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읽기 전에 주의사항 : 아래 글을 읽다가 빡쳐서 핸드폰이나 키보드 혹은 모니터를 박살내도 글싼이는 책임 안 진다.)
(아래 글은 플레이어 시점에서 진행된다고 생각하고 읽으면 된다.)
1. 어느 날, 늦은 시간에 테인이가 나를 찾아왔다.
"우웅~ 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형."
이런 저런 잡무를 마치고 겨우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갑자기 테인이가 찾아오는 바람에 잠이 확 달아나 버렸다. 그렇게 '우웅'거리는 소리 좀 그만두라고 몇 번을 이야기 했는데도 여전히 '우웅'은 계속된다. 듣는 것만으로도 키보드를 집어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으면서 테인이에게 도대체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로 찾아왔냐고 물었다.
"우웅~ 늦은 시간에 찾아온 건 미안해요 형.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흐트러진 평상복 차림에 땀을 흘리고 있는 걸로 봐서는 급히 뛰어온 것 같다. 밖에 계속 세워두는 것도 뭐하고 해서 나는 테인이에게 들어오라고 한 다음에 어서 용건이나 말하라고 했다.
"알았어요 형. 오늘은 건강검진 하는 날이어서 병원에 갔어요. 그런데 의사선생님이....."
차원종들과 싸우는 것이 직업인 만큼 클로저들은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을 받는다. 물론 그 이면에는 클로저들의 신체 데이터를 수집하겠다는 것도 있지만, 무료로 건강검진을 해주는 데다 부상당한 클로저들을 위한 의료기술 개발 등에 기여하는 거라 클로저들에게도 그렇게 나쁜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검은 양 팀이 오늘 건강검진을 받는다는 것은 전에 들어서 알고 있는 사실이다. 굳이 이렇게 늦게까지 찾아와서 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이 짜증나는 '우웅'은 도대체 왜 이 시간에 내 잠을 방해하러 찾아온 걸까?
".....5주째래요. 의사선생님도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줄은 몰랐다고 하시는데, 확실히 맞대요."
와 시발 잠깐만, 이 새끼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거지?
2. 나는 테인이에게 5주째라는 게 혹시 화장실을 못간 게 5주째냐고 물었다.
"형, 그게 아니라 형과 제 아이가 이제 5주째라고요."
이 새끼가 지금 게임을 무시하냐? 아무리 좆망겜이라고 해도 어떻게 남자가 아이를 가지는 미친 일이 일어날 수가 있지? 나는 테인이에게 증거를 요구했다.
"보세요. 이게 초음파 사진이라는 건데요. 여기 있는 작은 게 아기래요. 귀엽죠?"
귀엽기는 개뿔. 이건 기생충도 아니고 그냥 재앙이다. 재앙. 로그아웃 하려고 하는 의식을 간신히 붙잡으면서 테인이에게 물어볼 말을 최대한 신중하게 고른다. 먼저 아이라는 건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생기는 것이며, 남자와 남자는 아이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한 다음, 이건 뭔가 잘못된 것이라는 내 의견을 첨부했다.
"우웅. 그런 건 저도 알아요. 형. 의사선생님도 도저히 믿기 힘든 일이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이게 사실인 걸 어떻해요 형."
잠깐, 그러고 보면 애초에 나와 테인이 사이에 아이가 만들어질 껀덕지 자체가 없었다.
내 명예를 위해 변명하자면, 나는 게이도 아니고, 테인이와 서로 후장을 파 주는 사이도 아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해서 아이가 생길 수 있단 말인가? 사진이라고 들고 온 것도 주작같다. 차라리 이 모든 게 몰래카메라고, '서프라이즈!'라는 한마디로 모든 상황이 끝났으면 좋겠다.
"그러고 보면 5주전에 형이 밤 늦게까지 술 먹고 들어온 날이 있었잖아요?"
5주 전이라면.....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술을 필름이 끊기도록 마신 뒤 테인이 집에서 잤던 기억이 난다.
"그 때 형한테는 따로 말하지 않았는데, 그날 형이 밤 늦게 제 방으로 와서는 '아, 생수하고 싶다'고 하면서 갑자기 저한테 '테인아, 우리 합체하지 않을래?'라고 하셨어요.
저는 '형, 아무리 그래도 남자끼리 합체해도 되요?'라고 했는데, 형은 그 때 '괜찮아, 남자면 어떻고 여자면 어떻냐 맛만 좋으면 그만이지.'라고 하시면서 저랑 격렬하게 합체를 했어요.
다음날 형이 기억을 못하길래 저는 있었던 일을 그냥 말 안 했는데, 아무래도 그 때인 것 같아요."
시발 빌어먹을 놈의 술. 나란 새끼는 도대체 뭔 짓을 저지른 거냐. 술을 쳐먹고 이런 초대형 사고를 쳤으니 이제 자발적으로 고자되기라도 해야 하는 건가? 심각하게 모색중이다.
3.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테인이에게 물어 보았다.
"앞으로 한동안은 사냥을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지금은 사냥을 해도 괜찮다고 의사선생님도 말씀하셨지만, 몸이 무거워지면 더 이상 사냥에는 참가할 수 없겠죠. 슬프네요."
누구 앞에서 슬픔을 말하는 거냐? 기억도 나지 않는 사이에 세계 최초로 남자를 임신시킨 상병신이 되어버린 나 자신이 지금 가장 슬프다.
만약 내가 A급 요원이었다면 당장 눈 앞에 있는 '우웅'을 죽여버렸을 텐데, 나는 비위상능력자이고, 지금은 최대한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나는 최대한 침착한 말투로 태인이에게 앞으로 어떻게 이 사태를 수습할 것인지 물어본 거라고 말했다.
"형, 역시 결혼식은 어디서 하는 게 좋을까요? 집도 저 말고 두명이 더 필요하니까 지금보다 더 큰 집이 필요하겠죠?"
혼자서 뭔 개소리를 하는 거야. 미친새끼가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펴는 거야 자유지만, 이건 내 사활이 걸린 중요한 문제다.
4. 테인이에게 이 나라에서 남자끼리 결혼하는 것은 국가에서 허용하지 않는다고 말한 다음, 이제 테인이 배에 들어있는 재앙 덩어리를 어떻게 처리할 지 논의해 보자고 말했다.
"수술.....이요? 아이가 생긴 것 말고는 다른 이상은 없다고 의사선생님이 그러셨는데 무슨 수술을 받으라는 거에요? 형?"
바로 그 아이가 가장 큰 이상이다. 나는 테인이에게 남자가 아이를 가진 것은 지극히 비정상적인 일이고, 수술을 해서 아이를 제거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우웅. 그래도 형과 저의 아인데 그냥 기르면 안 돼요?"
미친새끼야. 너 때문에 나는 지금 전 세계의 교과서에 이름이 올라갈 판인데 그딴 소리가 나오냐?
"교과서라면 저도 알아요. 학교에서 가르치는 데 쓰는 책을 말하는 거죠? 형. 그러면 좋은 거 아니에요? 유명해 진 거잖아요."
유명해지는 것도 좋은 방향으로 업적을 만들어서 유명해져야 좋은 거지, 이딴 병신같은 사유로 유명해지는 것은 절대 사양이다. 앞으로 인류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과학시간에 계속해서 내 이름을 언급하면서 '인간은 양성생식을 하는 동물이지만, 2020년에 예외가 등장했어요. 이건 시험에 꼭 나오는 거니까 이건 무조건 외워야 되요. 알겠죠?' 라고 가르칠 것 아닌가?
만약 정말로 그렇게 되면 내 친척들은 전부 다 성을 갈아버릴 거고, 나는 전 세계의 인기스타가 되어서 동물원 원숭이 신세나 되겠지. 그리고 죽어서는 박제가 되어서 '남자를 임신시킨 최초이자 최후의 인류'라고 박물관에 전시될 거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토할 것 같다.
"......너무 그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형. 제가 열심히 해서 형하고 형의 아이까지 지켜낼게요."
지키고 말고를 떠나서 이미 그렇게 되는 건 확정이라니깐? 이 새끼는 뇌에 '우웅'을 쳐 달았는지 도대체 말귀를 알아듣지를 못한다. 극단적인 방법이 필요하다.
5. 나는 테인이에게 수술을 받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겠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허공 다이빙을 하겠다고 말했다.
"진정하세요 형. 아무리 그래도 이건 하면 안돼요."
내가 이렇게 된 게 누구 때문인데 도대체 어떤 아가리가 그딴 개소리를 하냐 이 개새끼야. 더 이상 말싸움 하는 것도 짜증나니까 수술을 할지, 아니면 내가 뒈지는 꼴을 여기서 볼지 선택하라고 밀어붙였다.
"아무리 형이라고 해도....... 제 아이를 해치려는 건 용서하지 않겠어요. 형은 뛰어 내리시려거든 뛰어 내리세요. 아이는 제가 키울 거에요."
나에게 죽창이나 개량형 위상관통탄이 있었다면 지금 당장 이 '우웅'을 한 방에 보내버렸을 텐데, 지금은 둘 다 가지고 있질 않다. 역시 투신이 최후의 희망인가. 나는 다음 생애에는 절대 술을 쳐먹지 말든지 아니면 아예 고자로 태어나거나 여자로 태어나서 이딴 개같은 일을 다시는 겪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6.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나는 의자로 유리창을 깬 다음 바로 몸을 던져버렸다. 테인이가 뭐라고 소리치는 게 들리긴 하지만 이제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도 들리지 않는다. 신서울의 바람이 얼굴을 스치면서 내 몸은 중력가속도에 따라 흙으로 돌아가기 위해 수직낙하하는 중이다.
절망을 이기지 못하고 한강에서 뛰어내린 사람들,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린 사람들, 절벽에서 뛰어내린 사람들은 모두 다 나와 같은 절망감 속에서 그렇게 죽었던 것일까? 전에는 '왜 병신같이 투신을 하냐?'라고 생각했지만, 이제야 투신을 하는 새끼들의 심정을 모두 이해할 수가 있다. 그래. 이래서 투신을 했던 거구나.
나는 갑자기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돋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 낸 가공의 날개. 출세도 야망도 희망도 모두 버린 나에게 허락된 이카루스의 밀랍날개다.
신이 허용하지 않은 인간의 날개는, 그렇게 지상을 향해 추락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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