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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상플) 불계 6

ㅁㅁㄴㅇ(218.209) 2017.04.09 08:52:34
조회 3562 추천 63 댓글 6


네모난 바둑판이 어지럽게 흔들린다. 잠을 못 잔것 때문일까, 예상보다 대국이 길게 흘러가서 그런 걸까.

택의 안경 너머로 선이 흐려진다. 따듯한 물 한 잔이 마시고 싶었다. 주륵 흘러내리려는 땀을 문질러 닦아낸 택은 다시 돌을 잘그락거린다.

길게 이어진 상대방의 집은 커 보이고 자신의 집은 작아보이기까지 한다. 앞으로 한집. 딱 한집 반이 부족했다. 앞으로 세도, 뒤로 세도.


-톡.


길게 이어진 줄이 끊기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돌을 내려놓은 택은 다시한번 마음속으로 계가를 한다.

확실한 승리를 위해 한집 반. 딱 그게 손에 닿지 않는다.


-따악.


'덕선아.'


-딱.

-따악.


'우리.'


길고 긴 장고의 시간이 지나가면 지나갈수록, 선밖에 보이지 않는다. 흐르던 땀도 멈추고 공기조차 멈춰버린 기분이었다.

답답하다. 먼지가 내려앉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영화볼까?'


-달칵.


한 박자 느리게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할 때, 누군가가 손 끝으로 바둑판을 두드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기로 놓으면 어때? 여긴 돌 놓는 데 아니야? 택은 흐릿한 눈가를 손가락으로 문지르고는 돌을 내려놓는다.

상대방의 대로변을 깎아, 잘라내는 작고.. 말없는 묵묵한 돌맹이 하나.


'영화보자, 우리.'


상대방은 잠시 그 수를 바라보다가 아미를 찡그리고는 이마를 손으로 문질렀다.


'영화..보자. 우리.'



~~~


종로 피카디리. 저녁 6시 30분. 2관. 마지막 황제. 표 두개.


저녁 6시 30분. 청소년 표 두장이요.


수십번이고 머릿속에서 되뇌였던 그 말이 잊혀질까 두려워 택은 손바닥 안에다가 볼펜으로 써 놓기까지 했다.

종로까지 오는 길은 굉장히 험난했다. 눈이 천근이고 만근이라, 택시를 잡아 타고 오지 않았다면 올 수나 있었을까.

급하게 잡아탄 택시 안에서 잠 십 분이라도 자지 못했다면 눈을 뜨지도 못했을 거야.

안경을 품 안으로 집어넣은 택은 천원짜리 지폐 몇 장을 지갑에서 주섬주섬 꺼내 택시 운전수 아저씨에게 건낸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넙죽 고개를 숙이고, 대답도 듣지 않고 택은 일어섰다. 커피라도 한 잔 마시고 나올 걸 그랬을까.

눈이 뻑뻑하다. 덕선이는 어디있지? 지금 시간은 몇시더라?


[아, 최택 6단 아니세요? 아. 저기, 싸인 부탁드릴게요.]

[죄송합니다. 잠시만요.. 죄송합니다.]


늦은건 아닌가, 뛰어가야 하는 걸까.

사람들의 파도 사이에서, 간간히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지나쳐간다. 그 와중에도 마비된 코, 몽롱하게 흐릿해진 눈

한 박자 늦게 들리는 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것 같은 촉감. 멀찌감치 머나먼 곳인지, 가까운 곳인지 모를 곳에서부터 들리는 목소리.


[택아. 왔어? 왠열, 너 되게 일찍 왔다?]

[안녕, 덕선아.]

택은 한쪽 눈을 껌뻑거리면서 웃음을 짓는다. 너무 멀리 서 있을줄 알았던 덕선은 어느세 바로 옆에 와서 어깨를 찰싹거렸다.


[오늘 대국 없었어? 늦게 끝날수도 있다며.]

[잘 끝내고 왔어.]

[이겼어?]
[응.]


택은 덕선의 손이 맵다는 듯이 손바닥이 닿은 부위를 문지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손바닥에 적어놓은 글귀를 잊어버릴까, 

그 간단한 한 마디 말을 덕선이 주위를 돌아보며 길거리 음식을 바라보는 동안 수십번 봤다가 감추기를 반복한다.

마침내 매표소가 다가오고, 택은 눈을 질끈 감았다 때면서 앞으로 다가가,


[청소년 두매... 청소년 두매..]

[여기 마지막황제 청소년 두매요! 야, 최택. 뭐해? 얼른 돈 내.]


~~~~~


꽤 추운 겨울이었다. 날도 추웠고 머릿속도 한참동안 굴려댄 탓인지 곤죽이 되어버린 모양이었다.

극장 안은 온풍이 제대로 도는지 안 도는지 모르겠다. 조금 지나자 한참동안 쌓아둔 피로가 한번에 몰려오는 것 같았다.


[야, 자?]


아니, 안자.

택은 눈을 껌뻑이면서 입을 오물거렸다. 좌석에 앉자 전등이 꺼진다. 어둑해질 때마다 극장 안에 단 둘만이 남은 기분이 드는 것 같았다.

내가 왜 이런 마음이 드는 걸까. 덕선이 옆에 있으면 맘이 따듯해지고 몸이 노곤해져. 안심이 되는 것 같다.


[영화 시작하면 깨워줘..]

[야, 바보야 이제 시작해!]
[...응, 나 안자.]

고개가 저절로 꾸벅거렸다. 바로 옆에 있는 덕선이 앉은 좌석에 둔 콜라라도 마실까 싶어 손을 뻗었다가 덕선의 새끼손가락에 손 끝이 닿는다.

전기에 감전당한 느낌이 이런 기분일까. 손 끝에 남는 감촉이 지워지질 않는다.


[덕선아. 영화 재미있어?]

[이제 시작했다니까... 최희동. 너 목소리 안 낮추면 진짜 두들겨 패준다?]

[알아.. 조용히 할게.]


주머니속에 몰래 들고 온 백돌 한알, 흑돌 한알이 어루만져진다. 정말, 이제 말 한마디 안하면 자버릴 것 같은데.

여기서 자 버리기에는 아쉬운데.. 덕선이 너랑 좀더 같이 이야기하고 싶은데.

목에 힘이 빠지는것 같아. 잠시 그녀의 손 끝에 닿았던 손가락을 무릎 앞에 모아 바라보자 눈가가 더 흐려진다.

이럴 때 왜 네 향기, 목소리.. 다 더 진하게 나고 들릴까. 택은 실눈으로 밖을 향해 뛰어나가는 푸이를 보다 말고 눈을 감는다.

이미 잠들어버린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녀의 어깨 위에 얼굴을 올린다.


[아후 최택 이새끼.. 일어나면 죽었어.]


짜증을 내며 속삭이는 목소리마저도 넌 왜 귀엽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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