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이민자 2세 퀸즈 출신, 무식한 교정기, 빨간 뿔테 안경에 색감, 소재, 무늬 중 단 하나도 일치 하지 않는 코디 감각으로 패션잡지사에 들어가 놓고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자신감과 성실함으로 난관을 척척 헤쳐 나가는 베티의 모습이 노트북 화면 가득히 펼쳐지기 시작했다. 1편까지 심드렁하게 옆으로 누워있던 난 3편쯤 플레이 되자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화면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퀸즈 거리가 나올 때마다 깔리던 레게톤 힙합음악에 반가워하고 몸매관리 때문에 뭐 하나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여자들 앞에서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멕시칸 푸드를 꺼내먹는 베티를 보며 깔깔거리고, 누군가 ‘게이 스타워즈’라고 표현했다던 화이트와 오렌지로 꾸며진 세트를 보며 감탄했다. 어느덧 노트북 하드에는 그때까지 방송됐던 1시즌 14편이 모두 다운받아져 있었고 창밖으로 동이 트고 있었다.

그 날 이후 딱히 내 인생이 달라진 건 없었다. 여전히 일은 없었고, 음반은 하나도 팔리지 않았으며 간간히 들어오던 공연제의도 뚝 끊겼다. 달랑 250만원 들어있던 펀드를 깨야 했고 피부마저 재생능력을 잃었는지 뾰루지가 있던 자리에는 그대로 점이 생겼다. 달라진 건 일주일에 한 번씩 <어글리 베티>를 다운받아 챙겨 봤다는 것이고, KBS에서 토요일마다 더빙판을 방송해주기 시작했다는 것 쯤.

그러던 초봄의 어느 날 <어글리 베티>의 시즌 1이 끝나기도 전에 생방송 연예프로그램의 조연출이 되면서 내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다. 우아하게 라디오 스튜디오에서 음악을 틀던 예전에는 상상하기도 힘들었던 업무량이 주어졌고 더욱 큰 조직에서 선배, 후배, 동료들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3일치 밤을 새는 것보다 가끔은 더 힘들었다. 시간 나면 모자란 잠을 자기 바빠 <어글리 베티> 따위는 잊은 채로 하루하루가 흘러갔다. 연예프로그램은 녹록치 않았다. 연예 프로그램이 “가장 비생산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연예인들의 미소와 한마디의 멘트를 얻으려 매니저에게 굽신거리기는 참...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베티가 생각났다.

영화배우 A양의 비공개 결혼식을 취재하려고 카메라를 큰 가방 속에 숨기고 호텔 뒷산을 오르다 보디가드에게 걸려 ‘개쪽’을 당하며 쫓겨나던 길이었다. 생판 낯선 곳에서 무시당하고 왕따까지 당해도 교정기 낀 이를 훤하게 드러내고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드는 베티의 얼굴을 보면 내가 느낀 일말의 자괴감 따위 사라질 것 같았다. 그날 밤 시즌1을 끝냈고 그 이후 나도 베티처럼 이 낯선 곳에 슬슬 적응해가고 있다.요즘엔 시즌2가 방송되고 있다. 등장인물끼리의 관계도가 더욱 복잡해졌지만 베티는 여전히 촌스럽고 해맑고 귀엽다. 조그맣게 만들어서 짜증날 때마다 주머니에서 꺼내어 보고 싶은 그녀 베티 오늘밤엔 밀린 8편까지 달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