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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룡회 전신, 동방협회 (중국인 양계초 회원임)

타쿠야(211.36) 2014.08.23 03: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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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東邦協會의 조선사정 조사활동과 조선인식*


최혜주 저



근대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적 통일국가 수립을 목표로 하면서 정책과제로 부국강병과 식산흥업 문제를 중요시하였다. 국가체제가 정비 되면서 일본인의 시야도 해외로 확장되었다. 일본정부는 종래 해외이민 억제정책을 펼치고 있었지만 1885년에 해외이주 제한이 철폐되었다. 1890년 전후 해외식민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본격적으로 식민지 획득 경 쟁에 나서게 된다. 이를 추진하기 위해 여론 형성을 주도해 간 것이 정부 보다는 민간 지식인이 결성한 단체였다. 동경지학협회(1879), 동방협회(1891)나 식민협회(1893), 대만협회(1898, 동양협회의 전신), 동아동문회 (1898) 등의 민간단체를 조직하여 해외사정을 조사 연구하게 된다. 군인 들의 정탐과 병행하여 개인적으로 조선사정 안내서를 간행하거나 조사 단체를 만들어 해외사정을 조사 연구하는 활동을 시작했다. 


이 글은 19세기 말 일본의 대외침략이 본격화할 때 동방협회가 조선을 대륙침략의 교두보로 만들기 위해 조선에 대한 사정 조사와 연구를 통해 조선 문제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밝히는데 목적이 있다. 동방협회는 1891 년 副島種臣을 중심으로 설립된 단체로 동북·동남아시아, 오스트레일리 아, 남양까지도 관심을 갖고 이 지역들을 조사 연구하여 20여 년간 활동 했다. 이 글에서 동방협회에 주목하는 것은 일본 내에서 영향력이 있는 정·관계, 군인, 민간 지식인 등을 망라하여 조선 문제에 관심을 표명하 고 있었으며 근대 일본인의 조선인식 형성에 영향을 미친 아시아주의 단 체이기 때문이다. 아시아주의1)는 일본의 근대 형성기에 새로운 질서에 적응하면서 등장한 사상이며 일본의 대외팽창을 정당화하는 이념적 역 할을 하였다.


지금까지 일본의 조선연구 단체에 대한 선행 연구는 먼저 일본 제국주 의의 아시아 침략에 첨병역할을 한 동아동문회와 아시아주의에 대한 연 구가 주류였다.2) 그리고 러일전쟁 이후 설립된 한국연구회, 동양협회, 조선연구회, 동경지학협회에 관한 최혜주의 연구3)가 있다. 동방협회에 대 해서는 국내에서 발표된 연구는 없으나 일본에서 安岡昭男이 협회의 설 립취지와 임원구성 및 회원을 정리하고 창립주도자인 副島種臣의 역할 을 다룬 연구, 狹間直樹의 동방협회의 설립 및 중국과의 관련 연구, 朝井 佐智子의 동방협회 러시아어학교와 박영효가 설립한 親隣義塾 지원에 관한 연구가 있다.4)


이상의 연구들은 모두 일본의 식민지 지배정책사라는 큰 틀에서 기초 적으로 다루었기 때문에 개별 단체의 성격이나 구성원의 사상적 경향, 강 연회 활동 등의 사업에 대한 구체적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각 단체의 조선 사정조사가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조선을 어떻게 인식했는지 도 실증적으로 분석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글은 동방협회의 기관지인 ꡔ東邦協會報告ꡕ(1891.5~1894.7, 통권38호)와 ꡔ東邦協會會報ꡕ(1894.8~1914.7, 통 권213호)를 중심으로5) 동방협회가 조선에 대해 어떠한 관심을 갖고 정보를 수집했는지 알아보려고 한다. 먼저 동방협회의 구성원, 운영, 주요활 동, 회원동향 등을 분석한다. 다음 조선에 대한 조사활동이 어떻게 이루 어졌는지 검토한다. 마지막으로 동방협회 회원들의 조선인식에 대해 살 펴본다. 일본이 청일전쟁에 승리한 후 대륙침략의 일환으로 조선에 대한 여러 조사를 단행하고 조선을 강점할 계획을 준비하고 있던 상황의 한 단면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2. 동방협회의 설립과 주요활동


1) 협회의 설립과 구성원


동방협회는 1891년 창립되었는데 그 준비는 1890년 1월부터 小澤豁郞, 福本誠, 白井新太郞이 시작하였다. 小澤豁郞은 1874년 일본이 대만을 침 략했을 때 육군중위로 거사에 참여하고 1884년 중국에 파견되어 군사목 적의 첩보활동을 한 뒤에 ‘대륙낭인’이 되었다. 福本誠은 일본신문사를 창간하고 청일전쟁 시 종군기자로 참가했으며, 井上雅二와 함께 동아회 를 결성하고 아시아주의 단체 현양사6)를 창립한 인물이다. 白井新太郞 는 1886년 상해의 낙성당 漢口지점에서 활동한 ‘대륙낭인’의 한 사람으로 청일전쟁 후에 동아동문회7)에 참가한 인물이다. 이들의 창립취지에 찬성한 小山正武, 山口宗義, 陸實, 矢野文雄, 箕浦勝人, 久島惇德, 小村壽太 郞, 齋藤修一郞, 高橋健三 등이 11월 5일 동경의 星岡茶寮에서 창립회의 를 열고, 1891년 7월 7일에 제1회 총회를 개최하였다. 창립 임원은 副島 種臣(추밀원 부의장), 渡辺國武(대장차관), 小山正武(대장성 서기관), 高 橋健三(관보국장), 陸實(일본신문주필 겸 사장), 箕浦勝人(중의원의원), 杉江輔人(政敎社 사원), 久島惇德, 北村三郞, 池辺吉太郞(일본신문사 객 원기자), 小澤豁郞, 福本誠, 白井新太郞이다. 협회 설립의 취지와 사업목 적은 “동양 諸國과 남양 諸島에 관한 講究”를 내걸고 학술연구단체를 표 방하였다.


설립당시의 「동방협회의 설치취지」에 의하면 “여러 나라가 빈번하게 식민지를 찾고 무역지를 찾는데, 서남 諸州가 이미 넘어가고 우리 동양 에 미친다. 일본·지나는 실로 그 요충에 해당하는데, 고식책에 안주하여 서로 바라보고만 있다.ꠏ동양의 선진을 자부하는 일본제국은 근린 제방의 近狀을 자세하게 알고 실력을 가지고 외부에 펼치며 이로써 태서제국과 균형을 동양에 보존할 계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미개지를 개척 하며, 불행한 나라를 도와야 한다.”고 언급하였다. 서구열강이 식민지를 찾기 위해 그 여세를 몰아 동양으로 진출하려 할 때, 동양의 ‘선진국’인 일본이 그 실력을 외부로 펼칠 것을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청일전쟁에 승리한 뒤인 1902년 6월에 개정된 <취지서>에 의하면, 협회의 역할에 대 해서 “열강의 동방경영에 대한 관심이 심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부 터 일본이 강국으로서의 설비와 실력을 충실히 하고 청·한의 독립과 자 위를 부익하기 위해서는 동방협회의 역할이 이전보다 다섯 배는 많아졌 다”고 언급하여 청·한을 열강의 간섭으로부터 배제시키기 위해 일본의 적극적인 팽창정책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즉 서양의 침략에 대항하여 일본이 아시아를 지도해야 하며 협회의 적극적이며 주도적인 역할을 주 문하고 있다. 이 점은 동방협회의 아시아주의 단체로서의 성격을 드러내 는 것이다.


동방협회의 목적과 사업에 대해서는 「동방협회 사업순서」에서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8) 이 규정은 1902년에 개정되어 “동방의 평화를 보장하 여 인문의 발달을 기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학술연구의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사업은 그 일환으로 조사부의 역할을 강화하여 “지리, 무 역, 식민, 식산, 교통, 통계, 재정, 민력, 군비, 國交, 近史, 문학, 미술, 교 육, 종교” 분야로까지 확대할 것을 명시하였다.


임원과 회원규정을 보면 창립시에 회두(1명) 부회두(1명) 평의원(12명) 회계감독(1명) 간사(2명)이었던 것이 1895년 10월에 개정되어 회두(1명) 부회두(1명) 평의원(40명) 회계감독(1명) 간사장(1명) 간사(1명)으로 바뀌 었다. 회두로는 副島種臣(내무대신)을 1892년에 추대하였고, 부회두는 1893년 3회 총회에서 近衛篤麿(귀족원의장)를 선출하였다. 近衛가 사망 한 뒤에는 黑田長成(귀족원부의장, 1899.8)과 加藤高明(외상, 1902.3)이 취 임하고 있다. 黑田이 회두로 승격한 이후에는 加藤이 부회두를 맡았다. 회계감독은 渡辺國武로 그는 대장차관과 장관을 역임한 인물이다. 간사 장은 稻垣滿次郞(타이주재공사)→伊東祐侃(1904.12, 통감부서기관, 경성 일보사장)→千頭淸臣(1908.12, 전 내무관료, 귀족원의원)→中田敬義(1912.4, 전 외무성정무국장)→寺尾亨(1912.8, 전 동경제대교수, 법학자)가 각각 맡 았다. 간사는 발족 다음해 福本誠(편집), 白井新太郞(서무), 小林定修(회 계)외에 山田猪太郞, 副島道正, 樺山愛輔, 伊東祐侃, 川村純藏, 本間德次郞, 副島八十六, 村松恒一郞, 三土忠造, 加藤太郞松, 本田貞介, 加藤房藏, 金山尙志, 大岡力, 三塩熊太, 川久保健 등이 맡았다.


당시 동방협회의 임원은 물론 회원에는 犬養毅, 陸實, 中江兆民, 松方 正義, 牧野伸顯, 後藤象次郞, 靑木周藏, 加藤高明, 荒尾精, 小村壽太郞, 谷 干城, 頭山滿 등 유력 정치가 관료들이 많이 참여하고, 최초의 아시아주 의 단체인 흥아회9)의 책임자 曾根俊虎와 회원들이 있었다. 동방협회가 20여 년간 존속하는 중에 청일전쟁, 러일전쟁, 한국병합 등 중요한 사건 이 일어날 때마다, 일본의 대외정책이 팽창정책으로 가는데 영향력을 행 사하였다. 조선과 관련된 인물로는 伊藤博文, 原敬, 星亨, 三浦梧樓, 小宮 三保松, 石塚英藏, 林權助, 花房義質, 岡本柳之助, 大石正巳, 大三輪長兵 衛, 大江卓, 鶴原定吉, 國友重章, 井上角五郞, 大鳥圭介, 恒屋盛服, 宇垣一 成, 目賀田種太郞, 齋藤實, 水野鍊太郞, 曾禰荒助, 小松綠, 三土忠造, 小田 省吾, 萩原守一, 澤柳政太郞 등이 있다.(<표 2> 참조) 이들은 통감과 총 독, 총독부 관료, 고문관, 주한공사 등으로 조선의 정치 외교와 깊이 관련 되어 일정하게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들이다.


이밖에도 중국의 양계초와 한국의 박영효, 김윤식, 李堈(의화궁 전하), 李鶴圭(주일조선공사), 尹致旿(일본유학생 감독), 李埈鎔(일본유학), 金益 南(일본 자혜의원의학교 입학), 朴鏞和(주차일본공사관 2등참사관, 주일 특명전권공사), 李址鎔(주일전권공사), 玄暎運(특명전권공사), 趙南益(시 종원 시종), 高源植(내각 서기관), 金寧鎭(내각총리대신 비서관)도 있었 다. 박영효는 1895년 7월 역모사건으로 일본에 망명했을 때 회원으로 가 입하고 김윤식은 같은 시기에 외무아문대신에 임명되었을 때 가입한 것 같다. 이강과 윤치오는 1899년에 신입회원이 되었고 이준용과 김익남은 같은 해 일본에 유학 중일 때 가입하였다. 이학규와 박용화, 이지용은 주일공사로 있을 때 가입하였는데, 이지용은 1907년 부회두 加藤의 소개로 종신회원이 되었다. 현영운은 1904년 특명전권공사로 일본에 파견된 뒤 종신회원에 가입하고 있으며, 조남익, 고원식, 김영진은 모두 간사의 소 개로 1907년에 회원이 되었다.


평의원은 매년 반수를 개선하였다. 최초 평의원은 陸實, 高橋健三, 大 井憲太郞, 杉浦重剛, 小山正武, 志賀重昻, 三宅雄二郞, 杉江輔人, 井上哲 次郞, 中橋德五郞, 星亨이었는데 나중에 24명이 되고 1895년 10월의 임시 총회 결의로 40명이 증원되었다. 평의원은 협회 사업이 확장되면서 미술 가, 실업가, 군인 등으로 그 분야가 확대되었다. 다시 1902년 3월 총회에 서 20명을 증원하여 60명이 되었다. 이는 협회의 목적과 사업이 개정되면 서 조사부를 설치하여 사업 분야를 확대한 것에 따른 조치였다.


회원규모와 회비에 대해서 살펴보면 회원 수는 1891년 5월 발족 시 101 명, 동 9월에 407명, 1892년 12월 790명, 청일전쟁 직후 977명, 1898년 1200 명, 1900년 이후 하강되었지만 러일전쟁 이후 증가되어 1910년 준회원을 제외하고 700명 정도가 되었다.10) 기존의 유력회원들이 1898년 10월 27일 동아동문회로 흡수되었고, 1901년에 대러시아 강경단체로 흑룡회가 성립 되어 회원들의 이동이 이루어졌다. 협회의 유지는 회비와 기부로 충당하 며(제16조) 회비는 제17조 규정에 의하면 “동경회원은 매월 50전 지방회 원은 매월 30전으로 한다. 회원의 증가에 따라 이것을 감할 수 있다. 다 만 일시에 50원을 내는 자는 본 항의 회비를 납부하지 않고 수신회원 자 격을 얻는다. 더욱 기납 회비는 본인의 청구에 따라 이 금액에서 공제하 는 것으로 한다“고 되어 있다. 종신회원을 모집하여 이들에게 받은 돈은 1 협회구락부의 설치, 2 회보개량, 3 서적출판, 4 기타 협회의 확장사 업에 지출하였다.


2) 주요 활동

일본 東邦協會의 조선사정 조사활동과 조선인식 289

동방협회의 활동은 강담(연)회 개최와 시찰원 파견, 교육사업, 지나조 사회 결성, 출판활동을 들 수 있다. 1 강담회는 둘째 토요일 오후 1시부 터 개최되었으며 간사의 판단으로 공개여부를 결정하였다. 그리고 1891 년 7월 31일부터 조선, 중국, 만주 등지로 시찰원을 파견하기 시작하였 다.11) 현지의 사정을 조사한 시찰원이 돌아온 뒤에는 그 내용을 소개하 는 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즉 군인, 외교관이나 정치가, 실업인, 학자 등에 의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여기서는 조선에 관한 조사내용을 시기별 로 소개하고 조사 목적에 대해서는 다음 3장에서 주제별로 자세하게 살 펴본다.

*1884년 梶山鼎介(육군중좌)의 만주, 압록강 정탐 소개.

*1889년 3월 28일(이름불명) 부산항에 도착, 경성까지 15, 6일간 예정으

로 시찰.

*1889년 磐城(해군함장 겸 수로부 측량반장)과 高木英次郞(해군소좌)의

대동강 수로탐색.

*1889년 柴山尙則(육군보병대위)의 조선 각도 정탐, 군사 기밀사항 조사. *1891년 1월 鈴木環(해군대위)의 수로탐색.

*1891년 7월 24일부터 12월까지 金田楡太郞(지질학사)이 부산, 경성, 평

양, 원산, 함흥, 원산, 경성, 충청도의 지질조사.

*1893년 봄 稻垣滿次郞(외교관)이 부산, 원산, 시베리아, 함경, 강원, 경

기, 경성 시찰.

*1894년 6월 福本誠(창립 발기인), 三宅雄三郞(언론인)을 파견. *1895년 5월 山田猪太郞(정당인)을 파견.

*1896년 大庭寬一(조선 내무고문관)이 재직 중 조사한 내용을 <조선론> 으로 발표.

*1897년 7월 20일 志村作太郞(대한철도회사 상무감독)이 조선 신개항 장 목포와 진남포 조사.

*1898년 7월 19일부터 8월 4일까지 부산상업회의소 시찰원이 부산, 낙 동강의 양산, 밀양, 영산, 대구, 성주, 고령, 초계, 의령, 칠원, 창원, 김 해의 수해 및 농업상황 시찰 보고 소개.

*1898년 12월 14일에서 다음해 1월 8일까지 宮本羆(부산영사대리)가 구 포, 김해, 창원, 함안, 진주, 의현, 영풍, 대구, 신령, 연천, 경주, 울산을 거쳐 경상도의 미곡출하를 시찰.

*1900년 8월부터 小藤文次郞(지질학자)이 경상, 전라, 충청, 경기, 강원 5도를 탐사.

*1901년 8월부터 小藤文次郞이 함경, 평안, 황해 3도의 지질학을 조사. *1904년 神鞭知常(정치가)이 부산과 인천, 목포, 군산, 원산항, 아산과

개성, 경성시찰.

*1905년 3월 1일부터 8개월 간 三宅義道(육군보병대위)가 함경도 성진

에 상륙하여 관북의 지형, 생활의 개황, 경작의 경황, 산림의 경황, 하

천의 경황, 천산물을 조사.

*1905년 3월 28일부터 5월 9일까지 田健次郞(체신차관)이 여순, 영구,

요양, 봉천에, 요양에서 마천령, 봉황성, 안동현, 신의주, 평양, 진남포,

경성, 인천, 부산, 마산포를 시찰 조사.

*1906년 肝付兼行(해군중장)이 한국항만 조사에 대한 강연

*1906년 木原(사가현청 수산 기사)이 사가현청의 명령을 받아 韓海의

어황을 시찰 조사.

*1906년 6월 21일부터 다음달 13일까지 本間德次郞(협회간사)이 만한과

북한시찰, 원산, 서호진, 독진, 청진을 거쳐 경성, 회령, 두만강 부근

시찰조사.

*1907년 9월 20일 小林房次郞(농사시험장 기사)과 中村彦(농상무기사)

이 한국습속, 교육 조사.

*1907년 靑柳新次郞이 간도 및 북한조사. 

*1910년 加藤房藏(언론인)이 淸韓을 시찰조사.


2 교육사업 확장. 


협회는 교육사업을 중요하게 인식하였다. 그것은 ‘동양의 맹주’가 되어 아시아주의를 확산시키기 위해서였다. “금일 세계 의 형세를 보면 동양을 이끌고 동양을 진정으로 문명으로 하는 것이 가 능하다면 이것은 일본인이 하지 않으면 안 된다.”12)고 언급한데 잘 나타 나 있다. 이러한 취지아래 동경에 러시아어학교가, 조선에는 경성학당이 설립되었다. 러시아어학교는 1892년 1월 11일 동경 神田에서 개교하였다. 속성을 목적으로 본과 2년, 연구과 1년을 수업연한으로 개설하였는데, 입 학자의 연령은 14세 이상이었다. 1894년 첫 졸업생을 배출한 이후의 실적 은 알 수 없다. 경성학당은 1894년 동방협회가 조선에 일본의 문화를 전 파하기 위해 기획한 것으로 조선교육연구회와 해외교육회가 만들어지면 서 1896년 4월에 개교하게 되었다. 동방의 ‘선각자’로서 일본의 책임을 완 수하기 위해 교육사업을 추진한 것이다.13)


3 지나조사회 설립. 

1899년 9월 18일 간친회에서 福本誠이 지나조사회 설립을 제창하여 만장일치로 의결하였다. 다음해 2월 5일에 화족회관에서 발기회를 개최하여 福本誠이 준비위원, 黑田長成 부회두가 위원장이 되었다. 동방협회가 주축이 되어 이에 참가한 단체는, 동아동문회, 아세아협회, 대만협회, 지학협회, 일본무역협회, 橫濱正金銀行, 대만은행,組, 三井물산주식회사, 실업단체, 각 상업회의소 등이다. 지나조사회는 편찬과 탐험을 사업으로 하면서 지나와 열강의 형세를 주로 논의하였 다.14)


4 단행본과 협회기관지 발행. 

단행본은 ꡔ大日本商業史ꡕ(菅沼貞風, 1892),ꡔ海上權力史論ꡕ(미해군대좌 Mahan, 1896), ꡔ佛國革命時代ꡕ(동, 1900), ꡔ東邦 近世史ꡕ(田中萃一, 1900), ꡔ東邦小鑑ꡕ(1900), ꡔ朝鮮彙報ꡕ(1893), ꡔ朝鮮論ꡕ(大 庭寬一, 1896), ꡔ支那新論ꡕ(佐藤宏, 1898) 등이 있다. 협회기관지는 ꡔ東邦協 會報告ꡕ와 ꡔ東邦協會會報ꡕ가 매월 1회 발행되었다. 협회보를 발행하는 이유를 동양과 남양지역을 연구하기 위함이라고 언급하였다.15)


이밖에도 협회의 활동은 동양의 정세에 대한 의견 개진과 외교현안에 대한 건의를 들 수 있다. 전자는 청일전쟁을 앞두고 동양의 정세가 절박 해지면서, “동방의 정치·인종·종교·미술·역사를 조사하고 동방문제 중에 아국이 해야 할 사업을 지정하여 임무를 완수해야한다”고 밝혔다. 후자는 스페인, 버마에 공사관을 설치하여 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영사 관 설치를 건의하거나 영·미·일·러 4개국 회의를 열어 연합조약을 체 결할 것을 건의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이는 협회의 이름으로 총리에 게 건의한 것이다.16)


이처럼 동방협회는 동양과 남양을 알자고 하는 학술적 목적에서 시작 된 것이지만 동양의 정세가 급박해지면서 외교·시사·상공업 등의 문제 에 대한 의견을 기관지를 통해 세상에 적극 제시하였다. 이를 위해 동방 의 정치·인종·종교·역사 등을 조사하고 협회가 추진할 사업이 무엇인지 연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이러한 기초 위에 수집하고 연구한 모든 정보와 자료를 가지고 “확장적으로 해외에 진출하여 활동할 것“을 촉구하였다.


3. 동방협회의 조선사정 조사활동


1) 군인의 정탐조사


일본이 조선에 대한 조사를 시작한 단초는 육군참모본부의 군사적 정 탐활동이다. 海津三雄 소위가 1877년 개항장 교섭을 위해 온 花房義質(대 리공사)을 수행하면서 한반도의 상황을 탐색하였다. 이듬해 그는 참모부 가 설치되자 조선전문 참모관으로 조선팔도 정탐에 나섰다. 1879년에 花 房義質이 다시 개항장 교섭을 위해 한성에 올 때 수행하여 지리지 편찬 을 위한 자료수집 활동도 벌였다. 부산, 원산지역 등과 내륙 곳곳을 정탐 하고 다녔다.17) 花房義質은 동방협회 회원이었다. 육군소좌 梶山鼎介는 성경지방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지역을 정탐하였다. 지세, 하천, 산세, 풍 속 등을 자세하게 조사하였고, 이 정보는 일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치르는데 이용되었다. 동방협회는 이 조사 자료를 10년이 지난 뒤에도 유용한 정보라고 하여 협회의 기관지에 재수록 하였다.18)


그리고 육군보병대위 柴山尙則이 1889년 조선 깊숙이 들어가 산해, 지 리, 형세를 시찰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19) 그는 1888년 5월 10일 일본 공사관의 무관으로 부임하여 정탐활동을 벌였다. 조선의 하류에 대해 압 록강, 대동강, 한강, 낙동강, 두만강을 중심으로 지세와 도로사정, 조운과육로운반, 한청무역 경계지 탐문, 조수 간만 차에 따른 배의 통과여부, 강 의 요충지 및 결빙상태 등을 상세하게 언급하였다.20) 동방협회는 그의 유작인 <이순신전기>도 수록하여 조선이 일본의 안위를 위해 중요한 지 역임을 소개하고 있다.


일본의 외성 외곽은 조선이다. 일본으로 하여금 오랫동안 동방독립의 존엄과 안녕을 완수하게 하려면 그 외성 외곽인 조선반도로 하여금 항상 일본제국의 國是에 일치 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논의를 기다리지 않는다. 조선의 咽吭은 전라 경상 2도에 있다. 그중 전라 해도에 있다. 그러므로 일본은 항상 이것에 주의하여 언제라도 경상 전라의 해도를 扼 守하여 이것을 점령하고 管制할 실력을 충분히 완비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분명하다.21)


이와 비슷한 시기 일본은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한 거점의 하나로 대동 강 개항을 준비하기 위해 해군을 통해 서해안의 수로탐색 작업을 벌였 다. 동방협회는 이곳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기관지에 자세한 내용을 수록 하였다. 하나는 1889년 磐城함장 겸 수로부 측량반장과 해군소좌 高木英 次郞의 실측에 의해, 둘은 1891년 1월 해군대위 鈴木環이 실험한 것이다. 대동강 입구, 대동강 부근의 기후, 潮, 대동강 남측 및 부근의 도서, 針路 法, 대암동각 근방, 대동강, 錨地에 관한 내용이다.22)


유사시 일본군의 한반도 상륙과 함께 전쟁수행의 필요성이 제기될 경 우를 대비하여 주요 항만을 조사하는 일은 동방협회의 중요한 관심사의 하나였다. 해군중장 肝付兼行의 강연에 의해 그 일단을 살필 수 있다. 그 는 해군 수로부의 측량과장과 수로부장으로 35년간 해군 수로부 사업에 종사하여 측량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수로부 사업이란 내외의 해안해면 을 측량하여 해군 전략전술의 중요자료가 됨과 동시에, 항해지도의 중요도구인 海圖와 水路誌를 만들어 이것을 부내 및 세상에 널리 공급하는 사업이다. 


그는 진해만이 매우 중요한 군항인 것은 쓰시마와의 거리, 몇 십 척의 함정 정박이 가능하고 방위 등에서 편리한 지형임을 이유로 든 다. 그리고 마산포는 장래 한국이나 만주에 일이 생길 비상시에는 일본 의 대군대가 상륙할 지점으로 부산보다 지정학적으로 우수하다고 말한 다. 영흥만은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의 군항에 대항할 만한 해군 근거 지로 중요하다고 보았다.23)


 “아국이 진해만과 영흥만을 한국으로부터 海 防에 필요한 지역으로 빌리는 것은 동양평화의 보장에서 실로 그 마땅함 을 얻은 것”이라고 언급하여, 장래에 있을 러시아와의 전쟁을 예상하여 해군을 통해 정탐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그는 일 본과 거류민의 이익을 위해 인천항을 수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 다.24) 인천이동양의해안중에서조수간만차가가장현저한곳이기때 문에 한국정부는 물론 통감부가 나서서 이 일을 추진할 것을 제안한 것 이다.


군인들의 정탐조사는 특히 북한지역의 사정조사에도 신경을 써서 육 군보병대위 三宅義道가 1905년 3월 1일부터 8개월 간 작전근무를 하며 조사한 내용을 기관지에 수록하였다.25) 함경도 성진에 상륙하여 임명, 길주, 명천, 경성, 수성, 부령, 백사봉, 회령 및 만항령을 거쳐 두만강에 이르는 과정과 10월 23일 청진에서 승선하여 개선하기까지의 기록이다. 관북의 지형, 생활의 개황, 경작의 경황, 산림의 경황, 하천의 경황, 천산 물을 소개하고 있다.


이처럼 동방협회는 창립 후 바로 조선 등지로 시찰원을 파견하기 시작 하였지만 청일전쟁 이전에는 군사기밀 사항의 정탐을 위해 이전에 추진 되었던 海津三雄 소위나 柴山尙則 대위의 정탐내용을 기관지에 다시 소 개하고 있다. 그리고 해군장교 등의 해로 실측내용을 강연회에서 소개하

여 개항장이나 낙동강, 대동강 등은 물론 조선의 지리 형세에 대한 파악 이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러일전쟁 이후에는 러시아를 경계하기 위한 방 편으로 북한지역의 사정조사에도 착수하였다.


2) 외교관·언론인의 조선사정 조사


末永純一郞은 한국정부의 재정고문 大三輪長兵衛의 비서로 조선에 체 재하면서 조선사정을 조사했다. 일본신문 편집장을 지내고 조선과 중국 의 혁명가와 교유한 인물이다. 청일전쟁 시에는 종군활동을 벌였고 러일 전쟁을 촉구하는 대러동지회에 참가하여 전쟁여론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그는 후술하듯이 조선이 왜 가난하며 위급한가를 지적하여, 지정학적 조 건, 임진왜란으로 인한 조선 문화의 파괴, 무기력하고 게으른 민족성, 관 리의 가렴주구, 구습 추종을 이유로 들고 있다.26)


외무성 통상국장으로 방곡령사건 처리를 위해 1892년 조선에 출장을 온 原敬은 당시 자신이 견문한 조선사정이 책에 기록된 것과 많이 다르 다고 보았다. 그는 청국이 주시하고 있는 조선은 전도가 용이하지 않은 나라임을 깊이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되고, 조선인은 세인이 상상하는 것 처럼 게으르고 가난한 인간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집은 왜소하지만 의복 은 청결하며 이것은 게으른 인간이 할 수 없다. 경작을 하거나 등짐을 진 것을 보면 힘이 강해서 모든 일을 배워서 하고 있다. 또한 현저한 미곡산 출량이 있으므로 지질이 세인이 생각하는 것처럼 척토가 아니라는 분석 이다. 조선정부가 부패하다면 이것을 조금 고치면 어느 정도 좋은 나라 가 될 것이라는 전망을 가졌다.27)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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