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탄: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jing&no=38896&page=1
잠깐만 이건 왜때문에 유저라이프간건데 잉??
대체 이 양반은 왜 이런데다가 별서를 지은건가?
땀을 한 바탕 흘린 후에야 시작된 욕......
아까의 팻말에서 1km를 더 걸어서
마을과 마을 사이로 돌아돌아 들어가도
송촌리라는 마을 이름이 보여도 한음의 별서터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대체 왜 이런데다가 집을 지었을까?
이렇게 깊숙한 곳까지 집을 짓고 싶었을까?
여름에 벌레도 많을 텐데
한음에 대한 욕과 원망을 찰지게 하며
갔던 길 되돌아가고
다시 한번 더 지도를 펼치고를 두 세번
마지막으로 여기겠지, 싶어서 산 아래에 자리잡은 마을로
향하던 와중
한 마을 어귀로 보이는 곳에서
이 것을 발견했다
4. 찾았다!
오 마이 갓!
송촌2리, 마을의 애칭같은 이름 '한음골'
드디어 왔다!
한음의 시비, 마음껏 취하니 자신이 죽은 이백과 친구먹어도 되겠다며
우리가 아는 이덕형과는다른 여유를 한껏 뽐내는 그 시비를 거쳐
그 옆 팻말이 가리키는 길로
한 걸음, 두 걸음을 옮겼어
마을은 참 아기자기했고
어르신들만 살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도시에서 온 젊은 부부들이 지은 예쁜 집과
오래된 기와집을 개조해서 만든, 노후를 보내기 위한 아름다운 집들
그리고 돌담길로 가득했었어
이 주변을 한번 갈 거라면
그런 집들을 보는 재미도 있을 거 같아
(실제로 이 집중 하나는 리ㅂ센ㅅ인가 잡지에 스몰하우스의 한 사례로 소개되기도 했었지)
골목을 돌고
언덕을 올라
열심히 여름 밭일을 하시는 어르신들을 지나니
그 언덕의 끝에 있었던 팻말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 그 끝에 있는 말 동상이 보이시는가?
드디어 도착한 한음의 별서터
들어서는 순간 이제까지의 욕과 땀은 모두 안녕~
'터'이기 때문에 그 곳에서 더 이상 집의 흔적을 찾을 순 없으나
누군가의 집과 집이 있는 그 사이에
이렇게 터와 그를 기리는 흔적을 남겨
보여주시는 그 노력에 그래도 감사할 따름이었어
화살표를 따라 들어가면 이렇게 말 동상과,
그 말 동상 옆에 있는 상하마석
그리고 그 앞으로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있다고 한다
지금은 집이 있을법한 터에
다른 누군가의 집이 세워져 있어
여기에 적힌 설명에 따르면
한음이 대아당을 지으며
그 양 옆으로 이로정과 음수정이라는 정자를 함께 지었다고 하는데
(소박한 집이라며...정자라니 ㄷㄷㄷ)
지금은 음수정이라는 정자만이 지금 집 터에 자리잡은 그 집의 앞에
새로이 복원이 되어 있어
그리고 이 곳에 별서터임을 알리는 비석 하나
5. 두 그루의 은행나무
아까도 얘기했지만
별서 터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말동상이 아니라 두 그루의 거대한 은행나무야
이 나무들의 나이는 400년,
이쯤되면 감이 잡히지?
별서는 한음이 영의정이 된 후 아버지를 모시려고 여기에 만든건데
그즈음이면 1600년대 초반
당연히 이 은행나무들도
한음이 심었다는 소리!
그리고 굳이 두 그루인데다가
믿거나말거나지만 이렇게 이유를 붙였다고 한다
흑흑 ㅜㅜ 그런 거였어......
전설의 고향같은 소리 하나는 이 나무가 625전쟁때 웅웅 울었다란 이야기가 내려오고 있어;;;
하지만 400년 오래 묵으신 나무님들 답게
이렇게 약도 드시고 계시는......
그래도 400년을 이렇게 이 자리에서 묵묵히 버티고 서 있는
나무들이 대견했어
시골에서 본, 많은 나무들이
150년, 많아봤자 300년 된 나무들인 터라
이렇게 버티고 있는건 만으로도,
시간을 거슬러서 그 흔적들을 담고 서 있는 것 만으로도
고마웠어
사실이면 좋겠다는 지극한 덕후의 심정
역사적으로도 두 사람이 참 짝짝쿵짝짝쿵 마음이 잘 맞았던 사람이기에
그랬으면 좋겠다, 라는 바람을 담아본다.
나무들이 부디 오래 이 자리를 지켜
100년 후에도 그 이야기들을 지켜주길 바랄 뿐이지
(왜 굳이 은행나무인가, 두 그루인가, 란 얘기에 대해선 이런 생각이 드는데
공자가 과거 행단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하지
그래서 은행나무가 나름 선비들을 상징하는 나무라 알고 있음.
한음도 자신의 별서에 그런 의미를 부여한 것은 아닐까, 란 추측을 해 봄
실제로 성균관 명륜당에도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심겨져 있지?!)
5. 느낌, 생각
음수정 옆에 놓여있었던, 대아당에 대한 설명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그리고 모친의 무덤(드라마엔 나오지 않았지만 한음의 모친 역시 전란 중에 세상을 뜨셨다고 함) 근처에
이렇게 지었던 집,
정말 집 앞에서 조금만 더 내려가면
북한강의 풍광이 보였기 때문에
조상님들의 탁월한 택지 능력에 엄지를 척! 들었지 ㅎㅎ
여담으로 남인 계열 사람들은
그렇게 강을 좋아하나? 싶은게
서애쌤의 고향인 하회마을도 강 근처
한음의 별서 역시 북한강 근처,
마지막으로 아주 멀고먼 시간을 뛰어넘은 남인이지만
다산의 집 역시 이곳 근처라는 공통점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집이 단순한 '별서', 그러니 별장은 아니었어.
만년을 여유롭게 즐기려고 만든 곳이었으나
결국 이곳에서 한음이, 세상을 신음하다가 세상을 뜬 곳이었기에.
마흔 두살, 그 때로도 젊은 나이에
영의정에 오른 후
잠시 관직에 물러나 이곳에 처음 별서를 지을 때만 해도
한음은 그가 여기서 비통속에 세상을 뜨리라 생각하진 못했을 거야
그토록 사랑했던 그곳에서
삐뚤어져 돌아가는 세상과
그를 바로잡지 못했던 자신을 원망하며 죽었던
한음 이덕형의 삶이
이항복이 썼던 그의 묘지 내용과 함께 떠올라서
잠깐 먹먹해졌었어
나무 외에 또 볼 거린
한음이 실제로 사용했다던 상하마비석
실제로 말을 타고 내렸던 자리라 한다
아마 근처 북한강 근처로 말타고 달리셨을지도.,..?
아니면 한양에 종종 일이 있을 때 저렇게 왔다갔다 하셨던 자리일지도?
저걸 타고 정말 옆의 말동상에 올라타려했는데
윽....이걸 우째
생각보다 너무 높아서
실패!
대신 인증샷으로 이렇게 남긴다
요 위에 내 발!
6. 왜 아무것도 없는 자리를 방문하는가?
참 멀고 먼 길이었고
이날 걸은 거리를 다 환산해 보니 대략 5km 남짓?!
(다이어트 하나는 제대로 됐겠군?!)
그러나 강바람과 산바람이 함께 만나는 별서 터에서의 잠깐의 휴식은
잊을 수가 없었던 것 같다.
드라마 하나가
어떻게 한 사람에게 이런 곳까지 해쳐갈 수 있는지가
신기할 따름이고
또 누군가는 이런 말을 하겠지
'드라마일 뿐이고 거기 아무것도 없는데 왜 거기까지 가는건가?'
음, 난 이렇게 되물어보고 싶어
박물관에 가서 왜 유물을 보는지냐고.
그 자리에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쓰임새가 없는 물건이 박물관에 놓여있는게 무의미할텐데
왜 그걸 보러가냐고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해
그 박물관의 물건 하나를 통해
나와 그 물건을 사용했을, 그 물건을 스쳐지나갔을 수많은 사람들의 손길을
느끼고 생각할 수 있듯이
그 자리에 서는 것이
그 자리에 서고 살았던 그네들의
한숨과 삶, 생각들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적어도 징비록이란 드라마가
아니 어쩌면 수많은 사극들이 했던 역할도
그런게 아닐까
그때문에 그 스토리를 풍만하게 가져갔던 나 같은 사람이
그 장소를 찾게되고 그 누군가를 기억하게 되는게 아닐까 싶다
그건 누군가가 드라마 하나를 계기로
실록을 찾거나
그 사람의 문집을 찾는 것도 같은 이유에설꺼고
(물론 아무리 이렇게 이유를 붙여도 드라마가 끝나고 어딜가게 되는 건 성지순례의 성격이 강할 수 밖에 ...허허허허)
마지막으로 마무리를 지으며
참, 새소리와 바람소리, 물 흘러가는 소리만 들렸던
아름다운 북한강 사진 하나로!
어쩌면 400년 전, 한음도 이 자리를 거닐면서
많은 생각을 하고, 많은 시를 지었을 지도 모르겠다.
리얼 마무리!
(한음쌤이 생전 음수정에 올랐다면, 아마 이런 풍광을 보셨겠지?!)
한음별서터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방법은
중앙선 운길산역 하차>2번 출구로 나와서>슬로시티 길 팻말을 따라 열심히 걷는다 (내가 선택한 길)
아니면
중앙선 운길산역 하차>1번 출구 버스 정류장> 167번을 타고 연세중학교 앞 송촌2리 정류장인가에 내린다
요런 방법이 있음!!
다음은 어딜갈까?
예고편은 음슴 .....
진짜 끄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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