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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상플) 봄볕 외전 - 풍래군상억

명워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5.07 23:41:16
조회 1504 추천 47 댓글 10

단오가 지나고 한 여름날, 잠에서 깬 비담은 오랜만에 머리맡에 놓여진 상자를 발견했다. 상자가 붉은 비단으로 감싸져 있는 것을 보고 비담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붉은색은 덕만이 좋아하는 색이었다. 덕만은 오늘 새벽 멀리 순시를 나갔으니 어젯밤 잠든 후 아니면 오늘 새벽에 왔다 갔을 것이다. 비담은 입가를 손으로 쓸며 밤사이 다녀갔을 부인님을 생각하면서 비단을 풀었다. 안에는 단정한 죽간으로 만든 부채가 있었다. 마침 한여름 더위때문에 잠을 설쳤던 비담은, 땀에 절었던 옷을 부치기 위해 부채를 활짝 폈다. 그리고 부채에 쓰여진 글귀를 발견하고 그것을 손바닥에 놓아 글귀를 읽었다.



억군무소증 憶君無所贈 그대를 생각하며 무엇인가 주고 싶으나 줄 것이 없어
증차일편죽 贈次一片竹 이 대나무 한 조각 주려고 하니
죽간생청풍 竹間生淸風 대나무 부채에서 맑은 바람이 불거든
풍래군상억 風來君相憶 바람따라 서로 생각합니다.



부채에 적힌 산뜻한 연시에 비담의 얼굴이 단숨에 붉어졌다. 원체 표현을 잘 하지 않던 덕만의 선물이라 더욱 마음에 들었다. 비담은 헤실헤실 웃으며 부채를 고이 접어 상자에 다시 모셔두었다. 평소에 쓰라고 주는 선물들을 방 한 곳에 잘 모셔두는 버릇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했다.



덕만은 며칠동안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에 비담은 혼자서 아이들을 돌봐야 했다. 하루는 비담이 품에 아들을 끼고 책을 읽어줄 때였다. 아들의 목덜미에 흐르는 땀을 발견한 비담은 냉큼 부채를 펴서 아들에게 부쳐주었다. 전날 알천이 유신이 선물해준 부채였다. 아들은 못보던 부채에 비담을 돌아보며 물었다.



"아버지도 어머니가 부채를 주셨어요?"


"응? 아니, 이건 시위부령이..."



무심코 대답을 하려던 비담은 깜짝 놀라 아들을 돌아 앉히고는 물었다.



"너도 어머니가 부채를 주셨니?"


"네."


"...글귀도 써있고?"


"네."



아들이 답했다.



"어머니 글씨였어요."



아들은 화사하게 웃었다. 그러나 비담의 표정은 아들과 달리 밝지 못했다. 그러고보니 연시로도 읽을 수 있지만 서로 사랑하고 아끼는 이라면 누구에게나 줄 수 있는 시였다. 비담의 얼굴이 전과는 다른 의미로 붉어졌다. 비담은 설레발 친 자신이 창피했고, 민망했고... 조금 서운했다.



덕만이 서라벌에 돌아온지 며칠이 지났다. 덕만은 요즈음 비담이 조금 이상했다. 놓고간 깜짝 선물에 대한 말도 없었고 묘하게 토라진 느낌이었다. 그래도 직접적인 말은 하지 않으니 먼저 추궁할 수 없었던 덕만은 그냥저냥 이전처럼 지낼 수밖에 없었다. 사실, 비담과의 묘한 서먹함을 푸는데 시간을 쏟기엔 덕만은 시간이 너무 가난했다. 신국의 온갖 보화를 다 가진 덕만이지만 시간만은 늘 가난했다.



여느 날 처럼 잠자리에 들기 전 상소를 보던 덕만은 품에서 부채를 꺼내 거칠게 부쳤다. 지나가던 비담이 덕만의 손에서 부채를 꺼내 옆에 앉으며 덕만에게 부쳐주었다. 여전히 상소문을 내려다보던 덕만은 문득 생각이 나서 말했다.



"참, 너 내가 놓고간 부채는 보았느냐?"



비담은 부치던 부채를 내려놓고 아랫입술을 내민채 딴청을 했다.



"보았지요."



역시 원인은 부채에 있는게 확실했다. 덕만은 부채에 비담이 토라질만한 어떤 일을 해놨었는지 애써 기억하기 위해 인상을 썼다.



"거기에 있는 시도 보았느냐?"


"예, 제 부채에도 있고, 태자의 부채도 있고, 공주의 부채도 있는 그것말이지요?"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덕만의 왼쪽 눈썹과 오른쪽 눈썹이 비틀렸다. 비담이 덕만을 돌아봤을 때, 덕만은 정말 이상한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보였다. 비담은 어리둥절하며 자세를 고쳐잡으며 물었다.



"그 시 말입니다."


"그래, 그 시."


"태자에게도, 공주에게도 써주셨다면서요."



그제야 덕만은 일의 전말을 알겠다는 듯 허탈하게 웃었다. 그동안 내내 신경쓰이던 게 이토록 허무한 오해로 인한 것일줄 몰랐다.



"무슨 말이냐. 그 시는 네 부채에만 써놓았다."


"예?"


"태자와 공주에게는 다른 시를 써놓았지. 연시를 어찌 자식들에게 쓰겠느냐."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린 비담이 이번에도 화르륵 얼굴이 붉어졌다. 비담이 창피함에 눈을 둘 데가 없어 쥐구멍을 찾는 동안 덕만은 남편의 실수를 마음껏 비웃으며 깔깔 웃었다.



"고작 그것때문에 그동안 그리 토라져있었던 것이냐?"


"...자꾸 그리 말씀하지 않으셔도 이미 충분히 창피합니다."



덕만은 개구쟁이처럼 웃으며 부채를 비담에게 부치면서 말했다. 비담은 자신에게 부쳐지는 바람을 느끼며 부채를 내려다봤다. 덕만의 부채에도 똑같은 시가 쓰여있었다.



"너는 여전히 참 질투가 많구나. 자식에게 하는 질투는 좀 줄이면 좋겠지만 말이야"



비담은 자신에게 부쳐지는 바람을 느끼며 부채를 내려다봤다. 덕만의 부채에도 똑같은 시가 쓰여있었다. 비담의 얼굴에 몰린 화기가 차츰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비담은 툴툴거렸다.



"제가 폐하를 너무 좋아해서 그럽니다."



덕만이 잔뜩 눈초리를 휘면서 웃더니 조용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너는 나를 너무 좋아해서 탈이다."


"...요즘 좀 능구렁이 같아진 것 아십니까?"


"나도 늙나보지."



덕만이 큭큭 웃었다. 갈수록 늘어가는 덕만의 농담에 어쩔 수 없이 물들어진 비담이 웃음을 되찾았다. 비담은 다시 덕만의 부채를 빼앗아 들고 소리 죽여 웃으며 상소문을 돌아보는 덕만에게 부쳤다.


살랑. 살랑.


부채에서 흘러나온 바람이 방안을 가득히 메우고 있었다.





갤이 정전같아 짧게 써서 올리는 글이야 ㅋㅋㅋ

글에 나오는 풍래군상억이라는 시는 실제로는 목은 이색 선생이 쓴 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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