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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문대회 중편 탈락작] 환생의 이면

ㅇㅇ(61.109) 2015.08.23 20:22:46
조회 476 추천 12 댓글 6

 인간의 죽음에서 가장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죽음의 공포를 산자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공포를 설명하려면 죽음을 직접 체험해보아야 하는데, 그런 사람은 이미 땅속에 묻혔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 즉 산 자들은 제각각 의견이 달라 이렇다할 명제를 내놓을 수 없다. 그러므로 죽음이라는 것은 산 자가 이해하지 못하는 원초적인 현상이다. 죽음을 온몸으로 맞닥뜨리는 과정에서 죽음의 공포를 온전히 이해하게 되는데 그 공포는 막대해서 산 자가 체험할 경우 미쳐버릴 정도다. 하지만 자연스레 임종을 맞이하거나 부득이한 사고사 등으로 죽을 때는 그것을 이해하는 동시에 뇌의 전기적 신호가 끊기기 때문에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지르는 등의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하워드 신지록 중에서

――――――――――


 칼이 허공을 가른 소리와 더불어 발생한 충격파를 뒤로하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정적을 깬 것은 주저앉아 훌쩍이고 있던 푸른 드레스와 긴 망토를 두른 엘사였다. 엘사는 고개를 휙 돌려 제 뒤에 있는 얼음 상을 힐끗 보곤 힉, 하며 외마디의 비명을 내질렀다. 그것이 안나인것을 알고는 얼굴을 부여잡고 슬퍼하다가 끝내 끌어안고 통곡했다. 주변엔 엘사의 울음소리 외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엘사의 흐느낌이 얼마나 서러웠는지 저 멀리 성 발코니에 모여있던 사람들도 고개를 떨구며 슬퍼했다. 엘사도 이제는 안나 어깨에 매달리다시피 할정도로 다리에 힘이 풀렸다. 얼음 상이 된 안나를 껴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얼음 상 속에서 안나가 나왔다. 아니, 나왔다라는 표현보다는 표면이 얼었다가 다시 녹았다고 하는 게 더 알맞을 것이다. 안나의 온기가 점차 돌아오자 무언가 변화를 느낀 엘사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개를 들어 안나를 쳐다보았고, 파랗던 얼음 상이 아닌 진짜 안나가 돌아왔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팔을 뻗어 껴안아 주려고 했지만, 안나에게서 또 다른 변화를 느낀 엘사는 팔을 거두었다. 엘사의 표정은 또다시 어두워졌다.


 안나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희끄무레하게 풀린 눈 하며 사시나무 떨듯 하는 몸에 겁에 질린듯한 표정은 쉬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엘사는 그런 안나를 다독여주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안나는 곧바로 뿌리쳤다. 엘사는 한순간 당황했다. 왜 그러냐고, 이제 괜찮다고 다독여주려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안나는 그런 엘사를 더욱 강하게 뿌리치며 저항했다. 끝에 가서는 아예 악을 썼다. 엘사는 몹시 혼란스러웠다. 실수로 안나에게 발현했던 얼음 마법이 채 풀리지 않은 건가 싶었다. 진정한 사랑으로 녹여 모두 없어진 줄 알았건만 아직 저주가 남아 있었던 건가? 하지만 어릴 적 사고로 생겼던 한 움큼의 새치도 같이 사라졌기에 마법은 전부 풀렸다고 보는 게 맞았고, 분명 다른 까닭이 있을 터였지만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엘사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엘사도 안나의 심장에 얼음조각을 박아 넣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별안간 안나 홀로 자신을 찾아와 아렌델이 꽁꽁 얼어붙었다는 말을 해준 까닭에, 잠시 평정심을 잃어 그걸 제대로 알지 못하긴 했다. 또 심장을 얼게 했을 때의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지는 일찍이 트롤에게서 얼핏 들은 게 있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니, 이유 없이 안나를 눈 괴물까지 소환해 가며 내쫓은 것은 아니었다.


 안나를 쫓아낸 뒤 마음이 약간 진정되어 사건의 얼개를 맞추는 과정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자신이 안나의 심장에 얼음을 박아넣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제 몸에서 마법이 응축되는 것을 느꼈고, 뒤이어서는 방출되어 사방으로 뿜어져 나갔기에 근처에 있던 안나도 마법에 적중했을 것이다. 안나가 뒤에 있어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뒤를 돌아보았을 때 안나가 가슴을 부여잡고 주저앉은 것을 생각해보면 심장 부근에 얼음을 박아넣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제야 엘사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곧장 안나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이 황량한 눈밭에서 그녀를 찾기란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었다. 설령 찾았다 해도 정작 해결법을 몰라 우왕좌왕할 것이 뻔했다. 트롤들에게 답변을 구하러 갈 수도 있었지만, 그들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 워낙에 어릴 적이었던 지라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곳이 어딘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모 아니면 도라고, 요행을 바라고 호기롭게 나선다 해도 갈피를 못 잡고 갈팡질팡하는 사이에 안나가 얼어버릴 수도 있었기에 섣불리 나서지도 못했다. 염치 불고하고 안나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편이 나았다.


 엘사는 어릴 적 얼음 마법을 가지고 놀았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는 저주도 무엇도 아닌 재밌는 놀잇거리이자 장난감이었다. 하지만 마법이라는 게 양날의 검이여서, 분명 아름다움을 논한다면 그 무엇에 빗댈것도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사람의 생사를 쥐락펴락할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한 것이었다. 결국, 그 위험성을 알지 못했던 어린 엘사는 기어코 일을 벌이고 말았다. 물론 고의로 일으킨 것은 아니었지만. 엘사는 빙판에 눈 봉우리를 만들어주곤 안나에게 그 위를 뛰어다닐 수 있도록 했다. (안나가 폴짝 뛰면, 엘사는 안나의 발밑에 더 높은 눈 봉우리를 만들어주는 식으로) 그런데 안나의 뜀박질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엘사는 조급함에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 이미 몸을 날린 안나에게 손을 뻗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때 엘사의 손끝에서 마법이 발현되어 나갔고, 그 마법은 안나의 머리에 직격했다. 안나는 정신을 잃고 굴러떨어졌다. 다행히 눈이 수북이 쌓인 곳 위로 떨어져 큰 피해는 면했다. 엘사는 곧장 안나에게로 달려가 끌어안고 훌쩍였다. 엘사의 울음소리를 들은 국왕과 왕비는 한걸음에 달려와 안나의 상태를 확인한뒤 말에 둘을 태우곤 어딘지 모를 깊은 숲 속으로 향했다.


 말이 엘사를 태우고 지나간 자리에는 서리가 맺혔다. 엘사는 제 뒤로 줄줄이 늘어선 서리를 보고 많은 걱정이 머릿속을 휘놓았다. 가장 큰 걱정은 자신이 마법을 통제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말을 이끌고 도착한 곳은 옛날 설화 속 트롤들이 거주하고 있는 숲이었다. 트롤들은 몸을 웅크리고 옹송그리며 모여있었다. 아무래도 손님이 오지 않는다면 항상 그러고 있는 듯했다. 국왕이 찾아오자 그들은 둔탁한 소리를 내더니 몸을 죽 펴고 일어났다. 그들은 오랜만에 손님이 왔다는 사실에 기뻐서 왁자지껄이었다. 그런데 곧장 그 주인공이 국왕인것을 눈치 채자 멋쩍어 숙연해졌다. 웅성거리던 트롤들 사이에서 나이가 지긋이 든 패비가 국왕 앞에 섰다. 그는 엘사와 안나의 사정을 듣곤 심장은 힘들지만, 머리는 어찌할 수 있다는 둥 말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그 해결법으로 안나의 기억에서 엘사의 마법과 관련된 것들을 모조리 지워버렸다.


 패비는 엘사에게 네 마법은 아름다우면서도 위험한 것이라며, 절제하지 않으면 안나 뿐만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다칠 수 있다고, 공포는 네 적이 될 것이라고 일장연설을 했다. 그리고 국왕은 패비의 말에 맞장구라도 치듯, 엘사와 안나를 서로 단절시키고, 더 나아가 바깥세상까지도 전부 단절시키겠다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엘사도 국왕의 말을 따라 안나와 마주하지 않으려 항상 노력했다. 엘사는 목석처럼 제 방에만 박혀있었다. 부득이하게 방을 나설 일이라도 생기면 안나와 마주칠까봐 항상 조마조마했다. 안나가 문을 열어달라고 조를 때는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 같이 놀고 싶은 마음을 뒤로한채 저리 가라며 매정하게 굴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는 부모님을 범선 전복으로 여의었을 때도 아버지와 한 약속을 지키려, 마법을 들키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그토록 사랑하던 동생을 지켜주려 했는데 결국 대관식에서 들켜버렸고, 동생이 다른 피해를 보게 하지 않으려 북쪽산으로 도피해 자유로움에 도취 되어 있을 때쯤 별안간 홀로 찾아와 전한 소식이 아렌델이 꽁꽁 얼어붙었다는 것이라, 무능력한 자신을 비관해 자신도 모르게 동생의 가슴팍에 얼음을 꽂아넣었고, 마음을 가다듬으려 하는데 성에 침입한 패거리들을 상대하다 정신을 잃었으며, 성으로 돌아와 안나를 만나려 했는데 얼음 상이 되어버렸다. 기적적으로 다시 녹아 모든 것이 끝난 줄로만 알았더니 안나의 상태가 이상하다! 동생의 안위 말고는 다른 건 바라지도 않았는데 어째서 결과가 이렇게 참혹한 건지 도무지 알 도리가 없었다.


 엘사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다가갈 수 없었다. 만약 여기서 더 다가간다면 정말로 안나가 미쳐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엘사는 자신의 동생이 미쳐버리는 꼴은 눈을 뜨고 볼 수 없었지만, 안나를 그 자리에 가만히 놔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자신을 공격한 한스가 충격파에 휩쓸려 정신을 잃기는 했으나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일이었기에, 일단은 안나를 말로 잘 타일러 궁궐로 가게 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안나, 정말 괜찮다니까. 이제 다 끝났어. 다시 궁궐로 돌아가자, 응?."


 "아냐…. 절대…. 절대로…. 언니는 안 죽지? 그렇지? 죽으면 안돼. 제발…."



 안나는 엘사 말에 대답은 않고 동문서답을 하더니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


 안나가 쓰러진 지 한 달째 되었다. 병상에 누워있는 안나는 눈을 뜰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엘사는 안나를 간호하는데 집중하기 위해 시끄럽게 떠들어 댈 것이 뻔한 위즐튼 공작과 한스를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한 나라의 여왕을 죽이려던 것을 털털하게 용서하기에는 그 죄질이 너무 무거웠지만 목전에 놓인 상황을 먼저 해결하는게 우선이었다. 위즐튼 공작은 지금 책임을 회피하는 거냐며 적반하장으로 따지고 들었다. 그러자 엘사는 이 이상 따지고 든다면 자신을 시해하려 했던 것을 위즐튼의 주변국에 모두 알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자 그는 겁먹은 개마냥 꼬리를 내리곤 제나라로 돌아갔다.


 엘사는 백성들의 미움을 사기에 충분했다. 아렌델의 겨울이 몇 주째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처음에야 여름에 눈이 온다는 이례적인 사건에 모두가 사뭇 신기해하기야 했다. 그런데 그게 그칠 기미가 보이질 않자 급작스럽게 수요가 줄어들어 생계에 빨간불이 켜진 얼음 장수를 비롯해, 야외에서 일하는 상인들이 서로 뭉쳐 시위를 벌이기까지 이르렀다. 그들은 나라의 안보도 제대로 책임지지 못 하는 군주는 우리 위에 설 자격이 없다며 팻말을 세우고 언성을 높였다. 엘사도 그걸 언제까지고 지켜볼 수만은 없었지만, 13년 만에 다시 만난 동생을 이대로 내버려 두었다가 큰일이 나면 어쩌나 싶어 일단은 간호에만 몰두하는 수 밖에는 없었다.


 엘사는 안나가 어째서 깨어나지 못하는지 알 수가 없어 골머리를 앓았다. 왕실 최고의 어의도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다며 아연실색했고, 그저 열병이라고만 진단했다. 자칭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도 몇몇 초청했지만, 모두가 이례적인 증상에 고개를 저었고, 아예 옆 나라에 솜씨 좋은 어의를 한 명 보내달라며 간곡히 부탁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보내 줄 수 없다는 답변 뿐이었다. 어의는 열병이라고 판단했지만, 의학에는 조예가 깊지않던 엘사도 그 증상이 간단한 열병이 아니라는 것 쯤은 알고 있었다. 안나가 스러져가는 과정을 직접 보았기에. 그걸 그저 열병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었다.


 엘사는 이 이해 못할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아렌델에서 가장 저명한 신지학자인 스텐베르그를 성으로 초청했다. 엘사는 종교적인 쪽과는 거리가 멀었다. 13년 동안 방안에서 갇혀 지내며 시간이나 보낼 요량으로 읽은 책들이 죄다 수학, 과학, 정치학 같은것이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그래서 신지학이라는 걸 그리 달갑게 보지만은 않았지마는, 안나의 안위가 조석에 달린지라 누구를 거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뭐라구요?"


 엘사는 스텐베르그가 말해준 내용이 전혀 용납이 가지 않는 듯했다. 그가 말한 내용은 환생의 부정적인 면에 관한 것이었다. 우리는 모두 죽음을 맞이할 때 막대한 공포를 느끼지만, 명쾌히 그 감정을 설명할 자는 없다고 한다. 죽음을 맞이할 때는 그 공포를 직면하는데, 그 공포를 이해하는 찰나 이내 뇌의 기계적 신호가 끊긴다는, 죽음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을 완전히 꿰뚫는 답변이었다. 하지만 안나의 경우는 달랐다. 천천히 죽어가며 그 공포를 완전히 이해한 영혼이 다시 육체에 결합하였고, 안나의 뇌가 그 공포를 수용하지 못해 쓰러져 버린 것이라고 했다. 그자가 못미덥기는 했지만 이 현상을 막힘없이 설명한 사람은 그자밖에 없었기에 일단은 믿는 수밖에 없었다.


 분명 환생이라는 것은 모두에게 긍정적으로 인식되는 것이었다. 예컨대 예수가 사흘 만에 부활하여 승천했다는 이야기를 그린 그림은 대부분 예수의 몸 주위에서 후광이 비치거나, 하늘 높이에서 밝게 빛나는 햇빛이 예수를 비추는 표현을 심심찮게 볼 수 있을 정도로 환생이라는 것은 모두에게 환상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는데, 그게 모두 헛소리였다니? 엘사는 상식이 모조리 파괴되는 느낌이었다.


 "아. 그래서 어떻게 안나를 원래대로…. 아니 깨어나게만 해도 되는데. 어떻게?"


 엘사는 여왕으로서의 위엄은 잃고 횡성수설하며 스텐베르그에게 질문했다.


 "자.. 그러니까 이게 공주님이 쓰러지신 게 결국 그 마법 때문이잖아요? 쓰러진건 환생 때문이라고 해도 말이죠. 그럼 뭐 어쩌겠습니까. 마법의 근원이 사라져야지 않겠습니까. 제가 아니라 누구라도 이렇게 말할 겁니다."


 그의 말이 맞았다. 누구라도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말하지 못한 이유는 단 한가지, 여왕 앞에서 마법의 근원이 사라지니 어쩌니 하는 말을 무슨 배짱으로 할 수 있겠는가? 모두를 대신해서 말한 셈이 된 것이다.


 사실 엘사 역시 적잖아 알고있었다. 모두 다 자신의 저주 때문이라는 걸. 그저 부정하고 싶었던 것이다.


 "무슨 얼토당토 않은 소릴…!"


 "얼토당토않은 소리가 아닙니다. 여왕 폐하도 동생의 안위가 중요하지 않습니까? 밖에서 언성을 높이는 백성들도 마다하고 간호에 열중할 정도로 말입니다. 제 답변은 대대로 신지학을 연구하시던 조상님들의 신지학에 따른 것입니다. 여왕님도 잘 아실 테지요. 제 아버지는 물론 조부, 그 증조부께서도 나라에서 제일 가던 신지학자였던 것을 말입니다. 선왕께서도 제 아버지께 서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으셨지요. 제 말씀만 들으신다면 공주님은 분명히 깨어나실 겁니다."


 선왕이 스텐베르그의 아버지로부터 얻은 게 많다는 것을 빌미로 억지로 동의를 얻고자 하는 것이다. 엘사의 아버지이자 선왕이었던 아크다르는 엘사의 마법에 대해 스텐베르그의 친부에게 많은 답변을 얻었다. 물론 항해중 사고로 사망한 것도 그의 말에서부터 시작한 건 사실이지만. 엘사는 금방이라도 스텐베르그에게 당신이 내 아버지를 죽였다고 멱살이라도 잡고 화라도 내고픈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신분이 신분인지라 그런 격식 없는 행동은 할 수 없었고,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그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으니. 그저 어금니 꽉 깨물고 참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


 안나가 쓰러진지 두달이 다 되어갔다.


 민중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처음에는 십수 명에 불과하던 저항세력들이 점점 머릿수를 늘리더니, 수백에서 얼추 천명에 이르렀다. 쥐떼처럼 늘어나는 저항세력을 그저 볼 수만은 없었던 아렌델군은 장군에 치하에 그들을 진압하기로 했다. 여왕의 명령따위는 들을 시간이 없었다. 안나의 건강에만 치중하던 엘사는 저항세력을 어떻게 해야만 좋겠냐며 명령을 내려달라는 장군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명도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치 엘사를 제외한 모두는 다른 세상에 사는 것만 같았다. 아렌델 군은 그들이 모이는 날만 고대하여 그들이 모여 시위한다는 것을 필두로 진압할 계획이었다. 진압에 성공한다면 겁을 먹은 그들이 더이상 거리밖에 나서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은 완벽히 빗나갔다. 그들을 진압하는 데 까지는 성공했으나 지레 겁을 먹기는 커녕 무력진압에 실망한 국민들 일부가 저항세력에 합세하기 시작했다! 사태는 더욱 심각해졌다. 그들은 아렌델군의 진압에 맞설 시민군으로 변모했고, 나라와 군주에 반감을 가진 소수에 아렌델군이 시민군에 합세하면서 군사저장고에서 무기를 빼돌려다가 공급해 준 덕분에 번듯한 무기까지 갖추었다. 줄기는 커녕 더 늘어나니 당황한 아렌델군의 사기는 점점 떨어졌고, 시민군의 기세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댔다.


 번쩍 솟은 기세와 함께 그들은 점점 더 대범해졌다. 데이지라는 리더가 그들을 통괄하기야 했지만 그 많은 사람들을 모두 통제하기엔 벅찼다. 결국 그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었고, 근무중인 국군에게 시비를 걸거나 심지어는 죄없는 시민의 금품을 약탈하는 등 온갖 비도덕적인 일이 파다했다. 그나마 다행스런 점은 서로 모토가 같아 시위를 벌이거나 무기를 빼돌릴 때는 죽이 잘맞았다.


 사람이 셋 이상 모이면 분열하기 마련이다. 서로 일맥상통하던 그들 사이에서 이제는 내분이 일어나 별안간 서로 파를 나누기 시작했다. 폭력을 주로 삼던 시민군에 반발한 세력은 이 겨울을 수습하나 폭력은 최소화하자는 모토의 온건파로 변모했고, 그 외의 세력은 자연스레 급진파로 변모했다. 온건파의 리더는 원래 그들을 이끌어가던 데이지가, 급진파의 리더는 새로이 뽑힌 느와가 차지했다. 서로 못죽여 안달이었다. 호시탐탐 한쪽을 소탕할 기화만 엿보았다. 운이 좋게도 병력을 나르던 군인이 급진파에 상주했기에 군사력은 급진파 쪽의 우세였으며, 그 이유에선지 머릿수도 많았다. 계속해서 불어나는 시민군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국군은 이제는 서로 대립한다며 조금이나마 쉴 수 있겠다며 안도해 했다. 상대적으로 우세한 군사력을 채비한 급진파는 군사력이 미비했던 온건파를 습격할 계획에 착수했다. 그 내용은 별다를 것 없는 기습작전이었다. 분명 이건 아렌델 군에겐 눈엣가시였던 시민군을 모조리 소탕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한껏 해이해져서는 그 기회를 모조리 놓치고 말았다.


 기습은 간단히 끝이 났다. 밤중에 경비가 느슨해진 틈을 타 정문을 따라 1차 병력이 투입되었고, 혼잡해진 틈에 나머지 병력이 우회로를 따라 잠입하여 중요 인물을 제거했다. 뒤늦게 전투태세에 돌입한 온건파는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죽어 나갔다. 늦은밤 기습을 당한 데다가 장비도 상태도 온전치 못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큰 타격을 입은 온건파는 회복도 하지 못하고 스멀스멀 사라져갔다.


 그들은 이제 눈에 거슬리던 온건파들도 모조리 사라졌겠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여왕 시해 작전에 돌입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들은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겨울을 끝낼 수 있겠다며 환호했지만, 그게 웬만큼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게 밝혀지자 실망감에 빠졌다. 여왕을 시해하기 위해선 일단 왕궁의 삼엄한 경비를 뚫는 것은 물론 주변의 잔존 병력까지 제거해야만 했다. 온건파를 기습했을 땐 그들의 병력이 미비했기 때문에 쉽게쉽게 제압 할 수 있었지만 이번 경우는 달랐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무기의 공급원은 국방부의 군사 창고였기때문에 아무리 빼돌렸다 한들 국군의 군사력이 더욱 우세한 건 당연지사였다.


 모두가 실망감에 사로잡혀있을 때 한 사람이 무식하게 경비를 뚫을 필요가 뭐가 있냐고, 자신이 직접 암살하겠다며 자신만만히 나섰다. 그는 날 때부터 근근이 뒷골목 생활을 해온 악셀이라는 젊은 청년이었다. 그는 날품팔이를 했는데, 어린나이에 파는 물건이야 상태도 안좋아 사가는 사람이 없어 이대로 가면 정말 쫄쫄 굶어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남들의 주머니를 건들기 시작했다. 그래도 벌이가 마땅치 않아 아예 남의 집까지 드나들기 시작했다. 이게 생활고에 도움이 되자 날품팔이는 접고 도둑질에만 전념했다. 직업 특성상 도망갈 일이 많아 자연스레 발이 빨라졌고, 모르는 사이에 빨리 주머니를 뒤져야 했기 때문에 손기술이 남달랐으며, 잠입 기술은 몸으로 경험한 것이 많아 요리조리 잘 피해다녔다.


 그러한 생활이 익숙해질 때 즈음, 별안간 한여름에 눈이 내리는 사태가 발생하고 폭설로 인해 외출하는 사람이 급격히 감소하자 소매치기도 못하고 전부 집에만 박혀있어 도둑질도 못해 돈벌이 수단이 줄어든 기분이라 괜스레 여왕에게 반감을 품고 시민군에 합세했다. 그리고 지금, 그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약 성공한다면 귀족 자리 하나정도는 얻을 수 있을 것이었다. 실패한다고 해도 제 빠른 발로 도망만 가면 되었기에, 잃을 것 없는 그는 여왕 시해 작전에 능동적으로 착수했다.


 악셀은 그 날만을 고대하며 체력을 쌓았다. 하루는 혹여나 들킬 것을 대비해 도주로를 탐색하던 날이었는데, 왕궁 가까이 까지 가서 탐색하다가 수상쩍은 낌새를 발견했다. 왕궁 성벽에서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는 한 처녀였다. 얼굴을 얇은 천으로 가리고 있어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는데, 풍성한 백금색 머리카락만은 전부 가릴 수 없었는지 천 사이로 삐죽삐죽 튀어나와있었다. 그때 악셀은 몇 가지 의문이 들었다. 하나는 왜 멀쩡한 정문은 놔두고 수고스럽게 성벽을 타고 내려오는지에 대한 것이었고, 둘째는 나오는 방법이 이상한 것은 둘째치고 저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뭐 저 처녀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하는 생각으로, 그냥저냥 자기와 비슷한 동류의 도둑인 셈 치고 제 갈길 가려했으나 자세히 보니 문득 무언가 생각났다.


 "대관식에 안갔다고? 왜?"


 "그깟 대관식이 나랑 뭔 상관이야. 내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마당에."


 "지금 여왕의 목을 따버리겠다는 녀석이…. 뭐…. 여왕은 백금발이고 동생은 밤색이야. 서로 헷갈리지 마. 뭐, 그다지 헷갈릴 일은 그다지 없을 것 같네. 아렌델에서 백금발은 보기 드물거든."


 어젯밤 느와가 여왕을 직접 본 적이 없어 얼굴을 모른다는 악셀을 위해 이렇게 미숙한 녀석이 거사를 제대로 치를 수 있을지 반신반의하며 해준 말이었다. 


 그때 모든 의문이 풀렸다. 그 처녀는 분명 여왕이었다. 정문으로 직접 나오지 않고 수고를 들여가며 성벽을 타고 나온 이유는 정문으로 나갔다간 괜한 파문이 일어서 피해를 볼까 그랬을 것이고, 얼굴을 천으로 둘둘 감싼 것 또한 같은 까닭이었을 것이다.


 악셀은 여왕이 약간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를 노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궁정 안에서 쥐새끼처럼 숨어있지는 못할망정 괜히 바깥세상을 구경하겠답시고 경비 몰래 성벽을 타고 빠져나오다니,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게 틀림없었다.  저런 우매한 여자가 한 나라를 통치한다니, 반란군이 도심을 도사리고 있는데 나올 군주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악셀은 여왕이 한심하기 까지 했다. 악셀은 그날까지 기다릴 필요없이 지금 당장 죽이면 될 것이라는 생각에 여왕이 한적한 곳에 가기만을 고대하며 미행했다. 설령 그녀가 여왕이 아니라도 별 상관없었다. 그저 예행 연습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이었다.


 악셀은 여왕이 음산한 곳에 가기만 하면 항상 가지고 다니는 단도로 가슴팍을 단번에 찔러 죽일 기세로 미행했다. 드디어 이 겨울을 끝낼 수 있겠다는 생각에 들떠서 소리를 내는 바람에 들킬 뻔도 했지만, 어찌어찌 잘 넘어갔다. 그런데 별안간 도시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아닌가. 그쪽은 북쪽 산 쪽이었고, 볼 것이라곤 자기 탓에 쌓인 눈밖에 없을 것이다. 바깥구경을 하러 나온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여왕은 북쪽 산 깊은 곳까지 들어갔다. 악셀은 아직 여왕은 건드리지 않았다. 악셀은 아직까진 호기심이 왕성해서 여왕을 바로 죽일 욕심보다는 그녀가 어딜 가고 있는 지 알고 싶은 욕심이 더 일었다. 그 호기심만 해결된다면, 단칼에 여왕을 찔러 죽일 셈이었다. 여왕은 더욱더 깊은 곳으로 향했다. 악셀은 아직도 그녀가 어딜 향해 가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렇게 미행이 점점 지루해질 무렵, 뜬금없는 얼음계단이 나타났다. 그게 향해있는 곳을 바라보니 하늘 높이 솟아있는 얼음 성이 나타났다. 악셀은 처음보는 광경에 눈이 휘둥그래져서는, 여왕이 자신의 시야에서 멀어지는 것도 모르고 얼음 성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투명한 각각의 얼음덩어리들은 서로 맞물려 하나가 된 것 처럼 보였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은 첨탑은 무서울 정도로 경이로웠다. 얼음은 태양에 비춰서 오색찬란한 광이 났다. 물론 그는 예술쪽에서는 문외한이었지만 그 얼음성은 예술에 조예가 없는 사람이라도 무아지경에 빠져들만한 것이었다.


 난생 처음 보는 얼음 성에 넋이 나간 나머지 그만 여왕을 시야에서 놓치고 말았다. 악셀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얼음 계단을 헐레벌떡 뛰어 올라가다가, 열두번째 계단에서 발을 헏디뎌 넘어졌다. 미끄러운 얼음 계단을 뛰어 올라간 게 실수였다. 그는 뒤로 고꾸라지면서 굴러 떨어졌다. 허리와 발목에 큰 충격을 입어 고통에 신음하고 있을때, 둔탁한 소리가 아래에서부터 위로 울려 퍼져 악셀의 귓가에 맴돌았다. 악셀은 그 소리에 놀라 발목이 아픈건 뒷전으로 하고 계단을 허겁지겁 올랐다. 일층에 여왕이 없어 두리번 거리다 이층으로 올라갔다. 그래도 그곳에 없자 발코니로 눈을 돌렸다. 들킬건 생각도 않고 발코니 문을 단박에 열어젖혔다. 하지만 그곳엔 정교하게 만들어진 얼음 구두 한짝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


 '착한아이가 되렴, 언제나 그래야해.'


 엘사의 아버지가 항상 하던 말이었다. 제 마법이 남을 해칠까 두려워 남을 피할 때마다 습관처럼 말해주었다. 그 차가운 손에 새끼손가락을 마주 걸고 약속할 때에는 그 온기가 사뭇 위안이 되어주곤 했다. 하지만 그 감정도 얼마 가지 않았다. 저 말을 계속해서 들어 버릇하니 귀에 박혀버렸다. 착한 아이가 되어야 한다는 부담이 생겨버린 것이다. 그 부담감에 성격은 도리어 소심해져서는, 자신의 방에 들어온 시녀에게 자칫 부딪히기라도 하면 죄송하다고 고개 숙여 사과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은 일쑤였고, 시녀는 왕족이 평민에게 사과하는, 주객이 전도된 상황에 어리둥절해서 땀을 뻘뻘 흘리며 어찌할 줄 모르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선왕이 살아있을 적만해도 착한아이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그리 크지는 않았다. 그저 아버지를 위해 할 수 있는것이 '착한 아이가 되는 것' 정도였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성격이 소심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마법을 어느정도 억제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런 허점은 충분히 무시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선왕이 뱃사고로 죽은 이후 아버지와의 마지막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 잡혔다. 그리곤 아버지를 이을 선왕(善王)이 되기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대관식날 그 첫 단추를 잘못 끼우고 말았다. 여왕으로 즉위하고 하루가 채 지나지도 않았는데 마녀 취급을 받기 시작했다. 안나가 장갑을 빼앗은 탓에, 마법을 통제하지 못해 들키고 만 것이다. 마법을 들킨데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분수의 물을 끔찍한 모양새로 얼려버리고, 사절단 일행을 다치게 할 뻔 해 괴물이라는 악칭까지 달게 되었으니, 마음 여린 엘사로서는 가히 감당이 안 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상황에서 무어라 변명하고 자시고 할 게 없었다. 당장 설명회라도 열어 내 마법은 이러이러한 이유로 발현된 것입니다-라고 해명할 수는 없었기에, 일단은 성 밖으로 도망하는 것 밖에는 답이 없었다.


 사뭇 뛰었다. 숨이 목구멍 까지 차오를 때 까지 부랴부랴 뛰었다. 뒤에서 안나가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미 겁을 지레 먹은 엘사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빙판을 한발 한발 내딛을 때마다 아렌델과 산을 깎아지른 피오르의 아름다운 절경이 벌레 좀먹듯 얼어가는 것은 꿈에도 모르고 무작정 뛰기 바빳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엘사의 달음박질은 멈추었다.


 엘사는 자신의 처량한 신세에 눈물이 확 차올랐다.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차오르자 턱선을 따라 흘러내렸다. 선왕이 죽고 3년동안 흘려본적 없는 눈물이었다. 훗날 여왕이 될 몸이라 격식을 차리러 눈물 한방울 떨구어본적이 없었는데, 결국 여기서 울음보가 터졌다. 눈물을 닦아내도 닦아내도 도저히 멈추질 않았다. 소매는 아예 축축하다 못해 늘어져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손으로 쭉 자면 한바가지 나오지 않을까 할 정도로 울었다. 죽을만큼 뛰다가, 이젠 꺽꺽대며 울고, 엘사는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한바탕 울고난 엘사는 치맛자락에 묻은 눈을 털어내고 일어났다. 몸을 쭉폈다. 한껏 울고나니 사뭇 머리가 맑아졌다. 그리고 생각했다. '왜 나는 선왕이 되어야만 하지?' 오늘에서야 처음 해본 생각이었다. 그리고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그런 강박감은 떨쳐내고 이 한몸 자유롭게 살아가리라 하는 생각까지도 했고, 아예는 착한아이가 되지 않아도 된다 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의식에 몸을 맡겼다.


 손을 휘두르는 대로 온갖 것들이 피어났다. 신이 된 기분하며 속이 뻥 뚫리는 기분하며 오랜만에 느껴보는 손끝의 차가운 감촉. 무엇하나 나무랄데가 없었다. 이쪽에 손짓하면 얼음성의 기둥이 솟아오르고, 저쪽에 손짓하면 성의 기반이 드러났으며, 위로 한번 손짓하면 천장이 기둥 위로 앉혀졌다. 푸르런 얼음이 사방에 깔려있는 것이 말그대로 황홀경이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해방감에 엘사는 미소가 떠나갈 일이 없었다.


 그리고 다짐했다.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노라고, 누구도 나를 억압하지 못할것이라고.


 그러나, 그게 뜻대로 되지가 않았다. 안나가 찾아오고, 또 안나를 죽기 직전까지 몰아넣고, 심지어는 아렌델을 통째로 얼려버렸다. 또 아렌델이 언 탓에 민심이 매서워졌고, 그탓에 엘사를 짓눌러왔던 압박감은 다시금 그녀를 찾아왔다. 그래서 엘사는 지금 옥외 난간에 서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러고 있을리가 없다.


 엘사는 괜히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처음부터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았더라면 이지경까지 오지는 않았을텐데. 아니. 유언이라도 남겨주었다면, 그런 강박감 속에 살아가지는 않았을것이다. 사실 내 불찰일 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별 다른 의도로 나에게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닐것이다. 결국 여기까지 나를 몰고간것은 나 자신이었다.


 엘사는 자신을 이지경 까지 몰고간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고 자책했다. 하지만 그건 끝까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나쁘게 하고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선왕에 대한 원망은 가시지 않았다.


 엘사의 머릿속이 복잡한 생각으로 얽혀있을때, 뜬금없이 저 아래서 둔탁한 소리가 나서는 그 흐름을 깨버렸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그 소리의 근원을 바라보았다. 가만보니 사람이다. 그냥 사람이 아니라 어딘가 다쳐서 신음하는 사람이다. 지금 이런 상황에 별안간 뜬구름 잡는 환자가 발생하다니, 이거 뭐 달려가볼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기는 뭐해서, 가만히 있는 것도 아니고 움직이는 것도 아닌, 엘사는 쭈뼛쭈뼛한 손짓을 연신 해댔다. 그자는 허리를 다쳤는지 어중간한 고양이 자세로 허리를 부여 잡았다. 그런데 가만보니, 허리춤에 차고있는 칼집이 눈에 들어왔다. 칼집이 눈에 들어오자 엘사는 저자가 자신을 죽이려 여기까지 온 것이라는 걸 단박에 알아챘다. 여자의 직감인 것이다. 까딱하면 칼에 찔려서 유혈이 낭자한채로 죽었을 수도 있었다. 엘사는 그런 생각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하지만 어쨋거나 이미 죽은 목숨. 칼에 찔려 피가 낭자해서 죽든 이 까마득한 높이에서 떨어져 머리를 박아 죽든 결국엔 결과는 똑같다. 체념한 엘사는 난간을 붙들고 있던 손을 떼었다.

 

 ++


 무작정 봄문 대회에 참가했는데, 막상 신청하고 나니 문제가 되는 건 머리를 아무리 쥐어짜도 소재가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집필 경험이 많지 않은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그냥글이 쓰고 싶은 마음에 무대뽀로 참가한 탓도 컸다. 그렇게 투고일만 가까워 지는데 이렇다할 소재는 떠오르지 않고 하릴없이 시종일관 프갤만 하다 어떤 글에서 착안해 후다닥 써내려갔다. 원래는 안나가 쓰러지고 난 뒤 일어나는 일을 엘사가 어떻게든 해결하는 게 주내용이었는데, 시간에 쫓겨 기승전결 등의 요소를 깊이 생각하지 않고 쓰다보니 내용이 점점 얽히고 섥혀 괴상해졌다. 그래서 그냥 다 뒤집어 엎고 주제만 그대로 한채 극발암으로 가보자하고 (쓰기 쉬우니까) 급선회해서 나온 작품이 이것. 부족한게 많지만 그래도 완결을 냈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있다. 쓰다가 흐지부지 끝내버린 글이 많아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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