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우선 요점부터 말씀드리고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더 이상 아크베어즈와 관련된 일에 제 이름이 오르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회사에서 겪은 일들 때문에 우울증과 트라우마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이후부터는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 조금 더 깊은 이야기입니다.
1.
저는 2014년 10월 아크베어즈에 고용되었습니다. 디렉터님으로부터 제가 해야 할 일에 대한 설명을 듣고, 그대로 작업을 했습니다.
그리고 팀원들에게 제가 만든 시나리오에 대한 설명을 하던 중, 발표가 중단되고 "그래서 이거 왜 해야하는 거냐?"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내부적으로 시나리오에 대한 계획이나 합의가 전혀 안 된 상태에서 저를 데려왔다는 걸 그 때 처음 알았습니다.
그 뒤로도 '시나리오를 왜 해야되느냐'라는 투의 반응이 계속 들려왔고,저는 저조차도 그 답을 모른 채 묵묵히 작업을 해야했습니다.
또, '게임에 이런 요소를 추가해보는 게 어떻겠느냐'라고 디렉터님께 제의를 했을 때, 말로 하기보단 기획서로 만들어 와 보라고 하셔서
ppt로 만들어갔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획서를 리뷰하는 과정에서 한 직원분께 "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해요"라는 말을 들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지나가듯이 한 말이라 본인들은 잊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2년 3개월동안 그 말은 계속 제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말로 굳이 꺼내지 않더라도, 다들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는 불안감이 사라지질 않았습니다.
제가 시나리오를 비롯한 많은 기획을 할 때마다 '저걸 대체 왜 하자는 거지?' '쟤 저거 또 하자 그러네. 다른 할 일 많은데.'라는 생각을 하는 거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 너무 괴로웠고,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기도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저 말을 하신 두 분을 포함해서, 대표를 제외한 모든 직원분들에게 악감정은 없습니다.
저를 상처주기 위해서 한 말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대체로 좋은 분들이시라는 걸 오랜 시간 같이 일하면서 알아왔으니까요.
굳이 대표를 제외하는 이유는 후술하겠습니다.
어쨌든 저는 제가 하는 일에 확신을 가지지 못 했고, 회사에 잘 적응하지 못 했습니다. 언제든 잘리겠구나 싶어
컴퓨터 지급을 거부하고(소기업이라 자금이 여러모로 빠듯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2년 동안 개인 노트북을 가지고다니며 회사 일을 했습니다.
언제든 떠날 수 있게 책상 위는 아무것도 놓지 않은 채 비워뒀습니다.
2.
제가 입사할 때 아크베어즈에는 기획 담당이 디렉터님 한 명. 아트를 담당하는 분이 두 명. 프로그래머 세 명. 그리고 대표까지 7명이 회사 인원의 전부였습니다.
PVP모드 외 다른 모드를 개발할 여력이 없었고, 별도의 공수를 들이지 않고 시나리오를 넣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습니다.
일단은 튜토리얼에 서사를 넣는 것. 그리고 편지나 로비의 멘트를 통해 세계관을 전달하는 것이 최선이었습니다.
또, GM레온님이 입사하기 전까지 회사에 기획 인력은 디렉터님과 제가 다였기 때문에… 시나리오 프로젝트가 잠정적으로 중단된 기간동안은
계속해서 다른 기획 및 잡무들을 해왔습니다. Log정책이나 UI개선, 전투시점 처리 문제 등과 같은 게임 내 기획에서부터,
이벤트 검수나 굿즈 제작. 판매처 물색 및 포장 등과 같은 게임 외 잡무까지.
너무 광범위하고 자잘한 일들인 데다 '시나리오 GM'직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맡고 있는 일이라고 볼 수 없는 일이라,
제가 어떤 일을 하고있는지 밝혀봤자 '시나리오 GM이 시나리오는 안 만들고 왜 저런 걸 하고있는 거냐' 소리를 들을 게 뻔해 밝히지 않았습니다.
또, 유저들이 "GM아야는 시나리오 일도 안 하고 뭘 하고있냐"고 물을 때마다 디렉터님도 그저 'GM아야님은 여러가지 일을 하느라 바쁘다'라고만 말해서
딱히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은 원하지 않는구나 싶었습니다.
여러가지 일을 하는 것은 재밌었지만 누구도 알지 못하고 어디 가서도 인정받지 못할 일을 하고있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고, 제가 이 일들을 열심히 함으로써 게임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일을 맡을 때마다 최선을 다해 왔어요.
하지만 역시 제가 원래 맡은 일(시나리오)을 계속 하지 못 하는 데 대해. 그리고 이 회사에 내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 못 했기 때문에 제 일에 대한 의구심과 불안감이 들었습니다. 디렉터분께 몇 번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냈으나,
"잘 하고 있다"나 "그런 부담감은 자기가 이겨내는 거다. 회사에서는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라는 말을 들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이게 보통이구나. 어떻게든 스스로 해결하고 이겨내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크베어즈는 점점 커지고, 점점 많은 사람을 들였습니다. 인원을 늘리는 과정에서 책상이 부족해
텅 빈 회의실로 쫓겨나 혼자 작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혼자 방 안에 박혀있다보니, 저를 빼놓고 사무실 사람들이
다 같이 밥을 먹으러 가 혼자 남을 때도 종종 있었습니다.
괜찮았습니다. 괜찮다고 말했고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뒤로 눈물이 많아진 걸 보면.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눈물이 나는 걸 보면 사실은 괜찮지 않았나봅니다.
어쩌면 그때부터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직감했는지도 모릅니다.
3.
그리고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 한 번 접었던 시나리오모드를 다시 기획해보자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저는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처럼 캐릭터 스탠딩이 나와 대화를 하는 버전, 간단한 컷씬이 나오고 비주얼 노벨처럼
텍스트만을 띄워서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버전 등등… 여러 가지를 기획했고 그 중 한 가지 버전을 채택해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시나리오를 만들던 와중, 카페에 올라온 패치노트를 통해 시나리오모드가 다시 엎어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 저는 어떠한 언질도 듣지 못 했고, 패치가 올라온 다음 출근을 하니 "시나리오모드는 공수가 너무 많이 들어 엎어지게 됐다.
공수가 그닥 들지 않는 스토리텔링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라."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회사를 다니면서 제일 크게 실망했던 순간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시나리오모드가 없어진 게 그렇게 큰 일은 아닙니다. 개발 공수를 줄여야겠다는 말도 당연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중간과정을 제게 공유해주지도 않고, 디렉터님과 개발자 몇 명의 의논만으로 모든 게 결정이 되고, 그 결정마저도
저에게 먼저 통보하는 게 아니라 유저에게 띄우는 공지를 먼저 올렸다는 게 정말 상처가 됐습니다.
'이 회사에서 나는 뭐지?' '내 역할은 뭐지?' '나는 어떻게 다뤄지고 있는 거지?' ...그런 생각들이 한 순간에 밀어닥쳐 머리가 복잡했습니다.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부터 계속 게임과 회사에 애정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일해왔기에 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때부터 제대로 일을 진행하지 못 했습니다. 무엇이든 잘 잊어버렸고, 멍하니 있는 시간이 많아졌으며
글자를 잘 읽지 못 해 세네번씩 같은 줄을 읽어야 했습니다. 지금도 그 이후부터 퇴사직전까지의 일들은 기억속에서 도려진 것 같이 잘 생각나지 않습니다.
다만 부탁받은 기획을 까먹거나, 웹툰 작가님께 콘티를 제공하는 게 늦어지거나. 데이터를 잘못 입력해 다른 팀원분께 미안한 감정이 들었던 것만 기억이 납니다.
제 개인적 심정이 어쨌든. 새로운 컨텐츠 추가가 필요했던 상황이었기에 일지와 도감 등을 기획해 텍스트를 채웠습니다.
나중에 다른 사원분으로부터 프로그래머 분 중 한 명이 "GM아야님이 일지 같은 것도 꼭 해야된다고 우겨서
개발했더니 유저 아무도 안 한다"는 말을 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제가 미숙하다보니 개발자분들께 손이 많이 간 것도, 여러모로 부족한 콘텐츠를 기획한 것도 알고있습니다.
하지만 저 대신 일을 맡아서 할 수 있는 사람도, 어떻게 만들면 좋을지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방법은 모르는데, 어쨌든 해야만 했습니다. 제가 맡은 모든 일들이 그랬습니다. 저는 해야만 해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애초에 저는 시나리오 GM이었습니다. 시나리오 GM이 시나리오를 넣어달라고 부탁한 게 잘못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시나리오가 필요 없으면, 혹은 필요없어졌다면. 저를 고용하지 않는 게 맞았다고 생각합니다.
입사 초기에는 주어진 일을 하나씩 해 나가다 보면. 그래서 게임이 더 탄탄해지고 회사가 커지면.
내가 가야 할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내가 꼭 필요한 부분이 생기지 않을까? 그런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 생각 하나로 약 2년 여의 시간동안 회사를 다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순간부터 모든 믿음이 사라졌고, 저 자신과 회사에 대한 의문은 확신으로 바뀌었습니다.
나는 이 게임을 더 좋게 만들 수 없고, 더 이상 성장할 수도 없으며 내가 한 일들은 묻혀질 것이다...
그리고 그 때부터 우울증 증세가 급격하게 심해지기 시작했습니다.
4.
내장이 두근거리는 게 느껴진다. 머리의 안쪽 혈관이 터질 것 같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을 때의 그 싸한 기분이 24시간
함께하고있는 기분이다. 너무싫다. 너무 싫다. 지금 내가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좆될 거라는 사실을 아는데도 아무것도 할 기력이 들지 않는다.
손이 차갑고 발이 차갑고 울고싶다. 점점 시체가 돼 가는 느낌이다. 수분마저 빠져버리면 진짜 송장이 되어버릴 것 같아서
눈물은 목으로 넘긴다. 가끔씩 허벅지나 눈 아래쪽 같은 부분이 경련을 일으킨다.
요즘은 가만있어도 갑자기 눈물이 난다. 늘 목이 멘 것 같은 상태이다. 늘 목을 매고 죽어가고있는 것 같다.
일을 하다 중간중간 화장실에 가서 울고온다. 소리내서 우는 방법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냥 가만히 서서 눈에서 나오는 물을 흘려보낼뿐이다.
이게 우는건지도 모르겠다. 다만 눈에서 물이 나온다. 그마저도 누군가에게 들킬까봐 계속 눈가를 닦고, 숨죽여 발소리를 듣는다.
끝도 없이 슬픈 감정을 느끼는 와중에도 온전히 나 자신에게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신경쓰는 내게 환멸을 느낀다.
위 글들은 제가 그 당시 썼던 일기의 일부분입니다. 정신적 한계 외에 신체적 이상 역시 감지했고, 이대로는 정말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동안 세계관과 캐릭터에 대한 애착이 강했고, 어떤 방향으로든 시나리오를 진행할 수 있겠지. 캐릭터들에 대한 얘기도 계속 쓸 수 있겠지.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희망도 보이지 않았고 모든 걸 포기하고 도망치고 싶기만 했습니다.
퇴사하고싶다는 의지는 10월에 밝혔으나 인수인계라든지. 웹툰 프로젝트 등 제가 벌려놓은 일들만큼은 마무리지어야겠다는 생각에
3개월정도가 더 소요돼 1월에 나오게 됐습니다. 세계관과 캐릭터설정은 확실히 정리해놓고 가려고 노력했는데, 나름 챙긴다고 챙겼음에도
빼먹은 게 많나봅니다. 더 많이 얘기를 해 봤어야 하는데 정신적으로 불안정했던 때라 그랬던 것 같습니다. 후임 시나리오 GM분들께 미안합니다.
5.
회사를 그만둔 후에도 대표와 디렉터분에게서 밥이라도 같이 먹자고 전화가 와 두어번 만난 적이 있습니다.
두 분이 퇴사한 GM들과 술자리를 가지는 걸 본 적도 몇 번 있고, 이왕 끝내는 거 감정 상하지 않고 좋게 마무리하고 싶었기 때문에 별 생각 없이 나갔습니다.
아크베어즈의 대표 분은 제가 회사를 다니며 딸이 태어나는 것도 지켜봤고. 늘 자신의 딸이 얼마나 예쁜지 자랑하고,
내 딸은 너같이 키우고싶다고 하시는 분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방심한 것도 있습니다.
그리고 둘이 같이(처음에는 GM메이지님이 같이 있었으나, 다시 회사로 들어가셨습니다) 술을 마시다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
네가 좋다는 둥, 내가 미친놈이라는 둥(여담이지만, 미친 소리라는 걸 알면 입 밖으로 내지 마셨어야죠) 소리를 하다가
집에 가겠다는 저를 강제로 붙잡아 앉히고 자기랑 더 있어달라거나. 핸드폰 및 외투를 뺏는 등 위협적인 행동을 가했습니다.
그 뒤로도 계속 연락이 왔습니다. 대표는 주소와 학교를 포함한 제 모든 신상정보를 알고 있었으며, 키 187cm에 100kg가 넘는 거구였습니다.
매일 등하교 할 때마다, 집에 들어갈 때마다 혹시 대표가 나를 찾아왔을까. 너무 불안해 몇 번씩이나 주위를 살폈습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메일을 쓰고, 제가 음성녹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렸습니다. 그 뒤로는 연락이 사라졌습니다.
만약 그 날 녹음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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