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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전쟁 1부 下.txt

Neb(116.123) 2014.02.27 08:51:16
조회 2478 추천 32 댓글 16

첫화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frozen&no=577759




13.



그날 내내 안나는 언니를 볼 수 없었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엘사의 방으로 달려가 문을 두들기며 언니의 이름을 불러도 보고 방문에 기댄 채 바닥에 앉아 무작정 기다리기도 해 봤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 카이에 의해 식당으로 끌려온 그녀는 엘사의 의자가 빈 것을 보며 한숨지었다. 식사로는 먹음직스런 스테이크와 후식으로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초콜릿이 나오는 것을 보았지만 별로 식욕이 일지 않아 조금씩 깨작거리며 먹다 말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안나는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지만 자정이 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이 내뱉었던 독설들과 엘사가 눈물을 흘리던 것을 머릿속에서 계속 반복재생하며 최책감에 몸서리쳤다. 


그런데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서서히 문이 열리더니 뭔가가 철컹거리는 금속음을 내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안나는 고개를 돌려 어둠 속에서 꾸물대며 움직이는 기괴한 갑옷덩어리를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히, 히-익, 경비-”


“안나, 나야! 올라프!”


올라프가 서둘러 대답하며 오일램프에 불을 밝히자 눈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머리에 중세 기사의 투구를 얹고 중간 몸통에는 매끈하게 빛나는 풀 플레이트 흉갑을 착용하고 있었다. 중간 몸통 양 옆에는 나뭇가지 대신 자동석궁과 전투도끼가 꽂혀 있었고 아랫 몸통에 받혀진 그리브(주-중세 기사가 사용하던 갑옷의 정강이받이)가 흉물스럽게 덜렁거리고 있었다.


안나는 얼마 전 머쉬멜로가 부럽다고 그녀에게 말했던 올라프를 마개조했던 것을 떠올리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올라프! 왜 한밤중에 튀어나와 사람을 놀래키고 난리야!”


“어, 안나? 장난치거나 그럴 의도는 없었어. 그저 나는 네가 고민이 많은 것 같아서….”


바이저(주-투구에 달린 얼굴가리개)를 덜컹거리며 그가 말했다.


“오늘 네 언니와 싸웠다고 들었어. 둘 다 모두 너무 슬퍼해서 너희를 도와줄 어떤 방법이 있을까 알아보러 온 거야.”


그 말에 상처받은 얼굴로 뛰어가던 엘사를 다시 떠올린 그녀는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나는 언니를 볼 자격도 없어…. 맙소사, 한 번 죽였으니 두 번째는 쉽다고? 내가 그런 소리를 했다는 게 믿겨지지가 않아….”


“음, 안나? 자책하는 건 좋지만 그게 언니 기분 푸는데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는데.”


“그럼 내가 뭘 할 수 있다는 거야? 엘사는 문을 걸어 잠그고 방 안에서 한 발짝도 안 나오는데? 문 앞에서 미안하다고 사과도 해보고 제발 열어달라고 애원도 해보고 안 나오면 초콜릿 다 먹어버리겠다고 협박까지 해봤지만….”


안나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말했다.


“완전 망했어. 어린 시절의 언니로 돌아간 것 같아서 미쳐버리겠어!” 


“음, 안나, 내 생각엔 이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지금 둘이 직접 마주보고 얘기하기는 좀 그러니까, 내가 가서 엘사 기분을 풀어주고 네가 얼마나 미안해하는지 대신 말해 줄게.그 잠깐 다음에 네가 들어와서 화해를 하는 거야! 어때? 지금 당장 하자!” 


올라프는 몸을 빙글 돌려 요란한 금속음과 함께 방문으로 통통 튀어갔다.


“하지만 엘사는 지금 자고 있을 텐데….”


“괜찮아! 아까 내가 살짝 보고 왔는데, 지금 깨어 있는 게 분명해.”


“문이 잠겨 있잖아!”


“그 정도는 내가 따고 들어갈 수 있어.”


그는 밖으로 나가려다 문지방에 걸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넘어진 뒤, 고개를 돌려 안나를 향해 말했다.


“그 전에, 역시 이 쇳덩이들은 좀 벗겨주라….”









14.



에렌델 성 안에 있는 예배당의 지붕 위에서 바람에 빙글빙글 돌아가는 풍향계를 멍하니 바라보던 경계병은 크게 하품을 한 차례 하고 졸린 눈을 비비고는, 계절 때문에 쌀쌀해진 밤바람에 몸을 떨면서 화톳불 근처로 슬금슬금 몸을 옮겼다. 


달의 위치를 보면서 교대시각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대충이나마 가늠하던 그는 문득 윙윙대며 고막을 때리던 바람소리가 어느 순간부터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시선을 돌려 다시 풍향계를 보았지만, 풍향계는 여전히 신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입을 열어 아- 하고 소리를 내보았다. 분명 성대가 떨리는 게 느껴졌지만 귀에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불안해진 그는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손으로 귀를 툭툭 쳤다. 그 때, 어둠 속에서 작은 화살이 날아와 그의 이마에 꽂히고 경계병의 동공이 풀리며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새카만 로브로 전신을 감싼 남자가 성벽 위로 올라와 시체를 성벽 밖으로 내던졌다. 그는 내실 방향으로 움직이려다가 다시 바람 소리가 서서히 들려오기 시작하자 잠깐 다리를 멈춘 뒤, 품에서 은은한 푸른빛을 내는 양피지를 꺼내 뭔가를 중얼거리며 북 찢었다. 그러자 양피지의 빛이 점멸하며 소리가 멎었고 그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15.



엘사는 눈물에 젖어 축축해진 베개 위에서 눈을 떴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았다. 은은한 달빛을 받아 희미하게 보이는 시침이 이제 자정을 넘어 아래로 서서히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엘사는 다시 얼굴을 베개에 푹 파묻고는 안나가 그녀에게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확실히 최근 들어 동생과의 대화가 드물어지긴 했다. 하지만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일들이 엘사에게 닥쳐왔고, 그녀에게는 도저히 동생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안나가 그녀를 도와줄 수 있다면, 그녀의 국정을 돕고, 의논 상대가 되어주고, 그녀가 내려야만 할 결단이 몰고 올 결과와 그 죄를 같이 짊어질 수 있다면 좋겠지만, 엘사는 자신 때문에 한 번 죽기까지 했던 안나에게 아무런 것도 요구할 수 없었다. 


엘사는 심란한 마음에 이불 속에서 몸을 뒤척였다. 창밖을 보자 별이 점점히 박힌 밤하늘이 보였다. 그런 그녀의 눈에 창문 한 구석의 유리가 소리 없이 깨져 구멍이 나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피가 식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눈을 가늘게 뜨고 창밖을 세세히 뜯어보았다. 검은 인영이 손에 든 무언가로 그녀를 겨누고 있었다. 


엘사가 황급히 손을 휘둘러 얼음으로 된 벽을 만들어내자 창문에 난 구멍으로부터 작은 화살이 날아와 박혔다. 그녀는 허둥지둥 침대에서 벗어나 문으로 달리며 힘껏 외쳤다. ‘경비병!’ 그러나 목이 울리는 느낌만이 날 뿐,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 동안 창문을 박살내고 방 안으로 침입한 괴한이 엘사가 만들어낸 벽을 타고 넘어 그녀에게로 쇄도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엘사가 다시 손을 휘둘러 좀 더 높은 벽을 만들어 냈지만 침입자는 달려오는 속도를 줄이지 않으며 왼손을 뻗어 그것을 후려쳤다. 벽이 순식간에 박살나고 방 안이 수증기로 가득 찼다. 당황한 그녀는 침입자가 접근해 단검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서야 몸을 움직였다. 가까스로 치명상을 피했지만 허리에 뭔가가 스치는 느낌이 들며 곧 끔찍한 통증이 그녀를 덮쳤다. 엘사가 한 손으로 상처를 감싸 쥐고 비틀거리며 달아나려 하자 침입자는 그런 그녀의 등을 향해서 단검을 찔렀다.


그 순간, 안개 속에서 난데없이 전투도끼가 튀어나와 단검을 튕겨내었다. 곧 전투도끼와 석궁이 달려있는 괴상한 모습의 눈사람이 나타나 침입자의 앞을 막아섰다. 침입자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걸 본 올라프가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무기들을 휘두르며 달려들어 흉흉한 기세로 도끼를 내리쳤다. 하지만 침입자가 살짝 몸을 틀자 도끼는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고, 그가 파리를 내쫒듯 왼손을 휘둘러 눈사람을 쳐냈다. 올라프는 몸통의 절반이 증발한 채 날아가 벽에 부딪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16.



또각또각 하는 발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안나가 한 손에 램프를 들고 시선을 발끝에 떨군 채 혼자 이런저런 말들을 중얼거리며 복도를 걷고 있었다.


“으음, 엘사, 내가 언니한테 한 말이 좀 심했지? 반성하고 있으니까 용서해줘. 아냐, 아냐. 이러면 마치 내가 강요하려는 것 같잖아. 음, 엘사! 내가 정말 미안해! 날 용서해줬으면 좋겠어! 이건 좀 가식적인 느낌이 드네. 음, 그렇다면-’


안나는 뭔가 이상하다 싶어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무엇이 이상한지 알아차렸다. 발소리가 안 나잖아. 그녀는 중얼거리다가 자신의 목소리마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뭐지?


안나는 문득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발걸음은 점점 더 빨라졌고 그녀는 곧 뛰어가기 시작했다.







17.



엘사는 왼쪽 허리에서부터 올라와 머리를 하얗게 태우는 통증에 괴로워하면서도 침입자로부터 조금이라도 멀어지기 위해 비틀비틀 방의 구석으로 도망갔다. 그녀의 목은 쉴 새 없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것을 듣지 못했다. 방해꾼을 치워버린 침입자는 그녀를 지긋이 노려보다가 바닥에 흩어진 얼음 파편들을 승화시켜 방 안을 안개로 가득 채우고 그 속으로 숨어들어갔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엘사는 미쳐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피가 계속 새어나오는 허리를 오른손으로 감싸 쥐며 불안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그녀의 눈에 갑자기 왼쪽에서 튀어나와 자신을 덮쳐오는 침입자가 눈에 비쳤다. 그녀가 자유로운 왼손을 휘둘러 침입자를 향해 흰 빛을 쏘아내고, 그것을 양 손목을 교차시켜 막아낸 침입자의 팔이 순식간에 얼어붙었지만 그는 계속 달려가 엘사의 허리를 향해 발을 내질렀다. 다리가 깔끔한 궤적을 그리며 그녀의 부상부위에 적중했고 엘사의 시야가 하얗게 변하면서 몸이 날아가 오른쪽 벽에 부딪혔다. 



올라프는 의식이 돌아오자 몸이 불타는 듯 한 통증을 느꼈다. 그는 처음 느끼는 통증이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곧 엘사가 처한 상황을 떠올리고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곧 그의 흐릿한 시야에 침입자의 희미한 실루엣이 보였다. 올라프는 덜덜 떨리는 왼쪽의 석궁을 들어올려 침입자를 겨누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엘사는 바닥에 쓰러진 채 입을 뻐끔거리며 몸을 꿈틀대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양 손으로 감싸 쥔 왼쪽 허리에서 새어나온 피가 바닥에 번져 그녀의 피부와 옷을 붉게 적셨다. 그러는 동안 왼손의 장갑으로 양 팔을 모두 녹인 침입자가 단검을 역수로 들고 왼손을 살짝 말아 쥔 사우스포 자세를 취하며 신중하게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엘사는 날아가려는 의식을 붙잡으며 발작적으로 손을 휘둘렀고, 침입자의 왼손이 그녀의 움직임에 반응했다. 


그 순간, 침입자의 몸이 뭔가에 받힌 듯 앞으로 튀어나갔고 그의 왼손은 힘없이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엘사가 그의 앞에 만들려 했던 벽이 그의 몸 안에서부터 만들어지며 내부를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18.



열린 방문으로 새어나온 안개로 가득한 복도를 지나 언니의 방으로 뛰어간 안나는 문지방을 넘기 직전 뭔가가 터지는 듯 한 소리와 함께 미지근한 액체가 자신에게 확 쏟아지는 감촉이 들었다. 그녀는 순간 멈추고 움찔했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방 안으로 들어서며 언니의 이름을 소리쳤다.


“엘사!” 다시 들리잖아? “엘사? 여기 있어? 대체 무슨 일이야?”


안나는 안개 속에서 멍하니 자신 앞의 뭔가를 바라보는 채 굳어있는 언니를 발견하고 그녀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엘사!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 안개랑 물은 또 뭐고?”


그 말을 들은 엘사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히스테리컬하게 소리쳤다.


“오, 오지마! 나가!”


“아니 대체 뭔데? 걱정되잖아.”


“그냥 나가라고!!”


박살난 창문으로부터 바람이 들어와 안개를 걷어내기 시작하자 자매의 눈에 서로의 모습과 방 안의 상황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안나는 놀라서 얼어붙은 채 언니의 앞에 너부러져 있는 하반신과 그 옆에 흩어져있는 내장들, 그리고 방의 반대쪽 구석에 처박혀 있는 상반신을 보고는 숨을 삼켰다. 방 안에 가득한 혈향이 그녀의 코를 찔렀다. 그녀는 지금 가장 힘든 것은 엘사일 것 이라고, 어서 그녀에게 다가가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발걸음이 도저히 떨어지지 없었다.


엘사가 피를 흠뻑 뒤집어 쓴 안나의 모습을 보았다. 허리의 상처 따윈 그녀의 머릿속에서 싹 날아갔고 저걸 어서 닦아내야만 한다는 생각이 그 빈자리를 가득 채웠다. 그녀는 힙겹게 일어나 비틀거리며 동생에게로 다가갔다. 언니가 다가오자 안나는 반사적으로 뒷걸음쳤지만, 엘사는 필사적으로 쫒아가 그녀를 붙잡고 얼굴에 묻은 피를 자신의 옷소매로 닦아내려 했다. 하지만 엘사의 옷은 이미 피로 흠뻑 젖어있었고 안나의 얼굴에는 피가 닦아내어지기는커녕 점점 번져가기만 했다.


몸을 굳힌 채 멍하니 있던 안나에게 문득 공포가 엄습해왔고 그녀는 몸을 돌려 문 밖으로 달아나며 소리쳤다. “경비병! 경비병!!” 그녀가 엘사를 뿌리치자 엘사는 바닥으로 무너졌고, 시야에 도망치는 동생의 등이 담겨있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의식을 잃었다.












19. 



엘사는 목이 불타는 것 같은 갈증을 느끼며 눈을 떴다.


의식이 서서히 돌아오는 것과 함께 정신이 맑아질수록 허리에서 느껴지는 통증도 커졌다. 그녀가 힘겹게 목을 돌려 옆을 보자 바닥에 무릎을 대고 침대에 엎드려있는 안나와 옆의 책상에 앉아 희미한 램프 빛에 의지해 뭔가를 끼적이고 있는 플래튼, 그리고 문 옆에 누군가 가져다놓은 의자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겔다가 흐릿하게 보였다. 엘사는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말했다.


“무, 물….”


그녀가 소리를 내자마자 안나가 잔뜩 눌렀다가 손을 뗀 스프링처럼 상반신을 벌떡 일으켰다.


“엘사? 엘사! 괜찮아!? 정신이 들어?” “여왕님! 겔다, 가서 빨리 물 가져와!” “아, 네, 네!” 겔다가 방 밖으로 헐레벌떡 뛰어나가고 재정관이 주책맞게도 머리를 산발로 한 채 허겁지겁 침대로 다가가며 물었다. “여왕님! 상처는 괜찮으십니까? 물 말고 다른 필요한 건 없으십니까?” “엘사! 지금 정신 든 거 맞지? 내 얼굴 보여?” 


호들갑을 떨며 이것저것 물어보는 그들의 말을 들으며 엘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 마실 물을 좀….”


“물은 지금 겔다가 가지러 갔으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맙소사, 엘사! 난 언니가 정말로 주, 죽는줄…. 정말, 정말 다행…. 으흐으으….”


한참을 울어서 붉어진 안나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렸다. 그리고 문이 벌컥 열리며 카이와 컵과 주전자를 손에 든 겔다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여왕님! 괜찮으십니까?” “여기 물 가져왔어요, 여왕님!” 카이가 엘사에게 다가가 그녀의 상체를 팔로 부축해 천천히 일으키고, 겔다가 물을 따른 컵을 들어 엘사의 입가에 가져갔다. “서둘지 말고 천천히 마시세요.” 바짝 마른 목구멍을 적시며 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자 눈에 비친 상이 뚜렷해졌다.  


“지금이 몇 시죠?” 그녀가 잔뜩 쉰 목소리로 힘없이 말했다. “내가 얼마나 오래 누워 있었던 거죠?”


“쓰러지신 지 이틀이 좀 넘었습니다. 상처가 조금만 더 깊었다면 큰 일이 났을 거예요.”


“올라프는…. 올라프는 어떻게 됐죠?”


“오, 올라프는, 쿨쩍, 크리스토프가 북쪽 산으로 데려가니까, 킁, 데려가서 눈바닥에 굴리니까 멀쩡해 졌어….” 


“그러면, 그…. 내 방에 들어왔던 사람은….”


카이와 안나의 대답을 들은 그녀가 조심스럽게 침입자를 언급하자 안나는 그날 봤던 것을 떠올리고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 광경을 보던 재정관이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시체는 이미 다 치웠습니다. 방은 깨끗합니다.”


“…제가 죽인 거죠?”


엘사가 허탈한 표정으로 묻자 재정관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다.


“여왕님, 그놈은 여왕님을 죽이러 온 암살자입니다. 죽이지 않으셨으면 이렇게 살아 계시지도 못했을 거에요.”


재정관의 위로 아닌 위로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내가 사람을 죽였어.” 방 안의 모두는 엘사를 위로하는 말을 꺼내려 했지만, 그녀 얼굴에 나타난 깊은 절망을 보자 입을 열지 못했다.


그녀는 동공이 풀린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그 순간을 떠올렸다. 침입자의 경악에 찬 눈과 힘없이 무너지던 몸, 그리고 얼음덩어리가 그의 배를 찢으며 나타나자 가죽 터지는 소리와 함께 비산하던 피와 붉은 덩어리들이 그녀의 뇌리를 맴돌았다. 전쟁이 일어나면 그런 것을 더 많이 보게 되는 걸까. 그러다 서던 제도에 생각이 미친 그녀는 자신의 지위와 의무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으려 노력했다. 벌써 이틀이나 지났다. 더 이상 국정을 내팽개쳐둘 수는 없다.


“서던 제도의 사절단은…. 그들은 어떻게 했나요?”


“어허허….” 재정관은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웃고는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나라를 걱정하시니 정말 참... 기특하십니다만, 여왕님, 지금 여왕님께서는 환자이십니다. 중환자요. 거기에 보너스로 정말 끔찍한 일도 겪으셨지요. 그냥 빨리 나을 생각만 하세요.”


“서던 제도의 군대는 제가 아프다고 기다려주지는 않을 거 에요.” 


“여왕님이 계속 아프시면 결국 힘든 건 저 입니다. 이건 노인학대에요. 저를 생각해서라도  그냥 아무 생각 말고 푹-”


“재정관, 저에겐 국가를 책임질 의무가 있어요. 명령입니다. 말하세요.”


그녀는 플래튼을 똑바로 쳐다보며 의연한 태도로 말하려고 노력했지만, 갈라져 높낮이가 들쑥날쑥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니 오히려 더 불쌍해 보였다. 플래튼은 측은한 눈빛으로 엘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픔을 내색하지 않으려 허리에서 올라오는 통증과 싸우는 엘사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는 것을 바라보며 그는 고민했다. 


더 이상 그녀에게 부담을 지우기는 싫다. 그녀는 이미 충분히 고통받고 있다.


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그녀는 자존심에 상처를 받을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권위를 스스로에게 의심받고 있는 그녀에게 치명적일 수도 있다. 제왕의 권위는 누구에게도 의심받아서는 안 된다고 플래튼 자신이 그녀에게 가르치지 않았는가.


잠시 후, 그는 무겁게 입을 열어 천천히 말했다.


“그들은 갔습니다. 전쟁이 시작될 겁니다.”



























20.



홀의 왕좌 앞에 선 플래튼은 그 빌어먹을 의자를 한참동안이나 노려보았다.


“저, 재정관님, 아니 임시 섭정님이라 불러 드립네까? 어쨌든 회의하실 시간입네다.”


“좀 기다려라, 이놈아. 왜 이리 성질이 급해?”


플래튼이 일갈하자 외무관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앞으로 다시는 들을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호칭을 곱씹으며 비참한 심정으로 다시 왕좌를 바라봤다. 섭정? 섭정이라. 역시 어감부터가 좆같구만.


외무관은 잔뜩 까칠해질 대로 까칠해진 재정관을 더 이상 재촉하기는 싫었지만 온 희망을 담아 간절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다른 관리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어차피 이 자리에 재정관에게 뭐라 할 만한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 게다가, 그는 몹시 피곤했다. 더 이상 침대로 달려가 꿀 같은 숙면을 취할 시간을 줄일 수는 없다.


“섭정님, 제 눈 좀 보시지 말입네다?”


재정관이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려 그를 보자 지난 사흘간 눈에 띄게 수척해진 노인의 얼굴과 시꺼멓다 못해 푸르딩딩해지기 시작한 다크서클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이 입에서 튀어나와 썅욕을 퍼부으려던 재정관의 혀를 붙잡았다. 그래, 지금 제일 힘들 놈은 저놈이지. 외무관은 정신병이 있는 게 분명한 그 서던 제도의 사절과 거의 전쟁을 벌여야 했다. 그와 동년배인 플래튼은 노인이 그런 일을 겪었을 때 얼마나 피폐해지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터벅터벅 왕좌 앞으로 걸어가 몸을 던져 의자 바닥에 등을 댄 방만한 자세로 앉았다. 그러자 그것을 본 외무관이 눈에 이채를 띠었다.


“오랜만에 거기 앉으신 모습을 보니 이제야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간 기분입네다그려.” 


“그건 또 무슨 헛소리냐?”


“뭐, 말 안 해도 아시잖습네까. 거기 여왕님께서 앉으신 뒤로는 뭐 하나도 제대로 된 게-”


“그 이상 지껄이면 넌 반역죄로 사형이다.”


외무관이 불만 가득한 눈빛으로 혀를 끌끌 차며 물러나자 그를 노려보던 플래튼은 시선을 빙 돌려 홀을 둘러보았다. 대다수의 신료들이 그에 동조하는 기색을 띠는 것을 보자 그는 암담한 기분이 들어 한숨을 내쉬었다. 


선왕이 죽었던 날부터 엘사는 언제나 그가 보호해야 할 대상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심지어 국장이 있던 날 까지도 궁 밖으로 나오지 않고 집 안에만 처박혀 허송세월하는 공주에게 과연 제왕의 기질이 있을 지 의심하는 이들은 많았다. 그는 섭정을 시작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원하지도 않았던 섭정파 파벌이 등장해 안나를 밀자는 것에서부터 그냥 다 죽이고 니가 왕을 하는 게 어떠하냐는 것까지 별의 별 제안을 다 하는 것을 들었고, 그때마다 정치적 약점을 잡고 협박해 입을 닥치게 한다거나 쥐도 새도 모르게 납치해서 배럴에 집어넣고 시멘트를 부은 다음 밀봉해 에렌델 앞바다에 던지는 등의 방법으로 그녀를 지켰다. 그는 대관식과 함께 모든 것이 바로잡아질 거라 생각했지만 그 여름의 사건과 함께 모든 것이 틀어졌다. 여왕의 지도력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았고, 플래튼은 언제까지나 그녀를 지켜줄 수만은 없었다. 사람은 언젠가 죽기 마련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던 섭정의 눈에 얼굴이 시뻘개진 채 화를 참느라 전신을 부들부들 떠는 근위대장이 들어오자 그는 희망을 가졌다. 비록 저런 무식한 새끼일지라도 여왕님 편이 있는 게 다행이구만.


그는 끙차 하는 소리와 함께 상체를 일으켜 왕좌에 똑바로 앉고 회의의 시작을 선언했다.


“자, 이제 여기로 몰려올 섬원숭이들을 어떻게 쓸어버릴지 생각해 보자.”














21.



온갖 배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훅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슬루프와 그것보다는 좀 크지만 그래도 역시 작은 콜벳들, 날렵한 프리깃들과 위풍당당한 전열함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도가 자랑하는 최강의 증기철갑선 HMS 레슬러 호 까지.


위대한 서던 제도의 통치자 통스 6세는 기함의 포어 마스트에 기댄 채로 수도 앞바다를 가득 채운 군함들을 보며 감격에 겨워 말했다.


“이 장면은 정말 언제 봐도 질리지가 않는군.”


“폐하, 이 출정 시기는 역시 너무 빠르지 않습니까?”


국왕은 눈치 없이 불유쾌한 말을 지껄여 한참 고양되어가던 자신의 기분을 잡쳐버린 장남을 보며 툴툴거렸다. “넌 정말 분위기 깨먹는 데에 일가견이 있구나.”


“폐하께서 말씀하셨던 마법에 대한 대책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출정한다고 해도-” 


“그것은 걱정할 것 없다. 여왕은 우리를 죽이지 못한다.”


간스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는 왕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왕이 저렇게 확신에 찬 태도로 단정할 때, 그는 틀린 적이 없었다. 왕은 그런 생각을 하는 태자를 흘끗 보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이걸 방해하려는 놈들이 어디 한둘이어야 말이지. 나는 네가 뭘 하는지 몰라서 너를 그냥 두는 것이 아니다, 간스.”


국왕은 그 말을 듣고도 여전히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태자를 봤지만 오히려 대견스럽다는 듯 그를 칭찬했다.


“너도 이제 정치가로서 완성되어가는구나. 하지만 네가 명심할 것이 있다. 아무리 그것이 대의를 위한 것일지라도, 네 정적에게 들킬 자신이 없는 일은 아예 하질 말거라. 네가 왕좌에 앉았을 때 상대할 적들은 지금의 나처럼 너그럽진 않을 테니.”


그런데 갑자기 그들의 뒤편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는 이 상황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구먼요!”


우람한 근육을 지닌 거구의 덩치가 그들에게로 걸어오며 말했다.


“엘사 고것의 초상화를 봤는데, 참 맛있게 생긴 아가씨더구먼요. 고냥 고것들이 내놓은 것들을 꿀떡 삼키고 나서 싸우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국왕은 그렇게 말하고선 쩝쩝 입맛을 다시는 셋째 왕자 단스를 보며 말했다.


“뭐, 네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지만 나는 영주놈들에게 뭔가를 준비할 시간을 더 주고 싶지가 않다. 그리고 여왕은, 음…. 좋다! 에렌델을 함락시킨 뒤 네가 그년을 맛볼 수 있도록 해주지.”


“흐하하! 고 작은 것이 제 밑에 깔려 비명을 지를 거라는 생각을 하니 꼴려서 참을 수가 없습니다! 고년을 잡으면 일단 머리채를 휘어잡고 옷을 세로로 이렇게 쫙 찢은 다음에 침대에 엎어놓고 XX를 XX겁니다! 으하하하하! 그렇게 한 발 X 다음엔 다시 뒤집어서 XX를 XXX면서-”


태자는 허공에 대고 요분질을 해대며 음담패설을 큰 소리로 지껄이는 동생과 그것을 흥미롭게 경청하는 아버지를 보며 한숨지었다. 그때 함대사령관 멜슨 제독이 다가와 왕에게 말했다.


“폐하, 함대 집결이 끝났습니다.”


“그럼 출발하도록 하자.”


고개를 끄덕인 제독이 뒤를 향해 수신호를 보내자 높은 곳에 올라간 수병이 수기를 흔들었고, 곧 형형색색의 깃발들이 요란하게 흔들리며 배에서 배로, 함대에서 함대로 왕의 명령을 전달했다. 곧 온 함대의 접혀있던 돛들이 하늘을 뒤덮을 듯한 기세로 펼쳐지고 바람의 방향에 맞춰 일제히 돛대를 축으로 회전하자 블라인드 커튼이 열리듯 서서히 너른 대양과 수평선의 모습이 다시 드러났다. 돛들은 바람을 받아 빵빵하게 부풀었고 함대는 서서히 가속해 역풍을 거슬러 북서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 광경은 늙은 왕의 차갑게 식은 심장에 다시 불을 지펴놓기 충분할 정도로 강렬했다. 그는 끓어오르는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선수부(船首部)로 달려가며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Come, cheer up, my lads! 'tis to glo-ry we steer!

To add some-thing more to this wonder-ful year!!”


국왕의 돌발적인 행동에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앞 갑판을 바라보았다. 왕은 그런 그들을 돌아보며 화난 표정을 짓더니 노성을 터뜨렸다. 


“바로 지금!” 그는 함대를 향해 팔을 활짝 벌렸다. "이 엄청난 장면을 보고도 느껴지는 것이 없나!? 너희들은 고추달린 남자 새끼가 맞는거냐!!”


그 말을 듣자 입에서 피식 하고 웃음이 나온 단스가 곧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아버지의 노래를 이어 부르기 시작했다.


“To ho-nour we call you, as freemen not slaves!

For who! are so FRREEEEE! as the sons of the waves!”


그 광경을 지켜보던 수병들이 하나씩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고 노래는 곧 배에서 배로, 함대에서 함대로 퍼져나가 노래가 후렴구에 이르렀을 때엔 함대의 모든 인원이 군가를 외치고 있었다.


함대는 광란의 도가니에 빠졌다. 많은 이들이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박자에 맞춰 선체를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 경건하게 국기를 향해 노래를 부르는 장교, 얼굴이 시뻘개진 채 미친 듯 소리 지르는 소년, 에렌델이 있는 북서쪽을 삿대질하며 욕을 섞으며 고함치듯 노래 부르는 노병, 가슴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감정에 몸을 맡기고 아무거나 주먹으로 두드려대는 청년 등 모두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합창에 참여했다.


배 위의 사람들이 만들어낸 거대한 감정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에서 태자는 굳은 표정으로 주먹 쥔 손을 높이 쳐든 채 노래가사를 외치는 아버지를 응시했다. 전 함대의 모든 이들이 한 사람의 몇 마디 말과 분위기에 휩쓸려 여태까지 알지도 못했고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을 증오하며 죽이려 한다. 얼마나 잔인하고 단순한 짐승인가. 그는 도저히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간스가 그러거나 말거나, 어찌됐든 그들은 계속 노래했다. 





마지막 후렴구를 끝으로 모든 노래가 끝나고, 수병들이 아직도 흥에 겨워 지르는 고함소리를 들으며 흡족한 미소를 지은 왕은 모두를 향해 우렁찬 목소리로 물었다.


“에렌델의 피를 원하는가!!”


예!!


“저 북쪽에 있는 간악한 마녀의 목을 원하는가!!” 


예!!





왕은 호탕하게 웃으며 힘차게 외쳤다.


“그렇다면 이제 너희들이 좋아하는 전쟁을 시작해보자!!”





-1부 끝.




다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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