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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고 싶지 않은 주인공

ㅇㅇ(203.234) 2018.01.17 03:07:50
조회 165 추천 0 댓글 2

정직하지 않은 사람들은 정직이 최고의 미덕이라고 말하죠. 사람들은 하얀 거짓말이 있다는 건 알면서도 검은 정직이 있다는 말은 굳이 입에 담지 않더라고요. 아빠는 어떻게 생각해요? 이런 말을 실제로 해 본 적은 없어요. 아빠는 나한테서 질문을 받는 데 익숙하지 않거든요. 먼저 묻는 것도 마지막으로 묻는 것도 자신이어야 하죠. 내가 할 일은 학습지에서 올바른 답과 질문에 선을 긋듯 그 둘을 잇는 거예요.

요즘 학교에서 어떻게 지내니? - 그냥 그래요.

애들하곤 잘 지내고? - 그것도 그냥 그래요.

뭐 부족한 건 없니? 용돈 필요해? - 괜찮아요.

묻는 사람도 답하는 사람도, 진짜 필요한 게 뭔지 알면서도 꽁꽁 싸고 돌 뿐이에요. 아빠는 내 어깨와 팔뚝에 난 멍을 모를 만큼 둔하지 않고, 태연하게 말을 이어나갈 만큼 수완이 좋지도 않아요. 난 아빠 앞에서 속마음을, 떨리는 목소리를 갈무리하는데 익숙하지 않죠.

자세히 말하고 싶진 않아요. 어릴 때 일어난 일이고, 너무 큰일이라 많이 알 수는 있었지만 자세히 알 수는 없었거든요. 깨닫고 보니 아빠는 모두에게 손가락질 받는 사람이 되어있었어요. 여기로 이사 오기 한참 전, 공원에 갔을 때가 기억나요. 매미도 지쳐 떨어질 만큼 더웠는데 아빠는 긴바지를 입고 있었죠. 더워 보여 걷어주려 했는데 버럭 화를 냈어요. 그때는 뭘 뜻하는 건지 몰랐죠. 며칠 뒤 이사를 갔어요. 태어나서 처음이었지만 마지막은 아니었어요.

 

그날부터 달라지지 않는 게 하나 생겼어요. 집도 달라지고 거리도 달라지고 오며가며 마주치는 사람들도 달라졌는데도 항상 말이에요. 아무리 빨리 달려도 태양을 따돌릴 순 없잖아요? 그것처럼 어딜 가나 우릴 바라보는 눈이 있었어요. 감추고 싶어도 한계가 있죠, 배상 문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오고, 우편이 몇 개 오가기 시작하면 끝이에요. 그게 싫어서 이사를 가죠, 그리고 얼마 뒤면 잘못 만든 게임처럼, 그날부터 다시 시작되는 거예요.

아빠도 힘들었겠지만 난 어땠겠어요? 아직 다녀야 할 학교가 있고 거기서 하루 종일 같은 시간을 공유해야 할 애들이 있다고요. 소문의 주인공이 바로 옆에 앉았는데 그 아이들이 어떻게 굴 것 같아요? 가끔 옷을 덜 입은 채로 사람이 많은 곳에 던져지는 꿈을 꾸곤 하잖아요. 전 매일이 그랬어요. 물론 숨기려고 노력 안 했다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그런 일이 있었는걸요. 언론에서 난리도 아니었죠. 그런데 때마침 전학 온 애가 있다고요? 그것도 자기 집 이야기를 싫어하는? 그걸 어떻게 숨길 수 있겠어요?

아빠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분명 현명한 일은 아니지만, 아빠는 그냥 아빠죠. 그게 내 삶까지 망가뜨리길 바라는 사람은 아니에요. 그래서 필요한 게 거짓말이고요. 먼저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했고, 그게 들통 나면 이제 아빠한테 해야 했죠.

점심시간 밥을 먹고 막 돌아온 아이들이 나더러 뭐라고 했는지, 아침 조회 때 일부러 교실이 찰 때까지 기다렸다가 들어오면 그걸 보는 아이들의 표정이 어땠는지 천천히 떠올리면서, 아빠 얼굴을 보고 말하는 거예요. 아무 일도 없었어. 당장은 달라질 게 없으니까요. 언젠가는 또 이사를 가야겠지만 하루에 수십 번씩 그런 생각을 한다고 그때마다 짐을 꾸릴 순 없잖아요.

사람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누가 직접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어요. 애써 외면하려해도 항상 눈치 챌 수밖에요. 남들이 하듯 자연스레 저지르는 실수라도 내게 달라붙는 눈길은 달라요. 어쩌다가 입을 열면 주위가 조용해지죠. 자기들끼리만 똘똘 뭉쳐 노는 것 정도면 차라리 고마울 정도에요. 팔은 안으로 굽는데, 그게 쥐고 있는 돌은 그럼 어디로 던져지겠어요? 나처럼 언제나 바깥을 맴도는 아이들이죠 물론.

언제나 명분은 필요해요. 저 아이는 더러워. 말투도 이상해. 남들에게 피해를 줘. 그래서 괴롭혀도 돼. 내 경우엔 그런 것들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커다란 명분이 떡하니 붙어 있잖아요. 안 될 게 뭐 있겠어요?

그렇다고 제가 나서서 뻗댈 수도 없죠. 그래서 아이들은 종종 선을 넘었어요. 자세히 말할 생각은 없어요. 아무도 안 볼 때 몰래 삼키는 눈물 한두 방울로는 못 덮을 게 있었어요. 일찍 집을 나선 내가 왜 지각이 그렇게 잦은지, 왜 학교 이야기는 항상 비슷한 곳만 뱅뱅 도는지, 내가 입을 다물 때마다 미처 꺼내지 못한 말들이 뭔지 다 알면서도 아빠는 거기 있었죠.

 

그 일이 터졌을 때 가장 힘들었던 사람은 물론 엄마였죠. 뉴스가 뜨고 나서 처음 집에 발을 들여놓은 아빠를, 퍽퍽 소리가 날 만큼 때리면서 울고불고 하시던 게 어렴풋이 생각나요. 아빠는 다리를 눈에 띌 정도로 휘청이면서도 끝까지 쓰러지지 않았죠. 엄마는 제풀에 지쳐 무릎을 꿇고, 아빠 옷자락을 붙잡고 속으로 울음을 삼켰어요. 당연히 외가에서는 노발대발했고 얼마 안 가 양쪽이 갈라서게 되었어요. 엄마는 끝까지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지만 난 싫었어요. 그런 일을 한 아빠를 혼자 둘 순 없으니까요.

우리 집은 다 같이 살던 때와는 달리 화장실이 한 개에요. 그래서 아빠는 오늘도 내가 자는 걸 확인해요. 보폭이 맞지 않는 발걸음으로 방까지 와 내가 곤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걸 보다가, 이내 조용히 문을 닫고 화장실로 가죠. 물론 난 다시 눈을 떠요. 그리고 손잡이에 힘을 준 채 틈을 벌려 문을 열죠. 그럼 보여요. 화장실의 아빠가.

오래 보고 싶은 광경은 아니에요. 긴 바짓단을 걷어 올린 채 타일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은 아빠. 한 손에 든 바가지로는 연신 물길을 끌어올려 다리에 끼얹고, 다른 손으로는 연고와 팩 따위를 뜯어 정신없이 바르고 있어요. 가만히 놔두면 피가 멎지 않는다. 그날부터 줄곧 이런 상태였다. 아빠랑 같이 현장에 나갔던 아저씨가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에요.

잘 익은 포도처럼 새카매진 다리는 딱딱해 보이지만 실은 아기 피부처럼 약해서, 조금만 움직여도 껍질이 벗겨져 피를 질질 흘려요. 상처가 생기면 잘 아물지도 않아서 덧나기도 쉬워요. 딱지라도 지면 바지 전체가 들러붙어서, 마음대로 옷을 벗을 수도 없죠.

나라가, 회사가 나서서 원자력은 안전한 미래의 에너지라고 홍보했으면서, 정작 거기에 문제가 생기니까 달려든 사람들은 우리 아빠 같은 사람들뿐이었어요. 먼지 쌓인 화학방호복을 입고 자원봉사를 하러 가는 사람들 소식이 나왔을 때, 엄마도 나도 설마 그게 우리 가족의 이야기가 될 줄은 몰랐죠. 아빠는 콘크리트 잔해를 들쳐 엎고 긁어내는 일을 했어요. 일을 다 끝내고 나서야 옷에 상처가 난 걸 알았다고 해요. 이곳저곳에서 들어오는 돈을 받고 이사를 갔지만, 사람들은 어딜 가나 우리를 알아봤어요. 아빠의 다리는 점점 더 안 좋아지고, 배상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도 아니에요. 사람들은 어딜 가나 우리를 쳐다봤어요.

오늘도 아빠는 똑같은 걸 물어봐요. 갈수록 거짓말이 힘들어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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