에 장제스가 패배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다. 린뱌오의 동북민주연군(나중의 제4야전군)은 큰 타격을 입은 채 일부는 북만주로, 일부는 북한으로 도주해야 했다. 따라서 장제스의 동북 출병이 처음부터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는 주장은 어쩌면 결과론적인 얘기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소련의 개입을 우려한 미국의 간섭, 뒤에서 중공을 은밀하게 지원한 소련, 국내외의 여론 악화 등으로 장제스가 머뭇거리면서 린뱌오는 동북의 전세를 뒤집을 기회를 잡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조선인들의 협력도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였다. 이는 중공이 조선인들의 민심을 잡는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1949 10 10일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다장제스는 대륙을 잃고 타이완으로 쫓겨났다. 국민정부가 패망 직전에 몰리자 산하이관 이남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은 전쟁을 피해 대부분 한반도로 귀환했다. 중국에 남은 조선인들은 원하건 원치 않건 중공의 통치에 순응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한국전쟁 전후로 북한으로 들어가 북한군이 되거나 중공군의 통역으로 참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인들은 이 과정에서 자신의 조국이 과연 북한인지, 중국인지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중공은 내전에 승리한 후 소수민족 정책을 본격화하였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중국에 정착한 조선인들을 중국 55개 소수 민족의 하나로 분류하여 "조선민족" 대신 "조선족"이라는 정치적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 또한 이전부터 동북에 거주하는 조선인은 중국 공민으로, 한국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돌아온 사람은 교민으로 구별하였다. 더 이상 중국에 체류하는 이방인이 아니라 중국인의 일부로 본다는 뜻이었다. 1952 9 3일에는 옌벤에 조선민족자치구(현재의 옌벤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가 설립되었다조선인들은 거류민증을 일괄 반납하고 중국 국적을 취득하였다. 이로서 더 이상 이중국적의 소유자들이 아니라 중국 공민으로서 단일 국적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의 삶은 이후에도 그야말로 풍파의 연속이었다. "토지는 농민의 손으로"를 외쳤던 마오쩌둥은 막상 내전에 승리하자 도로 빼앗아 강제로 국유화시켰다. 이는 농민들의 오랜 바램을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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