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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간지 연산군(3)

지랄 2006.12.09 20:41:05
조회 437 추천 0 댓글 1


연산군은 1498년 훈구파의 부추김을 받아 평소걸림돌이 되었던 사림파를 무오사화로 한 차례 제거함으로써 외척과 훈구세력들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 세력을 약화시켰다.   이 사화로 정치적 우세를 더욱 확고히 굳힌 훈구파는 연산군을 이용하여정치적, 경제적 기반을 닦아나가는 등 권귀화의 경향을 현저하게보였다. 그런데 연산군은 외척 중심의 궁중 세력을 새로이 등장시켜 이번에는 훈구파의 경제 기반을 탈취하기 위하여 1504년 갑자사화를 일으켰다. 이때 사림파도 피해를 보게 되었다. 연산군이 훈구파의 경제적기반을 위협했던 것은 왕권에 대한 불안을 느껴서인지도 모른다. 물론 갑자사화가 크게 확대된 것은, 연산군이 자기 생모가 폐비가 되고 사약을 받았다는 데에 감정적으로 격화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는 왕실을 위협해오는 훈구파와 새롭게 부상하는 신진 세력인 사림파를 동시에 제거하자는 의도도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두 차례의 사화가 거듭되는 동안에 연산군의 학정은 걷잡을 수 없이 심화되었다. {연산군일기} 등에 나오는 그의 폭정에 대한 예를 몇가지 들면 다음과 같다.   연산군은 우선 자신의 실정에 대해 간언하는 것을 싫어하여 비위가 상하면 죽여버리거나 관직 박탈, 또는 유배를 보냈다. 뒤에서 보게되겠지만, 중종반정을 일으킨 대부분의 핵심 인물들이 연산군에게 건의를 하다가 미움을 받아 피해를 입은 자들이었다.   또한 그는 경연과 대제학 제도를 폐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창덕궁과 담을 사이에 두고 있는 성균관을 자신의 놀이터로 만들어 버렸고, 장악원을 개칭한 연방원을 원각사에 두어 거기를 기생들의 모임 장소로 지정하였다. 이뿐 아니라 전국에 채청.채홍사를 보내어 미녀를 선발(이를 운평이라 하였다.), 그중에서 뽑힌 기녀를 흥청이라 하여 300명을 궁중에 기거시키면서 쾌락의 대상으로 삼았다.   또한 연산군은 매우 사냥을 즐겨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는 사냥을 즐기기 위하여 도성 밖 30리의 민가를 철거하는 폭정을 휘둘러 점차 민심을잃어갔다. 이러한 연산군의 병적인 행동을 비방하는 한글 투서 등이 사방에서 날아들었다. 그러자 연산군은 언문 때문에 왕을 욕하게 된 것이라고 격분하면서 {언문구결} 등 한글 관계 서적 등을불태우면서 한글 사용을 금지하였다. 연산군의 사치와 방탕은 극에 달하여 심지어는 내연에 나온 사대부의 부녀자를 농락하는 추태까지 부렸다. 이러한 지경이라면 올바른 정치를 바란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일이었다. 정치는 거의 왕의 손을 떠나 내시 김자원에게 맡겨진 상태라고 할 정도로 심각한 사태에 이르렀다.   이러한 연산군의 학정은 혼자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왕이 아무리 폭정이나 학정을 일삼아도 그 배후에는 이를 방관하거나 조종하는 무리가 있기 마련이다. 그들이 바로 신수근을 중심으로 한 외척들이었다. 여기서 당시 왕실을 둘러싸고 궁중파, 훈구파, 사림파 등 세 파로 갈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사림파의 경우 중앙에서 거의 밀려나 있는 상태라 그 힘은 미약하였지만 언제든지 다시 중앙에 진출하여 왕도정치를 구현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사림파는 연산군을 폐위시킬 계획을 갖고 있었으나 정치적, 군사적 기반이 미약하여 이를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따라서 이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세력은 훈구파 뿐이었다.   중종반정을 일으킨 핵심 인물들과 상황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부사용 성희안과 지중추부사 박원종 등은 당시 인망이 높던 이조판서 유순정의 호응을 얻고, 연산군의 신임을 받고 있던 신윤무,박문영, 장정 등의 지지를 받아 1506년 9월 연산군이 장단의 석벽으로 유람하는 기회를 노려 반정을 일으키려고 하였다. 그런데 돌연 연산군이 행차를 취소하는 바람에 거사도 중지될 위기에 처하였다. 이때 전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유빈, 이과 등이 거사를 일으킨다는 격문이 서울에 전해지자 서둘러 예정대로 무사들을 훈련원에 모으고 먼저 진성대군에게 거사를 알리는 한편, 신수근, 수영 형제와 임사홍 등을 죽임으로써 반정을 시도하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들이 순전히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국가 기강을 바로잡으려는 순수한 의미에서 반정을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반정을 주도한 인물 대부분이 연산군에게 피해를 본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권력에서 소외된 자들이 다시 중앙 진출을 노린 쿠데타가 아니었는가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반정에 참여한 주요 인물들이 당시 처해 있던 상황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우선 반정을 맨앞에서 이끈 성희안에 대해서 알아보자. 성희안은 연산군의 아버지인 성종이 많은 자문을 구할 정도로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종사관이나 형조참판의 자리를 거쳐 1504년에 이조참판에 올랐다. 그런데 연산군이 망원정이라는 곳에서 연회를 즐기고 있을 때 평소 연산군의 방탕적인 생활에 불만을 갖고 있던 성희안은 분을 못이겨 풍자적이고 훈계적인 시를 지어 올렸다. 이에 연산군의 미움을 사서 무관의 말단직인 부사용이라는 관직으로 좌천되었다. 부사용은 종9품에 해당되는 무직이었다. 사실 이때를 전후하여 연산군의 폭정과 타락은 날로 더해가 민심이 흉흉해지는 등 정치적인 불안이 감돌고 있었다. 이에 그는 박원종과 모의하고 당시 명망가로 알려져 있던 유순종을 끌어들이는 한편, 신윤무, 박영문, 홍경주 등에게 군대를 동원시켜 진성대군을 옹립,반정을 일으켰던 것이다.   성희안이 제일 먼저 모의를 나눈 대상은 박원종이었다. 박원종은 원래 연산군이 신임하던 인물이었다. 그는 연산군의 특명으로 동부승지, 좌승지 등을 거치면서 주로 재정 문제에 대해 왕에게 간언하였다. 그러나 결국 옳은 말을 하다가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1500년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좌천되기도 했다. 그후 다시 여러 관직을 거치다가 1506년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이때 다시 연산군의 미움을 사 파직당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성희안과 쉽게 뜻을 같이할 수 있다. 거사를 앞두고 박원종 등은 신수근을 찾아간 적이 있다. 신수근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연산군비 신씨의 오빠로서, 임사홍과 결탁하여 갑자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그는 외척이라는 특혜를 입어 좌의정의 자리에 올라 있었다. 박원종 등이 그를 찾아간 것은 순전히 마음을 떠보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옹립하려는 진성대군은 바로 신수근의 사위였던 것이다. 그들은 신수근에게 누이와 딸 중 누구를 더 중히 여기느냐고 눈치채지 못하게 돌려서 물었다. 그러자 신수근은 화를 벌떡 내며 비록 지금 임금이 포악하지만 세자가 총명하니 그를 믿고 살면 된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박원종 등은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고 판단, 만일을 위해 반정을 일으킨 후 제일 먼저 신윤무 등을 시켜 수각교에서 신수근을 살해하였다. 또한 그의 아우인 신수겸, 수영도 제거되었으며, 임사홍은 아버지와 함께 살해당하였다.   당시 인망이 높은 인물이었다고 평가받고 있는 유순정은 <조의제문>을 쓴김종직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은 인물이었다. 그는 활을 잘 쏘아서 무인 중에서도 그를 따를 자가 별로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문무를 겸비한 탓에 그는 전라도 지방에 침투한 왜구 토벌작전에도 참여하였으며 이시애의 반란때 공을 세운 허종의 막료가 되어 평안도평사를 지낸 적도 있다. 연산군이 즉위한 해에 사헌부헌납이라는 자리에 오르게 되었는데 그는 이때 임사홍의잔악한 행동을 비난하기도 했다. 그는 여진족 정벌에 참가하였으며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온 후 평안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연산군이 평안도 지역에 밤사냥을 간다고 하였다. 그러자 유순정은 밤사냥은 위험하다는 말을 하며 이를 반대하였다. 그러자 임사홍이 이를 빌미삼아 그를 곤란한 지경에 빠뜨리기도 하였다. 앞서 그가 임사홍을 비난한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이 일로 유순정은 연산군에 대해 불만을 갖게 되었고 성희안과 박원종의 뜻을 받아들여 급기야는 중종반정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언제 자신도 궁중 세력에게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작용했을것이다.   중종반정에 참여한 무신들 가운데 선두에 서서 활동한 인물은 신윤무였다. 그는 연산군 때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고 군자시부정에 오를 정도로 연산군의 총애를 받았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연산군의 폭정에 점차 불만을 갖게 되어 궁중 사정 등 내외 동향을 성희안, 박원종 등에게 자세히 알려주어 중종반정이 일어날 수 있는 기본 여건을 만들어주었다. 반정이 있던 날 신윤무는 임사홍, 신수근, 신수영 등을 죽이는 등 거사에 앞장섰다.   장정 역시 무신이었다. 그는 대마도치위관, 하동군수 등 여러 내외직을 거친 후 1504년 창성부사가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그는 연산군의 총애를 받던 장녹수가 부당한 방법으로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은 사실을 알고 다시농토를 원래의 주인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이 일로 파직당하고 말았다. 장정은 연산군의 학정이 극에 달하자 반정에 가담하여 군대를 동원하는 책임을 맡았다. 거사중에는 진성대군의 사저를 호위하였다.   전라도의 유배지에서 거사격문을 보낸 인물은 이과와 유빈이었다. 우선 이과는 1503년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을 때 연산군이 후원에서 활을 쏘며 노는 것을 논한 것이 화근이 되어 갑자사화 때 전라도로 귀양갔다. 1506년 유배지에서 유빈, 김준손 등과 같이 군사를 일으켜 진성대군을 추대하려고 모의하였으나 서울에서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이를 중지하였다고 한다. 유빈은 함경도절제사를 지내고 형조참판까지 올랐으나 갑자사화 때 모함에 걸려 전라도로 유배당한 인물이었다.   이렇게 봤을 때 반정에 직접 참여했거나 거사를 계획한 인물들은 연산군과 그를 비호하는 궁중파로 인해 정도의 차이만 있지, 모두 피해를 입은 자들이었다. 물론 내건 명분은 연산군의 학정을 바로잡는 데 있었지만 이들은 정치를 개혁하거나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반정을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조광조가 등장한 이후 다시 재개된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의 정쟁을 살펴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정변에 성공한 성희안 등은 성종의 계비이며 진성대군의 친어머니인 대비를 경복궁에서 찾아가 만나 연산군을 폐하고 강화교동에 안치시켜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내었다. 그리고 이ㅌ날인 9월 2일에 경복궁 근정전에서 진성대군을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이가 바로 조선 11대 왕인 중종이다. 진성대군이 왕위에 오름으로써 반정은 일단락되었지만 앞서 본 바와 같이 거사 주동 인물들이 연산군 때 일정한 관직과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던 훈구 세력들이기 때문에 다시 정권은 훈구파에게 넘어간 결과가 되고말았다. 이것은 사림파와의 갈등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중종반정의 의미와 {연산군일기}   중종반정으로 크게 달라진 것은 연산군이 폐위되고 정상적인 왕권이 어느정도 회복되었다는 것 뿐이다. 훈구파의 재집권으로 말미암아 이전부터 문제되어온 정치 체제의 모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은 기대하기 어려워졌으며, 이에 따라 사림파가 재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중종반정은 기득권 상실의 위기에 처한 훈구파들이 정권을 재장악하기 위해 일으킨 쿠데타였다고 볼 수 있다.   객관적으로 봐서 중종반정 자체는 커다란 역사적인 변혁을 가져온 혁명은 아니었다. 중종반정의 역사적 자리매김은 반정 이후의 상황을 검토해본 후에야 가능하다.   여기서 연산군이 폭군이었다는 것은 그리 중요한 의미를 갖지 않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반정의 구실이었다. 흔히 쿠데타 세력은 자신들의 거사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앞선 왕을 격하시키기 마련이다. 따라서 연산군도 어느 정도로 폭군이었는지 그 실체는 사실상 알수 없다. 다만 당시 살았던 여러 인물들의 행적을 추격해 볼 때 연산군이 문제가 많은 왕이었음은 사실이라고 보지만 <연산군일기>에 나타나 있는모든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연산군의 학정과 폭정을 말할 때 가장 핵심이 되는 자료로 거론되는 것은 역시 <연산군일기>일 것이다. 그런데 이 일기가 완성되기까지 상황을 보면 중종반정에 대해 다른 각도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시각을 갖게 된다.   <연산군일기> 편찬은 중종이 즉위한 직후인 1506년 11월에 시작하여 1509년 9월에 완성되었다. 이 일기가 완성되기까지에는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다.   우선 편찬관 임명을 둘러싸고 처음에 임명된 자들이 연산군의 총애를 받던 인물들이라고 해서 곧 교체되어 편찬 책임자에는 중종반정을 주도했던 성희안이 임명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편찬자들도 대폭 개편되었다. 그러나 <연산군일기> 편찬의 어려움이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연산군 때 사관이 왕과 대신들의 회의나 경연에 참석하지 못하는 예가 허다했다. 따라서 사관의 기록에 대해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또한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이라는 사초가 발단이 되어 일어난 무오사화 때문에 사관들이 해를 입을까봐 사초를 제출하기를 두려워했으며, 편찬자들도 후환이 무서워 그 직을 회피하는 사례가 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완성된 것이 <연산군일기>였다.   따라서 <연산군일기> 편찬에 참조할 자료들이 매우 희귀했다는 뜻이다. 사론 역시 다른 실록에 비해 매우 적어 25개 정도만이 실려 있다는 점만 봐도 이 일기가 얼마나 부실하게 만들어졌는가를 알 수 있다. 구체적으로 그 내용을 보면, 연산군 4년 이전에는 주로 대간들의 상소가 그 주류를 이루고 있고 갑자사화 이후 10년까지는 대간의 상소와 왕의 전교가 각각 반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말년까지는 주로 무오, 갑자사화에 관련된 내용과 연산군의 학정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물론 연산군의 시문과 이에 화답하는 신하들의 시도 실려 있기는 하지만 명나라나 여진족등 대외 관계에 대해서는 그 기록이 부실한 편이다.   <연산군일기>의 편찬 과정과 그 내용을 살피는 것이 그가 후세에 의해 조작된 폭군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단지 그를 평가할 수 있는 역사적 자료가 매우 제한되어 있으며 따라서 중종반정 자체에 대한 판단도 그만큼 힘들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즉 중종반정에 대한 평가를 내릴 때 중요한 것은, 연산군이 폭군이기 때문에 이를 폐위시키기 위해 반정이 일어났다고 평면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그 이면에 어떠한 정치적 흐름이 있었는가를 정확히 읽어내야 한다는 점이다.   연산군에 대한 객관적 자료가 부실한 상황에서 연산군 당시의 정치 동향을 정확히 읽는 것이 힘들다면 그 초점을 중종반정 이후로돌려야한다는 뜻이며, 그렇기 때문에 중종반정이 폭군인 연산군을 몰아냈다는 점만 가지고 그 역사적 의미를 함부로 상승시켜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왜 왜 왜? 연산군은 조선 최고의 폭군으로 기록되었을까? 유교사상을 가진 조선이란 나라에서 연산군은 철저한 유교의 배반자 였다는 것은 사실이다 조선 사대부의 정신과 사상을 한껏 조롱하다가 폐위 되었던 연산군.. 과연 미친놈일까? 유교의 정신 그리고 행동까지도 철저히 농락한 조선 최고의 이단아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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