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발라의 대의회장, 아라니온 가웨일의 회고록에서 발췌
제4 장: 새벽이 밝기 전
나는 커다란 회색 말을 탄 채로 내 부관들에게, 그리고 그들의 정예 기병들과 주문사수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옆쪽에서는 내 종자가 갈색 암말을 탄 채로 깃발을 세워 들고 있었다. 내 직속 부대의 상징인 불길을 두른 검이 그려진 깃발이었다. 젊은 엘프의 손 안에서 깃대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깃발을 꽉 잡아라, 꼬마야.” 나는 명령조로 말했다.
종자는 즉시 안장 위에서 자세를 고쳐 잡더니, 깃대를 꽉 움켜쥐었다. “예, 사령관님!” 그가 불안해하며 말했다. “어떤 명이든 받들겠습니다!” 그 얼굴은 변함없이 전방을 향해 있었지만 나는 그 두 눈동자가 날 흘겨보는 걸 볼 수 있었다. 자신을 인정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듯했다. 어떤 명이든 받들겠다라... 물론 그렇겠지. 나는 그가 이전에도 그런 눈빛을 내게 보내는 걸 본 적이 있었다. 젊은 병사가 사령관을 향해 보내는 존경의 시선, 그리고 어쩌면 다른 감정이 조금 실려있었을 수도 있겠지. 만약 내가 리나니일과 함께하는 기쁨을 누리지 못했다면, 그런 아름다운 청년의 관심이 썩 나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그 날이 바로 마법폭발의 날이었으니 그 꼬마가 긴장할 만도 했다. 그때는 자정으로부터 몇 시간 지났을 때였고, 우리 척후병들이 이미 다른 종족들과 협력하여 오크들을 은신처에서 끌어내고 있었을 때였다. 우리는 주요 공격 전선 너머로 전진했다. 우리는 대폭발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이곳에서 놈들을 포위할 것이었다. 주변에는 창날과 검, 갑옷들이 온통 늘어서 있었고 하나같이 별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야영지 내의 전투 마법사 부대는 자주색 로브를 입고 있었고, 빛나는 지팡이를 하늘 높이 들고 있었다. 실로 장관이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사방이 탁 트인 전장에서 이 대륙의 오크들 전부와 마주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마법폭발이 실패한다면 우리 모두는 크나큰 피해를 입게 될 것이었다.
나는 주변이 한눈에 들어오는 낮은 언덕에 진을 친 다음, 부하들을 남겨 두고 카르'크룰의 병력들을 찾으러 북쪽으로 갔다. 말을 타고 그들의 주둔지를 향해 달려나가는 동안, 나는 동쪽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발견했다. 두꺼운 회색 기둥 네 개가 새벽이 밝기 전의 희미한 빛 속에서 우뚝 서있었다. 분명 우리의 양동작전에 분노한 오크들에게 약탈당하고 불살라진 마을들일 것이다. 마을의 주민들은 진작 대피시켜 두었지만, 이 전투가 끝난 뒤 그들이 돌아갈 곳은 없을 것이었다. 대륙 전체를 아우르는 전쟁이라는 판에서 조그만 희생을 치렀을 뿐이었다.
새벽의 푸르스름한 연무 속에서 다섯 번째 연기가 치솟았고, 문득 다섯 개의 연기 기둥들이 마치 온 세상에 뻗친 악마의 손아귀처럼 보였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 손톱으로 땅을 헤집어 그 아래의 살점을 찢어내려는 손아귀처럼.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가, 모든 문명이 마주하고 있는 오크의 위협이었다. 우리는 그 위협을 막아낼 수 있다면 그 어떤 대가든 치를 수 있을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카르'크룰의 야영지에 도착하자 리나니일이 몸소 나를 맞이해 주었다. 그녀의 미소는 따뜻해 보였지만, 그녀의 눈동자를 보니 그녀는 그 날 벌어질 대사건이 기대되어서 더욱 흥분하고 있었던 걸 알 수 있었다. “몇 시간만 지나면,” 그녀는 참을성 없는 어린아이처럼 속삭였다. “정말 환상적일 거예요!”
내가 카르'크룰의 급조 천막으로 들어가자, 그 안에는 네이라와 카르'크룰의 고위 마법사들, 그리고 다른 인간 왕국들의 대표들이 있었다. 나는 투르텔이 천막에 없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북방 도시에서 백성들과 함께 지내고 있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최전선에 서지 않는 이유는 비겁해서도, 늙어서도 아니었다. 그 이유는 그의 아내가 오크들에게 살해당한 이후, 스스로의 분노에 집어삼켜져 아군과 적을 가리지 않고 마구 파괴하지 않도록 자제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들리는 바에 따르면 그는 가끔씩 도시를 홀로 떠나 여행을 하곤 했다는데, 그럴 때마다 그는 분노에 차서 실로 맹렬한 폭풍을 몰고 다녔다고 한다. 오크들은 "북방의 폭풍" 투르텔이 온다는 소문만 들어도 겁을 집어먹고 벌벌 떨곤 했다.
네이라와 리나니일이 카르'크룰의 병력을 지휘했고, 카르'크룰 마도사들의 굳은 표정에서 그 날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대응할 준비가 되어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네이라는 불안한 것 같아 보였고, 그 눈동자에는 의심의 빛이 역력했다.
“네이라 양이 좀 불편한 것 같은데?” 나는 리나니일에게 속삭였다.
“바보 같은 꿈 때문에요.” 그녀는 냉랭하게 말했다.
네이라가 곧장 쏘아보았다. “그건 그냥 꿈이 아니라고!” 그녀가 외쳤다. “불길한 징조라고 했잖아!” 그녀는 내 쪽으로 돌아보며 애원하는 눈빛을 보냈다. “제 말을 믿으셔야 해요, 아라니온. 오늘 무엇인가가 끔찍하게 잘못될 거예요. 어젯밤에 꿈속에서 정말 끔찍한 광경을 보았는데, 마치 오래 전의 기억을 되새기는 것 같았어요. 유리와 은, 그리고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도시가 불타고 있었어요. 수천 명 - 아니, 수만 명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고, 젊은이고 노인이고 할 것 없이 모두가 죽어가고 있었다구요. 그러자 하늘에 떠다니던 도시가 땅으로 떨어져 산산조각나고 드넓은 대지를 갈랐어요. 도시들은 그것 말고도 더 있었는데, 거기서는 보랏빛 빛기둥들이 솟아올랐고 그 기둥들은 코를 찌르는 악취와 살점이 불타는 냄새를 풍기면서 춤을 추고 있었어요. 온 사방이 죽음으로 가득 찼었다구요! 우리가 결코 본 적이 없는 그런 죽음으로."
“믿어 주세요, 그건 단순한 꿈이 아니에요. 그건... 계시가 틀림없어요. 우리가 손을 댄 위험한 힘에 얽힌 먼 옛날의 이야기를 보여 주어서, 우리에게 경고한 거라구요. 우린 당장 멈춰야 해요!”
네이라가 열변을 토하자 리나니일은 짜증을 내면서 발끝으로 땅을 툭툭 차고 있었지만, 나는 다른 지도자들의 얼굴에 그림자가 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때 나는 네이라를 진정시켜야 한다는 걸 깨달았고,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눈을 조용히 응시하며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댔다.
“그냥 꿈이 아닐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이고, 지나간 시대 전체를 통틀어서도 오늘은 심판의 날로 기억될 겁니다. 오크라는 재앙 때문에 우리의 문명은 위험에 처해 있고, 우리의 삶 역시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우리는 칼날 위를 걷고 있습니다. 이 세계는 그 칼날 위에서 균형을 잡고 있고, 잘못된 흔들림 한 번이 우리를 어둠과 절망 속으로 영영 몰아넣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행동이 그것을 결정할 겁니다. 그래요, 아가씨께서는 경고를 받았고, 아주 뚜렷한 계시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의 손에는 운명의 고삐가 쥐어져 있고, 오직 흔들리지 않는 지도자만이 다가올 파멸의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해 줄 겁니다. 네이라 아가씨, 그 흔들리지 않는 지도자가 되어 주시겠습니까?”
그녀는 나를 희망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가락은 마치 나에게서 힘을 빨아내려는 듯 나의 손목을 꽉 쥐었다. 그러고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해요, 아라니온. 저는 그저... 아뇨, 저도 각오할게요.”
나는 내 말을 듣고 완전히 넋을 잃은 사람들에게로 몸을 돌렸다. 너무 오래 생각하게 두면 문제만 더 일어날 게 뻔했고, 나는 그들이 당장 해야 할 일을 하게 만들어야 했다. “이제 시작입니다!” 나는 그렇게 소리쳤다. “병사들을 소집하고 진군 준비를 하십시오. 우리는 천천히, 또 끊임없이 나아갈 것이고, 신중하게 전투에 임할 것이며, 불길과 분노를 넘어서 마침내 자유를 되찾고 승리를 만끽할 것입니다. 오늘은 영원토록 역사에 남을 것입니다! 오늘은 모든 종족들을 위한 새 시대의 첫날이 될 것입니다! 오늘이 바로 마법폭발의 날입니다!”
그들은 모두 환호성을 내지르며 각자 부대를 지휘하기 위해 달려나갔다. 지도자의 사명을 되새기고 용기를 얻은 것이 틀림없었다. 네이라는 그녀 휘하의 마법사들에게로 갔고, 천막에는 나 혼자 남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천막 밖으로 나가다가 리나니일에게 기습당했다. 그녀는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나를 빈 천막 안으로 끌고 갔다.
“지도자 감이 아니라면서요!” 그녀는 감탄하면서 활짝 웃었다. “이제까지 들었던 것들 중 가장 지도자다운 연설이었어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겸손하게 미소지었다. “할 말을 한 것뿐이야.”
그러자 그녀가 내게 바짝 다가왔다. 그녀의 얼굴에 갑자기 불안한 빛이 떠올랐다. “그냥 꿈이었겠죠? 그렇죠?” 나는 그녀가 이제껏 허세와 장난기로 엄청난 두려움을 숨기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나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녀의 손가락은 안심시켜 주길 바라며 덜덜 떨렸다.
“그냥 꿈이야.” 나는 거짓말했다. 오늘날까지도 내 모든 것을 바쳐 대가를 치러 왔던 거짓말을 했다. “다 잘 될 거야.” 나는 그녀를 끌어당겨서 팔로 그녀의 가냘픈 몸을 안았다. 그녀가 나를 꽉 잡았다. 그녀는 아직도 떨고 있었다.
“고마워요, 아라니온.” 그녀가 속삭였다. 그러고는 얼굴을 들고 내게 입을 맞추었다. 그녀가 내게 해 주었던 것들 중 가장 부드럽고, 가장 섬세한 키스였다. 마지막 키스이기도 했다.
그 후 우리는 갈라졌고 나는 말에 올라타 내 부하들에게 돌아가기 위한 외로운 여행을 시작했다. 내 심장은 고막을 찢는 전쟁의 북소리처럼 쿵쿵대고 있었고 네이라가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서 계속 울리고 있었다. 그 말들이 그날 아침 내가 꾸었던, 하지만 직전까지 가슴 한구석에 잠들어 있던 꿈을 떠올리게 해 주었다. 나는 내 침대에 누워 있었고, 내 위에는 빛과 공기로 이루어진 어떤 형체가 떠다니고 있었는데 내가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생명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팔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기다란 촉수가 붙어 있었고, 흩날리는 로브가 천천히 그 위에 살랑거렸다. 머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조그만 혹만 있었지만, 나는 그 생명체가 날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생명체는 사악하고 위험한 것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려는 것처럼 기다란 촉수를 내게 뻗었다. 끔찍하고 불길한 예감이 나를 덮쳐왔다. 세상 그 누구도 본 적이 없는 파멸이 지금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이. 촉수의 끝이 내 이마에 닿자 눈앞이 검게 변했다.
그건 그저 꿈이었을까? 이상한 예지 비슷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내게 직접 경고하려 했던 진짜 유령이었을까? 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마법폭발의 때가 다가오고 있었고, 의심 같은 걸 할 때가 아니었다. 나는 내 운명을 향해 박차를 가했다.
댓글 영역
획득법
① NFT 발행
작성한 게시물을 NFT로 발행하면 일주일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최초 1회)
② NFT 구매
다른 이용자의 NFT를 구매하면 한 달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구매 시마다 갱신)
사용법
디시콘에서지갑연결시 바로 사용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