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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뇌피셜] 1276년 양절 방면 몽골 반격 재구성

갓-신.(121.145) 2019.10.08 08:03:52
조회 126 추천 1 댓글 1
														

앞서 남송 망명정부가 단종을 5월 1일에 즉위시키고서 남송 각 지역을 점령한 몽골군에 대한 공세를 펼친 것을 대강 살펴보았다. 5월에 출병했고, 최소한 늦어도 6월부터 성과를 얻었다.


그렇다면 몽골군은 송군의 공격에 어떻게 반응하고, 대응하여 역으로 송군을 밀어냈을까.


바얀 열전에 따르면, 바얀은 대도로 복귀하기 이전에 다음과 같은 임무를 맡겨둔다.


참지정사参知政事 아라칸과 동문병은 임안에 남아 행성 업무를 수행한다.


망쿠타이는 도독으로 양절서로에 주둔한다.


소게투는 선무사宣撫使로 양절동로에 주둔한다.


이때, 소게투 열전에 따르면, 동문병은 자신의 보조(副者)로 소게투를 해도 되겠냐고 허락을 바얀에게 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원사 세조 본기의 기록에는 1276년 5월에 바얀이 양절에 도독부를 설치해서 망구타이와 범문호에게 그 일을 맡겨도 되겠느냐고 허락을 구하는 바얀의 요청이 있고, 이를 쿠빌라이가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런데 같은 해 6월의 기록에 따르면 위의 도독부를 페하고 악주鄂州와 임안臨安에 행성을 설치했다고 한다. 바얀이 이끈 군단이 형호행성인데, 이 행성은 성격상 군전행성軍前行省으로 지방행정기구라기보다는 방면군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 군전행성은 바얀이 남송을 정복하면서 소멸했다고 하는데, 아마 이 기록과 연관된 것 같다.


새로이 임안에 설치된 행성의 경우는 동문병과 아라칸이 업무를 맡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위의 가정이 맞든 아니든, 어쨌건 동문병과 아라칸이 임안에 남아 행성 업무를 하고 있었을 것 같다.


그런데 7월이 되면 정복한 남송 지역에 머물던 여러 몽골군 지휘관들이 대거 승진하거나 소속을 바꾸는 인사조치가 벌어진다. 아릭 카야, 동문병, 타추, 범문호, 여사기 등. 아릭 카야는 평장정사가 되고 동문병은 중서좌승이 되었으며 타추, 범문호, 여사기 등은 참지정사로 승진한다.


이때 송사 본기에 따르면 1276년 7월에 평장정사 아릭 카야가 광남서로를 침입해 엄관을 돌파하자 이를 지키던 마기가 물러가 정강부를 지켰다고 나온다. 아릭 카야가 중서우승이 아니라 평장정사인 점을 보면 위의 7월 인사조치 이후에 일어난 것인데, 이는 쿠빌라이 조정이 남송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이 있기 전에 취한 조치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다시 원사 본기로 돌아가 6월 내용을 보자면, 쿠빌라이가 아릭 카야에게 광남서로 정벌을 지시하자 아릭 카야가 병력 3만을 늘려달라고 요청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내용이 있다. 마찬가지로 6월에 추밀원이 보고하는 내용에 따르면, 진의중과 장세걸이 복건 지역에 병력을 모아 공격하고 있다며 강서도원수의 지원 요청 내용을 담고 있고, 이에 쿠빌라이는 비교적 후방인 회남서로의 병력을 옮겨 증강시키라고 지시한다.


실제로 송사 본기 기록을 보자면 5월 복주에서 진의중, 장세걸, 문천상, 육수부가 익왕 조시를 황제로 추대하고 복건에 병력을 모으면서 몽골군이 차지한 지역에 대한 공격을 지시하는 내용이 있고, 이어 6월에 강서 방면에 실제로 성과를 거두기 시작하고 있다.


이를 보자면 7월에 있던 몽골군의 대대적인 인사 조치는 이전부터 준비하던 남은 남송 지역에 대한 공격 준비와 남송 잔당 세력의 공격에 대한 반격 차원에서 지휘계통 확립을 위해 이루어진 것 같다.


실제로 7월에는 동문병만 중서좌승이 되고 아라칸은 그대로 참지정사인데, 이는 양절과 복건 지역에 공세를 주도할 인물 둘이 같은 계급이면 지휘계통상 혼선이 일어날 수가 있으므로 동문병을 아라칸보다 높게 승진시킨 것으로 볼 수가 있다.


이외에도 인사조치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이후 남송 영역에 대한 공세를 주도하는 모습이 나타나는데, 가령 참지정사가 된 여사기는 장영실과 함께 9월에 매령을 넘어 광동으로 침공하는 모습이 보이며, 타추 열전에서는 1276년에 타추는 강서도원수江西都元帥가 되어 광동을 평정했다고 나와 있다. 그리고 여사기, 장영실은 이전에 강서도원수로 1275년 강서에 대한 공세를 펼쳤던 이들이다.


그러므로 몽골군이 남송군의 공격에 대대적인 반격은 인사조치가 취해진 7월 이후로 시작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다만 이 반격에서는 강서에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던 문천상에 대해선 조금 빗겨나간 듯한데, 강서도원수부에서 도원수 대신 좌부도원수左副都元帅이던 이항이 문천상의 공세에 대응하는 모습만 보이며 문천상이 독부를 열었던 정주를 1277년 1월에 함락한 뒤 얼마 있지 않아 2월에 전력을 빼내어 수비를 강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렇다면 남송 망명정부가 수립하고 나서 몽골군에 대한 공세를 펼쳐질 때, 몽골군은 7월의 인사조치 이후에야 대처를 했던 것일까? 그 이전에는 송군의 공격에 반응하지 않았던 것일까?


아닌 것 같다.


양절방면에서는 송군이 몽골군을 향해 공격를 펼치자 초동 대응한 인물에 대한 열전의 기록이 있다. 고흥, 소게투, 카라다이.


각기 내용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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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3인물은 모두 양절에 활동했던 내용만 위의 표에 넣었다.


이중 구체적인 시기가 그나마 있는 것은 카라다이로 고흥과 소게투가 언제 어디서 싸웠는지는 열전 내용만 보아서는 알기가 힘들다. 본기? 원사 본기에는 아예 얘기 없음 ㅎ.


앞서 말한 인사 조치가 7월 중에 있어 카라다이의 첫 대응이 인사 조치 이후일 수도 있지만, 7월 언제라고 구체적인 언급이 없어서 위의 표에 같이 넣었다. 다만 고흥과 소게투는 활동범위가 겹치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카라다이는 경원부에 주둔해 정해를 막으며 수세적으로 있다가 나중인 10월에야 온주로 진격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고흥과 소게투는 언제 쯤 송군과 교전했던 것일까.


그 이전에 고흥과 소게투의 활동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두 열전에서는 열전 주인공의 활약만 나올 뿐 다른 이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활동 범위도 겹치고 무주와 구주의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나섰다는 공통점을 보자면 비슷한 시기에 벌어진 일이라고 가늠할 뿐이다.


우선 고흥-1과 소게투-1의 내용을 보자면 둘이 출동한 이유는 구주와 무주의 송군이 봉기 때문이라며 공통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문제는 구주와 무주의 봉기라는 같은 원인을 가지고도 주둔지, 휘하 병력, 지휘계통 등에 차이에 의해 실제로 출동한 시기까지 비슷하리라는 법은 없다.


당시 고흥은 관군총관이고 소게투는 절동 선무사였다.


고흥은 1275년 말부터 있던 임안으로 향한 몽골군의 진격에서 아라칸 휘하 우익군으로 활동했음이 열전을 통해 드러난다. 그리고 위의 표의 양절에서의 활약 뒤에 아라칸을 따라 수왕 조여역과 교전한 내용이 실려 있다. 전과 후 모두 아라칸 밑에서 싸운 것을 보자면, 당시의 고흥도 아라칸 휘하의 장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게투는 위의 동문병 얘기를 하며 나왔듯이 동문병의 보조다. 그렇다면 소게투는 동문병 휘하의 장수라는 의미이다.


문제는 아라칸, 동문병, 고흥, 소게투 모두 이전에 주둔하던 구체적인 지역이 언급되지 않는다. 다만 동문병과 아라칸은 행성 입을 보아야 했던 만큼 행성 중심지인 임안부에 있지 않았을까, 하고 어림짐작만 해본다.


고흥의 경우는 무주와 구주의 봉기에 진압하려고 나서기 이전, 건덕부建德府(엄주嚴州)와 무주婺州의 항복을 받아냈다는 것이 직전의 활략상이다. 만일 고흥이 이곳의 항복을 받아내고 그대로 주둔했다면, 아마 건덕부에 주둔했을 가능성이 있을 것 같다.


소게투의 경우 동문병이 임안에 있을 것 같으니 같이 임안에 있을 수도 있으나, 바얀이 대도로 떠나기 전에 소게투에게 맡긴 직책이 절동 선무사로 아무래도 양절서로인 임안보다는 양절동로 어딘가에 주둔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양절동로 중 치소가 있던 곳이 소흥부紹興府니 소흥부이지 않을까.


소흥부일 개연성은 또 있는데, 이는 아라칸이 동문병과 함께 송군을 토벌하라며 할당된 관할범위를 참고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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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범위를 자세히 보자면 양절동로에서 소흥부는 쏙 빠져 있다.


이는 송군이 소흥부에 공격을 가하지 못했거나, 소흥부에 있던 송군이 봉기하지 못했다는 의미라고 보아도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양절동로 전체가 불타오르는데 소흥부 혼자만 쏙 빠졌을까? 아마 절동 선무사 소게투가 절동의 중심지인 소흥부에 주둔하고 있어서 소흥부를 꽉 장악하고 있던 탓이 아닐까?


만일 고흥이 건덕부(엄주)나 그 인근에 주둔했고, 소게투가 소흥부에 주둔하고 있었다면 구주와 무주의 봉기에 즉각 대응하거나 출동하라고 지시가 떨어질 이유는 충분해 보인다. 건덕부(엄주)는 구주와 무주와 접해 있고 소흥부는 무주와 접해 있으니까. 물론 소게투고 곧장 엄주로 건덕부(엄주)로 향했던 것을 보자면, 소게투가 임안에 있다고 가정해도 이상할 것은 없기도 하다.


이제 고흥-2로 넘어가자. 고흥은 휘하 5천의 군사를 거느리고서 파계破溪까지 가는 동안 7번의 교전을 벌였지만 송군을 제압하지 못하고 40일 간 대치했다.


내가 자주 쓰는 지도에서는 파계가 없어서 구글 지도로 검색하니 복건로 쪽에도 있고 양절 쪽에는 구주, 태주에 있던데, 구주와 무주의 봉기로 고흥이 출동한 것이니 아마 구주 쪽이지 않을까 싶다. 혹 사서에 나온 파계가 고글 지도에 나오지 않는 곳이라고 해도, 고흥이 구주와 무주의 봉기를 진압하려고 간 것이니 어쨌든 구주와 무주 쪽일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고흥은 송군을 제압 못한 것을 볼 때 송군의 규모는 고흥과 비슷하거나 더 많았을 것이다. 송군 또한 고흥을 이기지 못하고 대치만 했기에 압도적으로 송군이 유리한 상태는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40여일을 대치했다는 것이 7번의 교전 후 파계에서 대치했다는 것인지, 아니면 교전 시작부터 뭉뚱그려서 한 번에 서술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건 서로 엇비슷하던 전력의 고흥과 송군의 무게추가 송군에게 기울어진 것을 고흥-3을 통해 알 수가 있다. 서로 7번의 교전으로도 승부를 낼 수 없던 비등한 전력이 갑자기 고흥이 포위되어 돌파를 시도해 퇴각해야 했을 정도로 송군의 전력이 증강된 것이다.


그리고 고흥은 건덕으로 가 또 다른 몽골군과 합류했다고 나와 있다.


그런데 건덕이 어디인가? 1265년 건덕부로 개칭되기 이전 이름이 엄주다. 즉, 소게투-1에서 소게투가 구주와 무주에서 봉기한 송군을 토벌하기 위해 향하던 곳이 바로 고흥이 퇴각하여 지원군과 합류했던 곳과 동일하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고흥이 합류했다는 몽골군이 소게투의 군대를 말하는 것일까? 정황상 그럴 것 같다.


소게투-2를 보자면 소게투가 엄주로 향하던 도중에 송군의 숫자가 불어났다고 되어 있다. 앞서 봉기했던 구주와 무주는 물론 강동동로의 휘주까지. 이 3개 주는 서로 연달아 붙어 있다. 


만일 위의 고흥이 송군과 대치했다는 파계가 구주에 있는 것이 맞다고 한다면, 3개 주의 가운데 있는 구주로 이 연합군이 몰려들어 고흥을 포위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구주와 무주 어딘가에 있었을 터이니 고흥-3에서 고흥을 포위한 송군은 소게투-2에서 엄주를 공격하는 무주, 구주, 휘주 연합군과 동일한 것 같다.


고흥이 포위망을 돌파해 건덕부(엄주)로 도주하니 자연스레 송군도 그 뒤를 쫓아오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고흥-4에서 지원군과 합류해 난계(무주에 위치)에 싸워 3천여 명을 죽여 무주를 탈환했다는 것과, 소게투-3에서 장지부章知府 등 22인을 포획했다는 기록은 소게투와 고흥이 연합하여 구주, 무주, 휘주의 송군을 격파한 것으로 이해할 수가 있다. 이 전투의 여파로 고흥-4에 설명되었듯이 몽골군은 무주를 탈환한 듯하다.


이어지는 고흥-5, 6과 소게투-4, 5의 내용은 전장이 구주로, 고흥과 소게투는 곧장 구주로 간 것 같다. 소게투-4의 매령의 경우, 매령이라는 지명이 한두 곳이 아니지만 소게투-5에서 구주와 무주와 접하는 변경인 용유현을 수복했다는 내용을 보건데 구주 쪽에 있는 매령인 듯하다.


즉 진로검의 송군은 무주를 탈환하고 구주로 진격하는 몽골군을 막기 위해 나섰다가 패해 3천 명이 전사하면서 용유현을 몽골군에게 빼앗긴 것 같다. 소게투와 고흥은 구주성에 대한 공성을 벌인 것으로 보인다. 고흥-5에서 고흥은 구주성에서 송군 500을 죽였다고 되어 있고, 소게투-5는 구주를 공격해 소게투가 여러 병사들을 데리고 성벽을 올라가 함락했다고 되어 있다.


다만 고흥과 소게투의 행적은 뒤의 기록에서 갈린다.


고흥-6은 구주성을 함락시킨 후 아직 수복하지 못한 구주 서쪽에서 싸움을 벌인 고흥의 활약이다. 적산赤山과 진가산陳家山의 정확한 위치는 모르겠는데 강산현江山縣이 있는 것을 보면 구주성과 강산현 사이의 어디겠지 뭐.


이후 고흥 열전은 고흥이 수왕 조여역을 뒤쫓아 민閩(복건)으로 진입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소게투의 경우 소게투-6에서 고흥-6과 달리 구주 서쪽 지역에서 활동했다는 내용 없이 바로 처주에서의 전투와 복건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있다. 소게투가 처주에서 적 700을 죽이고 이후 복건로 건녕부의 송계현과 복건로 복주의 회안현을 점령했다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이 둘의 열전에 실린 이 활약들은 어느 시기에 있던 일들일까.


우선 소게투-6에서 처주를 공격한 것와 이후 건녕부로 진입한 것은 11월의 일일 것이다.


송사 본기에 따르면 11월에 아라칸과 동문병의 군사가 처주로 진입하자 이각이 항복했고, 이후 아라칸의 병사가 건녕부를 공격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소게투의 이름이 드러나 있지 않지만, 소게투의 상관이 동문병과 아라칸인 만큼 대표자의 이름만 적고 소게투의 이름은 생략된 것 같다.


고흥-6에서 구주성을 점령하고 구주 서쪽을 토벌한 것은 9월의 일일 것이다. 고흥-6에서 포로로 잡아 행성으로 보냈다는 인물의 대표로 위복흥이 거론되는데, 송사 본기 9월 기록에 따르면 구주 수장 위복흥이 복성교에 출전하였으나 죽었다고 되어 있다. 다만 고흥 열전에는 포로로 행성에 보내졌다는 위복흥이 송사에서는 죽었다고 되어 있는데, 아마 행성에 보내진 뒤 처형된 것이 아닐까 싶다.


고흥-3, 4와 소게투-3에서 무주, 구주, 휘주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무주를 수복한 것은 8월의 일로 보인다. 송사 본기에 따르면 수왕 조여역은 8월에 무주를 포위했는데, 거의 곧바로 대군이 접근한다는 소식에 포위를 풀고 물러가면서 복건로 남검주에 방어를 준비하라고 지시를 내린다.


이 기록에서 대군은 소게투와 고흥의 군사가 아닐까? 고흥 단독이라기에는 고흥은 초기에 5천으로 일개 만호 정도의 군대만 이끌었던 만큼 대군이라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휘주, 무주, 구주의 연합군이 격파된 이후 무주를 수복했다는 고흥과 소게투 열전의 내용을 생각해보면, 수왕 조여역은 3개 주 연합군이 격파되고 몽골군이 무주를 수복하기 위해 진격하자 위기감을 느끼며 철수하여 후방의 방비를 강화시켰다고 보는 것이 그럴 듯하다.


수왕이 무주를 포위한 것이 갑술일이고 포위를 푼 것이 병자일이다. 이 좆같은 60갑자를 누군가가 만든 킹갓 달력 환산프로그램으로 확인하니까 숫자로 표기하면 갑술인은 음력 8월 12일이고 병자일은 음력 8월 14일로, 8월 중순에 있던 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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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짜에서 고흥-2에 나온 40일을 빼면 7월 극초의 일이 되는데, 이 40일이라는 기간에 고흥이 포위망을 탈출해 소게투의 군대와 합류하고 송군을 격파하는 데에도 시간이 걸릴 것을 고려하면 고흥이 송군의 포위망을 탈출한 것은 아마 6월의 일일 것 같다.


그리고 고흥이 송군과 대치하기 이전 출동하여 송군과 교전하는 것에 걸리는 시간도 고려하자면, 제아무리 느려도 고흥은 6월 중에 송군의 공격태세에 반응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7월의 인사 조치 이전에도 몽골군은 송군의 공세에 대처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소게투의 경우 소게투-2에서 소게투가 출동하여 가던 중 10여일만에 송군의 규모가 불어났다고 되어 있는데, 이 경우에도 수왕 조여역이 무주를 포위하고 포위를 푼 것에 빼고 이것저것 고려하면 아마도 7월 하순 즈음에 출동한 것이 되지 않을까?


가장 처음에 언급했던 몽골군의 대대적인 인사 조치는 7월 중에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7월 병진(23일) 아주가 회서제치사 이정지과 강재를 잡아들인 이후 태주泰州에 병력을 주둔시켰다는 기록 뒤에 나오는데, 즉 7월 하순에 있던 일이다.


그리고 동문병과 아라칸 열전을 보면 둘은 쿠빌라이와 조정의 명령이 떨어지자 남송 망명정부를 토벌하기 위해 행동을 개시했다고 되어 있는데, 위의 인사 조치와 함께 동시에 둘에게 반격 명령이 떨어졌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소게투의 출동 지시는 인사 조치와 반격 명령이 떨어지자 우선 고흥이 열세에 밀려 막지 못한, 임안으로 향하는 군대를 처치하기 위해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몽골군은 6월에도 송군의 공세에 반응하긴 하였으나, 그건 초동조치 수준이고 본격적인 반격은 7월을 기점으로 개시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그럼 이제 양절 방면에서 가장 급이 높은 동문병은 7월 인사 조치와 함께 좌승으로 승진하면서 남송 망명정부를 토벌하러 무엇을 했는지 살펴보자.


동문병 열전에서는 정확한 시각이 역시 기재되어 있지 않다.


동문병은 태주台州에 웅거하던 장세걸을 쫓아 태주로 가자 장세걸이 도망갔다고 되어 있을 뿐 전투에 대한 기록은 없다. 장홍범 열전에서도 태주 토벌에 관한 내용이 있는데, 태주의 배신에 장홍범이 가서 토벌하고 주모자를 죽였다는 내용만 있다.


장홍범은 이전 1275년 말부터 있던 임안 진공에서 동문병의 좌익군 휘하에 있었으므로 이때에도 동문병 아래에 싸웠을 것으로 보이는데, 두 열전에도 전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없는 것으로 보아 특기할 만한 전투는 없던 것이 아닐까 싶다.


동문병 열전은 다음으로 온주溫州로 간 내용이 실려 있다. 장홍범 열전에는 이에 관한 얘기는 없지만, 카라다이 열전에서는 10월에 온주에서 교전한 기록이 실려 있다. 카라다이가 주둔했던 경원부가 태주 바로 북쪽인 것을 고려하면, 적어도 태주 토벌 전후에 동문병 휘하로 들어갔을 공산이 클 것 같다. 그렇다면 동문병은 10월에 온주로 간 것이다.


그렇다면 태주에 간 것은 언제인지가 문제인데, 동문병 밑에서 싸웠던 것 같은 카라다이가 8월에 경원부 정해에서 송군의 공격을 방어한 내용을 보건데 아마 8월 즈음의 일이 아닐까? 이전에 송군의 공세에 대해 재구성하면서 적국수가 수산에서 철수한 것이 8월일 수도 있다고 했는데, 적국수의 철수가 강서에 있던 오준의 패배만 아니라 송군이 모두 밀려가면서 철수한 것 같다고 서술한 적 있다.


이를 적용하면 동문병이 7월 하순에서 8월 중에 경원부를 경유했거나, 혹은 태주를 수복했고 그 비슷한 시기에 적국수가 철수한 것이 아닐까?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비슷한 시기의 일일 것 같다.


동문병이 7월 말~8월 중 정도에 태주를 지나 10월 중에 온주에 갔다고 치고, 동문병 열전에서는 바로 동문병이 복건으로 넘어갔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송사 본기에 따르자면 11월에 동문병과 아라칸의 병사가 처주로 가서 이각의 항복을 받아냈다는 것을 보자면, 동문병은 11월에 처주로 갔다가 이후에 복건으로 진입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바로 복주에 가지 않고 다시 온주에 가서 송군과 교전을 벌였을 것 같다.


송사 본기 기준 11월 갑진(14일)에 수왕 조여역이 반격하라는 명령에 서안瑞安에 갔지만 몽골군에게 패했는데, 이때 조여역 열전을 보면 동문병이 조여역에게 투항을 권유하기 때문이다. 


이제 아라칸의 행로를 추측해보자.


솔직히, 전혀 모르겠다. 시1발.


처음에 아라칸은 임안에 있을 것 같다. 아마도. 동문병이랑 같이 임안에 설치된 행성에서 일한 것 같으니. 문제는 그 이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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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출처마다 나누어 원사 고흥 열전을 A로, 아라칸 열전을 B로, 송사 조여역 열전을 C로, 송사 본기를 D로 임의로 구분하고 재구성해보자.


우선 고흥은 아라칸 휘하에 지휘를 받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B-1에 따르면 남송 망명정부가 공격을 펼치자 아라칸은 명령을 받아 몇 번이고 언급된 지역을 토벌에 나섰다. 이때 수왕 조여역을 조지기 이전에는 공무원 놈들 500명의 항복을 받아냈다고 되어 있다. 그게 끝이다. 수왕과의 전투 이전 아라칸의 행보에 관한 내용은 이게 끝이다.


B-1에서 고흥을 거느렸다는 서술, 이전 1275년 말 임안 진공 당시에 아라칸 휘하의 우익군에 고흥이 있었으며, B-4의 전투 서술에도 고흥이 언급되는 등 고흥은 분명 아라칸의 지휘 아래 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문제는 A의 내용과 소게투 열전에서도 아라칸에 대한 언급이 일절 없어서 아라칸이 어디에 무얼 하고 있는지 알기는 힘드나, A-2와 B-2에 수왕을 쫓아갔다는 내용이 겹치므로 적어도 고흥과 같이 수왕을 쫓아갔다는 것 정도는 짐작해볼 만하다.


그렇다면 아라칸은 고흥 등을 지위해 절동의 서쪽 방면에서 활동하고, 동문병은 반대편인 해안가를 따라 태주-온주를 점령하고서 둘이 처주에 합류한 것일까? 가능성이 있을 법하긴 한데 아라칸이 무얼 했는지에 대한 내용이 워낙 부실해서 불확실할 것 같다.


이제 위 사료 내용에서 수왕과의 전투와 관련해 서로 교차되고 모순이 없는 부분을 살피자.


D의 내용만 보자면 조여역은 아라칸과 고흥 등과 교전 없이 서안을 지키다가 몽골군에게 포위되고, 내부 배신자에 의해 성문이 열리면서 패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똑같이 송사가 출처인 C-3에서는 조여역이 서안으로 간 것만 아니라 역습을 시도하다가 관찰사 이세달이 죽었다는 내용이 있다.


관찰사 이세달이 죽은 것은 A-4와 B-4에서도 모두 교차되는 내용이다. 따라서 아라칸, 고흥 모두 수왕군과 싸운 것 자체는 맞으며, 송사 본기에 따르면 그 위치는 서안이나 그 인근이 되겠다.


또한 C에서는 조여역이 포로로 잡혀 동문병이 항복을 권유하나 처형되었다고 하는데, A와 B에서는 아라칸과 고흥이 수왕을 사로잡고 처형했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이 모순된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애당초 C에서는 아라칸과 고흥이 수왕군과 교전을 벌여 관찰사 이세달 등을 죽인 것 자체가 생략되어 있는 만큼 아라칸의 존재가 생략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수왕군을 격파한 주체가 아라칸이라고 하더라도, 서안을 포위한 몽골군 지휘관에 동문병이 제외되라는 이유는 없다. 또한 아라칸과 동문병 중 지위가 높은 자는 동문병으로, 가장 최고사령관인 동문병의 이름만 거론될 뿐 그 아래는 거론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문제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생략되었을까. 아마도 아라칸과 고흥을 막아선 수왕군의 주요 지휘관은 이세달이고, 수왕 조여역은 서안에 방홍 등과 함께 지키거나 혹은 이세달이 전투를 벌일 때 비교적 후방에 있던 것이 아닐까. 열전 특성상 보통 주인공의 공만 보여주고 과는 서술하지 않으며, 주인공이 관련되지 않은 부분은 생략하는 것이 많으니 가능성이 있을 법하다.


아라칸은 고흥을 거느린 채 동문병과 같이 수왕을 쫓아 아라칸을 주체로 수왕군을 격파하고, 이어 서안을 포위해 함락시켜 수왕과 그 동생과 아들 및 문무관리들을 모조리 처형시켰다는 것이 아마 그럴 듯하게 해석된 것 같다. D-2에서는 수왕군과의 전투 직전에 아라칸가 동문병이 같이 처주로 군사를 이끌었던 것으로 보이는 만큼, 개연성도 충분히 있다.


이제 문제되는 부분을 살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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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문제는 위치가 따로 논다는 것이다.


C, D에서는 원래 C에서는 이안부라고 되어 있는데, 이안부의 예전 이름이 온주고 그 안에 서안이 있는 만큼 둘은 동일하다. 문제는 A와 B다.


A에서는 고흥이 수왕을 쫓아 민, 즉 본건으로 들어갔다고 되어 있다. 그 후 전투에서 다리를 차지하고 수왕군을 격파한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수왕이 패배하고 죽은 곳은 서안이다. 특이하게도 A에는 또 조여역의 이름이 여발與綍로 되어 있다. C, D에서는 與睪, 與檡으로 표기되는데 혼자 따로 논다. 이유는 모르겠다.


B는 더 심각하다. 안복현에 이르자 수왕군과 싸웠다고 되어 있다. 문제는 안복현은 강남동로에 있는 행정구역이라는 것이다. 굳이 안복이라는 당대 지명을 더 찾으면 복건에 안복은장이라는데가 있지만, 아라칸 열전에서는 분명히 “안복현”이라고 되어 있는 만큼 거기는 당연히 아닐 것이다. 애당초 안복은장이라고 무리하게 주장하더라도, C와 D와 나타난 지역과 차이가 있다.


A, B, C 모두 관찰사 이세달이 몽골군에게 죽었다는 공통된 애기를 담고 있어서 다른 사건도 아니라 동일한 사건임을 보여주는데도 수왕군과 싸운 곳이 제각각이다.


B의 지명은 위치가 너무 심각한 차이가 벌이기에 원사다운 오류라고 치고 꺼림칙함을 무시한 채 넘어가보자. 우선 아라칸과 고흥이 언제부터 수왕을 추격했을까.


D-1을 보자면 수왕은 8월에 무주를 공략하다가 철수했을 뿐 어디로 물러갔는지는 제시되지 않는다. 이러한 수왕을 아무리 빨라도 고흥은 9월에 구주를 완전히 평정한 뒤에야 추격했을 것이다. (상단의 내용 참조)


고흥과 같이 수왕을 추격하던 아라칸은 D-2에서 11월에 처주에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리고 이어지는 D-3, 4에서 보이듯이 같은 달에 수왕군을 격파하고 나서 D-5가 말하듯이 바로 복건으로 진입해 건녕부를 공격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라칸은 처주에서 동문병과 같이 공격하다가, D-3에서 수왕이 망명정부의 지시에 반격하려 나선 것을 보고서는 뒤쫓아 격파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고흥은 9월 구주 평정 이후에 바로 수왕을 추격하지 않고 아라칸을 따라 종군하다가 이때에 같이 수왕을 격파한 것일까?


그러나 A-2가 문제가 된다. A-1에서 구주를 평정한 이후 고흥은 민, 즉 복건으로 진입했다. A의 내용만 보자면 고흥은 구주 평정-복건 진입-수왕 격파라는 진행이 된다. 표에는 없지만 A의 뒷내용은 고흥이 복건로의 흥화군을 함락하는 이야기다. 수왕 격파 후에도 복건에서 싸웠다는 것이다.


C, D에서는 분명 절동의 온주 내에서 수왕이 죽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을 따르자면 고흥은 절동(구주)-복건-절동(온주)-복건(흥화)으로 고흥은 와리가리를 했던 것일까?


그런데 아라칸의 부하로 아라칸의 지휘를 받고, 아라칸과 같이 수왕을 쫓았으며, 아라칸과 같이 수왕군을 격파한 고흥이 아라칸이 절동(처주)-절동(서안)-복건(건녕)으로 갔던 것과 별개로 따로 행동해서?


어쩌면 D-1에서 수왕이 철수한 곳이 복건이었을까? 어디로 갔는지는 나오지 않더라도 A-2에서 수왕을 쫓아 복건으로 갔다는 만큼 가능성은 있다.


그렇다고 해도 수왕을 쫓은 아라칸이 A-2에서 처주에 있다가 서안으로 간 것이고, 고흥은 복건으로 있다가 절동으로 가 아라칸과 합류라도 했다는 것은 무리가 있는 설명 같다. 아무리 길어도 3개월이 안 되는 시간 동안 너무 많이 와리가리한 것이 되지 않는가.


또 고흥이 처음에 봉기한 송군을 상대로 데리고 간 병사가 5천인만큼 이때 고흥이 그보다 많은 수의 병사를 지휘한 것 같지는 않은데, 그 정도 병력으로 홀로 방비가 강화된 복건으로 갔다는 것일까? 만약 고흥이 복건으로 가 수왕을 쫓았다면 몽골군이 복건을 공격했다는 내용이 D-5 이전에는 없는 것일까?


모르겠다 시발 ㅎㅎ


B에서 나온 안복현과 A에서 고흥이 복건으로 들어간 이후 수왕군과 교전한 것을 단순 오류라고 치부할지 말지에는 내 근거도 부족하고 지식도 부족하고 사료 해독을 잘못한 것일 수도 있고 애당초 참고한 짱깨위키 원사 본문이 이상한 것일 수도 있고 아 몰라 그냥 내가 부족해서 이건 모르겠다 하고 넘어가야 겠다.


대충 절동 방면에서 몽골군의 초기 대응과 반격은 이제 확실하거나 혹은 그럴 듯하게 재구성되었다 싶은 내용만 정리해보자.


남송 망명정부가 5월에 수립되어 양절, 강서, 광동 방면으로 병사들을 출병시켰다. 이 중 광동을 제외한 나머지는 6~7월부터 거점을 확보하거나 공세를 시작했다.


그중 양절 방면에서는 무주과 구주가 봉기하자 초동 대응으로 고흥이 5천 군사를 이끌고 아마 6월에 토벌하려고 나섰지만, 고흥의 몽골군과 구주와 무주의 송군의 전력이 비슷한지 교착상태가 지속되어 40여일을 대치한다.


그 동안 동문병, 아라칸 등 핵심 사령부는 초기에 특정 대응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추정하자면 조정의 지시가 오기까지 기다렸다고 보아도 될 것 같다.


쿠빌라이와 조정은 7월 하순에 대대적인 인사 조치와 함께 남송 점령지 각지에 있던 몽골군에게 반격을 지시한다. 이중 양절방면에서 동문병은 중서좌승으로 승진하면서 양절 방면에서 가장 급이 높아진 것으로 보아 양절 방면의 총사령관은 동문병일 것 같다.


내려온 지시는 절동 전체를 수복하고 남송 망명정부가 근거지로 자리 잡은 복건을 평정할 것.


아마 이 인사 조치 시기를 기점으로 몽골군이 대대적인 반격을 실시했을 것이다.


한편 7월에 이르는 동안 송군의 공세는 커져서 태주가 배반하여 장세걸이 점거하고, 창국주 등 섬 지역에서 적국수가 지휘하는 송 수군이 경원부를 공격하고 고흥은 휘주, 무주, 구주에 몰려온 송군에게 포위되어 수적 열세에 처해 있다가 포위망을 돌파하고 엄주로 퇴각한다.


8월에 이르면 수왕 조여역이 직접 무주를 포위할 정도로 송군이 기세를 높이지만, 소게투와 합류한 고흥은 반격에 나서 3개 주 연합군이 격파되고 무주를 수복하려고 들자 수왕 조여역은 퇴각하면서 복건에 대한 방어를 강화하라고 지시한다. 이때 조여역은 복건 쪽으로 퇴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창국주 등 섬에 근거하여 경원부를 공격하던 적국수도 이맘때쯤 철수했을 것 같다.


이후 9월~10월까지 몽골군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 서쪽으로는 구주를 수복하고, 동쪽으로는 동문병이 태주와 온주를 점령한다. 이 과정에서 장세걸은 태주에서 물러간다. 이때 서쪽 방면은 아라칸이 총지휘했을 공산이 있으나, 워낙 기록이 적어 확실하지 않다.


11월이 되면 동문병과 아라칸은 같이 처주에 이르러 5월에 남송 망명정부의 명을 받고 출병했던 이각의 항복을 받아냈다. 양절 방면의 전선이 완전히 붕괴하자 남송 망명정부는 수왕 조여역에게 반격을 명하여 온주의 서안에서 역습하나, 관찰사 이세달이 이끌던 3만 군대는 아라칸과 고흥에게 격파된다. 수왕 자신도 서안에 포위되었다가 내부 배신자에 의해 성문이 열리고 시가전 끝에 사로잡혀 처형된다.


이후 같은 달 11월에 아라칸이 건녕부를 공격하 수장을 붙잡고 주변의 소무군이나 남검주의 지사가 도망가는 등 복건의 북부 방어선이 붕괴하면서 몽골군이 복건으로 쇄도하고, 남송 망명정부는 황제 조시를 데리고 바다로 도주하게 된다.


다음은 76년 강서-광동의 대응이나 76~77년 복건에 대한 공세 쓸 생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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