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받겠어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와버렸어.
마치 아주 오랫동안 얹혀있던 음식을 토해낸 것처럼 홀가분하더라.
어디서부터 잘못 된걸까, 그런 고민을 하면서 집으로 돌아왔어.
샤워기 물을 맞으면서 옷을 벗었어. 왜, 다들 엄청 지쳤을 때 그렇게 하잖아.
머리를 말리고 차를 한잔 내려서 노트북 앞에 앉은 지금, 어떻게든 너에게 연락을 시도하다가
여기에 글을 적게 됐어.
첫 시작은 며칠 전에 있었던 워크샵이었던 것 같아.
사원들을 대상으로 해외 기업의 성공 사례와 배울점 같은 걸 가르쳐 주는 자리였어.
그토록 바라던 직장 생활이었고 무료한 반복마저 달가울 줄 알았는데
막상 그게 내 삶이 되고 나니까 꼭 그렇지도 않더라.
그런 회의감에 빠져 듣는 둥 마는 둥 자리에 앉아 있는데
강사분이 성공 사례로 우버를 소개해주더라. 너도 알지? 외국에서 유명한 택시 어플리케이션 있잖아.
지금 생각해봐도 정말 바보같은데, 나 그 순간에 '우버디아'를 떠올린거 있지.
그때 디아블로는 커녕 '게임'을 생각한 사람도 나밖에 없었을 거야.
일상의 반복에 점점 지쳐가는 중이어서 그런지, 예전 생활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디아블로를 하고싶은 욕구가 미칠듯이 솟아났어.
일주일에 꼭 한 번은 토익 수업 빠지고 피시방 가고, 밤에 부모님 잠드시면 몰래 거실로 나와서 또 앵벌하고.
아직도 피시방에서 날 쳐다보던 시선이 기억나.
지금이야 여자들도 피시방에 많이 가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20대 여자가 낮에 피시방에 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거든.
게다가 디아블로2를 하고 앉아 있었으니. 안 쳐다보는게 이상할 정도였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공책에 낙서를 하다가, 너 생각이 났어.
너는 지금쯤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친구 목록에서 네 이름을 찾아 봤어.
워크샵 기간동안 연락이 잘 안 될거라고 그 사람한테 거짓말을 한게 좀 찔리긴 했지만 말이야.
여전히 프사도 배경도 상태 메시지도 없이, 달랑 이름 하나만 그 자리에 있더라.
너랑 헤어진 이후로 몇 달 동안은 자주 확인해보고 그랬는데 계속 변화가 없는 걸 알고 안 눌러본지도 꽤 됐었거든.
네 이름 세 글자는 늘 거기에 있었는데 되게 오랜만에 만난 것처럼 반갑더라.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느라 2박 3일 내내 집중이 되질 않았어.
아무것도 얻지 못 하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그 사람을 만나러 가야했어.
더 이상 무의미하게 시간 낭비하지 말고 좋은 직장, 좋은 사람을 찾으라는 아버지 말씀 때문에 만나게 된 그 사람.
내가 좋아했던 게임도, 내가 좋아했던 사람도 모두 포기하고 아버지 뜻대로 새롭게 살기 시작했던 내 인생의 첫 단추.
피곤한 몸을 이끌고 그 사람 회사 근처로 갔어.
일이 바쁘면 내일 만나면 되는데, 하루라도 더 빨리 보고싶다고 그러더라.
그 사람이 날 얼마나 좋아하는지 느껴져서, 그래서 더 힘들었던 것 같아.
그 사람, 너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으니 모르겠지.
너랑 헤어지고 1년 정도 뒤에 만나게 된 남자야.
아버지 대학교 선배의 아들인데, 돈도 많고 직장도 번듯하고 정말 괜찮은 사람이야.
내가 취직을 하자마자 아버지는 기다리셨다는 듯이 그 사람을 내게 소개시켜 주셨고, 우리는 양가 부모님의 기대 속에 만나기 시작했어.
이상하면 어떡할까 걱정했는데.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어.
항상 친절하고, 나에게 모든 걸 다 해줄것만 같은 그런 사람이었어.
나이가 조금 많지만, 그런건 크게 신경이 안쓰일 정도로 나한테 너무 잘해줬어.
어느 새 과거형으로 쓰고있네. 지금도 계속 전화가 울려. 조만간 아버지에게도 전화가 오겠지.
그래. 그 사람의 단점은 이런거야. 자신의 의도를 절대로 감추지 않는다는 것.
그동안 직장 생활에만 몰두한 남자라 결혼, 연애에 대해선 아무 생각이 없었대.
어느 정도 지위에 올라 정신을 차리고 보니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주변 소개는 계속 마음에 들지 않았었나봐.
그러던 도중 아버지의 소개로 나를 만나게 되었는데, 내가 꽤 마음에 들었었나봐.
그 사람 부모님도 내 성격이 마음에 든다고 좋아 하셨고.
처음엔 나도 그저 친절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점점 그 마음이 보이기 시작했어.
나는 '결혼할 사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구나.
마치 우리가 부부가 된 미래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온 사람처럼
그 사람은 모든 행동에 전부 확신이 차 있었어.
아무래도 양가 부모님이 다 만족해하셨기 때문이었겠지.
그리고 뭐랄까. 이 사람을 놓치면 끝이다. 하는 그런 조급함이 계속 보였어.
점점 그런게 눈에 보일때 쯤, 그 사람도 내 반응을 의식하기 시작했어.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았는지, 내 마음을 얻기 위해 이상한 노력을 하기 시작했어.
자기가 여기서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 이 선물은 얼마에 산 건지. 얼마나 중요한 일을 취소하고 나를 만나러 왔는지.
날 만날 때마다. 나에게 무언가를 줄 때마다.
계속해서 자신이 얼만큼을 희생하는지 강조하는데, 그게 너무 눈에 다 보이는거야.
봐라. 나는 널 위해 이렇게까지 한다. 그만큼 너는 내게 중요하다. 너는 내 아내가 되어야 한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나에게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는 것 같았어.
집에서 쉬지도 못 하고 그 사람을 만나러 갔으니
나도 좀 예민해졌던 것 같아.
"내일 너무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 원래 저녁까지 잔업 해야하는데, 제가 그냥 나왔어요. 민현씨 보고싶어서요. 혼자 빠져 나오는데 부장님이 엄청 눈치주는거 있죠?"
"고마워요. 그렇게까지 안해줘도 되는데."
"아, 뭐야. 민현씨는 나 안 보고 싶었어요?"
"저도 보고싶었어요."
그 사람 회사 근처에 정말 근사한 식당이 있어. 오늘도 거기에 갔었는데. 그 비싸고 맛있는 음식들이 전혀 맛있게 느껴지지 않았어.
음식을 먹는다기 보단 삼키는 느낌이었달까.
내일 회의가 얼마나 중요한 건지. 자기가 나랑 잠시 함께하는 이 시간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그런 이야기가 또 길게 이어졌어.
평소에는 잘 웃고 넘겼는데, 몸이 지쳐서 그랬는지 정말 더는 들을 수가 없더라.
그때 그 남자가 자기 서류 가방에서 짙은 남색의 케이스를 꺼냈어.
딱 봐도 고급스러운 목걸이나 만년필 같은 게 담겨있을 것만 같았지.
"민현씨. 선물이에요. 워크샵 다녀오느라 너무 수고 많았어요."
고마워요. 원래 더 길게 말했어야 하는데. 그 사람의 이야기에 너무 지쳤는지 퉁명스럽게 말해버렸어.
예상대로 케이스 안엔 목걸이가 들어있었어.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 지 알아?
그 사람 입에서 그 목걸이를 사기 위해 자신이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그런 이야기가 나오지 않기를 정말 간절히 바랐어.
굉장히 비싼 목걸이었나봐. 무슨 재질로 만들어졌고 자기가 어떻게 구했으며 원래 가격은 얼마인데 어떻게 싸게 사게 되었는지 까지.
마치 내 예상을 신이 조롱하는 것처럼, 그 사람은 평소보다 훨씬 더 길고 장황하게 그런 말들을 테이블 위에 쏟아내기 시작했어.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해버렸어.
- 下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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