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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전쟁 2부 19-20.txt

Neb(111.206) 2014.03.09 00: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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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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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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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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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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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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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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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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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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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길쭉하게 잘 빠진 선체를 지닌 날렵한 대형 쾌속 클리퍼 한 척이 우아한 모습으로 그 밑바닥을 수면에 미끄러트리며 함대를 쫓아오고 있었다. 


오직 더 빠른 속도만을 위해 설계되고 건조된 그 배는 느려터진 굼벵이마냥 꼬물꼬물 바다 위를 기어 다니는 전열함들을 향해 다른 그 어떤 함선도 도저히 낼 수 없을 것만 같은 무시무시한 속력으로 날아오고 있었고, 시시각각 커지는 클리퍼의 모습을 보던 서던 제도의 왕 통스 6세는 불만이 가득 찬 어조로 혼잣말인지 옆의 제독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푸념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저게 벌써 와 버리면 안 되는데.”


그것을 들은 제독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이 정도면 예정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오히려 좀 늦은 감은 없잖아 있습니다만.”


“나는 시각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야, 제독. 나는 지금 상황을 말하고 있는 거다. 한 번 주위를 둘러봐라.”


왕은 하던 말을 끊고 몸을 한 바퀴 빙 돌려 전 함대를 둘러본 뒤에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말했다.


“아직 한 척도 침몰하지 않았지 않나. 저 배를 끌고 오는 놈들이나, 아직 한 명도 처치해 주지 못하고 빌빌대는 마녀나 전부 똑같이 도움이 안 되는 것들이로군. 보급선은 늘어져서 돈이나 잔뜩 처먹고 있고. 젠장, 이번 전쟁은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어.”


그때 벌써 함대를 다 따라잡은 클리퍼가 왕의 기함에 접현하여 통행을 위한 널빤지를 대고, 곧이어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여섯째 아들과 언제나 한심한 모습만을 보여줬던 막내아들이 그 위를 건너오는 것이 그의 눈에 보였다. 의기양양한 태도로 성큼성큼 걸어온 한스가 곧 왕의 앞에 당도하고, 손으로 자신이 타고 온 배를 가리키며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왕을 향해 말했다.


“당신이 간절히도 원하는 것을 그것이 정말로 필요한 시기에 가져왔습니다, 폐하. 그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제가 말이지요!”


“쓸모없는 놈.”


왕의 입에서 나올 자신을 추켜세워주는 말에 겸양을 표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한스는 자신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그의 반응에 당황해 순간 표정을 굳히고 말았으며, 그것을 본 왕의 얼굴에 나타난 경멸이 더욱 짙어졌다. 


“이제 용무는 끝났냐? 그럼 꺼져라.”


한스의 얼굴이 실망과 분노로 일그러지고, 그를 뒤따라오던 반스가 그걸 듣고는 “내가 뭐랬냐, 쯧쯧.” 이라며 한탄했다. 충격에 몸이 마비되어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그대로 서 있던 한스는 치밀어오른 화를 주체하지 못해 무엄하게도 왕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고함을 치고 말았다.


“아버지!! 정말 이러시깁니까? 이번에도 당신이 시켰던 일을 완벽하게 해내지 않았습니까! 저는 어린애 낙서 같은 부실한 약도 하나만 들고 수행원도 없이 사흘 밤낮동안 숲 속을 헤맸지만 포기하지 않고 결국 마녀를 찾아 서던 제도로 데려갔습니다!! 거기서 그녀를 닦달해 만든 물건들을 이렇게 직접 가져오기까지 했지요! 이렇게까지 해드렸는데도 어떻게 그 흔한 칭찬 한 마디조차 없으십니까!?”


그걸 심드렁하게 바라보던 왕은 한스의 말이 끝나자 조롱조로 그를 치하했다.


“던져줄 개뼈다귀가 필요한 거였으면 미리 말을 해라. 오, 용맹한지 어쩐지 모를 나의 막내아들이여, 나는 그게 별로 힘든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만, 네가 하도 징징대니 너의 임무수행 의지와 용기를 치하하노라. 따라서 함대와 본국을 연결하는 보급선을 보호하는 중책을 너에게 맡기겠노라. 됐냐? 이제 가라.”


흥분한 한스의 얼굴이 더 붉어질 수 없을 정도로 새빨개지고, 이대로 놔뒀다간 뭔가 사달이 나겠다고 생각한 반스가 그의 옷깃을 잡고 질질 끌어 왕에게서 멀어지면서 한스 대신 왕에게 말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서던 제도 모든 섬의 지배자이자 저희의 아버지이신 위대한 국왕 통스 6세여, 이 무례한 놈이 지금 말을 안 하고 있지만 그건 국왕님 은혜에 감격해서 말문이 막힌 거라고 하네요. 어쨌든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그는 계속 한스를 뒤로 질질 끌면서 그들의 배로 이어진 널빤지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다 막 갑판 위로 나온 태자와 마주치자 반스가 고개를 살짝 까딱여 그에게 인사했고, 간스가 손을 들어 그에 응답했다. 하지만 그는 반스의 손에 붙잡혀 끌려가는 한스를 보고서는 마치 그가 공기라도 된다는 듯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지나쳐버렸다. 그렇게 중앙 갑판을 지나 선미부에 도착한 그는 언제나처럼 미즌마스트에 등을 기대고 서 있는 왕에게 다가가 말했다.


“이제 전쟁의 끝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폐하.”


그것을 들은 왕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


“그래, 이대로라면 그냥 끝나 버리겠지. 그래서 기쁘더냐?”


“아국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간악하지만 강력하여 아무도 벌할 생각을 하지 못하던 마녀를 처단하신 폐하의 명성이 온 대륙을 뒤흔들 날이 머지않았사온데, 어찌 기쁘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 기뻐 보이는구나. 그래서 평소 하던 것보다도 훨씬 더 고풍스러운 단어들을 많이 섞어 말하면서 나를 조롱하는 게로구나. 웃기지도 않으니 어서 도로 사라져라.”


겉으로는 무표정을 계속 유지했으나 속으로는 신이 난 간스는 왕의 가시 돋친 말투에도 전혀 기분 상하지 않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갔다. 짜증 가득한 눈길로 그 등짝을 바라보던 왕은 그가 시야 밖으로 사라지자 이 전쟁을 좀 더 지속시키고, 저 배들을 침몰시킬 뭔가 좋은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허무하게 끝내버릴 수는 없다. 그때, 접현한 클리퍼의 너머에 있는 한 배의 갑판 위가 소란스러워지는 것이 그의 귀에 들렸다. 


고개를 돌려 그곳을 보니 중프리깃 아콘 호와 그 뱃머리의 갑판 위에서 에렌델이 있는 북쪽을 향해 삼고구배를 하는 거구의 모습이 보였다. 그 뒤에는 오열 종대로 늘어선 선원들이 우물쭈물하며 서 있었는데, 예식을 모두 마친 거구가 그들의 엉거주춤한 태도를 발견하자 미친 듯이 화를 내며 뭐라 뭐라 윽박지르기 시작했다. 거룩한 분노로 가득한 그의 우렁찬 외침은 왕이 있는 기함에까지 그 발음이 선명하게 들릴 정도로 그 소리가 컸다. 


“지금 뭐하는 거냐-! 니새끼들은 죄다 관절염이냐-!? 어서 신성한 방위를 향해 엎드려 여신님께 예배를 드리지 못할까-!”


그러자 어느 용감한 고급선원이 분연히 떨쳐 일어서며 거구의 앞으로 나아가 항의하기 시작했다. 비록 거리가 멀어 정확히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 짜증으로 가득한 어조로 미루어 짐작해 볼 때 분명 좋은 소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용기 있는 언행은 거구의 노여운 사자후에 의해 수레바퀴에 깔려 죽은 사마귀마냥 끔찍한 최후를 맞고 말았다. “항해사-!! 너는 방금 여신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대역죄를 저지르고 말았노라-!! 죽음으로 사죄하라-!!” 곧 첫 번째 격노의 철권이 가여운 중년 항해사의 마른 몸을 후려쳤고, 거구는 비바체 빠르기의 연주곡을 능숙하게 두드려대는 마에스트로 급 피아니스트처럼 신명나게 팔, 다리, 머리와 심지어 배, 엉덩이까지 동원하여 그 고급선원을 두들겨패기 시작했다. 참으로 흥겨운 박자여서 왕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들썩이지 않을 수 없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그는 입에 거품을 문 채로 쓰러졌고, 거구는 엄숙한 태도로 갑판에 널부러진 그의 몸을 한 손으로 번쩍 든 뒤 배 밖으로 집어 던졌다. 곧 깜찍한 퐁당 소리와 함께 고급선원이 수면 아래로 사라지자 거구는 양팔을 하늘을 향해 번쩍 들어올리며 희열에 찬 목소리로 승리의 함성을 내질렀다. 


“정의는 실현되었다-!! 여신님을 찬양하라-!! 엘-멘-!!”


잠시간의 정적이 흐르고, 거구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공포에 질린 선원들을 돌아보자 그들이 일제히 북쪽을 향해 절하며 입을 모아 정의구현을 기뻐했다. “여신님을 찬양하라, 엘-멘-."드디어 흡족한 미소가 거구의 얼굴에 나타나고, 그는 다시 신성한 방위를 향해 엎드리며 외쳤다. 


“예배를 시작하라-!!” 


“여신이시여, 저희를 구원하소서."




바짝 엎드린 이백 명가량의 선원들이 한꺼번에 자신의 머리를 오크나무 갑판에 두들겨대는 맑은 타격음이 짠내를 머금은 공기를 타고 바다 위로 널리 퍼져 나갔다. 저놈의 병신짓을 구경하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군.


얼음에 갇힌 채 함대의 항로 중간쯤에서 둥둥 떠다니다 구조된 아콘 호는 전보다 훨씬 더 괴상해져 있었다. 선장인 단스는 에렌델의 마녀를 신으로 모시는 사이비종교를 만들고 스스로 교주가 되어 선원들에게 신앙을 강요하고, 몇 차례 있었던 선장들의 회합 때마다 다른 배에 그의 믿음을 전파하려 부단히도 노력했다. 적국의 여왕을 신격화하는 그 해괴한 짓거리는 어떻게 보면 중죄에 해당했으나 왕은 그저 재미있어 보인다는 이유로 그것을 허락했다.


“난 저 녀석의 유쾌한 미친 짓이 좋아.”


“저도 좋아하긴 합니다만, 저 배의 선원들은 어쩔지 모르겠군요.”


“제대로 홀렸구만. 저렇게 단단히 미치기도 어려운데, 대체 얼마나 아름답길래 그런 거지? 그녀를 실제로 한번 보고 싶군.”


“제가 업무차 에렌델에 들렸을 때 그녀의 모습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확실히 상당한 미인이긴 했습니다. 제 평생에 걸쳐 본 온갖 미녀들 가운데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요. 하지만 아무리 아름답다 하더라도 저런 헛짓거리는 그 같은 정신병자에게나 가능한 일이지요.”


이제 거구는 선원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그들의 자세를 교정해 주고 있었다. 그러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 있었는지 한 수부가 단스의 사커킥에 걷어차여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바다에 퐁당 빠졌다. 유쾌해진 기분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왕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제독에게 말했다. 


“제독, 나는 저 미친놈도 자기 할 일은 잘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것이 정말인가?”


그것을 듣자 제독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잘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폐하. 그 특유의 정신병자같은 성격만 아니었다면, 저 대신 그가 이 자리에 서 있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는 조함술과 전투의 천재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봐라.”


잠시 기억 속을 뒤적거렸던 제독은 어렵지 않게 그의 천재성을 입증할 수 있을 만한 일례를 찾아내었다.


“엄청난 속도로 고속승진하던 그가 28문 프리깃 함장이 되어 왕실 소속 사략선으로 떠돌아다닐 때였습니다. 어느 날 그가 무르크의 1급 전열함 한 척과 3급 전열함 두 척으로 이루어진 함대를 만났지요.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국왕은 머릿속으로 중소형 프리깃의 작은 선체와 전열함의 육중한 거체를 비교해 보았다. 당연히 상대가 안 된다. 거기에다 프리깃이 훨씬 빠를 테니 애초부터 싸울 일이 없다.


“당연히 도망갔겠지.”


“예, 그도 도망갔습니다.”


국왕은 황당한 기분을 느꼈다.


“그 정도 판단은 나라도 할 수 있다. 그게 무슨 천재냐?”


“중요한 건 그다음입니다, 폐하. 그는 충분히 멀리 도망간 뒤 자기 배를 다시 도색해서 상선으로 위장시키고, 마스트 낮은 곳에 산탄을 장전한 대포를 잔뜩 달아놓고, 돛으로 그걸 가린 뒤에 다시 그 배들 근처로 접근했습니다. 적국 상선을 발견한 전열함들은 좋다고 잡으러 달려들었고, 그들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에는 이미 충분히 접근한 뒤였지요.”


“그래서? 접현전이라도 벌였나?”


“비슷합니다만, 조금 다릅니다. 1급 전열함 바로 옆까지 온 그들은 카로네이드와 마스트에 매달아 놓은 컬버린을 상대 갑판에다 쏴버렸습니다. 그러자 산탄이 저쪽 갑판 위를 쓸어버리는 것과 동시에 대포 반동으로 마스트 세 개가 전부 끊어지고 적함 방향으로 쓰러지면서 다리가 되었습니다. 거기에 미리 잔뜩 매달려 있던 함상 전투원들이 아직 살아있는 적들을 정리했지요. 그 뒤엔 그들은 모두 적함으로 건너간 뒤 갑판 아래로 뛰어들어가 나머지 선원들을 전부 죽이고 그 전열함을 점령했습니다.”


“승무원 숫자가 세 배도 더 넘게 차이 날 텐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지?”


“그것도 그의 재능 중 하나입니다. 일단 일신의 무력이 강하기도 하지만, 그의 선원들은 이상할 정도로 충성도가 높은 데다 잘 죽지도 않습니다. 그가 함장임무를 맡은 지난 4년간 전사자와 은퇴자를 제외하면 그의 밑에서 다른 곳으로 전출간 인원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보고된 것만 세 자리 수의 전투를 치렀는데도 전사자 합계가 백 명도 채 되지 않습니다. 그 말은 저 배에 타고 있는 선원들의 대부분이 백 회 이상의 전투경험이 있다는 뜻이지요.”


“허….”


함장이 아콘 호를 손으로 가리키며 마지막 문장을 말하자, 왕은 그 배를 보았다. 아직까지도 선원 전원이 북쪽을 향해 삼고구배를 하고 있는 그 배는 그 사실을 알기 전과는 전혀 달라 보였다.


“어쨌든 얘기를 계속 해드리겠습니다. 급습에 당황한 3급 전열함 두 척 중 하나는 1급 전열함을 뺏기거나 침몰시키기는 싫었는지 그 악마의 사생아들이 미쳐 날뛰는 배에 접현했다가 오히려 점령당하고, 나머지 한 척은 도망가다가 이젠 세 척으로 늘어난 적함의 함포에 두들겨맞고 결국 격침당했습니다. 원래 타고 있던 프리깃은 마스트가 죄다 날아가 버려서 항행 불능이 되어버렸지만, 그는 그 작은 쪽배 대신 전열함 두 척을 몰고 돌아왔지요.”


“싸구려 소설에나 나올 법한 영웅담 같군.”


“저도 보고서를 처음 봤을 때는 이 불쌍한 인간이 드디어 허언증에까지 걸렸구나 했습니다만, 군항에 가서 그가 잡아온 전열함들을 직접 보고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지요. 그는 확실히 천재입니다. 다만 공평한 것을 좋아하시는 주님께서 그에게 재능과 함께 수많은 정신병도 같이 내려주셨을 뿐입니다.”


잘한다 하는 소리는 많이 들어봤지만 이건 정말 예상외의 걸물이다. 적국 여왕의 미모에 제대로 홀려버린, 끝내주는 실력의 군함 전장이라. 이 정도면 제법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다. 다만 그 성격 때문에 끽해야 일회용품 이상이 되기는 힘들겠지만.


“단스를 불러라.”


곧 수기가 펄럭인 뒤 신호를 전달받은 아콘 호가 예배를 중지하고 배를 움직여 기함 옆으로 가까이 접근했다. 이어서 사이비교 사제장 노릇을 하던 거구의 단스가 쿵쾅거리며 아버지 앞으로 달려왔다. 그는 왕이 있는 미즌마스트의 앞에 도달하자 바닥에 바짝 엎드려 절한 뒤, 고개를 들어 결연한 눈빛으로 왕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버님, 소자 삼가 아뢰올 것이 있사옵나이다.”


왕은 그만 당황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것을 본 단스의 눈에 희망의 빛이 어른거렸고, 그는 머리를 다시 갑판 바닥에 처박아 쿵 소리를 낸 뒤 간절히 부탁했다.


“소자는 에렌델의 엘사 여신, 아니, 여왕님께 도저히 이 참람된 창끝을 겨눌 수가 없사옵니다! 부디 이 미욱한 자의 마음을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부디 권력이라는 악독한 마귀의 유혹에서 벗어나 이 부정한 전쟁을 중단하여 주시옵소서!”


국왕의 심정을 한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쏠린다' 가 가장 적당할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정적과 싸우고 그들을 복속시키거나 제거하며 키워온 강철과도 같은 정신이 아니었다면 그가 공황 상태에서 빠져나오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으리라. 어쨌건 간에 이성을 되찾은 그는 단스가 그런 고풍스러운 단어들을 알고 있어도 별로 이상할 게 없다는 생각을 했다. 어쨌건 간에 단스는 해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조기졸업한 인텔리였으므로, 그가 어느 책 한구석에서 저런 단어들을 봤었을 확률은 제법 높다. 마음속으로 제법 그럴듯한 결론을 내린 국왕은 자세를 낮추며 손수 단스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그러자 감격한 단스가 국왕의 몸을 와락 껴안았고, 그의 괴력에 숨이 턱 하고 막힌 국왕은 단스의 등을 툭툭 쳐서 포옹을 풀게 한 뒤, 더없이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도 어서 이 쓸데없는 전쟁을 끝내고 싶구나, 나의 아들아. 하지만 이 전쟁은 이미 우리가 이긴 전쟁이다. 여기서 끝내버린다면 다른 이들이 납득하지 못할 것이다.”


단스의 표정이 오그라든 알루미늄 호일마냥 팍 구겨졌다.


“여왕, 아니 여신, 아니 여왕님의 마법은 강력합니다! 그 어느 누가 감히 이 전쟁에서 이미 이겼다 할 수 있겠습니까! 알려만 주신다면 그 가증스러운 것들의 대갈통을 제가 직접-”


“워, 워. 진정하거라, 아들아. 저기 저 큰 배가 보이느냐?”


국왕의 손가락이 함미 끝부분 방향을 향하자, 그걸 따라 시선을 돌린 단스의 눈에 깔쌈하니 털고 싶게 생긴 클리퍼 한 척이 보였다.


“저것에 한스와 반스가 공수해 온 신무기들이 있노라. 저것들만 있다면 마녀의 마법 따위는 문제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게 좀 민감한 장비라, 만약에, 아주 만약에 배가 격침당하기라도 해버린다면 정말 큰 일이 나고 말 거다. 여왕의 마법을 막을 수 없으니 우리는 패배하고 말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저 배를 지켜야 하지. 알겠느냐?”


악마의 달콤한 유혹처럼 귀에 속삭여지는 국왕의 말을 듣던 단스의 눈빛이 점점 먹음직스런 사냥감을 노리는 치타의 그것으로 변해갔고, 그 얼굴을 보던 국왕은 속으로 낄낄대며 이 다루기 쉬운 멍청이를 비웃었다. 귀여운 놈 같으니라고. 그런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을 사악한 빛으로 반짝이던 단스는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퍽퍽 치면서 호언장담했다.


“이예! 폐하! 이 하찮은 목숨이라도 걸고! 반드시! 저 배를 사수하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쇼!”








20.



“경비병, 당신도 수고가 참 많습네다.”


“아, 아닙니다.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 당연한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저도 잘 알고 있습네다. 그리고 그것이 어렵다는 이유로 안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저는 잘 알지요. 에, 에취!”


성벽 위로 쌀쌀한 새벽녘의 바람이 불어오며 화톳불과 외무관의 옷자락이 함께 흔들리고, 싸한 느낌과 함께 그의 입에서 재채기가 나왔다. 그는 옷깃을 좀 더 단단히 여미고는 몸을 움츠리며 화톳불에 가까이 다가갔다. 끽끽거리는 불쾌한 마찰음이 멀리서부터 어렴풋이 들려와 그곳을 돌아보자, 예배당 지붕 위의 풍향계가 바람에 날려 신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한숨을 푹 내쉰 외무관은 다시 시계탑을 보았다. 그러자 4시 40분가량을 가리키는 바늘들이 보였다. 그가 바로 전에 보았을 때로부터 5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 20분 정도 남았구만. 그는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라면서도 그 시각이 영원히 오지 않았으면 하는 역설적인 기분을 느꼈다. 


이제 조금 뒤면 수도는 발칵 뒤집힌다. 싸움이 벌어지고 수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다. 지금 옆에서 고관을 부담스러워하며 힐끔거리는 초병 역시 죽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비참한 몰골을 한 여왕과 공주가 군인들의 억센 손아귀에 붙잡힌 채 성 밖으로 질질 끌려나오고, 서던 제도로 넘겨져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그는 그 모든 것이 싫었으나 그것 또한 그가 감수해야만 하는 일이다. 에렌델은 위기에 처했고, 그는 그 나라의 국민으로서, 그리고 녹봉을 먹고 사는 관리로서 조국을 위기에서 구할 의무가 있다.


착잡하게 한숨지은 그는 그 이후를 생각했다. 이 모든 것이 끝나고 나면, 플래튼은 어떤 행동을 할까? 딸자식 키우는 마음으로 자매를 돌봐온 그가 그녀들을 잃는다면, 분명 당분간은 비탄에 빠져 아무 일도 못 할 것이다. 그러나 외무관은 플래튼의 인품을 믿었고, 따라서 시기가 지나고 그의 상처가 치유되면 플래튼은 다시 국가를 위해 봉사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를 중심으로 다시 내각이 정립되고, 혁명이다 뭐다 시끄러운 이 시대에 직계 왕족을 모두 잃은 에렌델은 공화국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 핵심에는 분명 자신도- 이건 또 무슨 역겨운 생각이냐.


자기 쪽으로 떨어질 떡고물을 계산하던 외무관은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인식하자 깊은 자기혐오에 빠졌다. 그는 곧바로 자신의 의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나는 정말 나 자신이 아닌 조국을 위해 이것을 하는 걸까? 또 그는 그제 치안관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떠올렸다. ‘생각해보십시오. 무엇이 진정 국가를 위한 일인지를.' 머릿속이 복잡해진 그는 추위도 잊고 화톳불에서 떨어져 천천히 성벽 위를 거닐었다. 


그러다 다시 끽끽 대는 마찰음이 그의 귀를 찔렀고, 그것에 상념이 깨진 외무관은 다시 시계탑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시간이 이미 다섯 시를 십 분도 더 넘긴 것이 보였다. 황급히 고개를 돌려 그들이 나타나기로 한 피오르드 계곡 안쪽을 보았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발칵 뒤집힐 것이라 생각했던 도시는 아직도 차가운 새벽 공기 속에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뭔가 잘못되었다.


“경비병, 이제 전 슬슬 가봐야겠습네다. 수고하십시오.”


“아, 네! 조심히 가십시오, 외무관님!”


그는 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성벽 아래로 통하는 계단이 있는 망루를 향해 나아갔다. 그 뒤에 문을 열고 들어가 계단을 내려가려는 순간,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가 그의 몸을 붙들었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십니까?”


고개를 홱 돌려 뒤를 보자 그의 눈에 망루 안 구석에서 벽에 기댄 채 팔짱을 낀 방만한 자세로 서 있는 치안관이 보였다.


“치안관, 당신 지금 여기서 뭘 하는겁네까?”


“외무관님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당신은 치안대를 이끌고 도시 입구에서 공작과 합류하기로 한 것 아니었습네까? 아니, 뭐, 혹시 치안대원들이 당신 명령을 거부한 겁네까? 그렇다면 일단 같이 공작을 찾아갑세다. 그의 병력만으로도 충분하니, 크게 상관 없습네다. 그 전에 우리는 왜 공작이 늦는지를 알아야 합네다. 잠깐, 지금 웃으시는 겁네까? 이 상황이 웃깁네까?”


치안관은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배를 붙잡고 계속 킥킥대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진정하고 나서 외무관을 향해 말했다. 


“하, 외무관님. 급하실 건 없습니다. 모든 것은 예정대로 되었으니까요.”


“뭐가 예정대로 됐다는 겁네까? 지금 다섯 시 하고도-” 그는 잠깐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조명에 비춰 본 뒤 계속 말했다. “-십오 분이나 되었습네다! 뭔가가 잘못되었습네다. 빨리 공작이 오기로 한 곳으로 가서-” “그럴 필요는 없다, 임마.”


지난 수십 년간 들어온 그 굵은 목소리가 난데없이 들려오자 얼어붙은 외무관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 나이에도 아직 건장한 체구의 재무관이 망루 안으로 통하는 계단을 느긋한 걸음으로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니가 기다리는 놈은 지금 지하감옥에 처박혀 있으니까.”


외무관은 다시 고개를 돌려 당황한 눈으로 치안관을 보았다. 그러자 그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전 분명히 경고해드렸습니다. 생각해 보시라고, 사사로이 흔들리지 마시라고요.”


외무관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사위다. 혈연으로 맺어진 뒤 그는 언제나 싹싹한 태도로 자신을 대했으며, 정치판에서는 든든한 아군 역할을 해줬고, 겉으로 드러난 인간성도 전혀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래서 그를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결정적인 순간이 오자, 자기 아내의 아버지를 벼랑 끝에서 밀어버렸다.


“이, 이, 이 간나 새끼….”


분노가 머릿속을 맹렬히 휘저어댔지만, 정치판에서 수십 년을 굴렀던 그의 뇌 한구석은 냉철하게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내부에서 혼란을 일으킬 치안대는 그 대장이 배신했고, 외부에서부터 들어와 수도를 점령할 군대는 그 주인이 투옥됐다. 이제 남은 것은 자비를 구걸하거나, 아니면 재무관을 설득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여왕님께서도 이것을 아십네까?”


“언제나 그렇듯이 그분께서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시지.”


“흐허, 이번에도 여왕님 찌질대시는 게 보기 싫으셔서 말 안 하셨나 봅니다?”


재무관은 잠시 입을 닫고 조용히 외무관을 쏘아보았다. 그것을 본 외무관은 뭔가 먹힐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말을 이었다.


“이제 슬슬 깨달으시지요, 플래튼. 그녀는 군주의 자리에 적합하지 않습네다. 그뿐만이 아니지요. 그녀는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이곳으로 온갖 재앙을 다 불러들이는 존재입네다.”


“대관식 전에는 네놈도 크게 반대하지 않았던 걸로 아는데?”


“그때 당시에는 그녀에게 그런 무시무시한 저주가 걸려있는지 몰랐으니까 그런 겁네다. 아니, 알았다 하더라도 그걸 끝까지 숨길 수만 있었다면 저는 반대하지 않았을 겁네다. 하지만 이미 다 들켜버렸고, 이젠 전 대륙이 뒤집히게 생겼습네다. 에렌델이 이 시기를 버텨내기 위해서는 그녀들이라도 팔아넘겨야 합네다. 그렇지 않으면 서던 제도의 군대가 쳐들어와서 그녀들을 끌고 갈 테고, 어찌 되었던 결국 그녀들은 죽습네다. 모든 사람이 그녀들의 죽음을 필요로 하고 있습네다. 당신이 그녀들을 얼마나 아끼는지는 잘 알지만, 이젠 상황이 변했습네다. 당신도 변할 때입네다. 시대의 요구를 무시하지 마십쇼, 플래튼.”


가만히 그 이야기를 듣던 재무관은 잠시 뜸을 들인 뒤, 손으로 엉덩이를 벅벅 긁으며 답했다.


“난 그러기 싫은데.”


답답해진 외무관은 점점 다시 화가 나기 시작했다.


“아니, 그럼 대체 뭘 어쩌실 겝니까? 서던 제도 군대가 와서 여왕이든 공주든 아니면 뭐 다른 것이든 싸그리 털어갈 때까지 그렇게 궁뎅이나 처 긁고 계실 겁네까?”


“서던의 군대가 문제냐? 그럼 그걸 박살 내면 되지.”


“그건 또 무슨 개소리입네까! 당신이 무슨 일인 군대라도 됩네까? 희대의 전략 천재쯤 됩네까? 혹시 여왕의 마법을 믿고 계시는 건 아니겠지요? 개미새끼 한 마리도 못 죽여서 벌벌 떠는 겁쟁이년이 무슨 수로 군대를 까부숩네까!”


“여왕의 성격이 문제냐? 그럼 그걸 뜯어고치면 되지.”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저쪽에서 무더기로 들고 올 마법 도구들은 어떻게 하실 겁네까! 그것뿐만이 아니지요! 그 가텔인지 모텔인지 하는 마녀는 어쩌실 겁네까!”


“서던 제도가 에렌델처럼 오지에 처박힌 것도 아니고, 대륙 내해 한복판에 있는 데다 구교 교황이 있는 신성 리먼 제국하고도 가까운 그네들 군대가 마법을 펑펑 써대면 어떻게 되겠냐? 분명 뒷문을 통해 외교적으로 압박할 루트가 이리저리 생기겠지. 넌 외교관이라는 놈이 이런 것도 모르냐?”


“그 압박 해보기도 전에 여기에 서던 제도 깃발이 꽂힐 겁네다!”


“그건 모르는 거야, 임마. 대양에서든 협해에서든 어떻게든 막을 방법이 있겠지.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건 좀 그렇지 않냐?”


“흐허, 아주 대단한 대비책입네다. 어떻게든 막겠다니. 당신은 언제나 그랬지요. 주변에서 당신에게 바라는 것 따위는 무시하고, 그저 당신이 살고 싶은 대로만 살아왔지요. 하지만 그것도 여기까지입네다! 당신 혼자서 이 모든 것들을 막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네까?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에는 엄연한 한계가 있습네다. 당신도 이번에는 결국 휩쓸려 떠내려가 버릴 겁네다! 그때 가서 후회하지 마시고 그냥 지금 마음 바꾸십쇼.”


“내가 이런 걸 한두 번 겪어본 것도 아닌데 뭐하러 벌써부터 백기를 들어야 되냐? 섭정질 할 때에도 너 같은 소리를 하는 인간들이 참 많았었지. 내가 지금 왕녀들을 쫒아내지 않으면 결국 나도 그녀들도 실각할 거라고 그러더군. 그런데 지금 봐라. 셋 다 모가지가 멀쩡히 붙어있네? 내가 나 자신의 주인이 되면, 세상이 나에게 맞춰 바뀌지. 그저 상황에 쓸려가 버리는 대신에.”


플래튼이 말을 마치자 성벽으로 통하는 문이 벌컥 열리며 일단의 무장한 병사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걸 보던 외무관의 눈에 좀 전에 성벽 위에서 대화를 나누었던 그 초병의 모습이 보였다. 황당해진 외무관은 그에게 물었다. 


“자네, 혹시 날 감시하고 있었던 겁네까?”


“죄송합니다, 외무관님.”


초병이 조그마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외무관은 하도 어이가 없어 실성한 듯이 낄낄대며 말했다. “이거,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구만!” 곧 두 병사가 나서 그의 손목을 포박하고, 양쪽에서 그와 팔짱을 낀 뒤 밖으로 끌고 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계단을 내려가기 직전, 외무관은 고개를 돌려 재무관을 향해 말했다.


“저는 이렇게 시멘트 통 속에 처박혀 바다 아래로 가라앉겠지만, 전 장담합네다. 당신은 첫 번째 단계인 여왕의 성격을 바꾸는 것부터 실패할 겁네다. 어릴 때부터 선대 왕에게 세뇌당한 그 물렁한 성격은 결코 쉽게 바뀔 성질의 것이 아닙네다. 당신과 함께해서 즐거웠습네다, 플래튼.”


플래튼은 아무 말 없이 그저 씁쓸히 웃기만 하는 것으로 삼십 년 지기 친구의 최후를 배웅했다.


경비병에게 끌려 계단을 내려간 외무관이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플래튼이 탄식의 깊은 한숨을 내뱉고 나자 그때까지 벽에 기댄 자세로 침묵하던 치안관이 천천히 말을 꺼냈다.


“허, 한 명이 이렇게 또 가는군요. 어쨌거나 일이 끝났으니 제가 받아야 할 것을-”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머니 하나가 날아왔고, 그 빠른 속도에 놀란 치안관은 황급히 양손을 내밀어 그것을 받아냈다. 곧 찰랑거리는 금속음과 함께 묵직한 느낌이 그의 손에 전해졌다. 그 뒤 윗부분의 매듭을 풀고 입구를 살짝 열어 안쪽을 확인한 그의 입이 끝이 귀에 걸릴 듯 큰 호선을 그렸다.


“화끈하셔서 좋군요. 역시 세상은 이렇게 살아야지요. 외무관은 이런 쪽으로는 정말 답답한 인간이라 짜증이 났는데, 재무관님께서는 역시 통찰력이 남다르십니다.”


“난 너 같은 새끼 정말 혐오하니까 좀 닥치면 안되겠냐?”


“와, 재무관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로서는 좀 섭섭합니다만? 방금도 대쪽같은 사람 한 명을 골로 보내버리셔 놓고는. 시멘트에 담가질 그가 너무 불쌍합니다.”


“입 좀 조심해라, 이 쓰레기놈아. 그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 너보단 천만 배쯤 가치가 높은 인간이지. 단지 이번에는 아쉽게도 나와 추구하는 방향이 달랐을 뿐이야. 그리고 나는 이번엔 뒷구멍으로 몰래 죽일 생각 없다.”


“형법재판이라도 가실 겁니까? 그럼 외무관이 죽기도 전에 서던 제도 함대가 여기 도착할 수도 있겠군요.”


“에렌델에는 아직 국왕의 즉결처분권이 남아있다.”


그러자 치안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과장되게 손짓하며 말했다.


“와, 혁명이니 계몽이니 하는 것들이 왕들 모가지를 썰고 다니는 시기에 정말 그런 걸 쓰실 겁니까? 그리고 그 전에 당신이 국왕인 것도 아닙니다만?”


“어차피 이 후진 동네에서는 인권을 들먹일 사람도 별로 없고, 내가 아닌 엘사 여왕님께서 직접 처분 결정을 내리실 거다.”


“적군도 못 죽이겠다고 질질 짜시는 분이 퍽이나 그럴 수 있으시겠군요.”


재무관은 잠시 대답하려다 말고 뜸을 들였다가 잠시 후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 못 하신다면, 하실 수 있도록 만들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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