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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온 인성 황제 께서 조선왕 이종에 내리시는 글 명문이오

ㅕㅕㅕㅕㅕㅕ 2006.11.27 05:5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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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홍타이지(皇太極) 묘호 및 시호 : 태종(太宗) 문황제(文皇帝) 생몰년(재위기간) : 1592~1643(1626~1643) 홍타이지(愛新覺羅 皇太極)는 태조 누르하치의 여덟번째 아들로서, 병자호란때 직접 군대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여 결국 송파 삼전도에서 인조임금에게 치욕을 안겨준 것으로 우리에게 아주 잘 알려진 인물이다. 주지하다시피, 만주족의 군사 및 행정조직은 '팔기(八旗)'로 이루어져 있다. 정황기, 양황기, 정남기, 양백기 등 여덟 가지의 서로 다른 색깔과 모양의 팔기는 각각 다른 부족과 족장의 인솔 하에 있었고, 후금이 건국되던 시기만 하더라도 이를 통해 상호 간의 견제와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하였다. 청 황실도 본래 3개의 기병만을 통솔하였으나, 홍타이지가 잇따른 권력투쟁에서 계속 승리하면서 결국에는 모든 팔기를 황제의 휘하에 둘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홍타이지는 비록 그 생전에 자금성에 들어가보지는 못하였으나, 이후 소수의 여진인(만주족)들이 다수의 한족을 수 백년간 효과적으로 지배할 수 있도록 토대를 마련하였다. 몽골과 조선을 경략하여 배후를 안전하게 하였고, 민족 간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 화합방책을 강구하였으며, 만주족 고유의 조직인 팔기제를 시대에 맞게 개편하였으며, 국호를 청(淸)으로 개칭하고 칭제(稱帝)하여 중국과 대등한 왕조임을 표방하였고, 만주문자를 보다 쓰기 쉽게 바꾸고 중국의 여러 문헌들을 만주어로 번역하는 등등....... 역시 '태종'이라는 명칭에 걸맞는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우리나라 또는 중국(한족)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오랑캐 출신 침략자'로서 비춰질수 있을지 모르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왕조 초기의 뛰어난 창업군주로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오히려 당시 사대주의와 국제정세판단착오에 빠진 우리 조선 조정이나 외척·환관과 끝도 없는 부정부패의 늪에 빠진 명나라 조정이 부정적으로 조명되어야 할 것이지, 우리 임금을 무릎꿇게 하였다는 이유에서 그의 엄연한 업적을 무시하고 단지 '야만족 추장'정도로 폄훼하는 것은 역사를 보는 바람직한 시각이 아니라고 본다. 皇太極의 소릉(요녕성 심양(沈陽) 소재) 서양에서 발간된 동양사 문헌에서는 그의 이름이 아바하이(Abahai)라고 언급되는데, 어떻게 그런 명칭이 붙었는지 그 이유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홍타이지는 죽은 후, 만주 선양(沈陽)의 북릉(소릉)에 묻혔다. 다음은 그 내용을 적은 청태종의 편지 입니다. <(前略)내가 요동을 점령하게 되자 너희는 다시 우리 백성을 불러들여 명나라에 바쳤으므로 짐이 노하여 정묘년에 군사를 일으켜 너희를 정벌했던 것이다. 이것을 강대하다고 약자를 없신여겨 이유없이 군사를 일으킨 것이라 할 수 있겠느냐. 너는 무엇 때문에 그 뒤에 너희 변방 장수들을 거듭 타이르되, '정묘년에는 부득이하여 잠시 저들의 무리한 요구를 받아들여 화약을 맺었지만, 이제는 正義로 결단을 내릴 때이니 경들을 여러 고을을 타일러 충의로운 사람들로 하여금 지략을 다하게 하고, 용감한 자로 하여금 적을 정벌하는 대열에 따르게 하라'는 등등의 말을 했느냐. 이제 짐히 친히 너희를 치러왔다. 너는 어찌하여 지모 있는 자가 지략을 다하고 용감한 자가 종군하게 하지 않고서 몸소 一戰을 담당하려 하느냐. 짐은 결코 힘의 강대함을 믿고 남을 침범하려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도리어 약소한 국력으로 우리의 변경을 소란스럽게 하고, 우리의 영토 안에서 산삼을 캐고 사냥을 했으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그리고 짐의 백성으로서 도망자가 있으면 너희가 이를 받아들여 명나라에 바치고, 또 명나라 장수 공유덕과 경중명 두 사람이 짐에게 귀순코자 하여 짐의 군대가 그들을 맞이하러 그곳으로 갔을 때에도, 너희 군대가 총을 쏘며 이를 가로막아 싸운 것은 또 무슨 까닭인가. 짐의 아우와 조카 등 여러 왕들이 네게 글을 보냈으나 너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난 정묘년에 네가 섬으로 도망쳐 들어가 화친을 애걸했을 때, 글이 오고간 상대는 그들이 아니고 누구였더냐. 짐의 아우나 조카가 너만 못하단 말인가. 또 몽고의 여러 왕들이 네게 글을 보냈는데도 너는 여전히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었지, 그들은 당당한 원나라 황제의 후예들인데 어찌 너만 못하랴! 원나라 때에는 너희 조선이 끊이지 않고 조공을 바쳤는데, 이제 와서 어찌 하여 하루아침에 이처럼 도도해졌느냐. 그들이 보낸 글을 받지 않은 것은 너의 昏暗과 교만이 극도에 이른 것이다. 너희 조선은 遼, 金, 元 세 나라에 해마다 조공을 바치고 대대로 臣이라 일컬었지, 언제 北面하여 남을 섬기지 않고 스스로 편안히 지낸 적이 있었느냐. 짐이 이미 너희를 아우로 대했는데도 너는 갈수록 배역하여 스스로 원수를 만들어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 도성을 포기하고 대궐을 버려 처자와 헤어져서는 홀로 산성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설사 목숨을 연장해서 천년을 산들 무슨 이로움이 있겠느냐. 정묘년의 치욕을 씻으려 했다면 어찌 하여 몸을 도사려 부녀자의 처소에 들어앉아 있느냐. 네가 비록 이 성 안에 몸을 숨기고 구차스레 살기를 원하지만 짐이 어찌 그대로 버려두겠는가. 짐의 나라 안팎의 여러 왕들과 신하들이 짐에게 황제의 칭호를 올렸다는 말을 듣고, 네가 이런 말을 우리나라 군신이 어찌 차마 들을 수 있겠느냐고 말한 것은 무엇 때문이냐. 대저 황제를 칭함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은 너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이 도우면 필부라도 천자가 될 수 있고, 하늘이 재앙을 내리면 천자라도 외로운 필부가 될 것이다. 그러니 네가 그런 말을 한 것은 방자하고 망령된 것이다. 이제 짐이 大軍을 이끌고 와서 너희 팔도를 소탕할 것인데, 너희가 아버지로 섬기는 명나라가 장차 너희를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를 두고볼 것이다. 자식의 위급함이 경각에 달렸는데, 부모된 자가 어찌 구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네가 스스로 무고한 백성들을 물불 속으로 몰아넣은 것이니, 억조중생들이 어찌 너를 탓하지 않으랴. 네가 할 말이 있거든 서슴지 말고 분명하게 고하라. 崇德 2년 정월2일 조선왕조실록 仁祖 15년 1월2일(임인) 條 홍서봉·김신국·이경직 등을 오랑캐 진영에 파견하였다. 홍서봉 등이 한의 글을 받아 되돌아왔는데, 그 글에, “대청국(大淸國)의 관온 인성 황제(寬溫仁聖皇帝)는 조선(朝鮮)의 관리와 백성들에게 고유(誥諭)한다. 짐(朕)이 이번에 정벌하러 온 것은 원래 죽이기를 좋아하고 얻기를 탐해서가 아니다. 본래는 늘 서로 화친하려고 했는데, 그대 나라의 군신(君臣)이 먼저 불화의 단서를 야기시켰기 때문이다.짐은 그대 나라와 그 동안 털끝만큼도 원한 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다. 그대 나라가 기미년1366) 에 명나라와 서로 협력해서 군사를 일으켜 우리 나라를 해쳤다. 짐은 그래도 이웃 나라와 지내는 도리를 온전히 하려고 경솔하게 전쟁을 일으키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요동(遼東)을 얻고 난 뒤로 그대 나라가 다시 명나라를 도와 우리의 도망병들을 불러들여 명나라에 바치는가 하면 다시 저 사람들을 그대의 지역에 수용하여 양식을 주며 우리를 치려고 협력하여 모의하였다. 그래서 짐이 한 번 크게 노여워하였으니, 정묘년1367) 에 의로운 군사를 일으킨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때 그대 나라는 병력이 강하거나 장수가 용맹스러워 우리 군사를 물리칠 수 있는 형편이 못 되었다. 그러나 짐은 생민이 도탄에 빠진 것을 보고 끝내 교린(交隣)의 도를 생각하여 애석하게 여긴 나머지 우호를 돈독히 하고 돌아갔을 뿐이다. 그런데 그 뒤 10년 동안 그대 나라 군신은 우리를 배반하고 도망한 이들을 받아들여 명나라에 바치고, 명나라 장수가 투항해 오면 군사를 일으켜 길을 막고 끊었으며, 우리의 구원병이 저들에게 갈 때에도 그대 나라의 군사가 대적하였으니, 이는 군사를 동원하게 된 단서가 또 그대 나라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명나라가 우리를 침략하기 위해 배[船]를 요구했을 때는 그대 나라가 즉시 넘겨 주면서도 짐이 배를 요구하며 명나라를 정벌하려 할 때는 번번이 인색하게 굴면서 기꺼이 내어주지 않았으니, 이는 특별히 명나라를 도와 우리를 해치려고 도모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 사신이 왕을 만나지 못하게 하여 국서(國書)를 마침내 못보게 하였다. 그런데 짐의 사신이 우연히 그대 국왕이 평안도 관찰사에게 준 밀서(密書)를 얻었는데, 거기에 ‘정묘년 변란 때에는 임시로 속박됨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정의에 입각해 결단을 내렸으니 관문(關門)을 닫고 방비책을 가다듬을 것이며 여러 고을에 효유하여 충의로운 인사들이 각기 책략(策略)을 다하게 하라.’고 하였으며, 기타 내용은 모두 세기가 어렵다. 짐이 이 때문에 특별히 의병을 일으켰는데, 그대들이 도탄에 빠지는 것은 실로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단지 그대 나라의 군신이 스스로 너희 무리에게 재앙을 만나게 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대들은 집에서 편히 생업을 즐길 것이요, 망령되게 스스로 도망하다가 우리 군사에게 해를 당하는 일이 일체 없도록 하라. 항거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고 순종하는 자는 반드시 받아들일 것이며 도망하는 자는 반드시 사로잡고 성 안이나 초야에서 마음을 기울여 귀순하는 자는 조금도 침해하지 않고 반드시 정중하게 대우할 것이다. 이를 그대 무리에게 유시하여 모두 알도록 하는 바이다.”하였다. 상이 즉시 대신 이하를 인견하고 이르기를,“앞으로의 계책을 어떻게 세워야 하겠는가?”하니, 홍서봉이 대답하기를,“저들이 이미 조유(詔諭)란 글자를 사용한 이상 회답을 하지 말아야 하겠지만 한(漢)나라 때에도 묵특의 편지에 회답하였으니, 오늘날에도 회답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하고, 김류가 아뢰기를,“회답하지 않을 수 없으니 신하들에게 널리 물어 처리하소서.”하였다. 상이 각자 마음속의 생각을 진달하게 하였으나 모두 머뭇거리기만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신의 뜻은 영의정·좌의정과 다름이 없습니다.”하고, 김상헌이 아뢰기를,“지금 사죄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그 노여움을 풀겠습니까. 끝내는 반드시 따르기 어려운 요청을 해 올 것입니다. 적서(賊書)를 삼군(三軍)에 반포해 보여주어 사기를 격려시키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하고, 최명길이 아뢰기를,“한이 일단 나온 이상 대적하기가 더욱 어려운데, 대적할 경우 반드시 망하고 말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성첩(城堞)을 굳게 지키면서 속히 회답해야 할 것이다.”하였다. 김상헌은 답서의 방식을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다고 하면서 끝까지 극력 간하였는데, 최명길은 답서에 조선 국왕(朝鮮國王)이라고 칭하기를 청하고 홍서봉은 저쪽을 제형(帝兄)이라고 부르기를 청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지금이야말로 존망(存亡)이 달려 있는 위급한 때이다. 위로 종묘 사직이 있고 아래로 백성이 있으니 고담(高談)이나 하다가 기회를 잃지 않도록 하라. 예판은 여전히 고집만 부리지 말라.”하니, 김상헌이 아뢰기를,“이렇게 위급한 때를 당하여 신이 또한 무슨 마음으로 한갓 고담이나 하면서 존망을 돌아보지 않겠습니까. 신은 저 적의 뜻이 거짓으로 꾸미는 겉치레의 문자에 있지 않고 마침내는 반드시 따르기 어려운 말을 해올까 두렵습니다.”하였다. 이성구(李聖求)가 장유(張維)·최명길·이식(李植)으로 하여금 답서를 작성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당시 비국 당상이 왕복하는 글을 소매에다 넣고 출납하였으므로 승지와 사관도 볼 수 없었다 청 초기의 정규군은 팔기병(八旗兵)과 녹영병(綠營兵)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주력은 역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팔기병이었습니다. 팔기병은 청나라가 입관하기 전부터 존재한 부족군(部族軍)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청 건국에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팔기의 기원은 여진족의 부락 자체의 전투체제라고 할 수 있는 구루(牛錄)에 토대를 둔 것으로 구루의 구성원은 15세에서 60세의 남자로 통상적으로 인정(人丁)내지는 장정(壯丁)이라 불리며, 평상시에는 각 호에 흩어져서 일상생활을 하다가 시기가 되면 훈련이나 전투에 참전하는 병농일치제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각 기는 그 정착지역에서 농업과 수공업 분야에 종사하면서 식량에서 병기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기의 능력으로 갖추어야 했습니다. 팔기병은 처음에는 4개의 기로 시작하였는데, 각 구루는 황(黃), 백(白), 홍(紅), 남(藍)의 4개의 기(旗)로 각 구루를 구분하여 관할하다가 1615년 팔기로 확대하면서 팔기체제를 갖추었습니다. 그 후 1636년 칭제하면서 국호를 청이라 하여 개국한 후에는 몽고팔기와 한군팔기(漢軍八旗)가 증설되었는데, 먼저 한군팔기는 만주팔기 각 구루에서 한인(漢人)을 10정 중 1정을 추출하여 한군일기(漢軍一期)로 편성하였다가 1637년에는 둘로 나뉘었고, 다시 1939년에는 4기로 확대되었으며, 1642년에 다시 4개의 기가 추가되어 팔기가 되었습니다. 만주팔기역시 1634년에 만주팔기에서 몽고인을 뽑아서 2개의 기를 편성하여 이를 기초로 하여 몽고팔기로 확대, 편성하였습니다. 이렇게 만(滿), 한(漢), 몽(蒙) 각 8기로 모두 24기 약 15만명의 병력을 확보하였는데, 이 숫치는 당시 청나라의 총 병력이 약 80만명이었으므로, 24기의 병력이 차지하는 비율은 총 18%를 해당되었습니다. 팔기병의 기본적인 편제는 삼급편제로 구루를 기초로 하여 기(旗, 이를 固山이라고도 함)를 단위로 한 것으로 1기의 정원은 7,500명이었고, 갑라(甲喇) 5개가 모여 1기를 이루었습니다. 갑라는 중간 기구로 상하를 연결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1개의 갑라는 300여명으로 여개의 구루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았으며, 사실상 매 기는 갑라의 수에 따라서 가변적이었고, 항상 오갑라(五甲喇)로 고정된 것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팔기병의 병종에는 친군(親軍), 효기(驍旗), 전봉(前鋒), 호군(護軍), 보병(步兵) 등 5종(種)의 병종이 었었고, 예비병으로서는 양육병(養育兵)이 있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청군은 입관 전에는 592개의 구루가 있었는데 그 중 만팔기가 310개로 매 구루 당 300명을 유지하고 있었고, 몽팔기는 118개와 한팔기는 164개로 매 구루에 균등하게 200명을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만, 몽, 한 각 팔기의 병력은 만팔기 9만 3천명, 몽팔기 2만 3천명, 한팔기 3만 2천명 등 모두 14만 8천 6백명이었지만, 실제로 작전에 동원된 병력은 대체로 14~15만명 정도였습니다. 입관 후에는 팔기병에 녹영병이 증설되면서 청 나라의 군제는 양군을 기본으로 하여 팔기병을 주력으로, 녹영병을 보조로 한 체제를 유지하였습니다. 팔기군의 지휘계통 및 조직 ● 팔기도통아문(八旗都統衙門) 팔기군의 최고 지휘기구. 팔기의 모든 군사적 행정 뿐만 아니라 호적 및 민사부분까지 총괄 관리 ● 친군영(親軍營) 영시위대신이 지휘하는 귀시위처(歸侍衛處) 소속의 금위부대. 병력은 양황기, 정황기, 정백기로 이루어진 상삼기(上三旗) 675명과 정홍기, 양홍기, 양백기, 정남기, 양남기로 이루어진 하오기(下五旗) 1058명으로 편성. ● 효기영(驍旗營) 마갑(馬甲)의 전신으로 만(滿),몽(蒙), 한(漢) 마갑은 모두 28,000명 정도. 주방외지(駐防外地)의 효기영은 만, 몽, 한의 혼합편성으로 팔기도통과는 별도의 지휘계통하에 있었다. ● 전봉영(前鋒營) 만(滿), 몽기(蒙旗)의 정예병을 선발하여 조직한 금위군. 좌, 우의 2익(翼)으로 편성되었고, 각 익은 전봉통령(정2품)이 지휘. 좌익은 양황, 정백, 양백, 정남으로 구성되었고, 우익은 정황, 정홍, 양홍, 양남으로 구성됨. 전봉영 중 1/2 은 조총으로 무장한 조창전봉(鳥槍前鋒)이었음. ● 호군영(護軍營) 만(滿),몽(蒙) 팔기군 가운데 정예병으로 구성된 금위군 평상시에는 궁전문호(宮殿門戶)를 수비하면서 출입을 관리하였고, 황제가 순행할 때에는 행렬을 호위함. 총 병력은 15,000명 정도. 상삼기의 병력은 자금성 내부를 수비하고, 하오기의 병력은 성 외부를 수비함. ● 원명원호군영(圓明園護軍營) 원명원팔기내무부삼기호군영의 약칭. 원명원의 팔기호군영과 내무부의 삼기호군영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것. 병력은 경성팔기호군에서 충원하였으며, 호군, 마갑 및 양육병을 통합하여 5,700명 정도이며, 내무부삼기호군영 300여 명을 더하여 총병력은 6,000여명. ● 보군영(步軍營) 보군통령아문(步軍統領衙門)의 약칭으로 팔기병 중의 보병과 경성녹영병(京城綠營兵) 중에 마보병(마보병, 순포오영으로 나뉘었음) 등 2개의 부분으로 구성. 팔기보군의 병력은 만, 몽, 한기 총 63,000명 가량. 주요한 임무는 경성의 수비, 순찰, 출입통제, 범인체포등의 치안관계와 관련한 일체의 임무를 수행함. ● 화기영(火旗營) 조총 및 자모창 등의 화기를 갖춘 부대로 1691년 만, 몽 팔기에서 선발된 조창호군 6명과 포갑(砲甲) 1명으로 조직되었음. 편성은 성내에는 내화기영을 중심으로 창, 포 두 종류의 부대로 조직되었고, 성 외에는 외화기영을 중심으로 조창(조총)만을 전적으로 사용하는 부대로 이루어짐. 병력은 내외화기영은 조창호군 5,200명, 포갑 880명, 양육병 1,650명 등 총 7,800여명. ● 건요영(健饒營) 전봉영과 호군영의 병력 중에서 정예병 1,000명을 선발하여 1749년에 설립. 병력은 몇 차례 증가되었으나, 광서연간 때에는 만, 몽 전봉 2,000명, 위전병 1,000명, 양육병 833명으로 규정. ● 신기영(神機營) 신기영은 1861년 영,독일연합군의 공격을 겪은 다음 경성에 대한 방어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설치됨. 영의 편성은 좌익, 우익, 중익의 3제대로 이루어졌으며, 14,000명을 정원으로 함 위것은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소장의 팔기군 갑주 아랜 관온인성황제의 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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