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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문참가/순수문학] 썰물

위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1.01.28 18: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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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물



고요한 여왕의 집무실 안은 장작 타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거센 겨울바람이 부는 날씨였으나, 그녀를 감싼 모든 것들은 안온했다. 여왕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벽난로 앞 흔들의자로 가 앉았다. 시간이 지나 취향은 바뀌어, 어느덧 그녀도 벽난로 앞에서 타오르는 장작불을 보며 지난날을 추억하는 것을 즐기게 되었다. 오래된 흔들의자가 끼익 소리를 내며 여왕을 요람에 든 아이마냥 흔들었다. 흔들의자의 움직임에 따라 얼굴에 파인 고랑이 훤히 드러났다. 


낡은 경첩이 누군가의 발걸음을 짧게 노래했다. 


“안나. 밖에 눈이 와요.”


여왕, 안나는 대답 대신 미소지었다. 안나는 목소리의 주인이 올라프라는 것을 듣기도 전에 알아맞혔다. 그녀의 동생이나 다름없는 눈사람이 제 몸통만한 쟁반을 들고 안나에게 걸어오고 있음을, 그녀는 눈을 뜨지 않고서도 알 수 있었다. 


“여기, 안나도 핫 초코를 마셔요. 이런 날엔 핫 초코를 마셔야 한다는 걸 가르쳐 드리지요.”

“고맙구나 올라프. 그리고 그건 내가 가르쳐준 것 같은데, 아니니?”


올라프는 스벤의 투레질과 닮은 웃음을 짓고선 안나의 다리에 기대앉았다. 둘은 아무 말 없이 벽난로를 바라보며 핫 초코를 마셨다. 


올라프는 안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세월은 느리지만 확실하게 안나의 붉은 머리카락 색을 빼앗아갔다. 새봄에 피워올리는 붉은 튤립이 피었던 자리엔 흰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올라프는 자신의 나뭇가지 손을 뻗었다. 거칠거칠하며 앙상한 나뭇가지에 변한 것은, 없었다.


“안나, 안나의 머리에도 눈이 내려앉았네요.”

“그럴 나이가 됐지.”


안나가 맞이하는 일흔 번째의 겨울이었다. 안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은 평온했다. 세월이 흘러 아토할란 너머로 먼저 떠난 크리스토프의 빈자리는 헛헛했지만, 장녀 엘리와 아들 휴고가 있었기에 견뎌낼 수 있었다. 여전히 젊고 아름다운 그녀의 언니도 그리웠지만, 원래 나이들면 형제자매와 멀어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안나의 빛바랜 청록빛 눈동자는 축 늘어진 눈꺼풀 뒤로 슬몃 숨어버렸다. 힘을 잃은 눈꺼풀은 영사막이 되어 크리스토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그때 그 사람, 그 모습 그대로. 든든했던 풍채는 조금 작아졌지만, 여전히 아름드리 나무를 연상시키는 사람. 찬란했던 이파리들에 서리가 내렸지만 여전히 쉴 그늘을 내어주는 남자.


“그러고 보니 크리스토프 머리가 새하얗게 세었지.”

“원래 사내답지 못한 금발이라, 금방이었죠.”

“그러고 보니 올라프, 지난달에 히긴스네 공방이 염색약을 출시했다고 하지 않았니?”

“네?”


올라프는 마시던 핫 초코를 입에서 떼었다. 그리고 어느새 눈을 또렷이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자매와 다름없는 여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안나를 마주 바라보았다. 히긴스가 작년에 사고로 죽었을 때, 안나는 많이도 슬퍼했었다.

올라프의 시선은 도망치듯 모닥불로 급히 향했다.


“히긴스의 염색약을 좀 사와야겠다. 크리스토프의 머릴 예쁘게 염색해 주는 거야.”


올라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짓궂은 농담인가? 아니, 올라프가 아는 안나는 이런 농담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스스로 국장을 치렀던 그녀의 남편이다. 올라프의 짧다란 나뭇가지 손가락이 서글프게 떨렸다. 

잊고 싶고, 외면하고 싶었던 안나의 모습들이 그에게 밀물처럼 밀려왔다. 길을 못 찾던 안나, 아들을 향해 남편의 이름을 불렀던 안나, 요새 깜빡깜빡 한다며 멋쩍게 웃었던 안나....


“제가 사 올게요. 염색한 크리스토프를 엘사도 본다면 멋질 것 같아요.”


올라프는 얼어붙은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지었다. 안나도 마주 미소지어주었다. 그녀가 웃자, 얼굴의 주름들이 있어야 할 자리를 찾은 것 같이 차르르 접혔다. 


“고맙구나.”


여왕의 숨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느려졌다. 이윽고 느리지만 규칙적인 숨소리가 여왕의 집무실 안을 가득 채웠을 때, 올라프의 얼굴엔 절망이 어렸다. 

올라프는 바로 이 순간, 엘사가 자신의 옆에 있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엘사도 이 모습을 보았기를, 그리고 자신과 함께 안나의 옆을 지킬 수 있기를 바랐다. 


그는 그저 아무 말 없이 주름진 손에서 빈 코코아 잔을 받아들었다. 



****



올라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엘사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아토할란에서 돌아온 엘사는 올라프의 방을 가장 먼저 찾았다. 올라프는 미소지으며 엘사를 맞았다. 누구도 밟지 않은 설원을 닮은 흰 피부의 여인의 서늘한 손가락이 올라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시간이 된 거니?”

“...오랜만이에요, 엘사. 보고 싶었어요.”


담담한 듯 입을 열었지만, 올라프는 그녀가 굉장히 동요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행복한 눈사람’ 올라프는 최대한 웃으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엘사는 그의 눈에서 원망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엘사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올라프, 웃지 않아도 돼.”


다 이해한다는 듯 엘사는 허락했다. 그녀 스스로도 무엇을 허락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그가 무엇을 그리 애써 참고 있는지 그녀만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으리라. 


“크리스토프의 장례식 이후로 못 뵀으니까, 5년만이군요.”


창문 너머로부터 부서지듯 내린 프리즘이 올라프의 결점 없는 눈송이 위에 내려앉았다. 영원히 얼어붙어 변치 않을 그 눈송이 위로 그의 뜨거운 눈물이 지나간 흔적이 남았다. 한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엘사는 장례식 이후로 아렌델에 돌아오지 않았다. 푸른 눈동자가 주름 하나 없는 눈두덩이 뒤로 숨었다. 


“엘사, 그 얼음 동굴 속엔 답이 있던가요?”


결국 올라프는 원망을 쏟아내고 말았다. 해피엔딩인 줄 알았던 비극의 프롤로그에서 그만 내버려두고 도망친 창조주를 향한 배신감이 엘사의 가슴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미안하다, 올라프.”


엘사는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다. 그저 사과하며 올라프를 조용히 안아주었을 뿐이었다. 자매를 떠나보낼 준비가 되지 않은 올라프는 꺽꺽대며 울었다. 


그가 항상 좋아하던 엘사의 주름 하나 없는 새하얀 피부도, 살짝 서늘한 드레스의 반짝임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조용히 떨어지던 차가운 눈물방울이 점점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그녀를 찢어 놓았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로 올라프는 엘사에게 안겨 울었다. 



****



젊은날, 자매가 모두 젊었었던 그 나날에, 그녀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인 정령이 되기를 받아들였을 때는 모두가 행복해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녀는 항상 원해 마지않던 자유를 얻었고, 그녀의 여동생에게는 항상 원해 마지않던 돌볼 사람들이 생겼다. 


‘그래. 이제 모두 제자리로 돌아온 거야.’


자신을 마다하지 않는 백마를 타고 산으로 들로 실컷 달리며, 자신을 숨길 필요도, 의무도 없는 곳에서 지내는 생활. 때로는 그리운 아렌델로 돌아가 가족들과 한때를 보낼 수 있는 생활이 더는 완벽하지 않게 된 것은 그 젊은 날로부터 10년이 채 지나지 않았던 때였다. 


“언니! 아무리 제시어가 얼음이라고 해도 그렇지, 마법을 쓰면 어떡하냐구!”

“안나, 엘사한테 얼음 마법을 쓰지 말라니, 그건 좀 과하죠.”

“크리스토프! 지금 언니랑 같은 편이라고 편드는 거예요?”

“아... 아뇨! 내가 언제요!”


부부는 평소처럼 티격태격했다. 젊은 부부는 아이를 둘 낳았음에도 여전히 소년 소녀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엘사는 후후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찻물이 그녀의 웃음소리에 맞춰 기분 좋게 찰랑이고 있었다.


“안나, 어찌됐든 이긴 건 이긴 거야.”

“치사해! 뭐라고 말좀 해 봐, 올라프!”

“네? 뭐라구요, 여왕님?”


안나는 올라프를 돌아보았다. 아직 어린 엘리의 두 팔이 올라프의 머리 부분을 꼭 끌어안았지만, 팔이 짧아 꼭 올라프의 귀를 막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안나, 전 좀 바빠서요! 엘리 공주님이 귀를 막아서 안 들려요!”

“그래, 그래 보이네.”


안나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엘사가 앉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더니 엘사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엘사는 조심스레 찻잔을 티테이블에 내려놓고 안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삐죽대던 입술이 제 언니의 서늘한 손길 몇 번에 진정되었다. 


“다음번에 아기를 설명할 때 엘리를 데려와야겠어.”


중얼거림을 멈춘 아렌델의 여왕은 파자마를 입은 채 언니의 무릎에서 크게 하품했다. 


엘사는 이 순간이 너무나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모든 구름이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것처럼 원하는 만큼 자유로울 수 있고, 모든 배가 항구를 향해 떠도는 것처럼 돌아올 가족이 있었다. 사랑스러운 동생, 탐탁찮았지만 점점 배우고 있는 제부, 그리고 동생을 쏙 빼닮은 아이. 엘리의 머리카락은 안나의 것처럼 붉고 파도처럼 굽이치며 흐르고 있었다. 그 순간, 엘사는 안나의 머리카락에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안나, 이게 뭐야?”


엘사의 목소리가 희미한 공포를 품고 있었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밀려드는 공포를 끝없이 부정하는 그녀의 손끝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남아있는 실낱같은 인내심으로 안나에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보여주었다. 


안나는 엘사가 건넨 자신의 머리카락을 별것 아니라는 듯 뽑아버렸다. 


“아. 이거? 새치야. 이제 슬슬 그럴 나이가 됐지.”

“새치라고?”


엘사가 충격받은 듯 목소리를 높였다. 


“엘리! 언니, 왜 그래, 엘리 울잖아.”

“미, 미안해. 당황해서...”


안나는 울음을 터트린 엘리를 품에 안고 벽난로 앞 흔들의자에 가 앉았다. 언제나 더워서 싫어하는 자리였지만 딸아이가 흔들의자에 앉아 얼러주면 쉽게 잠이 들었기에 안나는 그곳으로 향했다. 


엘사는, 흔들거리며 그녀의 동생의 얼굴을 비추는 불빛을 보았다. 벽난로의 불꽃은 있는 힘껏 빛을 내뿜었다. 그녀가 외면하고 싶어도 너무 밝아 그러지 못할 정도로 밝은 빛이었다. 소녀 시절에는 없었던 입가의 미세한 주름이나, 웃을 때 접히는 눈가에 남겨진 흔적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녀의 동생은 나이가 들었다. 모든 순간이 완벽해서 동생이 어머니가 되었고, 아이들이 자라는 만큼 동생은 나이 들어간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아토할란에 얼어붙은 엘사는 시간의 흐름을 거의 느끼지 못했던 자신을 원망했다. 그저 시간은 엘사에게 있어 자연이 옷을 갈아입을 시기에 불과했다. 때로는 안나와의 약속이라는 의미도 가졌지만, 대부분의 시간동안 엘사는 시간을 의식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얼마나 뼈저린 실책인가. 엘사는 자신의 온몸을 관통하는 감정을 간신히 제어했다. 


“언니, 왜 새치 때문에 놀란 거야? 어차피 다들 나이 들면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건데. 언니도 곧 생길 거야.”


안나는 조용히, 아이를 어르며 말했다. 안나의 품에서 붉은 머리카락의 여자아이가 눈꺼풀을 바르르 떨었다. 안나의 입가에 주름을 남기며 아름다운 미소가 걸렸다.


“...미안, 안나.”


엘사는 그 자리에서 당장 도망치고 싶었다. 당장 도망쳐 애도하고 싶었다. 애도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엘사 스스로는 알고 있었다. 스스로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자연의 일부분이 되어 늙지도, 죽지도 않게 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언젠가 동생을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나 색채가 없는 자신의 머리카락보다 안나의 석양빛 머리카락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머리카락에 흰색 머리카락을 가진 채 저주를 풀고 본연의 색을 되찾았을 때, 엘사는 안나가 흰 머리카락을 되찾게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비극의 서막이었다.



****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왕실 수석 의원은 우물쭈물하며 엘사를 힐끔 보았다. 어찌하여 이 석상같이 아름답고, 달빛을 받은 대리석같이 피부에서 희미하게 빛이 나는 젊은 여성이 자신의 환자인 늙은 여왕의 언니라는 것일까. 엘사는 의원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손짓으로 사람들을 물렸다. 


여왕의 침실은 순식간에 텅 비었다. 절망적인 표정의 엘사와 올라프와는 달리 잠든 여왕의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올라프, 네가 가장 잘 알겠지.”

“엘사, 당신도 모두 보고 있었을 거잖아요.”


올라프의 말은 사실이었다. 모든 과거가 얼어붙는 아토할란은 매일 그녀의 동생을 한 발자국 뒤에서 따라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동안 엘사가 본 안나의 모습은 평범했다. 대부분의 일을 엘리에게 넘겨주고 퇴임식을 준비하는 모습, 흔들의자 앞에서 핫 초코를 먹는 모습, 가끔 조용히 산책하러 나가는 모습....


“엘사, 안나는 치매예요.”


올라프의 말이 현실을 날카롭게 꿰뚫었다. 치매. 엘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영원히 모든 것을 잊을 수 없는 엘사의 숙명과는 정 반대편의 병이었다. 모든 것을 잊고, 잊고, 잊어서 아토할란의 새하얀 눈송이들 중 하나가 될 때까지 그렇게 모든 것을 흘려보내는 병. 


“...알고 있어.”

“답은, 못 찾았죠?”


크리스토프가 죽고 난 뒤, 안나 그 어느 때보다 가족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때 엘사는 안나와 함께 있어 주지 않고 아토할란에서 나오지 않았다. 올라프는 엘사를 이해했다. 그녀가 가진 두려움을, 죽음에 대한 공포를, 도망칠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주 작은 눈송이들이 모여 설원을 이루듯, 원망이 쌓여만 갔다.


“답, 못 찾을 걸 알았잖아요.”


그녀의 동생이 걸린 시간이라는 병에서 완치할 방도를 찾아,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얼음으로 만든 도서관을 뒤진 엘사였다. 더 빠른 시일 내에, 더 확실한 방법으로.... 그 완전하고 불안정한 집착에 대한 답은 어디에도 없었다. 동방의 황제가 찾아다녔다던 약초의 위치도, 하늘의 신들이 나눠 마셨다던 음료의 제작법도 아토할란은 알려주지 않았다.


“미안해...”


빛나는 여신의 형상이 잠든 노인의 머리맡에 무릎을 꿇었다. 마치 신전에서 용서를 구하듯, 입술이 달싹거리며 자신의 죄를, 자신의 외로움을 낱낱이 고하고 있었다. 올라프는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님을 알고 천천히 방문을 나섰다. 그저 혼자 남게 될 것이 두려웠던 창조주가, 그를 혼자 남겨두고 떠난 것에 대한 원망은 스스로의 고통만으로도 충분하리라.


완전히 흰색으로 뒤덮여버린 안나의 머리카락을 새하얀 손가락이 쓸어내렸다. 속삭이듯 입술 사이로 내뱉은 동생의 이름은 당사자에게 닿지 못하고 연기처럼 흩어졌다. 항상 얼음 동상 같던 엘사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제 정말로, 홀로 남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



안나의 기억은 빠르게 거슬러 올라갔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안나는 엘사가 5년동안 아토할란에서 두문불출했다는 사실은 물론, 크리스토프의 죽음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였다. 


“어머... 아니, 안나.”


크리스토프를 똑 닮은 아들 휴고의 팔짱을 끼고 활짝 웃는 안나의 모습을 보며 엘사는 어쩔 수 없이 웃었다. 어쩌겠는가. 지금이라도 아토할란에서 벗어나 자신도 죽게 해달라고 빌어봤자 저 고집불통 정령들은 듣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엘사는 자신을 저주하고, 저주했다. 그깟 자유, 그깟 해방 때문에 나는 동생의 삶을, 내 삶을 망쳐버린 것이다. 순리대로라면 나는 동생과 함께 늙어가고 있었겠지. 그런데 왜 동생의 기억은 미리 아토할란으로 돌아가고 있고, 나는 그 너머의 동생과 절대 만날 수 없는가. 두서없는 생각들이 엘사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올라프는 걱정스럽다는 듯 엘사의 손을 잡았다. 거친 나뭇가지가 차갑지만 부드러운 손등에 내려앉았다. 


“엘사, 당신 잘못이 아니잖아요.”


올라프는 배신자이자 동지인 엘사를 향해 위로를 건넸다. 안나는 창밖을 보며 둘의 분위기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다. 


“뭐야, 둘이도 싸울 때가 있어?”

“안나랑 크리스토프도 싸우잖아요.”

“그거야, 크리스토프가 이상하니까.”


안나는 곁에 서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서 있는 휴고를 흘겨보았다. 눈물 많고 순한 휴고는 매일 밤마다 어머니를 보러오지도 못하는 누나에게 어머니의 안부를 말해주었다. 안나는 자신과 너무 닮은 엘리를 보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엘리는 어머니의 모습을 잘 보지 못했다.


하루하루 걱정으로 말라가는 조카의 생각을 하자 엘사의 얼굴이 더욱 슬퍼졌다. 안나는 엘사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웃고 있는 눈의 정령의 눈동자가 슬퍼 보인다는 것쯤은 일흔의 노인에게 너무나 명백히 잘 보였다.


“언니, 이럴 땐 딱 좋은 것이 있지.”


안나는 품속에서 붉은 색 먼지덩이처럼 보이는 것을 꺼냈다. 엘사는 눈살을 찌푸렸으나 이내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너무나 낡아버린 어머니의 노덜드라 스카프였다. 도대체 언제 저걸 숨겨두고 있었던 거야.... 건강에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엘사는 안나의 품에서 그것을 빼앗으려고 했다.


“안나, 그건...!”

“그래. 엄마의 스카프야.”


안나는 엘사의 손을 아픈 노인이 그랬다고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르게 피하더니 스카프를 엘사의 어깨에 두르고야 말았다. 악취가 풍겨왔지만 안나는 환히 웃었다. 주름이 제 자리를 찾아들어가며 천천히 아코디언이 연주하듯, 안나의 주름투성이 입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다 저편, 북쪽에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강...”


시간을 담고 있는 갈라진 노인의 목소리가 어머니의 자장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 가사를 잊어버렸을 법도 하건만. 안나는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어머니의 자장가를 불러주었다. 코를 쓸어내리는 특유의 제스쳐에 엘사는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어때, 좀 괜찮아? 하암, 나는 좀 졸려.”

“그래, 안나. 먼저 자렴.”


엘사는 안나의 머리를 조심스레 침대에 뉘였다. 창밖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아름다운 오후였다. 휴고도, 올라프도, 엘리도 없는 그 순간, 엘사는 비밀을 고백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나, 내가 비밀 하나 알려줄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엘사는 거칠고 푸석푸석한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 


“기억의 강은, 얼어붙은 빙하다? 그거 몰랐지?”


안나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를 그녀의 동생에게 하고 싶었던 고백. 너는 항상 강물 속에서 얼어붙어 있을 거라는 잔인한 진실. 자신은 그 강을 영원토록 건너지 못할 것이라는 말은 엘사의 구중에 맴돌았다. 주름 없는 서늘한 손가락이 여동생의 주름진 얼굴을 쓰다듬었다. 노인의 눈꺼풀은 마치 얼어붙은 것 같이 단단했다. 엘사는 이 순간을, 이렇게 얼어붙게 하고 싶지 않았다.


엘사는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그동안 동생에게 얼마나 고마움을 느꼈는지, 그동안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동안 얼마나 미안했는지.


그리고 그 기억은 아토할란에 오래도록 남아 엘사를 아프게 했다. 대답을 찾을 수 있었냐는 올라프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 날을 기다리며, 엘사는 아토할란의 눈보라 너머를 무한히 헤매고 있었다.




작가의 말


마치 용두사미라는 단어를 수식하기 위해 만들어진 글 같군요. 문학대회는 몇 번 참가해봤는데, 그때마다 제본 공구가 없어서 아쉬운 마음에 참가했는데 이번에 쓴 글이 제일 마음에 안드네요. 엘사와 안나가 자연과 인간을 잇는 두 다리 역할을 한다고 작중에서 표현했으나, 안나의 경우 정령이 되었는지에 대한 여부가 확실하지 않아 엘사가 정령이 되어 불로불사의 삶을 살며 소중한 가족들을 떠나보내지만 안나의 아이들을 만나고 또 손주들을 만나 많은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아름다운 정령이 되어가는...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너무 구절구절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유는 제가 현생이 바쁘단 핑계로 작품에 제대로 녹여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이 동시에 드네요... 다음이 있다면 더 좋은 작품으로 보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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