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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rozen 단편집] 겨울에도 얼지 않는 항구 上

인섹o장지웅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6.03.15 09:11:55
조회 340 추천 6 댓글 1

나는 오래전부터 이 작은 부동항을 지키는 수군의 문지기였네. 때는 1905년의 추운 초본이었지. 황량한 영구 동토층에서 나고 자란 우리 민족은 뼈를 깎는 추위를 매년 겪어왔지만, 그 해는 유달리 독했어. 겨울에도 얼지 않기로 유명한 이곳 블라디보스토크 항이 결빙될 정도였으니까.  

그날도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추위를 쫓고, 지방의 내 가족을 생각하며 보초를 서고 있었다네. 비록 무역항에서 군함이 출항하는 일은 없었지만, 우리는 잦은 군함의 출입에 무언가 벌어졌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어. 천 번째 패전소식이 들려온 것은 바로 그 날 오후였다. 온 항구도시가 떠들썩해졌지. 겨울철 다랑어잡이를 하던 어민들도, 보초를 서던 우리 군인들도. 세상에, 대러시아의 함대가 일본에 패전하였다니 뭐니!  

사실 나는 남쪽의 작은 나라들에 그리 친절하지 않다. 근대의 강성한 청은 가고 없고, 우리의 코사크 기마병들이 누벼야 할 따뜻한 - 비옥하지는 않지만 - 땅을 빼앗긴 지 오래였지. 남쪽의 왜소한 나라들은 연중 얼지 않는 항구를 통해 우리 땅을 자주 드나들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는 조선의 황제가 이곳으로 피신했다고도 하지.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이렇게 불우한 땅에서 수천 년간 살아왔음에도 우리 슬라브인들은 단 한 번도 의심을 하지 않았다. 또한, 의심을 하지 않은 사실을 의아해한 자도 단 한 명이 없었지. 나를 제외하면!  

서쪽의 높으신 분들은 무지한 사실이지만, 동쪽의 초라한 촌 슬라브인들에게도 우리 고유의 전설이 있었다. 마을의 노인이 집에서 유일하게 따뜻한 모닥불 가에 앉아 들려주던 구전들.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상당수는 전통신앙에 박식하신, 지금은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들려주신 것이지. 구전은 우리의 어촌지대 삶에 깊숙이 스며들었고, 때때로 전래동화의 예언들은 삶의 방향을 결정해 주었네.  

비록 나는 비린내가 풍기는 항만도시 사람이지만, 내 조상들은 침엽수림과 공존하며 살았지. 숲 속에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살면서, 오직 가장 진실한 자에게만 모습을 드러내는 “트롤”이라는 존재가 있었어. 많은 자는 트롤을 전설 속의 존재로 치부하며 믿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트롤과 깊은 인연은 맺은 몇 안 되는 사람이었어. 트롤은 미래를 제한적이나마 내다볼 줄 알았지. 그들의 예술적인 시구의 형태로 전해지는 예언들이야. 

여기, 내가 소개해주고 싶은 예언 시를 하나 암송해보겠네. 하지만 뒤를 조심하라고. 교회 정교도를 탄압하는 짭새의 눈에 걸리면 큰일이니까. 

얼음의 군주  
얼어붙은 대지의 봉인이 풀릴 때,  
슬라브의 후예에게는 선택이 주어진다네.  

얼음의 군주가 대국을 호령하던,  
말 탄 군주가 왕국을 통치하던,  

선택이 어찌 되는 미래는 핏빛으로 물드리.  
신령의 손을 잡거라, 그러지 않는다면,  
그대의 절친이 자네를 핏빛으로 물들이리.  

군주는 대지를 떠나리.  
순록의 땅은 버려지리.  

엘리자베스의 저주가 실현되리,  
구원자가 오기 전까지.  

구원자가 군주일지 외세일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네.  

대현자 파비를 따르게나.  
.  
.  
.  


* * * 

그해 초, 패전소식이 들려오기 전, 민중이 깍듯이 섬기던 군주 니콜라이 2세는 빵을 요구하는 민중에게 발포했다.  

“피의 일요일."  

성역, 하늘의 권위를 지닌 차르의 겨울왕궁이 붉은빛으로 물들었다네. 새하얀 눈바람이 그 자국을 덮는 데는 하루도 걸리지 않았지. 나는 젊었을 적에 피비린내를 맡아봤어. 사건 발생 당시 동쪽 끝의 무역항에 있었던 것을 감사히 생각하는 이유지.

어릴 적부터 트롤의 예언을 숭배했던 나는 이 예언이 실현되고 있다는 걸 직감했네. 민중의 절친이 피바람을 휘날리며 자신의 위용을 과시했고, 민중은 이에 맞서 파업을 요구했지. 산불처럼 번지는 반발의 여론에 맞선 탄압의 손길은 이곳 동쪽 지대까지 뻗치게 되었다.  

그해 말, 우리의 신뢰를 저버린 차르 니콜라이 2세는 산속으로 도피했지. 이 얼어붙은, 황량한 사냥꾼들의 대지를 잊은 채. 그의 충복들은 이미 암살당했다. 유일하게 그레고리 라스푸틴만이 제 죽음을 예언할 수 있었고, 그는 스스로 “라스푸틴이 귀족에게 죽는다면 차르는 이 땅에서 사라질 것이다”라는 문구를 남겼다고 전해져.

나는 라스푸틴이 트롤의 전령이라고 믿네. 
그의 의술은 대자연의 것이요, 예언은 고대 기도문에 새겨진 것들이지.  

최후의 차르가 사라진 1905년의 겨울은 그해 초에 겪었던 추위보다 더 강렬했어. 항구도시의 모든 장정이 나서서 얼음을 깼지만, 저주받은 바다는 우리에게 다랑어잡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예언이 착실히 실행되어 가고 있었지.

보초를 서던 어느 날 오후 - 토요일이었을 게다 - 나는 드디어 예언의 마지막 구절이 실행되는 것을 발견했다. 최근 몇 달간 배가 드나든 적이 없는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에 군함 한 척이 들어오는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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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도 얼지 않는 항구 상
겨울에도 얼지 않는 항구 하

안나와마술나라 상
안나와마술나라 중
안나와마술나라 하


*****

작가의 말
유일하게 2인칭으로 쓴 작품이자 유일한 역사 단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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