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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중편] 겨울의 공화국 (1)

ㅇㅇ(121.136) 2021.01.25 20:31:41
조회 516 추천 31 댓글 10

 


 1839년의 여름이었다. 프랑스 칼레의 빛을 밝은 색채의 건물들은 햇빛을 힘차게 반사하며 도시에 생기를 불어 넣었다. 종교 개혁 이전부터 혼잡하던 건물들의 틈바구니에서는 멀리 붉은 향신료부터 순록 털, 하얗고 차가운 가루가 뭍은 온 각종 상품들이 독특한 향기를 풍기며 떠들썩하게 오고 갔다. 항구에 닻을 내리고 정박한 배들에 석탄 가루를 뒤집어 쓴 인부들이 들어가고 나오면서, 짐짝 수 백 개가 쏟아지듯이 나타났다. 좀 살살 다루라! 나무 상자를 내던지듯 내려놓는 어느 짐꾼의 태도를 본 감독관은 파이프 담배를 문 채로 자신이 차려 입은 갈색 양복을 담뱃재로 더럽히며 호통쳤다. 혼잡한 풍경을 배경으로 한 채 두 상인은 노르웨이산 순록 가죽의 가격을 높히냐, 낮추냐를 두고 목소리를 높혔으며 둘의 콧대는 하늘을 향하는 듯 했다. 수요와 공급에 대해 논하는 그들의 전문 용어들은 인부들의 귀에 들어오고 흘러나갈 뿐이었다. 그들은 임금 계산서에 적힌 액수만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어느 세 사람은 감독관과 주인의 눈길을 피해 가로등조차 없는 골목에 앉아, 작은 술상을 차리며 농땡이를 피웠다. 가난한 그들도 딱히 반기지 않던 럼주 한 병이 전부였으나 낮의 따뜻한 기운은 이들의 이성을 즐겁게 해주는데 적합했다. 잠시 자리를 비우며 세 쌍 이외의 다른 눈길이 있는지 잽싸게 확인한 안경잡이는 술자리로 몸을 던지듯이 옮기며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한 친구는 연기가 막 올라오는 파이프 담배를 건냈고, 그는 그것의 종류를 물었다. 맘에 드는 것임을 확인한 안경잡이는 덥석 받아 물더니, 나머지들 앞에서 귀를 잡아 당기는 제스처를 취했다. 귀를 바짝 열어보라는 의미였다.



"거 좀 들어봐. 아까 그 하얀 기운에 대해서 말이야. 그건 분명히 얼음이었어. 바다가 얼어붙는 것 말이야!"



그들은 배가 아렌델 영해를 벗어나는 순간 보았던 하얀 유령이 사이렌인지 허깨빈지, 아니면 눈보라인지에 대한 논쟁을 풀었다. 눈보라를 주장하던 안경잡이 짐꾼은 망상꾼으로 악명 높은 자였다. 멀리 아렌델에서 칼레로 향하는 배에서도 손가락만큼이나 두꺼운 안경을 끼고, 혼자 배의 온갖 그림자가 그리워지는 구석에 앉아, 성경, 마녀의 망치, 흑사병 관련 기록 따위에 푹 빠져 있던 그는 '네눈박이 망상꾼'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비실비실하고 말이 엉뚱한 데로 새곤 하던 그 파리 출신 은둔자는 감독관들에게는 놀림거리였으나, 인부들 중에서 유일하게 숫자와 화폐 단위가 아닌 것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었기에 나름 존중 받았다.



"어찌 그게 눈보라란 말인가! 이 날씨에 눈보라라니! 이게 그 한 여름 밤의 망상이겠군! 자네는 공부만 하다가 눈이 먼 게 분명해!"



"나는 내 눈을 믿고 있어! 배 고물에서 파이프를 피우던 순간이었어. 아무리 신과 역사의 종이라 해도, 가끔 씩 그분의 가장 큰 창조물의 빛을 쐬야지. 그래야 기분전환을 할 수 있거든. 그런데, 막 부싯돌이 불꽃을 튀기는 순간에, 그때 차가운 가루 같은 것이 바람을 타고 내 볼을 스쳐지나갔지. 마치 포세이돈의 삼지창이 간발의 차이로 나를 지나간 것 같았어! 그리고 피오르드 너머에서 새하얀 얼음이 손을 뻗으며 바다를 갉아먹는 풍경까지 봤어. 우리의 한심한 주인이 한량스럽기 짝이 없는 밀렵꾼인게 정말이지 한스러웠어! 순록을 한 가득 실고 꽁무니를 빼는 신세였지 않는가? 그 와중에..  그 초록 꺽다리들이 석궁을 쏘는 바람에 정말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니까! 수수께끼에 휩싸인 은둔의 여왕을 뵈러 가는, 여유충만한 돼지 귀족들의 행렬이었으면 10분의 여유라도 주어졌겠지."



"그런 풍경 봐서 좋을 게 뭐가 있겠나. 네 정신이 이상하다는 것에 쐐기를 박을 뿐이야. 그것은 아마 자네를 선장으로 착각하고 사이렌이 불러낸 환영이었을 거야. 그녀들은 자네는 오디세우스 같은 꾀돌이가 아닌 걸 알았겠지. 멍청이라는 걸 말이야."



 둥근 안경을 쓰고 있던 그는 고개와 양 손을 동시에 저으며, 잘못에 항변하는 사람의 제스처를 취했다. 그리고 검지손가락을 하늘로 향하며 나머지 인부들을 향해 성큼 일어났다. 눈을 부릅 뜬 채.



"계시야! 메시지야! 하느님은 내게 경고하신게야! 그 얼음들은 우리가 아렌델을 완전히 나가는 순간까지 퍼져나가고 있었다니까!"



  안경잡이는 양팔을 하늘을 향해 뻗으며 감탄사를 내뱉었고, 어두운 골목길 속에 스며 들어온 햇빛 한 줄이 그의 두꺼운 안경에 반사되었다. 눈이 새하얘진 채 그때의 기억에 감탄하던 안경잡이의 모습은 계시를 받은 예언자 같았다. 정확히는 그런 사람을 흉내 내는 사람 같았다. 계시를 받는 척을 따라하다가 그만 낮은 테이블에 놓인 잔 하나가 밀쳐 떨어졌고, 맑은 소리가 세 사람 밖에 보이지 않던 거리를 흔들었다. 와인과 낡은 지붕에서 떨어져 나온 석면 가루를 넘치도록 담은 그 낡은 유리잔은 바닥에 닿기 무섭게 큰 조각으로, 작은 가루로 쪼개졌다. 내 잔을 깨드리다니! 이 철없는 녀석아! 얼음 환영을 만든 사이렌의 외모를 멍하니 상상하던 친구에게 그는 언성을 높히며 그를 질책했다.



"넌 사이렌에게 홀린 게야! 미쳤다는 뜻이지!"



 내 술값! 잔값을 물어내라! 친구는 안경잡이의 코 앞에서 오른쪽 검지를 휘젓듯 흔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 잔을 얼마나 아꼈는지에 대한 연설을 늘어 놓았다. 다름 아니라, 오스만에서 일할 때의 옛 주인이 쓰던, 한 40년 정도 된 유리잔을 훔쳐온 것이랜다. 

 연극 배우 마냥 과격한 동작을 취하던 안경잡이와 인부, 그를 말리려는 친구의 말싸움은 몸이 부딫히는 것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 난폭한 소란은 검은 색에 솟은 머리를 하고 골목을 걷던 어느 여자의 귀에 들어왔다. 그녀는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골목을 파고 들었고, 모퉁이 두 개만 돌면서 어렵지 않게 세 사람의 싸움판을 찾을 수 있었다. 



"봉쥬르. 무시외(아저씨). 길을 잃었는데, 혹시 부두가 어딘지 말해주실 수 있으신지?"



"무슨 부두요? 동양에서 온 차를 가져오는 부두요, 순록 가죽을 실어온 부두요? 아니면 담배를 실어온 부두요? 순록 냄새 나는 부두만 아니였음 좋겠구만."



"담배를 실어온 부두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갈색 눈동자는 걱정이 섞인 채 희미하게 흔들렸다.



"그건 왜 찾나? 주인 마님이 사오라고 하셨디?"



"제 여동생은 폐가 안 좋아서요. 병원에서는 담배 연기를 좀 먹이라고 했어요. 가능하면 가장 비싼 거로, 멕시코에서 재배된 거로요."



"거 의사가 잘 알려줬구만. 담배를 찾는다면, 저 방향으로 나가서 왼쪽으로 돌면 있네."






 길을 묻던 사람은 클로디아라는 여자였다. 한 시도 낭비할 수 없는 듯 성큼 걸음으로 움직인 그녀는 모퉁이를 헤집고 다니는 순간에도 걱정을 품에 안고 있었다. 가죽신이 멋도 모르고 돌부리를 밟을 때의 느낌은 마음을 깊숙히 찌르는 송곳 같았고, 낡은 집의 지붕에서 떨어져 코 속에 들어간 석면 가루는 기침을 터뜨렸다. 자신의 여동생이 병마로 고생하면서 내뱉던 그 소리와 비슷했으나 조금 걸걸했다. 골목을 빠져나온 그녀를 따스한 바다가 반사한 햇빛이 맞이했다. 그녀는 막차를 타려 발길을 재촉하는 직장인처럼 속도를 높였다. 가까워질수록 물건을 구매하려 모인 상인들과 짐꾼의 소란이 더욱 커졌다. 하지만 그 인파는 담배를 사려 온 상인들이 아니었다. 인파가 몰린 배는 쌍두 독수리 깃발이 매달린, 막 14일의 해상 격리를 마치고 입항까지 완료한 러시아 국적의 것이었다.



 마침내 구름 떼처럼 모인 인파에 파고들 무렵에 그녀는 무언가 예상과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귓구멍으로, 그리고 피부로 느꼈다. 햇살이 내리쬐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에 뜬금없이 느껴진 희미한 냉기는 대기를 지배하는 더운 온도에 비하면 나약했다. 그러나 그 혼령처럼 미세한 촉감은 사막 가운데의 오아시스처럼 선명했다. 시민들의 웅성거림으로 걸을 필요도 없이 인파 한 가운데로 떠밀려진 클로디아는 사야 할 물건을 생각하면서도 순간 느꼈던 차가움을 잊을 수가 없었다. 이내 그녀는 상인들의 소란을 단지 방관하고 있을 것 같은 사람에게 질문을 하기로 결정했다. 인파 속에서 느꼈던 그 차가움을 느끼지 아니한 사람은 아마 없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거기 아저씨, 아까 무언가 찬 기운 못 느끼셨습니까?"



"몰러. 저기 앞에 밀입국자가 발버둥치다가 빈손으로 뭘 던졌데. 나도 거기까지만 들었어."



 쏟아지는 햇살 아래서 눈조차 마음껏 뜰 수 없는 날씨에 느낀 그 냉기는 여전히 클로디아의 심장 한 편에서 맴도는 듯 했다. 주변 인파 모두 냉기의 정체를 알 수 없다면, 일단 무슨 판국인지 구경만 하고 나가야겠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소란과 냉기 역시 맨 앞에 서면 자초지종을 훝어 볼 수도 있겠고. 혹시 소란이 다 해산되어서 알 길이 없어진다면, 밤에 머물게 될 여관 주인이 떠드는 소리에 주의를 기울이면 되겠지. 


 

그녀는 속으로 결론을 짓고, 구경꾼과 구매자, 계약한 상품을 받으러 온 상인, 그 와중에 짐을 들고 나가는 인부들로 북적이는 인파에 두 다리로 돛을 폈다. 그녀는 키가 작아 다른 사람의 뒷통수와 등짝 둘 중 하나만 볼 수 있었지만 어디가 앞이고 뒤인지는 파악할 수 있었다. 등 뒤에 다른 사람의 코가 부딪혔고 사방에 어깨 또는 팔과 몸을 맞대었다. 수십 명이 충돌하고 뒤엉키는 사람의 무리 속에서 그녀는 내던져지 듯 튀어나왔다. 인파에 뒤섞인지 10 분 채 되지 않았음에도 그녀의 하루치 체력은 하루종일 평야를 질주한 포장마차의 황소처럼 바닥났고, 숨은 다른 사람의 옷에서 떨어져나간 털에 섞이지 않은 공기를 흡입하느라 바빴다. 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들어, 현재 벌어지고 있는 소동을 관찰했다. 



 푸른 드레스 차림의 여성이 몸 곳곳에 문신과 흉터가 새겨진 인부들에 의해 끌려 나가는 참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사형수 대하듯이 갈색 자루를 뒤집어 씌워 확인할 수 없었으나 어깨 아래부터 발끝까지 둘러싼 푸른 드레스의 반짝임은, 마치 사막 한 가운데의 불야성처럼 화려했으며 재투성이 시민들 속에서 더욱 강조되었다. 아마 최고급 중국산 비단으로 수놓은 것일 게야. 망토에 새겨진 눈송이 무늬는 칠레 산 은가루로 벨기에의 레이스 장인들이 새긴 것이겠지! 그녀는 속으로 속삭였다. 그녀와 시민들이 여성의 아름다움에 정신이 팔린 사이 검역소에서 출동한 두 검사원들이 지저분한 회색 의사 외투 차림으로 다가갔다. 그들은 하나같이 길쭉한 막대기 하나를 들고 있었고, 한 명은 정돈되지 않은 수염을 입과 함께 씰룩였다. 한 명은 담배 한 개비를 물고 있었다.



"멀리 상트페테르부르크 항구에서 여기 도착한 배에서 머문 밀입국자요. 요새 그 청사병인가 하는 게 도는 도시말이요. 14일간 격리를 시켰는데도 청사병 증상이 현재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 자세한 검사가 필요할 것 같소.



 배에서 귀부인을 경찰서로 끌려가는 범죄자처럼 대하던 인부가 보고했다. 검사원들은 그녀의 손과 발목 등 드러난 부위를 힐끗 관찰했다. 아침에 내린 눈처럼 새햐얕다못해 창백하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얼굴은 나중에 보도록 하고, 신분부터 천천히 봅시다. 어디 보자. 퀼로트인가, 상퀼로트(평민을 뜻하는 프랑스 속어)인가."



"이 여자는 우리 공화국 사람은 아니었으니 그 구별법은 소용 없을 겁니다. 짜르 왕국 사람은 더욱 아니었소. 프랑스 사람 누가 눈을 머금은 짚단 같은 백금발 머리를 하고 있겠습니까? 물 들인 게 아닌가 싶었는데, 뿌리까지 백금이에요. 



"...농 퀼로트네. 퀼로트(귀족이 입던 반바지)가 없어."



"근데 귀족이나 부잣집 따님이 아니고서야 이런 화려한 비단옷을 입을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일단 러시아에서 온 배니까 러시아 대사관으로 보내죠. 배에서 발견한 내내 입을 한 번 뻥긋 하지도 않았어요."



"그래. 신상파악부터 진행하도록 하자. 그래야 검사 방법을 논의할 수 있겠지. 장, 차에 태우게. 청사병 증상 중에는 몸에 서리가 끼어 창백해지고 혀와 손이 굳어서 제대로 쓰지 못한다는 보고가 있어. 저기 봐봐. 검역관들 손도 벌벌 떨면서 망설이고, 잡지를 못하고 있잖아."



 검역관들은 인부들을 배로, 또는 선술집으로 돌려보낸 뒤 푸른 옷 아가씨를 연행했다. 물러가시오! 감염자일 수 있소! 막대기를 휘저으며 인파들까지 해산시켰다. 막대기가 두려워서라기 보다는, 소문으로만 듣던 역병이 두려워서였다. 손발이 푸르게 변하고 온 몸에 시퍼런 서리에게 먹히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것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듣는 소문으로만 알고 있던 역병이었다. 자고로 병이 가진 가장 강력한 힘은 죽게 하고 괴롭게 하는 게 아니라 그 주변을 고독하게 하는 것이었다. 




소동 구경을 마친 클로디아는 담배가 있는 부두를 향해 발을 옮겼다. 어떤 게 폐에 가장 좋을 지 고민하던, 이 무지하나 나름 사려깊은 여자는 자신의 약에 대한 고민과 푸른 옷 아가씨를 보고 마음이 흔들린 것에 대한 의문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푸른 그 옷에서는 마법이 베인 것 같았다. 이백년 뒤 최고의 화가와 방직공들을 불러오라. 저 정교함을, 저 망토 한 조각을 그리는 데에 한 세월은 거뜬히 걸릴 것이리. 그들에게 낼 보수는 검은 쥐 같이 잔꾀 많은 장사꾼 수 천 명의 금고를 털어야 할 것이리.



 또 그 비단 치마 속의 하얀 발목은 어땠는지? 그녀는 도저히 이성의 말로 그것을 생각할 수 없었다. 오, 오! Belle! Belle! 아름다워라! 생각의 끝자락이 꿈틀거리는 순간마다 사탄 같은 욕, 욕심이 이글거렸다. 



물건을 구매하는 일은 방금전 난리통을 구경할 때와는 허무할 정도로 쉬웠다. 이미 구매자들이 전부 재고를 사간 무역선에는 갈매기 몇 마리만이 유일한 고객으로서 부두를 거닐고 있었으며, 조금의 한기가 스며든 바닷바람은 소란을 만드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녀가 살 수 있었던 가장 좋은 담배는 배의 가장 밑 바닥에서 시궁쥐와 시간을 보내었을 법한 가장 질 낮은 상품이 전부였다. 그래도 그녀는 빈 손보다는 낫겠지, 싶었다. 아무리 질 낮은 담배라도 폐렴 환자 치료에 아주 효과가 없겠는가. 어서 파리로 돌아가자. 쓰고 매운 연기를 들이마시면 병균뿐만 아니라 동생에게 묻은 악귀까지 달아날 것이라 그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소름 돋는 기운이 어디선가 불어오고 있음을 느꼈다. 그것은 자신의 앞에 있는, 차갑고 깊으며 수도승처럼 고요한 해변이었으며 땅거미가 질 기미를 보이는 시간이었으나 서늘함이 불어올 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바람이 몰려 온 수평선을 향했고, 호랑나비처럼 검고 진한 눈화장으로 감싸진 눈동자는 그 너머에서 서서히 기어오는 무언가를 찾아내었다. 



그것은 느려 보였다. 그러나 수평선이라는 거대하고 험한 언덕을 넘는 순간, 클로디아가 서있는 칼레 부두를 향해 속도를 더욱 가속하며 달려왔다. 그것은 더욱 빨라졌다. 마치 눈덩이를 굴리는 듯이, 하찮고 조그만한 그것은 수평선 너머의 작은 선이었으나, 곧 온 수평선을 향해 팔을 뻗혔다. 그리고 녀석은 창 끝처럼 날카로운 부리를 먼저 내밀어 자신의 새하얀 날개로 온 바다를 뒤엎었다. 그 하얀 기운은 얼음이었다. 8월의 여름에, 아직은 태양이라는 거대한 피조물이 서쪽 하늘에서 기세를 거두어들이지 아니한 시간 4시 무렵에. 



그리고 바다를 덮는 얼음 위에는 수 백 개의 적란운이 장벽을 세운 채 따라오고 있었다. 거인의 그림자를 천하에 드리우는 그 구름 아래에서는 차갑다 못해 시퍼런 냉기가 소란쳤다. 장대한 몸집의 거인은 햇빛과 기온 앞에서 조금의 지체도 하지 않으며, 서서히 움직이는 운명이었다. 다리를 가지고 있는가? 날개를 가지고 있는가? 튼튼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라. 이 적란운 군대 앞에서 추위 따위를 두려워하지 않을 이는 없다네. 목격자는 이 파리에서 온 아가씨만 있는 게 아니었다. 부두 근처에 바다가 보이는 방을 잡고 영감을 찾던 여행객부터 아직도 짐짝을 나르며 감독관을 헐뜯던 인부들, 짚단으로 가득 찬 마차를 등지고 바닥의 이삭을 줍던 교외 소작농 아낙네들까지 모두가 보았다. 눈이 있는 자는 보았고 귀가 있는 자는 들었고 살이 있는 자는 피부로 낮아진 기온을 느꼈다. 각자 서있는 자리는 천차만별이었으나 느낀 바는 단 하나였다.



"오, 주여."



육지 바로 아래까지 뻗어나간 빙판은 벽돌로 이루어진 부두의 턱에 닿았다. 냉기는 딱딱한 벽돌에 꽂힌 것처럼 눈송이 무늬로 자라며 뿌리를 뻗었으며 그 눈송이의 날카로운 끝이 닿은 곳은 서리가 스며들며 새로운 무늬를 만들었다. 새로 생긴 눈송이는 어두워진 하늘 아래 먹구름의 그림자를 머금은 채 새로운 서리를 만들며 내륙을 향해 파고 들었다. 악마가 손짓한 곰팡이처럼 퍼져 나간 서리는 벽돌 틈, 건물 안을 가리지 않고 잠입했다. 현관문 사이 종이 한 장만 허락할 수 있는 좁은 공간에 잠입한 서리는 따뜻한 저녁 식사를 준비 중이던 가정의 테이블과 촛등, 상수관까지 얼렸다. 액체 상태의 물이 그대로 돌처럼 변하면서 파이프까지 터뜨렸다. 얼음이 쇠파이프를 터뜨리는 파열음이 온 가정집과 땅 속에서 울려 퍼졌으며, 그 소리가 합창처럼 동시에 터져 나오니 땅이 다 울릴 정도였다.



갓 도착한 바람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정통으로 맞은 이들은 냉기가 그대로 살 속에 파고 드는 것을 느끼며 주저 앉았다. 짐 때문에 건물 뒤나 안으로 숨을 틈이 없던 인부들과 평야 한 가운데에서 남는 이삭을 줍는데 서두르던 아낙들이 그랬다. 몇 걸음만 달려가면 숨을 곳이 있던 클로디아는 당장 폭풍을 피할 틈을 벌었다. 숨은 건물은 해안에 위치한 작은 성당이었다. 막 미사가 시작되려던 그곳은 노란 불빛과 포근한 온기와 부드러운 미소가 아직 가시지 않은 장소였다. 



"모두 남쪽으로 피해야 합니다!"



 바깥의, 야외에서의 종말을 보고 온 그녀가 모든 신자들과 신부에게 외친 말이었다. 파리로? 무슨 이유로? 지금 미사 시간인 거 안 보이나? 저 파리 억양을 쓰는 아가씨는 누고? 당황한 이들이 떠들었다. 



"무슨 일입니까."



제단에서 갈색 가죽 커버를 가진 성경을 펼치던 신부가 질문을 던졌다. 클로디아는 이미 전력을 다해 도망치느라 말할 힘과 호흡을 '떠나야 한다' 한마디에 바친 상태였기에, 등을 돌려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으로 대신 답했다.



"저거.. 저거 눈 아니야?"



"8월에 눈보라라니!"



"진짠지 가짠지 봐야겠는데?"



 그러나 밖으로 나가려던 자는 아무도 없었다. 폭풍이 성당 바깥을 맴돌며 건물 외벽과 지붕을 억세게 짓눌러 생긴 소음과, 벽돌 건물조차 온전히 유지하지 못하여 발생한 웅장한 진동은 모든 시민들을 침묵 시켰다. 그리고 머지 않은 곳에는, 뎅뎅뎅. 뎅뎅뎅. 두 손을 가진 사람은 도저히 낼 수 없는 속도의 박자를 종이 만들어내고 있음을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 강풍에 휘날리며, 균형을 잡아 줄 종지기를 잃어버린 교회 종은 마치 강풍에 최후의 매듭에 의존하고 있는 깃발처럼, 놋쇠 고리 하나에 의존하며 날아가는 것만 견뎌 내었다.



 충격에 빠진 모든 이들은 감히 밖으로 달아나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너가 나가라, 니가 나가라. 서로 바깥에 나가는 것을 떠넘기고, 깨진 창문 너머 얼어붙은 풍경을 확인하며 세상의 끝을 다시 상기하는 시민들은 명백한 사실을 폭로했다. 고요함은 물러나고 공포와 당혹감이 온 성당을 가득 메웠다. 아니야, 8월에 눈보라라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침묵을 지키고 있던 어느 남자가 외쳤다. 그는 스위스의 늙은 나무꾼처럼 갈색 수염이 잔뜩 나있었고, 강인한 눈매는 신의 존재를 믿어 의심치 않는 열성적인 신도의 것과 같았다.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오로지 마녀만 가능한 일이겠지! 동지들, 걱정들 말게. 의심이 들면, 저 천장을 보게.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의 것만큼은 못하지만, 우리의 목자가 계심은 똑같지 아니한가? 저 손가락들 사이, 하느님과 아담의 손가락 사이의 절묘한 틈을 보게. 머지않아 그분은 우리의 차가운 손을 잡아 주시니 두려워할 것 없어라! 그분은 우리를 이끌고 마실 물이 있는 언덕으로 인도하시네. 자, 다 같이 기도하자. 이런 일은 전부 허깨비, 사이렌의 악령에 불과하다고 믿자고!"



"저기, 여러분. 천장을 보십시오. 끝났습니다."



"무슨 문제 있습니까 신부님?"



그는 나무꾼 같은 남자에게 당당함을 전부 잃은 것처럼, 겁 먹은 양 한 마리가 되어 벌벌 떨며 천장만을 바라보았다. 기도를 위해 모은 손마저 서서히 풀리고 있었다. 신부의 오른손이 천장을 가리키기 시작할 무렵에야 남자도 시선을 옮겼는데, 용감하기 그지없던 그조차 충격에 빠뜨리는 상황이 벌어졌음이 드러났다. 천장 벽화 속에 아담과 신의 사이, 정확히는 서로 닿기 직전의 두 손 사이에 시퍼런 서리가 스며들고, 얼룩 같은 서리 한 가운데를, 빛이 들어오지 못해 검은 선으로 보이는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두 존재의 사이에는 붓으로 그은 듯한 균열이 생겼으며, 끝내 한 존재가 떨어져 나갔다. 




-------------------


ㅎㅇ. 원래 겨울왕국 IF 소설 'Let It Come을 연재하던 갤러야. 겨울 내내 공부하는 게 생겨서 연재를 미루고 미뤘는데, 어느새 프갤에 문학을 찾기가 어려워졌더라고. 내가 쓰던 거도 많이 잊혀진 거 같아. 그래서 이 기회에 새롭게 리부트 겸 프리퀼을 써보려고 해. 아직 완결도 못한 문학 프리퀼을 쓰는 게 이상하긴 한데, 그래도 이참에 완전 새 소설을 쓰는 게 좋을 거 같아서.


'겨울의 공화국'은 겨울왕국 제목을 조금 비틀어서 써본 제목이야. 왠지 비슷한 제목의 문학이 있었을 법 하네.

 '여왕님의 마법을 전혀 모르던 사람들이 마법을 보게 된다면, 그리고 그 사람들이 외국인이라면?'이라는 발상이 들어서 써봤어. 앞에서 서술 되기도 했지만 소설 배경은 19세기 여름의 프랑스이지. 다른 나라의 시점에서 보는 프1 스토리다보니 여왕님과 공주님은 주역으로 나오기 어려울 수 있겠다. 대신에 Let It Come에서 주인공이던 '클로디아'의 과거사와 게임 '프로스트펑크'의 뉴런던 같은 도시의 초창기가 다뤄질 예정임. 담편도 많이 기대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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