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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전쟁에 대한 오해와 편견 다섯 가지

민족백서 2006.11.27 02:2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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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썼던 글 [임진전쟁에 대한 오해와 편견 네 가지]에서 하나를 추가하고, 조금 퇴고한 글입니다. 1. 임진전쟁에서의 승전국은 어디인가? 주지하다시피 전쟁의 승패는 전쟁 당사국 중에서 어느 쪽이 전쟁 목적을 달성했는가로 가름합니다. 임진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목적은 조선을 완전히 점령하고 중국(명나라)에까지 세력을 넓히는 데 있었고, 침략당한 조선의 목적은 일본의 침략을 격퇴하고 국가의 존명을 유지하는 데 있었습니다. 일본은 임진년과 정유년 2차례에 걸쳐 대규모 침략을 감행했지만 결국 조선을 멸망시키고 점령하는 데 실패하였으며, 조선은 한때 국토의 최후방까지 밀리며 위태로운 상황을 맞았지만 끝내 일본의 침략을 격퇴하고 국가를 보전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항목에서 살펴보겠지만, 전쟁의 과정에 있어서도 일본군은 대규모 공세의 초기에만 우세했을 뿐이지 조선군이 전열을 정비하고 반격에 들어가면 일본군은 패주를 거듭하였고, 조선은 최후의 전투 노량해전에서 대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임진전쟁에서 승자였음을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이고, 심지어는 패한 전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까지 존재하는 것은 어찌한 영문인지 궁금합니다. 1812년 러시아는 나폴레옹의 급작스러운 대규모 침략을 받아 전쟁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후퇴를 거듭하며 수도 모스크바까지 내주고 후방으로 밀렸지만 다시 반격하여 나폴레옹군을 격퇴하고 최후의 승리를 거두었고, 러시아는 오늘날까지 이 전쟁에서의 승리를 '영원한 러시아의 영광, 슬라브 민족의 위대함'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똑같은 승리의 과정을 겪은 우리가 자랑스러워하지는 못할망정 패배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2. 조선군은 수세에 몰리고 왜군이 공세를 주도했는가? 보통 임진전쟁에서 조선군은 형편없이 수세로 밀려 도주하기에 바빴다고 알려져 있는데, 오히려 조선군이 공세를 취한 일변도로 진행되었습니다. 7년간 통계를 보면 전투가 105회 중 조선군측 공격이 68회, 왜군측 공격이 37회로 조선군 공격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승패의 측면에서도 조선군측 승리가 65회, 패배 40회로 조선군이 더 많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특히 임진전쟁은 임진년 첫해에 가장 많은 전투가 있었고, 그 후로는 개전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왜군은 모두 경상도 남쪽 해안으로 패퇴하여 왜성을 쌓고 버티다가 정유년에 재침하지만 명량에서 이순신 장군이 13척으로 333척을 격파함으로써 열세에 몰려 다시 왜성으로 들어가 수성전을 하며 본국으로 퇴각할 기회를 엿보게 됩니다. 참고로 실질적인 전투 기간은 왜군의 부산 상륙이 있었던 임진년 4월 13일부터 서울을 수복한 계사년(1593년) 4월 20일까지의 1년과, 남원성 전투가 있던 정유년 8월 16일부터 명량해전이 있던 9월 16일까지의 약 두 달로 총 14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계사년(1593)에 조기종결될 수 있었던 이 전쟁이 7년이나 끌게 된 것은 전투를 회피하고 조선군까지 잡아두며 강화에 전념했던 명군 덕분입니다. 1차 전쟁의 첫해(임진년)에 가장 많은 전투가 있었고, 조선군이 처참한 패배를 면치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1년차에 조선군과 왜군은 모두 72회의 크고 작은 전투를 벌였고, 이 가운데서 조선군측 공격전이 45회, 왜군측 공격전이 27회로 조선군이 공격한 전투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게다가 72회 중 조선군의 승리가 42회, 왜군의 승리가 30회로 조선군의 승리가 훨씬 많습니다. 또한 전쟁 발발 1년도 되지 않은 계사년(1593) 3월까지 왜군은 이미 총병력의 절반이 넘는 75,613명이 전사하여 절대적인 열세에 몰리고 있었습니다. 개전 초기, 왜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조선군이 평양으로 밀리는 동안만 왜군이 공세를 취하고 우세했지만, 곧바로 조선군이 전력을 재정비하고 반격에 나서자마자 전세는 역전된 것입니다. 3. 조선 관군의 역할은 전무하고 의병에 의한 역전이었는가? 조선 관군의 역할은 과소평가되고, 의병이 승리로 이끈 전쟁이라는 것도 매우 잘못된 편견입니다. 가장 전투가 많았던 임진년에 조선군이 승리한 42회의 전투 가운데 19회가 관군의 단독 전투였고, 의병군 단독 전투는 11회, 의병군 참전 아래 관군 주도의 전투가 6회, 관군 참전 아래 의병군이 주도한 전투가 6회였습니다. 이처럼 관군이 전쟁을 주도했으며 의병은 보조적인 역할만 행했고, 계사년(1593)이 되면 의병은 거의 해산됩니다. 그리고 계사년(1593) 1월 10일에 병력을 집계한 <선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총병력은 172,400으로 세부 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울산에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박진의 25,000명, 안동에 경상좌도 순찰사 한효순의 1만 명, 경상우도 순찰사 김성일이 진주에 15,000명, 창원에 15,000명을 포진시켰고, 곽재우, 김면, 정인홍 등이 모두 12,000여 명의 의병군을 거느렸고, 전라도 좌˙우수영을 합쳐서 15,000명, 권율과 병마절도사 최원의 육군 1만명, 창의사 김천일의 의병군 3천 명 등과 전라도 각지에 육군 1만 명, 경기도에는 8,300명, 평안도에 14,900명, 함경도에 10,200명, 충청도에 10,800명, 황해도에 8,800명, 강원도에 2000여 명, 그리고 기타 크고 작은 의병군 4,400여 명이 있었습니다. 위에 볼 수 있듯이 의병 2만 여명을 제외하고 15만이 모두 정규화된 관군으로서 이들이 전쟁을 주도했습니다. 물론 보급선을 끊고 위협한 의병의 활약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적으로 의병에 의해서 전쟁이 우세하게 진행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4. 임진전쟁의 승리는 명군 덕분이었는가? 물론 명군의 가세가 전략적으로 의미가 있었음은 분명합니다. 비록 처음에는 5만여밖에 파병하지 않았으나 동아시아의 최강국이 조선을 지지하게 되어 발생하는 전략적 열세에서, 그리고 조선군 17만여와 초기의 명군 5만을 합치면 20만이 훨씬 넘어 병력의 수에서도 발생하는 열세에서 심리적 압박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투에서 소극적이고 조선군의 지휘권까지 맡아 조기 종결할 수 있었던 전쟁을 교착전선으로 밀어넣고 장기화시킴으로써 명군은 득보다는 해가 됩니다. 지휘관들 역시 어리석어서 척후도 없이 기분에 내켜서 왜군을 추격하다 벽제관에서 복병을 만나 이여송을 비롯한 지휘부가 완전히 전멸할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벽제관에서 패배하여 완전히 겁을 집어먹은 명군은 파주를 버리고 임진강까지 건너 개성까지 후퇴해버립니다. 이 정도는 차라리 애교에 가깝고, 평양성 1차 공격에서는 왜군의 단순한 공성계(空城計)에 속아 명군 태반이 섬멸되고 그 대장인 조승훈은 요동까지 도망가서는 조선군이 왜군에 투항하여 졌다고 명 조정에 허위 보고까지 합니다. 또 명군 장수들이 조선 장수들에게 상전 노릇을 하며 무례와 오만 방자함을 떨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 민가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습니다. 게다가 전투 자체를 두려워하여 왜군의 강화 요구만 들어오면 아무리 전세가 유리하고 조선군이 싸우자고 요청하여도 휴전을 내걸고 교섭에만 몰두했고, 10만도 파병하지 않은 주제에 매번 40만 대군을 일으켜 왜를 정벌해 버리겠다는 허풍만 쳤습니다. 덕분에 조기 종결될 수 있었던 전쟁이 7년이나 조선 백성들을 괴롭히게 됩니다. 계사년(1593) 초기에 17만여 명에 이르렀던 조선군 병력은 전쟁 후기로 가면 줄어들어 무술년(1598)에 이르면 명군 87,000명에 비해서 조선군은 33,800명으로 크게 줄어드는데 이것은 선조의 정치적 계산으로 조선군이 해체되었기 때문입니다. 선조는 전쟁 초기에 서울까지 버리고 의주까지 몽진하여 명에 망명하려고까지 했기 때문에 왕으로서의 명분을 크게 잃은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약점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선조는 자신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최고 공로자가 되기 위해서 자신이 구원을 청한 명군에 의해서 전쟁을 종결되어야 했습니다. 전쟁 후에도 명나라가 있는 서쪽을 등을 보이고 앉지 않을 정도로 열성적인 사대를 한 것과 의병장과 관군 장수들을 의혹의 눈초리로 감시하고 공신책봉에서도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소홀한 대우를 받은 것은 이러한 선조의 정치적 약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명에 원군을 청하지 않아도 조선군은 7만 5천여가 전사한 왜군에 비해 총병력이 17만여 명으로 병력에서도 압도했고 전세도 역전되었기 때문에, 명군이 오지 않았더라면 오히려 조선은 계사년(1593)에 전쟁을 승리로 종결시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5. 명은 종주국으로서의 대의를 지키기 위해서 원군을 파병했는가? 명이 조선에 파병한 것은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상국의 의리를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파병을 결정하기 이전에 이미 왜군은 수세에 몰리고, 조선군은 점차 거센 반격을 가하고 있었지요. 조선군이 형세를 뒤집자 명나라는 그제서야 상국의 '명분'을 지키기 위해 파병을 결정하게 됩니다. 조선 파병 결정에 앞서 설반이라는 인물을 조선에 보내 정세를 살피게 했는데, 설반이 명황제 신종에게 보고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요진(요동)은 경사(북경)의 팔이고 조선은 요진의 담장입니다. 200년간 복건과 절강에 왜적이 침입했으나, 요양(요동)은 그러하지 않았으며, 이는 조선을 담장으로 삼은 까닭입니다. 만약 왜적이 조선을 침공한다면 요양이 하루도 안심할 수 없으며, 배를 타고 오면 수도의 앞뜰인 천진도 화를 당할 것이고, 북경이 진동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빨리 출정하면 조선 사람의 힘을 빌려 왜적을 치는 것이 되고, 늦게 출정하면 왜적이 조선 사람을 이끌고 와서 우리와 싸우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조선이 왜군에 의해 멸망하면 요동과 수도인 북경이 위태로우니 나중에 자국에서 전쟁을 치러 큰 피해를 입기보다는, 조선 땅에서 자국의 피해 없이 조선의 군량을 취해 군자금을 들이지 않고 자국의 방위를 이루려고 했던 것입니다. 명군의 선택은 객관적으로 보아도 전략적으로 옳지만, 왜군을 몰아내고 전쟁을 1년여 만에 조기 종결시킬 수 있었는데 강화 협정을 하느라 7년이나 전쟁을 끌게 한 것은 분명히 명군의 잘못입니다. 명군은 자국 피해가 없고, 마음껏 조선 백성들을 약탈할 수 있으며 군량까지 조선이 담당하니 전쟁이 오래 끌어도 손해 볼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명군의 조선에서의 약탈과 폭행 등의 피해는 어마어마해서 그 당시 백성들 사이에서는 '왜군은 얼레빗, 명군은 참빗'이라는 말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애초에 윤두수는 이러한 것을 예견하고 오히려 피해가 더 커진다며 선조에게 명나라에 원군 요청을 반대했습니다. 참으로 탁월한 선견지명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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