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어기는' 박영효 사화기락의 내용을 연상시킨다. 가운데 태극이 있으며 둘레에 팔괘에다 바탕까지 홍색이다. 언뜻
보기엔 사화기략의 '송기무처서' 내용을 확인시켜주는 결정적 단서인 듯 하다. 그러나 역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그림이
이론에 맞지 않는 전혀 '엉뚱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규장각 '어기'는 세 군데나 착오를 드러낸 도안이다. 세 군데란 팔괘의
배치, 태극의 모양, 그리고 깃대의 위치다. 이 세 군데가 동시에 틀렸다는 것은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먼저
팔괘의 배치를 보자. '어기'의 팔괘배치는 위가 리 아래가 감이니 '후천팔괘도' <일명 '문왕팔괘도'>를 따른
듯한데, 아래 '문왕팔괘도'와 비교해 보면 팔괘의 위치가 여러 군데 차이가 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 두 그림을 좀 더
자세히 비교해 보면 그 원인을 알 수 있다. 다름 아닌, 팔괘를 그리는 방식이 달랐기 때문이다. 주희의 '문왕팔괘도'가
중심으로부터 사방으로 확산시키며 팔괘를 그려나간 데 반해 '어기'는 바깥에서 안으로 수렴시키면서 팔괘를 그렸다. 따라서 '어기'의
팔괘 위아래를 뒤집으면 정확히 '문왕팔괘도'의 배치와 일치하다.
'어기' 팔괘 배치의 이런 착오는 '어기'를
그린 사람이 주희로부터 통용되어 온 '태극팔괘도'를 그리는 기본 원칙, 즉 가운데 태극으로부터 제일 가까운 쪽에 초효가, 그리고
바깥으로 확산되면서 2효 3효가 그려진다는 약속을 몰랐기 때문이다. 팔괘의 위치는 알았지만, 그것을 그려 넣으면서 중대한 실수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사실은 '어기'를 그린 사람이 조선조 성리학적 관습에 어두웠음을 말해준다. 이런 '어기'는 적어도
성리학 전문가들이 운집해 있던 조선의 조정에서는 그려질 수 없는 도안이었다.
가운데 태극문양에 나타난 착오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어기'의 가운데 태극은 주렴계 "태극도설"에
보이는 태극인데, 제일 가운데 동그라미는 "무극이면서 동시에 태극"인 상태로, 응당 공백으로 비워두어야 한다. 이곳을 음양으로
나눈 것은 태극도설의 이론과 배치된다. 이것을 보아도 '어기'가 주렴계 태극도설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에 의해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깃대 위치다. 조선의 깃발은 깃대가 오른쪽에 가는 것이 원칙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서 살펴보았다. '어기'의 깃대가 왼쪽에 있는 것을 보면 조선의 통상적 관습을 몰랐다는 것은 '어기'를 그린 자가
조선인이 아닐 수 있음을 의미한다.
재미있는 것은 '어기' 가운데 있는 '이상한' 태극문양이 조선
최초의 우표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조선의 우표는 1884년 4월 22일(음력 3월 7일) 고종황제의 칙력으로 우정총국이
설치되면서 발행되었다. 그런데 당시로서는 인쇄기술이 부족해 일본대장성 인쇄국에 발간을 의뢰했는데, 이 과정에서 엉뚱한 일이
발생했다. 조선측에서 일본측에 인쇄를 의뢰하면서 원래 태극문양을 원본으로 보냈는데, 일본측에서 아무런 해명 없이 가운데 문장을
주렴계 태극도로 바꿔버린 것이다. 일본의 의도적인 조작이라 할 수 밖에 없다.
일본이 의도적으로
바꿔버린 주렴계 태극도 한가운데 부분은 위에서 살펴본 어기의 한가운데 모습과 동일하다. 주렴계 태극도의 한가운데 동그라미를 둘로
나눈 것은 태극도설의 이론과 관련 없는 독창적이며 전무후무한 그림인데, 이것이 일본이 조작한 우표에 그대로 등장하는 것은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 어쩌면 어기를 그린 자와 우표 도안을 한 자가 동일인이거나 동일 집단이었을 수 있다.
일본의
왜곡작업은 해방이 되고 난 후에도 그 영향력을 잃지 않을 듯 하다. 예를 들면 이태진은 이 '어기'가 바로 태극기의 원조라
주장한다. 박영효가 수신사로 일본에 갈 때 왕명을 받아 제작해 휴대하고 간 '태극팔괘도'가 바로 '어기'와 같은 것인데, 그것이
결국 '군주기'가 되고 이후 어기로 채택되었으며, 여기서 제임스의 자문을 참고해 8괘 중 4괘로 줄인 것이 국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래도 '박영효 태극기' 사본이 발견되기 전의 주장이라 이해할 수 있지만 김원모는 사본이 발견된 뒤에도 여전히
이것이 대한제국의 '어기'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대한제국이 어기를 제정함에 있어서 태극팔괘도와
같은 '조선식 태극문양'을 채택하지 않고, 중국식 동그라미 태극문양과 8괘도를 채택했다는 것, 뿐만 아니라 '문왕후천팔괘도'의
8괘 배치와 다르게 파격적인 8괘 배열을 채택한 이유가 무엇인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그것은 대한제국의 고종황제는 대청국 광서
황제와 그 위상이 동격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같이 중국식을 채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8괘의
배열에 착오를 일으킨 것도 고종황제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파격적인" 배열로 이해하는 이런 어이없는 관점은 다름 아닌 규장각에서
발견된 '어기'에 대한 철저한 믿음에서 나온 듯 하다. 그리고 이런 믿음은 물론 송기무처서라는 사료에 바탕을 두었을 것이다.
일본이 사료 왜곡을 위해 온 힘을 쏟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을 듯하다.
출처 : https://arca.live/b/city/21627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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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어기는 조선시대때 조선인들이 만든것이라기에는 조작 의심이 아직까지도 있다
일단
아무 맥락없이 조선 어기 그림이 규장각에 덩그러니 놓여있던점(1902년 어기 제작 문헌이 존재하긴 하는데 그 어기가 저 문양의
어기인지도 모름. 게다가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저 태극 어기는 조선시대가 아닌 대한제국때 최초로 만들어진것임)
어기라면서 조선의 깃발 드는법도 틀리고 태극 문양도 틀리고 팔괘도 틀리고 기타등등 오류가 많은점
마지막으로 성리학과 정반대되는, 절대 그려질수 없었던 사상이라는점 등등
그래서 몇몇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출처가 불분명한 조선 어기라는것이 사실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이 어떠한 목적에 의해 조작으로 만들었을것이라는 의심을 한다
왜 일본은 태극 사상 및 기호들을 조선에서 예전부터 유래되어왔던것마냥 조작하고, 최초의 우표까지도 마치 태극기를 사용해왔던것마냥 조작해 발행했을까?
일본은 조선이 처음부터 독립국이었다는것을 위해 수없이 많은 노력을 해왔는데 아마 태극 관련된 근본 조작도 그 일환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이태진을 포함한 거의 대부분의 한국 역사학자들은 규장각에서 발견된 어기 그림과 초선 최초의 우표에 나와있는 태극 어기를 근거로 태극 문양은 아주 예전 조선에서부터 사용되어왔으며 근본과 유래가 있다고 말한다
심지어 나무위키와 기타 위키들에서도 조선시대때 조선의 어기를 사용해왔던것처럼 적어놓았다. 저게 사실이라고 해도 조선 어기는 1903년부터 사용되었으므로 대한제국시절때부터인데도 어거지로 뭉뚱그리는것이다
성리학 질서가 지배하던 조선에서는 절대 태극 사상을 담은 기호가 그려질수가 없다. 한국은 국기에 관련된것마저 남이 뿌리를 만들어준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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