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人の一生は重荷を負て遠き道をゆくがごとし。 いそぐべからず。(사람의 인생은 짐을 짊어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 서두를 필요가 없다.)」
- 徳川家康 (도쿠가와 이에야스) -
근갤러들은 클래식이란 단어를 들으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고전적인 음악과 화풍? 아니면 고풍스럽고 우아한 교양인들의 모습이 떠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클래식은 '시간을 초월해 존재하는 특정 분야의 완전한 형태'를 의미한다.
우리가 흔히 클래식 음악이라 부르는 음악들도 그 형태가 이미 바흐와 베토벤에 의해 완성되었고, 현재의 클래식 음악, 나아가 현대의 모든 음악들은 이것의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클래식을 클래식이라 부르는 것이다. 음악계에 도는 우스갯소리로, 바흐와 베토벤의 작품들만 타임캡슐에 묻고 음악을 모조리 없어버린다 해도 이 타임캡슐만 무사하다면 현대의 음악들을 복원하는 건 시간 문제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다.
바흐와 베토벤, 더불어 이 둘에게 영향을 미친 당대의 무수한 음악가들은 이미 죽고 그 흔적조차 없지만, 이들의 작품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절대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것이 이른바 클래식이라는 것이다. 죽어서도, 사라져서도 영원히 완전한 형태로서 특정 분야에 자리매김하는 것. 따라서 클래식으로서 인정받는다는 것은 대단한 자질을 갖춰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바흐와 베토벤이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그 동안 쌓인 유럽의 음악적 지식들이 집대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활약할 수 있었던 것처럼, 클래식을 창조하기 위해선 문화적 토양 또한 대단히 중요하다 할 수 있다. 유럽 같은 경우는 로마 시대와 중세를 거쳐 음(音)을 수학으로 표현하려는 시도와 신께 찬양을 드리기 위한 음악 등이 있었기 때문에 클래식 음악이 유럽에서 탄생한 것이다. 바흐가 인도에서 태어나고, 베토벤이 마다가스카르에서 태어났다면 그저 그런 음악가로 역사에 기록조차 되지 못한 채 죽었을 것이다.

창작의 영역 전반적인 데에 있어서 정형화된 이미지들이 있다. 이들은 주로 실존했던 특정 문화권을 바탕으로 하는데, 기본적으로 모든 창작은 현실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드래곤과 맞서 싸우는 기사, 이교도를 처형하는 십자군, 피라미드를 쌓아 올리는 파라오, 지하드를 펼치는 무슬림 전사들 등등 이른바 창작물들의 '단골 소재'들이다. 이들은 비록 오래 전에 사라졌지만 지금도 여러 창작물들의 단골 소재로서 활약하는 '클래식'들이다. 이들이 지금까지 문화적으로 살아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재밌으니까'. 지금껏 지구 상엔 무수히 많은 문화와 문명이 있었고, 창작자들도 이것저것 시도해 봤으나, 여러 번 써먹어도 계속 재밌는 소재들은 몇 개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한때 유행했으나 곧바로 재미가 고갈되고 사라지는 컨텐츠들도 무수히 많다. 당장 근갤러들이 극도로 혐오하는 조선의 국악도 당대엔 최신 유행(물론 조선 기준으로)에 속하는 음악이었다. 그러나 지금 와선 어떤가? 다른 나라는 고사하고 한국 내에서조차 국악을 '즐기는' 한국인은 없다. 국악을 생업으로 삼고 연구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이들은 어디까지나 문화 보존(이걸 문화라고 부를 수 있다면야)의 측면에서 일할 뿐, 순수하게 즐긴다고 하기 힘들다. 당장 평생을 판소리만 하고 살아온 소리꾼들도 남은 인생 동안 판소리만 듣고 살라고 하면 질색을 할 게 뻔하다.
국악은 사실상 조선의 멸망과 함께 끝난 장르이나, 유물을 박물관에 보관하듯 현대에 강제로 유지시킬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조선 국악은 클래식이 아니다. 시간을 초월해 존재하는 완전한 형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국악이 클래식이라면, 현대인 남녀노소가 국악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으며 빠져들어야 한다.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를 듣고 감동을 받을 순 있어도, 반면 춘향가 완창을 듣고 감명을 받기는커녕, 공연이 끝날 때까지 깨어 있는 사람도 없다.

그렇다면 일본 문화는 클래식인가?
그렇다. 일본 문화는 19세기부터 시간을 초월해 세계 각지에서 끊임없이 차용되면서, 인류의 창의력 속에서 영원히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이유로 일본이 멸망하고 일본인들이 모두 사라진다면 일본 문화도 지구 상에서 함께 사라질까?
그렇지 않다. 일본과 일본인들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일본 문화는 계속 남아 있을 것이다.

일본인이 사라져도, 사무라이는 계속해서 매체에 등장할 것이며

일본이 멸망해도, 사이버펑크 장르에는 일본어 간판과 광고들이 등장할 것이다.
진정한 클래식은 그 원본이 사라져도 영속된다. 만일 DC 코믹스가 모종의 이유로 부도가 난다고 할지라도, DC 코믹스의 캐릭터인 슈퍼맨은 여전히 특정 캐릭터의 의미를 뛰어넘어 슈퍼 히어로 전반에 대한 대명사로서, 또한 상징으로서 계속해서 기능할 것이다.
일본 문화도 마찬가지다. 일본 문화는 이미 특정 문명권의 문화를 뛰어 넘어 상징이 되었다.

반면 한국 문화는 어떤가? 강남스타일? 방탄소년단?
물론 이들은 성공한 한국 문화의 예이다. 허나 클래식은 아니다. 당장 한국이 멸망하고 한국인이 모두 사라진다고 가정해 보자. 이렇게 되면 싸이와 방탄소년단도 사라질 것이다.
사라진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선 이들을 기억하는 외국인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10년, 20년이 지난 후엔? 과연 100년이 지난 후에도 강남스타일이 지금처럼 기억될까? 150년 뒤에도 방탄소년단은 여전히 인기 있는 보이 밴드로서 끊임없이 차용될까?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방탄소년단이 사라지고, 사람들이 이들을 추억하는 시간보다, 닌텐도가 망하고 사람들이 포켓몬을 추억하는 시간이 훨씬 길 것이다. 이게 클래식과 그렇지 않은 것과의 차이다.

그렇다면 일본 문화는 어떻게 클래식이 되었나? 그리고 한국 문화는 왜 클래식이 될 수 없나?
답은 간단하게 '문화의 질적 차이'라 할 수 있다.
근갤에서 소위 시정잡배라 부르는 것이 한국 문화의 본질이자 전부로서, 생존을 위해서라면 땅바닥에도 구르고 명예를 헌신짝처럼 내다 버리며 약속을 농담보다도 우습게 아는 자들이 한국인이다. 이런 자들의 문화는 결코 매력적일 수 없다.
서양과 일본의 문화가 매력적인 것도 같은 이치다. 서양과 일본의 사람들은 수치를 죽음보다도 괴로워했으며, 약속은 목숨을 잃어 가는 순간까지 지키려 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겠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말이다.
한국인의 시선으로 보자면 때로는 바보 같아 보이기도 하는 것이 이들이다. 유럽에선 사소한 욕을 들었다고 결투를 하다 목숨을 잃는 일이 무수히 많았고, 사무라이들은 자그마한 모욕도 견디질 못해 상대방을 죽이거나 자결하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하기도 했다. 이들이 무지해서 이런 삶을 산 것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상대방을 존중하며, 계급의 차이는 있되 항상 관계는 1대1로 맺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는 이들에겐, 이러한 1대1의 관계, 상대방과 내가 맺는 기본적인 존중이 깨지는 것이 죽음보다도 불쾌했던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상황이 고착된다면 자기는 넘어갈지언정, 자신의 가족과 친구들이 이런 깨진 관계 속에서 살아갈 것이 불쾌하기도 했을 것이다. 이들은 목숨보다도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던 사람들이다.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이, 목숨을 바쳐 작품을 만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뻔한 일 아닌가.
반면 살기 위해서라면 흙바닥에 납작 엎드리고 자신의 가족들조차 가져다 바치는 것이 습관화된 조선인들이 만든 작품이면 뻔하지 않겠는가.
결국 사람이 만든 문화를 사람이 알아보는 법이다.
조선인들은 사람이 아니므로, 사람들에게 조선 문화가 클래식으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처사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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