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5일

"주군의 태양이 꺼진 지, 375일.. 난 멸망하지 않았어."

개로리는 알람소리를 들으며 시간에 맞춰 일어났다. 어제 저녁부터 내리던 비가 아직 그치지 않았는지, 아니면 그쳤다가 다시 내리는지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태양 안 떴네.."

비가 오는 날이라 태양이 창 밖으로 보이지 않았다. 태양이 뜨지 않았다는 사실이, 앞으로 자신에게 주군의 태양이 뜨지 않을 거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아서 기분이 나빠졌다. 주군이 태양 기다릴 때는 375일 째 되던 날에 태양도 환하게 떴고, 저녁에 태양을 만났는데, 나샛기는 글렀구나.

주군의 태양이 꺼진 지 375일. 이게 축하할 일인지, 짠내난다고 울 일인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375일 동안 잘 버텼다. 그렇게 스스로를 칭찬했다. 다른 드라마를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주군의 태양을 떠나보내지는 않았다. 아, 그게 더 나쁜가? 안 잊었으니 뭐 어때. 바닥에 앚아 침대위에 팔을 올려 두 주먹을 포개어놓고 주군이 늘 그러던 것처럼 거기에 턱을 올렸다. 처음엔 불편했는데 오랫동안 그러지 않으면 이젠 그렇게 불편한 지는 모르겠다.

주군의 태양이 꺼졌으니, 개로리도 꺼지는 게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똥깨가 아니라면 다 같이 꺼지는 게 계산에 맞는데, 똥개가 되었나보다. 처음에는 여운이 남아 떠나보내지 못 했다. 디비디가 나올 때 까지만이라고 생각했다. 디비디를 기다리며 시상식에서의 투샷을 기대하며 열나게 투표를 했었다. 그랬는데, 뒤통수를 맞았다. 배우의 사정이야 개로리로서 당연히 이해하는 것이었지만 시상식은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시상식 이후에 점점 오기가 생겼다. 디비디를 받고 나서는 그 주옥같은 장면들을 다시 돌려보느라 떠나보내지를, 떠나지를 못 했다. 이렇게 오래 있을 생각은 아니었지만 어쩌다보니 날짜를 세며 기다리고 있었다. 기약없이 떠난 태양을 기다리는 주군 심정이 이랬을까. 자잘한 일들을 겪으며 375일이 되기를 기다렸다.

오늘이 375일 째가 되는 날이다.

멸망은 하지 않았다. 이젠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날만을 보며 날짜를 세고, 오기로 버텨왔다. 당연하지만 달라질 건 없었다. 꺼졌던 태양이 주군의 옆에 다시 뜬 건 애초에 예정되어있던 사실이었지만, 개로리들에게서 꺼진 주군의 태양은, 정말 끝이 났었으니까.

하루종일 그 생각이었다. 이젠 뭐 하지.

주군의 태양이 꺼진 지 375일이 되는 날도 저물어가고 있다. 하루종일 흐려서 코빼기도 비치지 않던 태양은 그렇게 또 져 버렸다.

하지만 개로리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지금 하고 있는 건 발악이라는 것을. 자신은 이미, 갈 때까지 갔다는 것을. 그리고 앞으로도 회전문을 돌리고 있을 것이란 것을. 

멸망하는 그 날까지. 발악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