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돌아보기)
“어이, 거기. 어딜 빠져나가시나?”
아래 위로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우리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온다. 그가 잡고 있던 내 손목을 자신의 뒤로 숨긴다. 나는 자연스레 그의 뒤에 숨는다. 무슨 상황이지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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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른 요원들에 이끌려 방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가장 높은 곳, 60층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뒤를 돌아봤지만 그는 싱긋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가 돌아오지 않는 2시간 동안 나는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고 집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나 때문에 잘리는 건 아닌가, 트레이너가 바뀌는 건 아닌가.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내 자신이 우스워졌다. 나 때문에 잘리는 건 그렇다 치고, 트레이너가 바뀌는 건 왜 걱정하는 건가. 나는 오늘 그와 처음 만난 사인데. 얽히고설킨 생각들의 꼬리를 따라잡고 있을 때쯤, 그가 돌아왔다.
“어!! 위에서 뭐래요? 자른대요? 혹시 트레이너 바꾼대요?”
나는 현관으로 뛰쳐나가며 물었다. 그가 실소를 터트리며 신발을 벗었다.
“기 센 아가씨 내 걱정 많이 했나보네? 걱정 마. 시말서만 한 장 써서 올려 보내면 돼.”
그가 ‘시말서’라고 적힌 종이를 흔들었다.
“근데 너, 글 좀 쓸 줄 아냐?”
“??? 아니..ㅋ.. 그 쪽 시말서를 지금 저보고 쓰라구요?”
“너 때문이잖아. 그리고 그쪽 아니고 선생님!!”
“와ㅋㅋ 저 글 못 써요. 한글 아직 덜 배움.”
“막 나간다. 초딩이냐? 한글 모르면 영어로 써. 여기 다 외국인들이야.”
그가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느새 나는 그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는 나와 이야기하며 부엌으로 갔고, 물을 마셨고, 소파 앞 테이블에 시말서를 놓고 바닥에 앉았다. 나도 그를 따라 테이블 맞은 편에 앉았다.
“자, 그럼 우리 공정하게 반반 쓰자.”
“그게 공.정.한.거? 근데 그거 길게 써야 해요?”
“아니? 꼭 그런 건 아닌데?”
“제가 뭘 좀 아는데. 이런 건 짧고 강렬하게 써야 해요. 자잘한 것들은 최대한 빼고 팩트만 정확하게 전달하고, 마지막에 죄송합니다. 이렇게 한 마디 쓰는 거죠. 무조건 4줄 이하로 써야 해요.”
그가 턱을 괴고 나를 보고 있다. 뭐야. 왜, 뭔데.
“너 나랑 아홉 살 차이 나지.”
“네. 왜요?”
“아홉 살이면 완전 앤데.”
“허 참. 저기요. 저 스무살이구요. 성인이구요. 그 쪽이랑 연애해도 아무 문제없는 나이거든요?”
“그러니까.”
“그러니… 네?”
붉어진 얼굴이 느껴졌다. 코앞에서 턱을 괴고 나를 바라보고 있다. 장난기 어린 얼굴로. 웃는 얼굴과 장난치는 얼굴은 숨길 수 있는 게 많다. 나는 알 수 없는 이 사람이 점점 더 궁금해진다.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져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나란 사람은. 친구 같은 것들은 모두 귀찮았고, 약속들은 더 귀찮았다. 나 자신과 하루 종일 이야기해야 했고, 나 자신과 한 약속들을 모두 지켜야했다. 나는 내 안에 빠져 살던, 극개인주의였다.
그런데 나에게 궁금한 사람이 생겼다. 사람들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기 때문에 스스로에 대해 털어놨다. 기브 앤 테이크 형식. 내가 이 정도를 털어놨으니 너도 너의 것을 밝혀라. 사회가 가진 암묵적인 룰은 나를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그도 그랬을까.
그 역시 이 곳 출신이다. 이 사람은 얼마나 천재 길래 A쁠로 졸업을 했을까.
“흫, 장난이야. 뭘 또 그렇게 진지해. 그럼 그렇게 잘 쓰는 네가 시말서 좀 써. 몇 줄 안 되니까 금방 쓸 수 있지? 난 좀 누워야겠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에 누웠다. 역시, 저 기럭지란. 저 위에 눕고 싶당ㅎㅎ 내 진지한 생각은 이 사람 앞에서 10초를 못 간다. 근데 너 내 선생 아니니?
“저기요. 선생님? 명색이 선생님이신데 뭐 안 가르쳐요?”
“가르치고 있잖아.”
"뭘 가르치는데요?"
옆으로 돌아놓은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연애?”
“아, 장난치지 마요.”
그는 소리 내어 웃다가 이내 고요해진다. 동그란 눈꺼풀. 그 아래 높은 코. 올록볼록한 입술. 박스테이프로 둘둘 감아 납치하고 싶은 사람이다. 옆으로 돌아놓은 그의 티셔츠 아래로 베렛나루가 보였다. 어머, 어머. 저 선은 무조건 복근이다. 6팩인지 8팩인지 기회가 된다면 무조건 밝혀낼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나는 싸팬가... 나는 얼굴이 붉어진 채로 시말서가 아닌 그를 보고 있었다. 한참동안.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잠든 그를 보고 있었다.
이 곳은 이때까지 알던 곳과 다른, 신세계 같은 곳이고, 그런 곳에 잘생긴 남자와 단 둘이 한 방에 있다. 나는 손톱 밑의 때를 파내거나, 컬러렌즈를 빙빙 돌리면서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시말서 따위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잘생긴 남자가 나를 향해 돌아 누워있고. 잠들어있고. 이 곳엔 둘만 있고. 우리 둘이 여기서 무슨 일이 있어도 아무도 모른 다는 것.
“내 얼굴에 구멍나겠다.”
“힉, 쿨럭, 쿨럭쿨럭,”
깜짝 놀라 몸이 튀어올랐다. 사레가 걸려 콜록대자, 그가 슬며시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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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제목이 변경되었어. ‘그의 천재성’은 너무 재미없어 보이는 제목 같아서 ‘수상한 동거’로 바꾸려고. 오늘도 긴 글 읽어줘서 고마워.
소설 연재는 하루에 1개 내지 2개 까지 쓸 예정이고, 비추 많은 날은 2개 쓰려구해. 대부분 낮 3시 전에 올리고 비추 많은 날만 따로 새벽 1시 전에 또 올릴 예정이야.
5화에서는 지철의 시점에서 쓸 예정! (일종의 예고편)
5화부터 짤들은 대부분 도깨비 짤들을 활용하려고 해. 소설의 분위기와 지철의 복장이랑 잘 맞을 것 같아서ㅇㅇ
-베렛나루 손톱 밑의 때 싸패 신세계 컬러렌즈 박스테이프
-------------------------------------------------그들의 집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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