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프랑스가 떠난 자리를 미국이 차지한 남베트남에서는 어떤 사태가 일어났을까?
미국이 발탁한 고 딘 디엠은 유권자보다 투표자가 많았던(140%가 또..)선거에서 98%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으로 들어앉았는데,
남 베트남을 철저한 반공국가로 만들기 위해 불철주야 동분서주한 결과, 남 베트남 정권의 멸망을 재촉함으로써 역설적이지만 베트남의 해방에 공헌했다.
그는 '칸라오'라는 5인조 1조 테러조직을 만들어 정부. 군. 야당. 사회단체 각 분야에 침투시켜 사찰. 음모. 테러를 감행했다.
카톨릭 교도로 구성된 이 조직은 특히 불교 탄압으로 악명을 드높였다.
디엠은 또한 치안 유지법을 제정하여 모든 형태의 반정부운동을 무차별 탄압했다.
디엠 정부는 46만 헥타르의 토지를 몰수하고 프랑스인 소유 25만 헥타르를 돌려 받았는데 그중 25만 헥타르만 농민에게 분배하고 나머지는 지주에게 넘겨주었다.
그들은 게릴라 지역을 점령하면 빈농의 토지를 다시 빼앗아 지주에게 돌려주는 '뒤집힌 토지개혁'을 실시했기 때문에 농민들의 저주를 받았다.
장교들은 군 예산을 착복했고 관리들은 탈세를 눈감아준 대가로 재산을 모았다.
이 모든 것이 장개석 정권 말기와 비슷했다.
더욱이 디엠 군대 장교들은 대부분 프랑스 식민정부에 복무한 경력을 가진 매국노들이어서 민중의 지지를 받을 수가 없었다.
디엠은 1958년부터 농촌에서 일기 시작한 무장 게릴라 활동을 말살하기 위하여 9천여 군데 '전략촌'을 건설하여 농민을 강제로 집단 수용했다.
그러나 정든 집에서 끌려 나와 포로수용소 같은 전략촌에 수용된 농민들은 더욱 디엠 정부를 혐오하게 되었고, 그래서 애써 만든 전략촌은 농민들이나 '베트콩'이 대부분 파괴해 버렸다.
더욱이 베트민 병사로서 프랑스군과 싸우다가 제네바협정 후 고향으로 돌아온 6천여 명을 색출하기 위해 디엠은 농촌지역에서 대대적인 군사작전을 감행했다.
이 같은 디엠 정부의 무능한 부패, 전횡과 탄압에 항거하여 농촌에서는 무장투쟁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방어와 자위를 위한 자발적 행동이었다.
디엠과 미국 정부는 그들을 '베트콩(베트남 코뮤니스트)'이라 했다. 하지만 그들은 대개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디엠 군대와 미군한테서 빼앗은 총으로 무장했고 붉은 깃발이 아니라 나름의 다양한 깃발을 들었으며, '인터내셔널'이 아니라 애국가를 불렀다.
무장투쟁이 점점 확산되어간 1960년, 마침내 남베트남
혁명세력은 '남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결성하여 전면적인 무장투쟁에 나섰다.
초기 해방전선의 주력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진보적인 지식인과 불교 및 소수 종교단체, 산악의 소수민족이었으며, 해방구에서 토지개혁을 실시하고 노동조합을 끌어들임으로써 그 사회적 지반을 넓혀 나갔다.
심지어 디엠 정부의 공무원과 군대 내부에서까지 많은 협력자를 확보했다.
해방전선은 중국 홍군이 그랬던 것처럼 세계 전쟁 사에서 일찍이 찾아볼 수 없는 여러가지 전술을 사용하여 디엠 정부를 위기에 몰아넣었다.
해방전선은 몇 년 안에 남 베트남의 3분의 2를 장악하고 세금을 걷는 '실질적인 정부'로 성장했다.
이리하여 '베트남의 이승만' 고 딘 디엠이 미국의 신뢰를 잃자 63년 11월 돈 반 민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빼앗았다.
그러나 민 역시 불과 2개월만에 또 다른 쿠데타로 무너졌다.
(공익이 공익이 뻐스를 20번이나~ 갈아타네)
이 같은 군부 쿠데타는 미군이 패주하기까지 몇 번이나 반복되어 구엔 반 티우 정권에서 그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한편 미국은 베트남 주둔 병력을 계속 증강하였다. 59년에 2천 명이던 미군은 62년에 8천, 64년에 3만으로 급증했다.
그리고 남 베트남 정규군은 17만, 경찰은 9만으로 늘어났다.
미군은 1961년 10월부터 1년간 해방전선이
장악한 마을을 5천 번도 넘게 공습했다.
적어도 남 베트남에 관한 한 미국은 통킹만사건 이전에 이미 명백한 전쟁행위를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진보적 정치가로서 미국 국민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존 F. 케네디는 의원 시절에는 베트남 개입을 반대했지만, 대통령이 되고부터 베트남에 대해 매우 반동적인 침략정책을 실시했다.
그리고 63년 그가 암살된 대통령직을 승계한 존슨은
이를 더한층 노골화하였다.
베트남에서 전면전을 전개하면서 미국 정부는 이를 '북 베트남의 침략으로부터 남 베트남의 민주주의와 자결권을 수호하기 위한 정의로운 전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북 베트남 325사단이 남하한 시점이 미군 전투부대가 군사작전을 진행한 뒤의 일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에는 눈을 감았다.
(이런 막장 나라를 '수호'할만할 가치가 있을까?)
더욱이 남 베트남에 수립되었던 바오 다이 정권과 군사정권이 과연 보호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민주주의를 실시하는 독립주권국가인지조차 의심스러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으로 참가했던 서방국가들도 이번에는 개입을 거절했다.
따라서 미국은
단독으로 개입할 수밖에 없었으며 한국처럼 미국의 대외정책을 무조건 추종하는 나라들만 병력을 파견했다.
전세계는 숨을 죽이고 이 전쟁을 지켜보았다. 2차대전과 한국전쟁에서 위력을 과시하였고, 그 이후 발전을 거듭한 최신형 무기를 가진 세계 최강의 군대가 인구 3천만의 조그만 민족을 목 졸라 죽이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일 뿐 미국의 승리는 불을 보듯 뻔했다.
그러나 사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미 백 년씩이나 제국주의 군대를 맞아 고난에 찬 투쟁을 전개해 온 베트남 민중은 자기 땅에서 벌이는 저항전쟁을 필승으로 이끌 원칙과 방법을 완벽하게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베트남 민중은 세 개의 돌팔매로 미국을 쓰러뜨렸다. 무장투쟁과 정치투쟁, 그리고 적군 설득공작이 그것이다.
그들은 이 셋을 교묘하게 결합하여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을 폐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50만 미군은 5만 한국군과 뉴질랜드. 호주 군대에다 50만 남 베트남군까지 거느리고 베트남으로 진군했다.
그들은 B52 폭격기로 북베트남에 융단폭격을 가하여 하노이 정부가 휴전기간 동안 피땀 흘려 건설한
보잘것없는 공업시설마저 잿더미로 만들었다.
하노이를 비롯한 하이퐁, 남딘 등 북 베트남 경제 중심지는 '석기시대'로 돌아갔으며 민간시설과 학교,교회, 병원까지도 빠짐없이 공습을 당했다.
미군 비행기는 민간인에게 특히 큰 피해를 입히는 네이팜탄을 대량 투하했으며, 게릴라 근거지를 말살하기 위해 살포한 고엽제와 제초제 때문에 엄청나게 넓은 밀림이 황무지로 변했다.
또한 최루가스탄을 사용하여 부락을 폐허로 만들고 핵심적인 게릴라 지역을 불도저로 밀어붙였다.
그야말로 과학기술 전쟁, 또는 SF전쟁을 감행한 것이다.
그러나 해방전선은 이것을 이겨냈다. 그들은 세 종류의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민병과 게릴라, 지방군, 그리고 정규군이다. 베트남에 상륙한 미군은 맨 먼저 민병과 게릴라들을 만나야 했다. 그들은 도시와 농촌 어디에서나 민간인 속에 섞여 있었다.
게릴라의 기습적인 테러와 부비트랩에 시달리고 난 미군은, 그 다음에 소규모 지방군의 기동적인 기습공격에 넌덜머리가 날 만큼 시달려야 했다.
전쟁의 의미도 모른 채 바다를 건너온 병사들이 '빌어먹을 전쟁!'하고 투덜거릴 때쯤 해방전선 정규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밀림 속에서 정규군의 매복 공격에 걸려 심각한 타격을 입을 미군 주력부대는 신속히 퇴각한다.
그러면 포병과 항공기가 그 지역을 쑥밭이 되도록 두들긴다.
보병이 다시 들어가 보면 진지는 껍데기만 남아 있고 해방전선 병력은 보이지 않는다.
그때쯤에는 신속히 밀림을 빠져 나와 재무장한 해방전선 군대가 후방의 포병부대와 전투사령부, 기갑부대를 전격적으로 기습하여 혼란에 빠뜨린다.
이것이 전형적인 전투 양상이었다. 신출귀몰하게 미군부대 사이를 스며들어와 전후방도 없이 뒤엉켜 기습공격을 벌이는 탓으로 항공기화 포병을 속수무책이 되고 말았다.
전투 거리가 몇십 미터도 안 되는 상황에서 포격을 했다가는 미군까지도 날아가 버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해방전선은 땅굴과 죽창, 함정, 벌, 원숭이 등을 교묘하게 사용하여 미군을 혼란에 빠뜨리는 원시적인 전술과 더불어 소련에게서 지원 받은 사거리 10킬로미터가 넘는 로켓포나 모터보트, 바추카포를 동시에 사용했다.
그들은 정글 속에 소형 레이더와 대공화기를 설치해 두고 미군 전투기의 접근을 감시했다. 조종사가 모는 최신형 전투기를 맨발의 민병들이 격추시키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발생했다.
미군은 1분에 2천 톤의 폭탄은 퍼부어 북 베트남을 폭격하고 3백억 달러의 전쟁 비용을 투입했지만
전세를 뒤집을 수 없었다.
(그거 알어? 우리 잔고가 마이나스여 마이나스)
그들은 군사적으로 철저히 패배했다.
그로 인해
본국의 재정적자는 날로 늘어나 '인간 계산기'로 불렸던 국방장관 맥나마라마저 그 때문에 고개를 내저으며 사표를 던졌다.
물론 1965년 후 3년간 총액 15억 달러에 이른 소련의 북 베트남 원조가 이 같은 승리에 한몫을 한 것을 사실이지만, 미국이 쓴 전쟁비용과 비교하면 해방전선은 자기 힘으로 미군을 이겼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해방전선은 무장투쟁과 아울러 대중적인 정치투쟁을 전개했다.
사실 남베트남 정부는 정치적으로 한번도 해방전선과 맞서지 못했다.
바오다이에서 티우에 이루기까지 남 베트남의 최고 지도자들은 모두가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억압하는 프랑스를 위해 일한 자들로 부자와 부패분자, 그리고 미국을 위해서 봉사했다.
민중은 그들을 위해 싸우려 하지 않았으며 그들 스스로도 그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다.
한편 미국의 점령지구에서는 사이공 정부의 관료와 장교, 친미협력자, 인신매매 조직과 마약 상인, 미국 상품 수입업자 등이 점령군에 빌붙어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실업, 인플레, 뇌물수수가 판을 치는 가운데 민중의 기본적 생존권과 민주적 권리를 철저히 억압당했다. 해방전선은 미군 점령지역 민중에게 정치투쟁을 호소했다.
이에 호응하여 미국계 기업 노동자와 부두 노동자, 운수 노동자 등 사이공 시내의 1백 17개 노조가 1966년 말에 총파업을 벌이는 등 노동자들의 파업이 꼬리를 물었다.
청년 학생과 언론인들은 부정부패 척결과 언론 자유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고 학생과 교수, 승려들이 지도하는 불교도 운동이 불붙었다.
미군 점령지역의 각계각층 민중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투쟁한 것이다.
이 같은 정치투쟁은 사이공 정부를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으며 미국 내의 양심인들 사이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미군에서는 진보적이고 양심적인 백인 대학생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이끈 흑인
민주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들은 흑인과 백인간의 모든 법률적 관습적
차별의 철폐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복지정책을 확대하라고 요구했다.
대통령이 빈곤 추방을 선언하고 대대적인 사회복지 예산의 편성을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귀중한 예산이 베트남인의 자주적이고 정당한 요구와 염원을 말살하는 데로 흘러가 버리고, 영문도 모른 채 숱한 흑인들이 베트남의 정글에서 죽어 가는 것을 보고 흑인 민권운동은 양심적 지식인들이 벌이고 있던 반전 평화 운동과 손잡았다.
미국인들이 비로소 매카시즘이라는 반동적 광기에서 벗어나 진실을 불 수 있게 된 것이다.
미국 대통령 존슨은 토마토와 계란세례 때문에 거리에 나갈 수 없게 되었고 곳곳에서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했다.
베트남전쟁은 미국 사회를 남북전쟁 이후 가장 격렬한
대립과 증오 속으로 밀어 넣었다.
따라서 미국 행정부는 군사적 패배와 함께 닥쳐온 이 정치 위기 때문에라도 베트남에서 손을 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더욱이 미군의 잔혹한 전쟁행위에 대한 국제적 비난 때문에 지국은 국제사회에서도 점차 고립되고 있었다.
결국 사이공에서 해방전선이 벌인 정치투쟁이 바다 건너 워싱턴의 심장부를 강타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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