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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구축후 제목없는 엛쟝 34 34 34

ㅇㅇ(93.135) 2016.02.09 03:13:10
조회 1837 추천 38 댓글 9








34 








집에 돌아온 후에도 엘빈은 거의 항상 잠들어 있었어. 아침에 깨어났다가 잠이 들면, 하루에 한 번 오는 의사가 보러 올 때까지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지. 의사는 매일 오후 쯤 왔다가 돌아갔는데, 약의 상태를 체크하고 주사기를 바꾸는 정도 말고는 그도 할 수 있는게 없었어. 

이렇게 약으로 주무시면.. 제 말은 들으시나요? 

들으실 수도 있습니다. 

꿈은 꾸시나요. 

..잘 모르겠습니다. 

..꾸실 수도 있나요. 

…단장님.. 

의사는 애처롭게 쟝을 바라봤어. 쟝이 그저 체면 치례로 여기에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의사는 이미 오래 전에 알아차리고 있었어. 엘빈이 일어나 있는 동안, 쟝은 단 한 번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어. 엘빈이 자면서 심하게 뒤척일 때 옆에서 만지고 말을 걸어주자 눈에 띄게 안정 되는 걸 보고, 그 때부터 쟝은 매일 밤 엘빈의 품에 안겨 함께 잠이 들고 함께 일어났어. 맞는 수액 때문에 차가워진 그의 손을 계속 잡아주고,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지. 쟝은 정말 하루 하루 진심으로 엘빈의 곁을 지키고 있었어. 오전에 엘빈이 다시 잠이 들때마다, 딱 한번만 더 일어나 줬으면 하는 마음이 가득했어. 그럴 때마다 쟝은 일층으로 내려가, 그의 부엌에 숨어 숨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울었어. 





그렇게 며칠이 더 지났을 때 였어. 한 밤중에, 갑자기 현관의 초인종이 울렸어. 문 앞에 서 있는건 , 다름아닌 조사병단의 군복을 입은 병사였어. 

저는 지금 열외중입니다. 본부에서 전달받지 못했습니까.

..본부에서 오는 길입니다. 분대장께서 스미스 전 단장께 꼭 전해야 한다고하셨습니다.

병사는 서류 봉투를 쟝에게 내밀었어. 엘빈의 이름을 입에 담으며 병사는 쟝의 눈을 피해 바닥만 바라봤어. 쟝은 병사를 돌려보내고, 현관 앞에 기대 봉투를 열었어. 아르민이 보낸 첫 전서구가 내지에 도착했다는 소식이었어. 원래 예정했던 날짜보다 훨씬 빨랐어. 단장실의 업무에 대한 간략한 중간 보고와 함께 들어있는 쪽지들은, 보고서에서 그렇게 본 아르민의 글씨 그대로였어. 분대장은 벽 밖에서 온 그 원본을 그대로 엘빈에게 전달해 준 듯 했어. 

쟝이 위층으로 올라갔을 때, 엘빈은 깨어났는지 몸을 일으켜 침대에 앉아있었어. 쟝은 침대로 다가가 엘빈의 뺨에, 이마에 한참을 깊게 키스했어. ..벽 밖에서 편지가 도착했어요. 보실래요? 엘빈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쟝에게 편지를 읽어줄 수 있냐고 물었어. 쟝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봉투를 안고 이불 속으로 폭 들어가 엘빈의 옆에 함께 자리를 잡았어. 이불 속은 따뜻했어. 쟝은 엘빈과 어깨를 맞대고 붙어앉아, 쪽지같은 그 작은 보고서들를 추려 읽어내려가기 시작했어. 보고서의 내용은 좋아 보였어. 날씨가 잘 맞아, 첫번째 목표지까지 금방 내달린 것 같았어. ..기후는 아직까지 비슷하나 지대가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멀리 산맥이 보이는데 그 거리와 높이를 가늠하기가 힘듭니다.. 일단 진군 하겠습니다.. 이름 모를 식물들이 발견되기 시작합니다. 식물들을 표본 추출해 보관하고 있습니다.. 아르민은 구석에 마치 도감처럼 잎의 작은 그림을 베껴 보냈어. 보고서를 내려읽던 쟝이, 갑자기 작게 웃으며 엘빈을 콕콕 찔렀어...이거 파슬리 같지 않아요? 

눈 앞의 초점이 흐려, 사실 종이 위의 그림은 전혀 보이지 않았어. 파슬리라는 단어를 듣고 엘빈은 그저 웃으며 쟝을 쓸어내렸어. ..너는, 너는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구나... 종이를 읽어가는 쟝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들으며, 엘빈은 잠이 들락 말락 하는 듯 했어. 엘빈은 살짝 돌아본 쟝은, 엘빈의 머리를 조심히 끌어 자신의 어깨에 기대주고, 이불 위에 서류를 든 손을 내려놓았어. 쟝의 손에 들린 벽 밖에서 온 조사병단의 그 작은 첫 전서는, 엘빈의 삶과 통째로 맞바꾼 것이었지. ...이게 다 단장님이 이루신 거예요.. 그 벽 밖을, 얼마나 직접 보고 싶었을까. 이렇게라도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쟝은 힘없이 종이를 쥐고 가만히 생각했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그 때, 엘빈이 갑자기 잠꼬대를 하는 듯 쟝에게 작게 속삭였어.

고마워. 

뭐가요..?

..사랑해준거..

엘빈의 그 한 마디에 갑자기 목이 턱 막혔어. 혼자 멋대로 좋아했던 건데. 그의 말 대로 안되는 게 맞았는데. 그런데도 눈길을 돌려 줘서, 받아줘서 고맙다고, 당신의 소중한 사람이 되어 행복했다고, 진짜 고맙다고 말해야 할 건 자신인데도. 그게 정말 엘빈의 마지막 인사 같아 차마 입이 떨어지지를 않았어. 목이 계속 메어 와, 쟝은 결국 벽 쪽으로 고개를 돌렸어. 엘빈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 지 몰라 도저히 엘빈 쪽을 쳐다볼 수가 없었어. 기댄 쟝의 어깨가 조금씩 들썩이는 걸 느끼고, 엘빈은 가만히 쟝의 손을 찾아 잡았어. 

한참을 그렇게 둘이 함께 침대에 앉은 채로 멍하니 울다가, 어느 새 서로의 어깨와 머리에 깊게 기대 잠이 들었던 듯 했어. 눈을 비비며 일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환하게 떠 있었어. 엘빈을 제대로 눕혀 주고, 쟝은 침실의 창문을 열었어. 바람은 약간 찰 정도로 시원했지만, 햇살은 꽤 따스했어. 겨울이 그렇게 다 물러난 것 같았어. 새가 짹짹이는 이른 오전은, 멀리 밖을 걸어다니는 사람이 밟는 자갈소리가 다 들릴 정도로 조용했어. 엘빈이 갑자기 조그맣게 쟝을 불렀어. 

..쟝.

네. 

대답을 해 놓고도, 잘못 들었나 싶었어. 자는 듯 눈을 감고 있던 엘빈이 곧 살짝, 희미하게 웃길래, 뭐가 필요하신가 싶어 쟝은 엘빈의 손을 잡고 다음 말을 가만히 기다렸어. 엘빈은 조용했어. 

...단장님. 

쟝은 엘빈의 얼굴을 쓸어 내렸어. 엘빈의 눈가와 입술을 매만지던 쟝의 손이 가만히 그 자리에 멎었어. 입술에는, 숨결이 없었어. 




상황을 천천히 깨닫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어. 엘빈은 너무나 편안한 표정이었어. 우습게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어. ..다행이다. 혼자 아파하지 않고, 그렇게 편안하게, 잘.. 처음 그에게 입을 맞췄을 때 처럼, 쟝은 잠든 엘빈의 입가에 입술을 댔어. 사랑해요. 혹시 들을까, 싶어 쟝은 몇 번이나 눈을 감은 엘빈 앞에 그 말을 반복했어. 


.. 안녕히 가세요..


벽 밖, 온 들판에 이름 모를 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아침이었어. 오래도록 힘든 길을 지나고 또 지나, 엘빈은 쟝의 품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어. 그의 나이 마흔이었어.






























엘빈의 사망 소식은 원정단의 전서와 함께 담겨져 조사병단 본부로 올라왔어. 소식을 들은 담당 의사는 병사와 함께 바로 엘빈의 집으로 달려왔지. 쟝이 엘빈의 곁을 지키러 내려온 후, 간부들은 가족이 없는 엘빈의 장례를 병단에서 치뤄 주기로 결정하고 미리 서류를 준비해 놓고 있었어. 쟝이 그 서류를 받아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는 동안, 의사는 엘빈의 사망소견서를 작성해 쟝에게 건넸어. 서류는 간결했어. ..간결하다 못해, 너무나 짧았어. 성명. 주소. 생년월일. 그리고 사망일시. 사망원인, 종양. 열 장, 아니 백 장의 편지를 써 주어도 부족해야 할 엘빈의 인생은, 거기 손바닥만한 딱딱한 표 하나로 정리되어 있었어. 그것들이 쟝이 엘빈의 집을 채 떠나기도 전, 그가 다시 일에 복귀하며 처음으로 싸인해야 하는 서류였어. 

이틀 후, 나일은 유언장의 증인으로 엘빈의 장례를 함께 치루기 위해 내려왔어. 나일은 단장실에 쟝을 앉혀놓고 엘빈의 유언장을 꺼냈어. 유언장에 적힌 자신의 이름을, 쟝은 꼼짝도 하지 못하고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어. ...그래서 병단에 오셨었구나. 홀로 병단을 찾아 사무과를 왔다 갔다 할 때부터 엘빈은 이미 떠날 날을 손에 넣고 세고 있었던 거야. 유언장에 적힌 자신의 이름을 읽어내려가는 쟝의 표정은 참담했어. 나일은 그런 쟝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지. 쟝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쟝은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처럼 위태로워 보였어. 겉으로 담담한 척 하지만 무언가를 꾹 내려 참고 있는게 눈에 다 보일 정도였어. 나일은 그저 잘 갔냐고 물었어. 쟝은 네, 편하게 가셨습니다, 라고 나일 앞에 조용하게 대답했어.  





다음 날, 호위 병사를 둘 데리고 나일은 엘빈의 집에 도착했어. 안 그래도 덜 꾸며진 그 집은, 계속 비워져 있던 탓인지 이제 정말로 주인을 잃은 티가 났어. 나일은 1층에 병사들을 세워놓고 지하실부터 열었지. 예상과는 다르게 지하실은 거의 비어 있었어. 그림도구가 든 종이상자와 벽에 천으로 덮여 함께 묶여 세워져 있는 이젤과 캔버스들, 그리고 긴 나무상자 하나가 전부 였어. 상자는 끈으로 여러차례, 하지만 꽤 어설프게 묶여 있었지. 구석이 망가진 걸로 보아, 한 팔로 못질을 하려다 못 한 듯 했어. ..태워 없애 달라던 건 이거겠지. 

나일은 구석으로 다가가 엘빈의 붓을 들었다가, 다시 툭 내려놓았어. 군대에서 평생을 박혀있던 놈이 뜬금없이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는게 농담인 줄 알았는데. 나일은 천을 슬쩍 들어올렸다가, 그대로 멈칫했어. 

..허.

나일은 자리에서 일어나, 캔버스를 덮은 천을 풀어내렸어. 흘러내린 천 뒤로 나타난 그림들은 정말, 말도 못하게 예뻤어. 나일은 기가 찬 얼굴로 그림을 하나 하나 넘겨보기 시작했어. 전경과 정물화, 마당의 아이들을 그린 그림이 대부분이었지. 혼자 여러가지를 다 해 본 듯, 수채화, 유화, 그리고 목탄으로 그린 스케치도 있었어. ..재미있었나 보네. 심지어 오른손잡이였다는 녀석이.. 손을 까맣게 해서 종이에 코를 박고 이걸 그렸을 엘빈을 생각하니 갑자기 울컥했어. .. 군대는 도대체 왜 왔냐. 그냥 거인이고 뭐고 어디 구석에 처박혀 그림이나 그리고 살지.. 

캔버스를 몇 개를 더 넘기다가, 나일은 한 소년의 그림을 발견했어. 청년에 가까운 그 나체의 소년은, 엘빈의 침대에 앉아 이불을 끌어 덮고, 강아지를 안은 채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어. 

..그건 쟝이었어. 그리고 난 후 일부러 덧붙여 그린 듯 얼굴은 흐릿했지만, 쟝을 알고 있는 나일은 그림을 금방 알아볼 수 있었어. 그 그림을 눈 앞에 들이밀고 나서도, 나일은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참을 알아차리지 못했어. 머리가 굳은 듯 했어. 깨달음은 갑자기 목구멍 밑에서부터 천천히 차 올라왔지. 나일은 자기도 모르게 캔버스를 밀치고 뒤로 물러났어. 죽기 직전이었던 엘빈이 왜 이 집을 굳이 사서, 뜬금없이 후임자에게 넘겼는지, 쟝이 은퇴한 선임을 도대체 왜 그렇게 끔찍하게 챙겼는지, 그리고 상자를 모두 소각해 달라던 이상한 부탁도. 거기에 무슨 목적이냐, 무슨 생각이냐, 이런 질문은 다 필요없었어. 맞는 질문은 단 하나였어. 무슨 사이 였냐는 질문. 엘빈은 자신의 침대 위에서 나신으로 스스럼 없이 웃던 쟝을 그림에 담았어. 그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그런 사이였어. ..그런 사이. 잠시 지하실의 허공을 당혹스럽게 돌던 나일의 시선이 갑자기 나무 상자에 가서 꽂혔어. 

나일은 신경질적으로 상자의 끈을 끊어 풀었어. 기껏해야 파기해야 할 조사병단의 옛 기밀 서류 같은 것일 거라 생각하고 내려왔었지. 박스 한가득 들어있는 건 엘빈의 앞으로 온 편지였어. 발신인은 단 한 명이었어. 키르슈타인. 아래까지 모조리 뒤져보지 않아도 뻔했지. 선임의 안부 따위를 묻는 가벼운 편지가 아니었어. 그의 죽어가던 연인을 향한 처절한 고백이, 거기 한 가득 들어있었어.

..걔가 마음 약해져서 못 버릴까 걱정이 돼, 밖으로 나가면 곤란해... 나일은 상자 뚜껑을 바닥에 있는 힘을 다 해 집어던지고, 머리를 감싼 채 그대로 주저앉았어. 곤란한 정도가 아니겠지, 이 미친 새끼들이..! 나일은 속으로 이를 부득부득 갈았어.. ..이 미쳐 뒤질 새끼들이 진짜!

괜찮으십니까? 뚜껑이 지하실 바닥을 구르는 굉음에 병사들이 기겁해서 지하실 입구쪽으로 달려왔어. 나일은 계단 위의 병사들을 막아세웠어. 

못 가져와.

잡일 하실 게 있으면 저희가... 

못이랑 망치 가져오고. 병사의 말을 끊는 나일의 목소리는 죽죽 갈라지고 있었어. 

..지금부터 내가 나갈때까지 지하실에 단 한 놈이라도 얼씬거리면 전부 목을 친다. 





영문을 모르는 병사들의 잔뜩 겁먹은 표정을 뒤로 하고, 나일은 못과 망치를 받아든 채 지하실 문을 쾅 소리가 나게 닫고 내려왔어. 그림을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게 찢어 내다 버리려 주머니에서 단도를 뽑아 들었지만, 나일은 그 그림에 도저히 칼을 댈 수가 없었어. 물감이 다 마르지 않은 상태로 덮었었는지 두껍게 칠한 곳은 천에 닿은 채로 굳었다 떨어져 나가 구석 여기저기가 망가져 있었어. 그 정도로 가까운 시일에 그렸던 거였어. 엘빈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이었겠지. 그림 속 쟝에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붓을 댔을까 싶었어. 

한참을 칼을 들고 망설이던 나일은, 결국 욕을 하며 그림을 통째로 캔버스 틀에서 뜯어내기 시작했어. 천을 고정한 쇠고리를 뜯어내는 칼날은 순식간에 상해 끝이 부러져 나갔어. 나뭇대를 쥔 손도 금방 아파왔지. 지하실의 안좋은 공기에 계속 기침을 하면서도, 나일은 손을 멈추지 않았어. 그림을 망가지지 않게 틀에서 완전히 분리해 낸 건, 도대체 얼마인지 모를 정도로 시간이 흐른 후였어. 나일은 그 그림을 말아, 편지와 함께 상자에 넣고 못을 들어 사방을 봉했어. 

나일은 그 상자를 엘빈을 화장 시킬 때 전부 같이 태워 보낼 생각이었어. 나는 도저히 끼어들어 손 못 대겠으니 니가 다시 가져 가라는, 그런 엘빈을 향한 무언의 항의였어. 두번 다시 열리지 않게 곳곳에 망치질을 하며 나일은 계속 고개를 내저었어. 차라리 못 봤으면 좋았을걸. 모르고 이대로 지나갔으면 좋았을 걸, 이 빌어처먹을 놈이.. 엘빈이 타인에게 그렇게 감정적으로 쉽게 다가갈 인간이 아니라는건 누구보다 나일이 가장 잘 알고 있었지. 죽을 때까지 진심이었을거야. 자신에게는 숨겨둔 여자 없다, 결혼 생각 없다던 지 아들뻘인 사내새끼를 데리고! 마지막 못을 거칠게 때려박고, 나일은 그 무거운 상자를 혼자 들쳐메고 일어났어. 엘빈에게, 심지어 쟝에게도 이유없이 화가 치밀었어. ..진짜 끝까지 미친 짓만 하다가 갔구나. 

상자를 들고 지하실을 열어놓은 채 엘빈의 집을 나서려 했을 때, 병사들은 머뭇거리며 나일에게 물었어. 

부엌 구석에 강아지가 한 마리 있습니다. 누가 밥을 주는 것 같기는 한데.. 

니네 병단장에게 물어. 

나일은 딱딱하게 대답했어. ..그 놈이 안고 있었으니까. 쟝의 편지와 그림을 엘빈의 집에서 싹 치워들고, 나일은 그대로 엘빈의 집을 떠났어. 














나일이 쟝을 다시 본 건, 엘빈의 장례 당일이었어. 나일은 그 날 곧바로 다시 중앙으로 출발하기로 되어있었지. 나일이 엘빈의 집에서 가져온 상자는 화장을 위한 나뭇대의 가장 안 쪽 아래, 엘빈의 관을 받치는 주춧돌처럼 끼워 넣어졌어. 

너, 타이가.. 

예.. 

..아니다.

순간 햇빛에 잘못 본 건가, 하고 나일은 그냥 입을 다물었어. 쟝의 목에 걸린 루프타이의 색은 투명한 색이었어. 엘빈의 퇴임식 날, 총통이 걸어주지 않아 엘빈이 방에서 직접 걸어주었던 임시단장의 타이였어. 그에게 꼭 개인적으로 선물 받은 것 같아 쓸모가 없어진 이후에도 버리지도, 반납하지도 못하고 그저 계속 가지고 있었지. ..그 작은 목걸이로 엘빈을 기억하고 싶은 것도 있었고, 조사병단의 단장 자리를, 오늘만큼은 나누지 않고 엘빈에게 고스란히 주고 싶었어. 

멀리서 언뜻 본 관은 열려 있었지만, 엘빈의 시신은 머리 끝까지 흰 천으로 덮여 있었어. 나일이 시킨 거였어. 자른 머리도, 이마의 상처도 병단에 굳이 보여줄 건 되지 못했어. 쟝의 표정은 내내 알 수 없는 표정이었어. 쟝이 오늘 해야 할 일은 복잡하지는 않았어. 식의 마지막에, 병단을 대표해 경례하고, 관을 덮어 주고, 나뭇대에 불을 붙인다. 복잡한 일은 아니지만, 쉬운 일은 아닐 터였어. 나일은 아무 말 없이 발로 흙바닥만 툭툭 쳐 냈어. 사실은 걱정이 됐어. 시신에 불을 대는 일을, 보통 '그 정도'로 가까운 사람이 직접 하는 경우는 없었어. 한참을 고민하던 나일은 쟝에게 애써 무덤덤한 듯 말했어. 

..오늘 못 하겠으면 말해. 

괜찮습니다. 쟝은 잠시 나일을 돌아보고는, 묵묵하게 대답했어. ..신경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예의바른 모습조차 답답했어. 상자 안에 가득 들어있던 편지는 도저히 나일이 무시할 수 있는 게 못 됐어. ..이 정신나간 놈은 지금 내가 왜 이렇게 신경쓰는지도 모르겠지. 나일은 속으로 한숨을 꾸역꾸역 삼키며 자리로 가 앉았어. 벽외에 세워진 조사병단의 기지창고 공터에, 엘빈을 위한 짧은 식을 위해 마련된 공간은 거의 발 디딜 틈 없이 병사들로 가득 차 있었어. 의무적으로 와야 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그를 함께 위로하고 보내고 싶은 병사들은 뒤쪽에 참석하라고 했는데도 거의 올 수 있는 모든 병사들이 내려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어. 조사병단에서, 엘빈은 아직도 그만큼 큰 존재였어. 식이 시작되자마자, 구석에서 훌쩍이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어. 쟝은 식의 내용을 한 마디도 듣지 않고 내내 엘빈 쪽을 바라보고 있었어. 흰 천으로 덮여있는 그의 실루엣은 차가워 보였어. 단장님 추위 많이 타시는데. 쟝은 멍하니 생각했어. 저렇게 눕는거 불편해 하시는데..

그를 위한 두 번의 묵념 후, 식은 금방 마지막 순서가 됐어. 쟝은 자리에서 일어나, 중앙으로 가 횃불을 들었어. 끝까지 잘 보내주겠다고 입술을 씹고 또 씹었지. 그러나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다 흰 천 아래로 가슴에 올린 엘빈의 손을 봤을 때, 쟝은 느닷없이 그 자리에 멈춰 섰어. 누가 귀에 대고 찢어지게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어. 갑자기 머릿속이 새하얘졌어. 

저 손, 이제 두 번 다시 잡아볼 수 없어. 

병단 전체가 모여있는 곳에서, 엘빈의 시신을 코앞에 두고서야 쟝은 지금 자신이 엘빈을 보내주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 ..그가 보내 주는게 아니었어. 엘빈은 이미 떠나 있었어. 혼자, 그냥 그렇게 영원히 떠나버린 거였어. 이제 안아 드릴 수도 없어. 얼굴을 만져 볼 수도, 눈을 마주쳐 볼 수도 없고, 목소리도 들을 수 없고, 편지도 보낼 수 없어. 찾아갈 수도 없고 인사도 할 수 없어.. 엘빈의 목소리가 갑자기 귀청을 때렸어. 사람이 떠나간다는 건 그런 거라고. 네가 더 힘들어 할까봐 걱정이 된다고.

그의 목소리를 떠올리자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어. 쟝에게서 내내 불안하게 눈을 떼지 않던 나일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어. 내 저 새끼 저럴 줄...! 나일은 순식간에 뛰어들어와 쟝의 손에서 거의 떨어져 내리려는 횃불을 겨우 잡아챘어. 놀란 병단이 웅성대기 시작했지. 나일은 쟝의 목덜미를 잡고 엘빈의 시신에서 확 돌려 세워, 기겁해서 따라 달려나온 분대장에게 던지듯 넘겼어. 분대장은 쟝과 함께 휘청거리다 그대로 바닥에 같이 주저앉았어. 

나일은, 병단을 돌아보고, 쟝을 대신해 엘빈의 시신에 경례를 하고, 그의 관을 닫았어. 타닥거리는 소리에 쟝이 고개를 휙 돌렸을 때, 나일이 댄 불은 이미 밑에서부터 무서운 속도로 올라가고 있었어. 안 돼, 진짜 안 돼..

가지 마세요..

그 말은 마음 속에서 그렇게 갑자기 터져 나왔어. 사실 엘빈에게 계속, 계속 하고 싶던 말은 그거 하나였어. 그가 미안해 할 까봐, 살아 있을 때조차 입 밖에도 꺼내지 못한 말이었어. 가지 마세요. 가지 말아달라구요. 눈물이 미친듯이 쏟아졌어. 편안히, 꿋꿋하게 보내주겠다고 속이 닳도록 마음을 먹은 것도 소용이 없었어. 결국 일어나지도 못하고 오열하기 시작하는 쟝을, 분대장은 그저 품에 끌어안고 있었어. 나일은 횃불을 물통에 던지듯 담궈 끄고, 곧장 쟝에게 다가왔어. 

괜찮아. 편하게 갈 거야. 괜찮아.

나일은 제대로 숨도 들이키지 못하고 흐느끼는 쟝의 고개를 숙여주고 그의 등을 토닥이기 시작했어. 

..괜찮아.. 

분대장의 어깨 너머로, 쟝은 불꽃이 공중으로 올라가는 걸 계속 바라봤어. 사랑했어요. 진심이었어요. 가지 마세요. 손 한번만 다시 잡아주세요. ...편하게 가세요. 고생했어요. 미안해요. 가지 말아요.. 한 번만 안아주세요.. 

불꽃은, 몇 시간이나 하늘로 흩날렸어. 눈이 아플 정도로 하늘이 맑은 날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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