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암역 쪽에서 수락산에 오르다보면
서계종택을 지나 노강서원鷺江書院이 보입니다.
저 편액에는 노강서원鷺江書院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정조 신해년(1781)에 하사한 어필(임금의 글씨)입니다.
그런데,
주변에 강이 없는데, 왜 노강鷺江이라고 했을까요?
약 70년 전까지 노강서원은 한강변 노량진에 있었습니다.
노강鷺江은 바로 노량진鷺梁津에서 따온 명칭입니다.
서원書院은 걸출한 업적이 있거나 충절로 이름난 문인文人을 모신 곳입니다.
노강서원은 조선 숙종 때 짧은 생을 살다 간
박태보朴泰輔(1654∼1689)라는 문인을 기리며 만들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왜 박태보가 노강서원에 모셔진걸까요?
이유는 “참혹하게 죽었기 때문”입니다.
박태보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옛날이야기? 같은 느낌으로 읽어주세요.
조선후기 숙종임금 때,
장희빈張禧嬪이라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숙종의 첩이자 희대의 요녀라고 합니다.
숙종의 정실부인, 그러니까 중전마마는 인현왕후였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자식이 없었습니다.
임금에게 자식이 없다는 것은 당시로선 국가의 존망이 걸린 굉장히 중대한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왜 없었을까요?
조선시대에 임금은
섹스도 굉장히 엄숙하고 격식있게 했습니다.
임금 뿐만 아니라 양반집에서는 보통 그랬습니다.
결혼을 해도 아무 때나 섹스할 수가 없었습니다.
남자는 평소 사랑채에서 따로 잠을 잤습니다.
그러다가 안채에서 머무는 와이프가 가임기일 때,
집안 어른들이 택일을 해서, “오늘은 합방 하라”는 허락이 떨어지면 섹스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혼 초에는 서로 잘못봤습니다.
왕실은 더욱 엄격했습니다.
정확히 가임기에 맞춰서 섹스를 시켰습니다.
양반집 어른들의 역할은
임금의 어머니나 궁녀들 중 짬을 많이 먹은 사람이 했을껍니다.
이렇게 택일을 해서 아무리 잠자리를 가져도
인현왕후는 자식을 낳지 못했습니다.
아마 인현왕후가 불임이었던 모양입니다.
왜냐하면 첩 장희빈은 아들을 낳았거든요.
아들을 낳고 보니 숙종의 총애는 더욱 깊어져서
장희빈은 인현왕후를 쫓아내고 스스로 중전이 되려는 계획을 꾸미게 됩니다.
그때 마침,
장희빈이 낳은 아들이 열병이 났습니다.
이때 장희빈은 일부러 아들의 침실 뒤에
‘아들의 생년월일시를 쓴 인형’에 칼을 꽃아 묻어두고
이를 숙종이 알도록 했습니다.
결국 숙종은 인현왕후를 의심해서
폐위시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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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박태보와 노강서원에 대한 인트로입니다.
그럼 이제 노강서원이 세워진 유래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조선시대엔 어떤 면에서는 지금보다 더욱 엄격하게 법을 지켰습니다.
죄 없는 왕후를 폐하는 일은 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하물며 장희빈의 질투로 멀쩡한 왕후가 폐서인되는 것은 상상도 못할 사태이며
대의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때문에 신하들은 제각기 숙종에게 상소를 해서 이를 막으려고 했습니다.
보통 이런 경우엔
연명상소聯名上疏를 합니다.
연명상소란,
대표자 한 명이 상소문을 짓고
그 상소문에 동의하는 사람이 연달아 이름(聯名)을 써서 동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한명씩 상소를 올리면 군신 피차간에 번거롭기 때문입니다.
지금 청와대에 국민청원 게시판인가 뭔가가 생겼다는데,
거기서 누가 청원을 올려놓으면
그 아래 '동의합니다' 하면서 댓글다는거랑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박태보는 당시 겨우 36세였으며
벼슬도 그닥 높지 않았지만,
필력과 기개에서는 당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내가 여러분의 뜻을 종합해서 상소문을 지을 테니 여러분은 잠깐만 기다리시오.”
라고 하고는 순식간에 상소문을 완성했습니다.
숙종은 이 상소문을 읽고 불같이 노해서
친국親鞫을 명했습니다.
친국이란, 죄인을 임금이 직접 신문하는 것입니다.
보통 친국을 한번 당하면 평생 불구가 되는 일이 많았습니다.
사극에서 대궐 마당에 횃불을 밝혀놓고
피투성이가 된 죄인이 의자에 앉아있는 장면을 상상해주세요.
금부도사가 박태보를 잡으러 오자,
박태보는 갓과 담뱃대를 어머님께 바치고 끌려갔습니다.
유품을 보면서 자신을 기억해달라는 의미입니다.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까 위에서 조선에서는 엄격하게 법을 지켰다고 했는데요,
고문에도 법률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박태보를 고문하는 숙종은
법을 어겼습니다.
박태보는 숙종의 꾸짖음에도 전혀 쫄지 않고
임금의 잘못에 대해 간언했습니다.
눈이 돌아간 숙종은 밤새도록 신문을 했습니다.
곤장이 몇 개나 부러졌고
박태보의 엉덩이에서 튀는 피가 나졸의 옷에 벌겋게 물들었다고합니다.
피비린내가 대궐 마당에 가득했으며,
살이 흐트러져 다 떨어져나가고 허연 엉덩이 뼈가 앙상하게 드러나서야 곤장을 멈추고는
숙종이 다시 물었습니다.
“잘못했지?”하니까 박태보가,
“죄없는 왕후를 폐서인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주상전하께서 잘못하셨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숙종은 주리를 틀었습니다.
종아리 뼈가 다 퉁겨져 부러지고 무릎뼈가 다 조각나서
헝겊으로 싸매야 뼈가 흩어지지 않았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다시 물었습니다.
하지만 박태보는 굽히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단근질을 했습니다.
단근질은 화로에 달군 쇠꼬챙이로 몸을 지지는 것입니다.
본디,
단근질은 역모를 꾀한 대역죄인에게만 행하는 형벌입니다.
하지만 숙종은 역적이 아닌 박태보가 바른 말을 한다는 이유로
온몸을 지졌습니다.
또한 발바닥만 지지도록 되어있는 법을 어기고
온몸을 지졌습니다.
이게 불과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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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숙종은 다시 신문을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옆에서 장희빈이
“아주 죽이지는 마시옵소서.”
라고 하는 한마디에
귀양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요즘으로 따지자면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하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누구나 박태보가 얼마 못갈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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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보의 귀양지는 전남 땅 끝 진도珍島로 정해졌습니다.
귀양가라는 왕명이 떨어지면 그 즉시로 출발해야 했기 때문에
고문당한 다음날 늦은 오후쯤에 출발한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서울에서 남쪽으로 가자면
반드시 남대문으로 나가야 했습니다.
성곽이 있었으니까요.
박태보의 집은 남대문 가기 전에 있었습니다.
지금의 명동 위치입니다.
금부도사가 집에서 하루 묵는 것을 허락했지만,(사실상 가족과 사별할 시간을 준 것)
박태보는 “실낱같은 목숨이 붙어있고 죄명이 지중하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했습니다.
결국 그날은 해가 저물었고
이태원에서 하루를 묵었습니다.
다음날
아들 박태보의 죽음을 예감한 서계 박세당朴世堂도 귀양길에 동행했습니다.
결국 한강 노량진鷺梁津을 건너자마자
박태보는 아버지 박세당의 손을 잡고 운명했습니다.
그 장소가 지금의 7호선 노들역 근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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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0여년이 지나
정세가 바뀌었고
장희빈의 지나친 시기와 질투에 질린 숙종은
인현왕후를 복위시켰습니다.
(당시 정치상황과 당파싸움이 주 원인이지만요.)
또한 자신이 참혹하게 죽인 박태보를 위해서
서원을 짓고 현판을 내렸습니다.
우연하게도 박태보가 죽은 곳은
조선 초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판하다가 죽은 충신 사육신의 묘 옆이었습니다.
그곳에 서원을 세우고 노강서원鷺江書院이라고 명명했습니다.
하지만 6.25때 폭격을 맞아 소실되었고
이를 1968년 현재 위치에 복원한 것이
지금의 노강서원입니다.
(글을 쓰고 찾아보니까, 1925년 홍수에 떠내려갔다는 기사들이 있군요. 표지판에는 한국전쟁에서 소실됐다고 되어 있는데.)
사육신 묘 뒤쪽 한강에 접한 아파트 단지에
'노강서원터'라는 조그마한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저기가 바로 박태보가 운명한 장소이고
본디 노강서원이 있던 장소입니다.
노강서원 오르기 전에 서계 종택이 있습니다.
서계는 아까 말한 박태보 아버지 박세당의 호입니다.
박세당이 40대 쯤에 정치에 환멸을 느껴
조용한 곳에 별장을 만들었던 장소가 대대로 내려와서
지금까지도 서계종택으로 남아있습니다.
소실된 노강서원을 현재 위치에 옮긴 이유도
아버지 박세당 근처에 박태보를 모시기 위함입니다.
제대로 전달됐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장암역 쪽에서 수락산 오르실 때,
옳음을 위해 목숨을 바친 박태보의 의기를 한번씩 떠올리면 의미가 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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