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테레이 시가지에서 싸우는 미군, 1842년 9월 23일>
먼저, 20세기 이전에 시가전은 빈번했는가?
생각보다 나름 벌어졌음. 무슨 스탈린그라드 이런 걸 생각하면 안 되겠지만, 방어자 측이 기존에 있는 작은 마을의 건물들에 틀어박혀서 저항하는 경우는 흔했음. 당장 유명한 워털루 전투만 해도 전장 중앙부의 라에상트와 우구몽 농장를 수비하던 영국군을 프랑스군이 공격한 사례와 프리셰르몽, 플랑스누아를 지키던 프랑스군을 프로이센군이 공격한 사례를 꼽을 수 있음. 전자는 네의 기병대를 지원하기 위해 전진하던 프랑스 보병대를 저지하며 전투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고. 게티즈버그 전투도 거기 옆 마을에 보면 Shriver House라고 역사 투어 있는데 남군 기병대랑 북군이랑 마을 건물들 점거하고 다락방에 총안 뚫어서 총질해댄 흔적들 남아있음.
그 밖에도 7년 전쟁, 미국 독립전쟁, 나폴레옹 전쟁, 남북전쟁을 보면 마을이나 농장 따위에 소규모 수비대가 주둔하고, 돌담과 밭에 숨어서 진격해 오는 적군과 끈덕지게 맞붙는 사례들을 빈번하게 찾을 수 있음. 사실상 그런 거 하나도 없는 탁 트인 평야에서 벌이는 회전이 더 드물 정도임.
하지만 스탈린그라드 같은 건물 다 때려부수고 초토화되는 시가전은 거의 없었던 게 사실임. 우리가 흔히 아는 ‘대도시의 핵심부까지 깊은 종심으로’ 벌어지는 시가전이 드물었던 이유는, 도시의 가치가 그러기엔 너무 높으니까... 민간인과 전쟁 사이 분리해야 된다는 사상도 적잖게 작용했고. 그 말인즉슨, 대도시 말고 좀 작은 도시랑 마을, 특히 민간인 소개를 부분적으로라도 완료한 곳들에서는 잘만 시가전 벌였음.
보통 이러한 시가전은 딱히 병사들 FM에 훈련되는 상황이 아니었음. 그냥 알아서 잘 총안구 벽에 파내고 몸 숨기고 도끼 같은 걸로 문 빗장 때려부수고 하면서 꼴리는 대로 싸웠지. 기관단총이니 현대적 수류탄이니 이런 것도 없어서 그 걸리적거리는 머스켓 총 가지고 알아서 잘~ 싸워야 했음.
까놓고 말해서 시가전 = 최외곽 성벽 뚫리고 나서의 공성전이라 사실 여기서 공성전 여전히 자주 벌어졌다 땅땅땅! 으로 끝낼 수도 있기는 한데, 그러면 노잼이니까 당시에 시가지에서 싸우는 법 연구한 사례 하나를 들어 봄. 영국군의 Street Firing이란 교리인데, 7년 전쟁 - 미국 독립전쟁 때부터 있던 공성전 상황용 교리였음. 엉뚱한 렉싱턴 콩코드 전투에서 로리 대위가 시도했다가 피 보긴 했는데 그건 딴 얘기니까 생략하고.
좁은 시가지에서 횡대로 전개(deploy)할 수 없을 때 종대 대형이 적전 전진/후퇴를 하는 교리로 소개되어 있고, 구체적인 방법은 다음과 같음.
1. 전진할 시 - 3개 중대가 본대와 충분한 간격을 두고 떨어짐. 1-2-3중대 순서로 차례대로 늘어서고, 본대와 중대들 사이 간격에는 기병 또는 포병을 배치함.
사격 명령이 내려지면 1, 2중대가 무릎을 꿇고 3중대가 사격함. 그 다음에는 2중대가 일어서서 쏘고, 마지막으로 1중대는 무릎 쏴를 함. 그리고 나서 상황 봐서 맨 선두의 1중대가 그대로 일어서서 돌격하거나, 아직 적 저항이 완강하다면 중대를 소대들로 나눠서 거리 양편에 붙게 하고 3개 중대 뒤에 배치되었던 대포를 쏘거나 기병을 돌격시킴. 또한, 중대들 양 옆에 1열씩 측면에 전개해서 시가지 양편 건물들의 창문에 총질할 것도 권장되어짐.
2. 후퇴할 시 - 이때에는 아까처럼 1-2-3중대 순서로 늘어섰는데, 1중대가 쏜 다음에 소대들로 나뉘어 양편으로 후퇴함. 그래서 3중대 뒤에서 다시 재편하고, 2중대가 쏜 다음에 맨 뒤로 가고... 그런 식임. 보면 네덜란드식 카운터마치 전술에서 좀 영감을 받은 듯하지.
한편 교범에서는 적이 점거한 마을에 들어갈 때면, 교두보 확보 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로 양 측면의 건물들을 확보(clear)하는 것이라고 함. 그리고 본대는 시가지 양측방의 건물을 확보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함부로 길거리를 따라 전진하지 말라고도 하며, 확보 임무를 맡은 양익의 분견대는 집에서 집으로(house-to-house) 전진하며 가로막는 담벼락 따위는 때려부수라고 되어 있음. 반도전쟁 때 영국군 공성전이 대개 이렇게 이루어졌음.
그렇다면 이런 공성전에 가까운 시가전이 언제 공성전과 확연히 구분되는 특색을 가지게 되었느냐? 보병의 대형이 훨씬 느슨해지고 보다 여러 사격자세에서 유연하게 싸우게 된 19세기 말, 후장식 단/연발소총의 제식화 시기임. 처음으로 ‘현대적인’ 시가전을 볼 수 있었던 건 1870년 보불전쟁, 스당 전투의 바지유 전투로 여겨짐. 여기서 보면 프랑스 해병대(정확히 말하자면 해양보병대 - 육군 산하)가 바이에른군 상대로 바지유 마을에 틀어박혀서 분전한 사례인데, 전투 끝나고 나서 찍은 사진이 이러함.
나폴레옹 전쟁 때는 이렇게 벽도 없는 마을을 철저하게 다 때려부숴 가며 싸운 경우는 드물었음.
한편, 1차 대전의 시가전은 또 별 인지도가 없는 편인데, 이건 왜냐면... 처음에 참호 만들 때는 참호선이 마을 통과하는 경우 꽤 있었고, 기존에 있던 돌담 같은 거 활용해서 뒤에 숨은 경우도 있었지만... 사전포격 때 땅 위로 튀어나온 구조물들은 상대 포병한테 가루가 되었기 때문임...
그래도 찾아보면 나름 있음. 1916년 솜 총공세에서도 마을 건물을 일종의 화력진지로 꾸며서 싸우는 독일군의 사례가 있고, 1918년에 춘계공세 - 백일전투 기간에는 전투가 몇 시간 동안 사전포격 가해서 일단 다 갈아버리고 시작하는 양상에서 좀 더 기동전 양상으로 바뀌면서 멀쩡하게 남은 건물에서 치고박고 하는 경우들도 많이 늘어남. 서부전선 말고도 동부전선에서 각종 요새 공성전들이 있겠고, 또 유명한 베오그라드 공방전의 사례도 있음.
이거 말임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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