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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보라 망상] 옴니버스 시리즈_아주 평범한 결혼기념일앱에서 작성

ㅇㅇ(119.194) 2016.12.22 02:40:39
조회 4019 추천 107 댓글 12

전편 링크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reply1988&no=1007256

원래 선보라 결혼기념일에 올리고 싶었지만 타이밍을 놓쳐서.. 선보라 보고 싶은 마음에 후다닥 놓고감



1987년의 어느날

손목시계를 한번 본 선우가 다시 한번 머리를 살짝 흔들어 정돈했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선우의 머릿속은 수학 수업 시간때보다 더 복잡하게 돌아갔다.

아까 목욕탕 갔다온 소리를 들었으니까 지금쯤이면 점심도 먹었겠고... 이번주엔 엠티도 없다고 했지? 그럼 오늘은 집에 있을테니... 마침 아줌마 아저씨도 우리집에 놀러 오셨고...

이리저리 계산을 끝낸 선우가 입술을 한번 굳게 앙 다물었다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덕선아-"

덕선이네 집 문을 조심스레 열며 선우가 얼른 부엌쪽을 바라봤다. 아무도 없는 싸늘한 그 곳을 보며 침을 한번 삼킨 선우가 다시 목소리를 내며 방 쪽을 기웃거렸다.

"덕선아- 성덕.."

드륵-
안쪽 방 문이 신경질적으로 열리며 살짝 심통난 표정의 보라의 얼굴이 나타났다. 자기도 모르게 나타난 반가운 표정이 무색하게 보라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선우를 맞았다.

"덕선이 지금 없는데. 뭐 또 빌리러 왔냐?"

"아, 누나 안녕하세요. 저기.. 자 좀 빌리려고요"

살짝 고개를 갸웃해보인 보라 머리가 사라지는가 싶더니 얼마 후 다시 나타났다.

"어디 있는지 못 찾겠는데. 급하게 필요해?"

선우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잠깐 생각한 보라가 말했다.

"일단 들어와, 그럼. 덕선이 곧 올꺼야"

자신의 세계를 뒤흔들만한 말을 툭 뱉고 사라진 보라의 뒷모습을 짚으며 선우가 가슴을 몰래 쓸어내렸다. 슬쩍 뒤를 돌아보며 문을 닫은 선우가 쭈뼛거리는 걸음으로 보라와 덕선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선우가 들어오든말든 관심 없다는 태도로 이미 자신의 책상에 앉아 뭔가를 열심히 끄적거리는 보라를 바라보며 선우가 문 가에 어색하게 몸을 구겨 앉았다. 다리를 꼬고 심각한 표정으로 볼펜을 움직이는 보라의 말간 얼굴에서 비누 내음마저 느껴지는 것 같아 선우는 그저 넋을 놓고 그 하얀 볼을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였다.

"아씨-"

갑자기 탁 펜을 내려놓는 기세에 괜히 혼자 찔려 펄쩍 뛰는 선우를 아는지 모르는지 혼자 머리를 벅벅 긁은 보라가 다시 펜을 들고 빙글빙글 돌렸다. 고심에 빠진 표정이 역력한 보라의 옆모습을 조심히 살핀 선우가 입을 열었다.

"누나, 무슨 문제 있으세요?"

선우의 조심스런 말투에 돌아본 보라가 입을 열듯하다가 선우의 눈치를 쓱 보고는 입을 금방 다물었다. 그리곤 한번 뾰족하게 입술을 모았다가 별거 아니라는듯 툭 내뱉었다.

"내일이 우리 부모님 결혼 기념일이거든. 애들은 꽃 사러 갔고 나보고는 카드 쓰라고 하는데 아무리 해도 내가 잘 쓰고 있는건지 모르겠다. 내가 이런걸 잘 못해서..."

"아.."

아버지를 잃은지 얼마 되지 않은 자신의 처지에 대한 보라의 숨은 망설임과 배려에 살짝 미소 지은 선우가 말했다.

"결혼기념일 축하드리고, 사랑한다고 쓰면 되죠, 그 이상이 어디있겠어요. 너무 고민 하지 마세요"

코 끝을 찡그리며 선우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보라가 카드를 한번 더 훑어봤다. 그런 보라를 보며 선우가 덧붙였다.

"사실 결혼기념일엔 아저씨랑 아줌마가 같이 있다는게 더 중요하잖아요. 저희 엄마랑 아빠도 그러셨거든요. 제가 카드 써서 드리는 것도 좋아하셨지만, 서로 결혼해줘서 고맙다 사랑한다 이런말 주고 받으실때 제일 행복해보이셨어요"

과거의 기억을 더듬으며 선우가 이어 말했다.

"아빠가 그러셨어요. 아침에 눈 떠서 엄마를 보고, 저랑 진주를 보는거 그 이상의 결혼기념일 선물은 없다고. 그러니까 너무 고민하지 마세요. 아저씨랑 아줌마, 어떤 카드 내용이라도 좋아하실꺼예요"

아련한 미소를 띄며 말하는 선우를 한참 응시한 보라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래, 아저씨다우시네"

책상으로 고개를 돌려 필기구를 정리하던 보라가 휙- 다시 선우 쪽을 봤다.

"선우 너도 분명 아저씨처럼 다정한 남편 될거 같다. 누가 너랑 결혼할지 엄청 부럽네"

평소 듣기 힘든 장난기섞인 말투로 선우의 마음을 뒤흔든 보라가 씩 웃으며 덧붙였다.

"내가 나중에 너랑 결혼할 사람한테 잊지 않고 꼭 말해줄께. 결혼기념일엔 꼭 니 옆에서 그런 간질거리는 말 해주라고"

말없이 눈을 깜빡이기만 하는 선우를 아는지 모르는지 한번 더 싱긋 웃은 보라가 미련없이 선우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와 동시에 떠들썩한 소리와 함께 덕선과 노을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어? 선우형, 왠일이야?"

"노을아 안녕. 덕선아, 나 자 좀 빌려줄래? 긴 걸로"

"자? 잠깐만. 찾아볼께"

덕선이 방 안으로 들어오자,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는 선우 옆으로 의자에서 일어난 보라가 스쳐 지나갔다. 옅은 샴푸 향기를 풍기며 집 밖으로 나가는 보라의 뒷모습을 자기도 모르게 눈으로 좇은 선우가 살짝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하아..."

어두운 방 안에선 작은 한숨마저 크게 울렸다. 잠자리에 든지 두어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잠이 오지 않는 자신을 탓하며 선우가 한번 더 몸을 뒤척였다가 눈을 천천히 떴다.

누가 너랑 결혼할지 엄청 부럽네-
내가 나중에 너랑 결혼할 사람한테 잊지않고 꼭 말해줄께-

낮에 들었던 보라의 말들이 귓가에서 계속 맴도는 기분에 선우가 한번 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좋았던 감정에 어느새 이렇게 욕심까지 더해졌는지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향해 있지 않는 보라의 마음도, 같은 성을 가졌다는 현실도 모두 자신의 편이 아닌 지금이 한층 더 무겁게 다가왔다.

그 사람이 누나였으면 좋겠어요. 절대 할 수 없는 그 말을 속으로 중얼거린 선우가 이불을 세게 쥐고는 머리 끝까지 뒤집어썼다. 보라에게서 났던 샴푸 향기가 아직도 은은하게 코 끝에 남아있는 듯했다.









...우야.... 선우야....

잠결에 어렴풋이 들리는 자신의 이름에 선우가 살풋 미간을 찡그렸다.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 벌써 아침인가 싶어 감기는 눈을 힘겹게 떴다. 이제 막 동이 텄는지 아직은 희미한 불 꺼진 방안을 대충 확인한 선우가 다시 눈을 감았다.

"선우야. 자기야, 잠깐 일어나봐"

다시 잠에 빠져들려하다가 들린 낯선 호칭에 응?하며 놀란 눈을 뜨며 몸을 반 일으킨 선우 눈 앞에 보라가 싱긋 미소짓고 있었다.

나 아직 꿈꾸고 있나?
얼떨떨한 표정으로 눈만 껌뻑이는 선우의 양 볼을 보라가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미안. 너 새벽에 들어와서 피곤한건 아는데 그래도 나 출근 하기 전에 얼굴 보고 말해야 할 거 같아서"

어슴푸레한 방 안에 금방 눈이 익은 선우가 깔끔한 치마 정장을 차려입은 보라의 모습을 훑었다가 다시 멍하니 보라 얼굴을 응시했다. 잠이 덜 깬 선우의 그 모습에 귀엽다는듯 살짝 웃은 보라가 선우의 얼굴을 꼭 잡은채 선우의 두 눈을 바라봤다.

"첫번째 결혼기념일 축하해. 나랑 결혼해줘서 고마워, 선우야"

그대로 쪽-하고 선우의 입술에 입맞춤을 한 보라가 미소지으며 덧붙였다.

"사랑해"

아, 나 보라랑 결혼했지. 꿈 속에서 지난 과거의 기억 한 자락을 더듬었다는걸 깨달은 선우가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보라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대로 침대에 다시 누웠다. 금새 보라에게서 선우에게로 향긋한 샴푸 내음이 풍겨왔다. 

"야, 나 출근해야돼"

"딱 오분만"

앙탈부리듯 말하는 품 안의 보라를 사랑스럽게 쳐다본 선우가 이번엔 자신이 보라에게 짧은 입맞춤을 했다.

"내가.. 진짜 사랑해, 보라야"

선우의 말에 미소 짓던 보라의 입술이 다시 다가온 선우의 입술 사이로 사라졌다. 평범하지만 아주 특별한 그들의 결혼기념일 아침이 그렇게 밝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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