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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듯한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휴일 아침. 늦잠을 좀 더 자도 좋으련만 바보 같은 몸뚱이는 평일 출근 시간에 맞춰 눈이 번쩍 떠진다. 침실 밖에서는 아이와 아내가 부스럭부스럭 소리를 내며 나를 압박한다. 아, 나가기가 싫다. 정말 일어나기가 싫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면 지금 느끼는 이 나른함이 산산조각 나버릴 게 뻔하다. 저 문밖에는 골치 아픈 것들 투성이다. 눌어붙은 밥풀을 불려야 한다는 핑계로 물속에 담가만 놓았던 설거짓거리들이 먼저 떠오른다. 옷방에 멋대로 벗어 던져놓은 빨래거리들은 상상조차 하기 싫다. 일주일 전만해도 물기 하나 없이 반짝반짝 윤이 나던 화장실은 또 어떻게 변해있을까? 주말이 되면 저 무거운 카페트를 걷어버리겠다고 호언장담이나 하지 말걸. 각종 후회와 번민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뒹굴뒹굴. 이불 속에 들어앉아 시간을 음미한다. 괜히 고개를 돌려 커튼의 주름 개수가 홀수인지 짝수인지 헤아려본다. 나는 아직 잠을 자고 있는 것이라고 최면도 걸어본다. 자박자박.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 온다. 분명 나를 깨우러 오는 아내의 소리다. 눈을 질끈 감고 문이 열리길 기다린다. 벌컥. 문이 열렸다. 이제 산적한 문제를 직면하러 현실 세계로 나아가야 할 시간이다. 그때, 얼굴을 문 사이로 빼꼼히 들이민 아내가 나에게 말을 건넨다.
“나 오늘 친구들이랑 약속 있어서 나갔다 올 거야. 점심 먹고 백화점도 좀 들렀다가 늦게 올지도 몰라. 애는 내가 데려갈 테니까 집안 일 좀 부탁해~”
해.방.감.
아내가 던진 한마디에 나는 감았던 눈을 번쩍 뜨고 누워있던 척추를 곧추세워 현관문 앞에서 신나게 손을 흔들며 둘을 배웅한다. 그렇게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의 위이잉하는 진동이 귀에서 멀어질 무렵, 나는 산란하게 흩어져있는 현실을 뒤로하고 소파에 몸을 던진다. 아내가 떠났다고 해서 나에게 주어진 현실 중 달라진 것은 사실 하나도 없다. 모두 몸을 움직여 해결해야 할 것들 투성이다. 설거지는 여전히 물속에 있으며, 거실에는 지난 일주일의 온갖 난잡한 흔적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직장인들이 무두절을 맞아 기뻐하는 것처럼, 나를 짓눌렀던 현실의 요소 중 하나가 빠졌다는 것만으로 뭔가 홀가분한 느낌이다. 그리고 나는 그와 비슷한 종류의 오묘한 해방감을 지난 월요일 저녁, 황선홍 감독의 자진사퇴 소식을 접하며 오랜만에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실패했고, 그래서 떠났다
그가 떠났다. 지난 몇 달 동안 나는 그가 나가주기만을 바랐다. 떠나는 그를 향해 문 앞에서 힘껏 손을 흔들 준비도 되어있었다. 그런데 그는 내가 기다리다 지쳐 반쯤 포기했을 무렵, 그렇게 갑자기 말도 없이 떠났다.
자진사퇴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떠나간 이에게 저주를 퍼붓자는 말이 아니다. 그는 그저 자신이 만들어놓은 상황에 밀려난 것뿐이라는 거다. 누구도 그를 자르지 않았지만, 혹은 누군가는 그의 바짓가랑이를 잡았겠지만,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호언했던 그 상황이 황선홍을 결국 밀어냈다.
사실 황선홍 감독은 팀에서 나가는 게 맞았다. 그는 서울이라는 팀에서 주어진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게 맞다. 최용수 감독의 후임으로 그가 팀을 이어받을 당시 서울이라는 팀은 리그에서도 잘 나가는 팀이었다. 리그 우승을 바라봤고, 구성원 모두가 아챔우승을 염원하던 팀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물론, 그가 감독으로 부임한 첫 해, 반년 만에 우승을 일궈냈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누군가는 더 큰 목표를 향해 리빌딩이 반드시 필요했던 시점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 정도로 여유있는 팀이 아니었다는 것이 지난 1년 반 남짓의 시간동안 줄어든 관중의 숫자로 증명되었다. 분명 그랬을지도 모른다. 리빌딩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적과 관중이라는 프로스포츠 최대 덕목을 둘 다 포기해버릴 정도로 과격한 방법을 사용했어야 했는지는 의문이다. 물론 그 역시 승리를 갈망했고 관중동원을 염원했겠지만, 결과적으로 업무수행에 실패했다는 것을 그는 스스로 사퇴를 통해 증명하였다.
그가 떠난 뒤, 어떤 이는 리빌딩이라는 지난한 과정을 기다려주지 못한 팬들의 성급함을 지적하고, 또 어떤 이는 경남전 한 경기의 결과를 보면서 차라리 그가 떠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탄식한다. 맞다. 그가 떠나지 않고 자신의 행보를 계속 이어갔다면, 내년 혹은 내후년쯤 다시 우승을 노리면서 아챔우승을 염원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에는 가정이 필요치 않다’는 명제처럼 지금은 ‘그가 떠나지 않았더라면’이라는 가정은 불필요하다. 그러한 가정은 시간이 훌쩍 흘러 지금 우리가 지나고 있는 현실이 역사가 되었을 때 필요한 일이다. 그는 이미 실패했고, 떠났다. 그리고 지금은 ‘~했더라면’이라는 가정이 아니라 부단한 현실 인식이 필요한 때다.
우리는 이제 강팀이 아니다
모두들 그토록 떠나기를 염원했던 그가 떠났다. 하지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그가 떠났지만 지난 2년간 어지럽게 흩어진 현실들은 여전히 그대로다. 여전히 우리는 리그 9위를 기록하고 있고, 11경기를 치르는 동안 9골밖에 넣지 못했다는 사실에도 변함이 없다. 우리 스스로 승점을 쌓아 따라잡아야 할 거리는 멀고, 우리 뒤의 누군가가 우리를 따라잡을 거리는 가깝다.
설상가상으로 그가 떠난 자리를 채운 건 프로지도자 경험이 미천한 이을용이다. 언제나 그래왔듯 그는 남은 시즌 전체를 보장받았다. 이건 이을용이라는 인물에 대한 호불호와는 상관없다. 그들은 한 번의 성공에 도취되어 또다시 도박을 걸었고, 좀 더 확실한 길 보다는 쉽고 돈이 덜 드는 길을 택했다. 구단은 또다시 ‘서울을 가장 잘 아는 구단 출신’임을 내세워 감독 뒤에 숨어버렸다. ‘소통’을 갈망하는 팬들 앞엔 ‘좋은 상황’이라는 전제가 붙은, 물고 뜯고 맛보고 즐기기 좋은 먹잇감만 던져놓았다.
나는 이러한 행보가 구단이 지금 품고 있는 야망의 정도를 보여주는 바로미터라고 생각한다. 구단은 분명히 달라져야 하고, 또 누군가는 책임져야 하는 게 맞다. 만약 정말로 상황이 여의치 않은 것이라면, 적극적인 소통을 통해 왜 우리의 야망이 거기까지인지, 또 앞으로의 구상이 무엇인지 구성원들을 설득시켜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사실은 아쉽지만 우리는 이제 강팀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단의 행보에 분노함과 동시에, 또 누군가에게 계속 책임을 물음과 동시에 우리 자신도 우리가 현재 우승을 바라보는 강팀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쉽지만 인정해야 한다. ‘FC서울이 언제부터 강팀이었다고, 터키 감독 하나 데려와서...’라는 얘기에 분노했던 시절로 시간을 다시 돌려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우리가 그것을 인정할 때에야 비로소 ‘황선홍의 시대’와 진정한 안녕을 고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만약에’, ‘옛날에는’과 같은 말은 이제 접어두자. 냉정해지자. 시선은 높은 곳을 향하되, 우리가 현실에 발을 디딘 채 서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우리는 이제 강팀이 아니다.
그리운 것들, 보고싶은 것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요즘 축구권태기에 빠졌다. 지난 5번의 홈경기를 모두 지켜보면서 나는 내가 왜 축구를 보는가에 대한 의문만 커졌다. 누군가는 성적이 너무 좋지 않아서라고 이야기할 지도 모른다. 맞는 얘기다. 부정하지 않겠다. 하지만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는 축구장에 사람이 많은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처음 상암에서 축구를 보았을 때부터 나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에 더 익숙했었다. 시간이 가면서 내 주변에 점점 사람이 많아졌을 때 즐거움보다는 불편함이 더 컸다. 주차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맥주 한 캔을 사기 위한 시간은 점점 더 길어졌다. 축축하게 땀에 젖은 겨드랑이를 내 어깨에 걸칠 때, 환하게 미소 지으며 생전 처음 보는 나에게 하이파이브를 권할 때, 아무잘못도 없는 내 달팽이관에 자신의 분노를 토해낼 때마다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요즘엔 이런 것들이 모두 그리워졌다. 돌아보면 내가 모두 싫어하던 것들인데 막상 그런 것들이 사라지니 허전했다. 나는 젖은 겨드랑이에 내 어깨를 내어줄 준비가 되어있고, 무표정한 얼굴로 하이파이브에 맞장구를 쳐줄 준비가 되어 있지만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기어이 경기장을 찾은 사람들조차 모두 팀이 망가진 모습에 분노하고 슬퍼하느라 웃음을 잃어버린 모습이었다. 그리고 물론 나도 그랬다. 나는 나의 분노를 그들에게 전염시켰고, 그들도 그들의 슬픔을 나에게 전염시켰다. 그렇게 우리는 지난 5경기를 지켜보았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우리는 이제 강팀이 아니라는 현실인식이 필요하다는 것. 그것을 인정하고 이제 ‘황선홍의 시대’에 안녕을 고하자는 것. 이제 당신들을 경기장에서 만나고 싶기에 꺼낸 이야기다. 우리가 더 이상 강팀이 아니라고 ‘팀’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내가 사랑했고, 당신이 사랑했던 팀은 비록 예전보다 못난 모습이지만 여전히 죽지 않았다는 것, 또 감독은 사라지고 선수도 사라지겠지만 팀은 언제나 거기에 있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얼마나 멋진 일인가?
이제 경기장에서 하자. 손을 흔들어 안녕을 고하자. 분노의 목소리로 책임을 묻자. 승리에 기뻐하고 패배에 아쉬워하자. 서로를 위로하자. 다시 강팀이 될 수 있도록 박수를 보내자. 이제 경기장에서 우리가 사랑하는 팀에 대한 책임을 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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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아무리 노력해도 잠이 오지 않아 소파 머리맡에서 아내가 읽다만 책 한권을 집어 들었다. 어린왕자. 한 번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본 적이 없거니와, 수십 번을 읽었어도 도통 모르겠는 그 책을 집어 들고 잠이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거기엔 이런 구절이 있었다.
“너의 장미꽃이 그토록 소중한 것은 그 꽃을 위해 네가 공을 들인 그 시간 때문이야. 너는 그것을 잊으면 안돼. 너는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 언제까지나 책임이 있는 거야, 너는 장미에 대해 책임이 있어.”
나는 내일 아침부터 온몸 구석구석을 깨끗이 씻어낸 뒤, 경기장에 갈 생각이다. 물론 경기장에 가기 전에 청소와 빨래도 할 생각이고 말이다. 그래서 말인데, 당신도 함께 가는 게 어떻겠는가?
두줄요약
솔직히 차린건 없겠지만
같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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