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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갤단편문학] 에그.txt

황새(121.64) 2012.01.02 14:52:25
조회 2647 추천 36 댓글 36

1.

유혈처럼 낭자한 점액 위에서, 해를 가리고 막아선 퍼렇고 커다란 그림자 너머로 멀리 검붉은 저녁 노을에 떠가는 동족의 모습.

나의 최초의 기억은 그와 같이 시작한다.

눈을 바로 뜨지 못한 어린 내게 살갗 너머로 처음 만난 세계는 전혀 호의적인 것이 아니었다. 차갑고 매캐한 공기. 잡아 찢는듯한 사납고 거대한 굉음. 나는 마치 취소된 태아처럼, 세계가 뻗치는 무자비한 칼날을 피해 찢겨진 보금자리에 본능적으로 머리를 박았고, 기억은 거기서 한 번 소실된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모든 것은 낯선 손이 정리한 공간처럼 잘못되어 있었다. 가장자리부터 검게 말라가는 크립. 체액 위로 무너진 싸늘한 동족들. 그리고 홀로 태어나진 작디작은 나.

나를 닮은 형체는 터져버린 보금자리에 박혀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그것의 목덜미를 물고ㅡ 서늘한 가죽의 질감에 나는 흠칫 떨었다ㅡ 아직 미약한 온기가 남아있는, 찢겨진 거대한 어머니의 잔해 속에서 추위를 견뎠다. 밤이 바뀌고, 잔해에서 오르던 김도 그 자취를 감추자 춥고 굶주려 나는 견디기 어려웠다. 기억조차 나지 않는 보금자리의 양수 속을 그리워하며, 나는 그 곳에서 등을 마주했을 나를 닮은 형체를 허연 입김 너머로 바라보았다.
그렇게 내가 처음 먹어치운 것은 나를 닮은 형체의 시신이었다.





 

2.

길을 떠나고 나서 처음으로 그것을 발견했을 때를 나는 결코 잊지 못한다.

최초의 기억에서 유일하게 살아 움직이던 동족이 향한 먼 하늘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은 우연섞인 본능이었다. 길은 멀고 멀어, 그저 하얗고 광활할 뿐인 세계 아래서 나는 말라버린 보금자리가 생각나 괴로웠다. 그리고 그것은 갑자기 눈보라 저 편에서 마치 강인한 어머니와 같이 거대하고 우뚝하게 서 있었다. 희끄무레한 시야에서 그것은 보이는 것보다 한참 멀어, 나는 조바심과 기대감 사이에서 내달리며 다시 보금자리를 그리워했다.

그러나 그것이 마침내 나를 마주했을 때, 나는 코를 들이밀어 냄새를 맡고, 주위를 몇 바퀴 빙 둘러보고, 그것이 온기나 보금자리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보이는 그저 거대하고 각진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파도처럼 덮치는 혼란과 피곤에 떠밀려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세계는 언제나 이렇게 차갑고 각진 것일까.

그러면 나의 보금자리는 애초에 없어야 할 잘못된 것이었을까.
그리고 그 때, 눈밭으로, 툭, 하고 무언가가 떨어졌다.





 

3.

처음 그를 보았을 때를 나는 결코 잊지 못한다.

툭, 하는 이질적이고 느닷없는 눈밭의 음성에 나는 본능적으로 네 다리에 힘을 그러쥐고 목구멍 깊숙이 끓는 소리를 그렁였다. 눈밭에는 적갈색의 조그마한 덩어리들이 흩어져 있었다. 나는 주위를 경계하며 으르렁대다가, 거대하고 각진 그 곳 위에서 우두커니 시선을 늘어뜨리는 파란 그림자를 발견했다. 그와 거의 동시에 나는 흩어진 적갈색의 덩어리에서 풍기는, 허기진 본능의 가장 깊숙한 곳을 자극하는 따스한 냄새를 포착했다.

나는 다시금 상반된 본능의 격전에서 몸을 빼내기 어려웠다. 저 위에서 나를 관찰하는 시선은 최초의 기억에 박힌 퍼렇고 커다란 그림자를 생각나게 했다. 까닭 모를 두려움에 나는 온몸을 곧추세우고 자세를 낮추었지만, 그 와중에도 온 신경은 마치 천상에서 내려온듯한 적갈색 덩어리에 쏠리고 있었다. 싸늘함에 대한 공포와 더운 삶을 향한 집착의 외줄타기는, 멀고 길게 흐르는 몇 초의 시간 속에서, 마치 거대한 동족을 품은 보금자리처럼 천천히 결론을 잉태했다. 적갈색 덩어리는 단호하게 시야를 잠식했다. 식사는 맹렬하고 집요했다. 그리고 어느새 모습을 감춘 그의 공백은 고개를 들기 시작한 포만감과 졸음에 다시 그 자리를 내어주고 있었다.

문득 잠에서 깨어난 뒤로 파란 그림자와 적갈색 덩어리의 출현은 몇 번인가 반복되었다. 익숙함 속에서 조금씩 누그러지는 두려움과 달리 적갈색 식사는 언제나 족히 만족스러웠다. 밤이 두 번 바뀌고, 파란 그림자가 다시금 시선을 늘어뜨리는 기척에 나는 마치 응답처럼 끓는 소리를 그렁였고,
바로 그 때, 그가 올려든 팔에서 나는 낙하를 준비하는 적갈색 덩어리의 군집을 보았다.

나는 그것을 결코 잊지 못한다.





 

4.

한 쌍이라는 건 어째서 이렇게나 친밀하고 따뜻한 것일까.

나는 파랗고 커다란 그의 곁을 걸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동료로서 그는 그다지 살가운 편은 아니었다. 서로 목덜미를 마주 비비는 일도, 장난치며 눈밭을 뒹구는 일도 없다. 그들은 단지 종종 주변을 배회하며 시간을 보낼 뿐이었다. 그리고 그가 몇 줌의 적갈색 덩어리를 휙 던지고, 내가 달려가 코를 박고 만족스런 식사를 마치고 나면 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곤 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는 이 서늘한 세상에서 베풀어진 단 하나의 호의였다. 처음이자 유일한 나의 동료다. 밤이 바뀌면 문득 그 자리에 다시 나타날 변하지 않는 생의 이정표다. 그가 살아 움직이고, 그 곁에서 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것으로 나는 한없이 따뜻했다.

모처럼 눈이 그친 오후였다. 여느 때처럼 모습을 드러낸 그에게 나는 반가움을 안고 꼬리를 흔들었다.

오늘은 멀리 능선이 보이는 언덕까지 나가려는 모양이다. 함께 걸을 시간이 많겠구나 싶어 나는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괜히 그렁거려 본다.

그 때, 나는 바람을 타고 멀리서 흐르는 오래된 기억 속의 삭은 냄새를 느꼈다.

나는 등을 꼿꼿이 세우고 능선 저 편을 바라보았다. 착각이 아니다. 냄새는 점차 선명했다.

어머니의 잔해 너머로 흩어지던 그리운 동족의 냄새.

문득 참을 수 없이 그리웠다. 마른 크립 위에서 죽어가던 작은 동족들. 입을 굳게 다문 어른들의 잔해. 식어버린 어머니 안에서 베어물던 나를 닮은 형체. 모든 것이 머릿속에서 선연히 회전하며 소리치고 있었다. 나는 질풍처럼 내달렸다. 동족을 만나 그가 떠난 보금자리의 기억을 물어야만 했다. 노을 너머로 천천히 떠나가던 동족과, 움직이지 않던, 나를 닮은 형체에 대해 들려줘야 했다.

멀리 쓰러지는 퍼런 냄새의 진원이 보인다. 그는 동족을 닮지는 않았다. 오히려 나의 동료를 닮은 편이다. 그러나 냄새는 단호하고 명확하게, 그가 의심의 여지 없이 동족의 보금자리로부터 떠나왔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어째서 그는 지쳐 쓰러지고 만 것일까. 나는 눈보라치던 지난 길을 떠올리며 다시금 다리에 힘을 실었다.



그리고, 그 때, 아득한 기억 속의 날카로운 굉음과 함께, 시야가 이울어져 곤두박질한다.

등이 한없이 무겁다.

꺾여 처박힌 고개 너머로, 눈을 녹이는 김서린 나의 체액과 멀리 아득한 나의 동료가 보인다.

괜찮은 걸까.

전에 없이 따스하게 느껴지는 흐릿한 눈밭에 누워, 나는 아직 아늑한 어린 나의 보금자리와, 등을 맞댄 나의 동족을 떠올렸다.

괜찮은 걸까.

그리고, 한없이 무거운 눈꺼풀에, 나는 설핏 눈을 감았다.

 







 

epilogue.



변방 도시의 번화가지만, 술집은 꽤나 떠들썩하게 연말의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가득 찬 테이블마다 모여 앉은 남자들은 서로 맥주와 보드카를 나누며 이야기에 여념이 없다.

"북방의 커널 해칭사건 실종자 얘기 들었어?"

"그 불쌍한 자식? 어디서 개죽음당한 시체 토막이나 찾았나 보지?"

"남부 변방에서 눈밭에 자빠져 죽었다던데?"

"뭐? 이거 또 어디서 헛소문이나 듣고 왔구먼."

"아니라니까. 더 모르겠는건, 근처에 덜 자란 저글링이랑 터렛 관리병도 총알 구멍 하나씩 내고 죽어있었다는 거야."

"뭐야 그게? 당국에선 뭐라는데?"

"지들도 사태 파악이 안되니까 아직 발표를 못 냈어. 지역 신문에나 실렸지. 이건 내 생각인데, 혼자 살다가 게이가 된 터렛병이 우연히 발견한 실종자가 저글링에 죽으니까 열받아서 쏴죽이고 자기도 자살한게 아닐까?"

"이 친구 맛이 갔구먼. 새해부터 술에 꼴아서 헛소리나 지껄이고 말야."

"헛소리 아니라니까. 젠장. 집어치우고 한잔 해. 새해를 위하여, 건배!"

"건배."


 

술집 너머로 조용히 눈이 내린다.
눈은 어디에나 온당히, 충혈된 대지를 덮고, 빈 터렛 위에서, 외로운 커널 위에서, 파괴된 잔해 위에서 그렇게 서로의 시간을 포개고 있다.
그리고 그 위를, 말 없는 세 개의 죽음이 부드럽게 일렁이며 흩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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