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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담 19. 뒤늦은.모바일에서 작성

ㅇㅇ(1.247) 2019.04.07 21:08:04
조회 493 추천 5 댓글 0


19. 뒤늦은.

"하나, 이거 뭐야?"
마리가 뭔가를 내민다. 종이?
"응, 소파 밑에 떨어져 있었어. 난 못 읽어. 네 건가봐."

종이.
아..  서진의 메모.
언젠가 서진과 로빈, 서로 잘 알아야 한다며 질문지를 만든 적이 있었다. 서진이 전해준 질문지. 어디 책 사이에라도 끼워져 있다가 떨어진 건가..

좋아하는 영화는?
가 보고 싶은 나라는?
좋아하는 음식은?

떠 오른다. 로빈과 침대에 누워 리스트를 하나씩 읽어내려가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시간. 로빈은 미처 알지 못했던 서진의 모습에 신기해 했고, 하나는 솔직하고 담백한 서진의 답에, 먹먹했었다.
편안하고 따뜻했던 기억. 가슴이 저린다. 다시는 오지 않을 시간. 늘 다정하고 부드러웠던 사람. 그의 눈웃음, 소소했던 장난. 그 앞에서는 씩씩한 하나도 장난스러운 애교쟁이가 되곤 했다.
눈물이.. 흐른다.
로빈의 따스함이 좋았다. 지금도 여전히 미치도록 그립다. 그 품에 안겨 응석을 부리고 싶다.
하지만.. 서툴게 다가오던 서진을 생각하면, 마음이 서걱거린다. 그의 말 한 마디, 눈빛 하나. 얼마나 많은 망설임 끝에 나온 것인지 충분히 전해지던.

천천히 읽어 내려간다.
꼼꼼한 답들. 서진의 성격 그대로다. 미간을 찌푸리며 답을 고심했을 그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 하다.  
종이를 가득 채운 정갈한 글씨는 늘 차갑도록 반듯했던 그를 떠올리게 한다.


좋아하는 음식? 담백한 한식 종류는 가리지 않고 좋아함.
\'그래, 떡볶이도 안 좋아하고.. 주전부리 하는 것도 한 번도 못 봤네, 맞아..\'
좋아하는 커피 스타일? 카페인이 들어간 것은 안 마심
\'아하, 맞아 디톡스 음료 같은 것만 드시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걸론 안 보이던데..\'
이번 주말에 하고 싶은 것은? 영화관에 가기.
\'응? 영화관에 가고싶어 했구나. 영화관.. \'
갑자기 하나의 마음이 툭, 떨어진다. 혼자 영화를 보고 싶다고 적은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나에게  같이 가자,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결국 영화관에는 가지 못했다.
하나는 매일 로빈과 시상식에 갔던 일, 쇼핑했던 일, 재잘재잘 떠들곤 했는데.. 그는 늘 미소를 지으며 하나의 이야기에 귀기울여 주었을 뿐, 영화관에 가고 싶다는 그 작은 바람조차 하나에게 욕심낸 적이 없었다.

그제야 알게 되었다. 늘 문 밖에 서 있던 서진의 모습을.
어둠이 내리고 로빈의 시간이 찾아오면, 로빈과 행복해하는 나를 위해, 차마 그 문을 열지 못하고 내내 기다려주었던 그의 마음을.
하나 자신 말고는 자기 것을 한 가지도 가지지 못한 로빈에 대한 애틋함 때문에 서진의 마음을 외면했던 것을.
그를 늘 어둠 속, 문 밖에 세워둔 것은 하나, 자신이었다는 것을.

그런데도 원망이 하나도 담기지 않은 담담하고 정갈한 글씨가..너무도 쓸쓸해 보였다.



\'이건 뭐지?\'
자료를 찾다가 발견한 종이.
\'아,질문지..\'
하나의 제안으로 적어내려갔던..
좋아하는 음식.
해보고 싶은 일.
다른 직업을 택한다면.
스트레스 푸는 법.

하나와 함께 읽어내려가며 보냈던 시간. 하나는 함께, 재미있어하고 뿌듯해했었다. 기억난다. 편안한 일상. 누군가 함께 있다는 포근함. 뭉클했던 기억.
잠들 때 듣는 음악은.
좋아하는 색은.

그러다 서진은 문득 생각한다.

늘 나란 사람의 문제에 골몰하느라 하나에 대해선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
어떤 꽃을 좋아하는지,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지,
어떤 영화를 좋아하는지..
갓 어버지를 여의고 한국으로 돌아왔던 그녀가  나란 사람의 인생에 휘말려,  어떤 심정으로 지냈는지 제대로 헤아려본 적이 없다.
그녀는 나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속속들이 알아주고
공감해주고,
함께 아파해주고
나를 위해 울어주었는데,

정작 내 상처만 보고
그녀의 사랑만을 욕심냈을 뿐
늘 제자리에서 나를 안아주는 그녀에 대해 나는,
제대로 알려고 해 본 적이 없다..

그 깨달음이 서진은 뼈저리게 아팠다.

그녀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잠드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녀가 좋아하는 꽃을 선물받고 기뻐하는 표정을 보고 싶다.
영화관에서 그녀가 좋아하는 영화를 보며 그 작은 손을 잡아보고 싶다..
이것도 너무 큰 욕심인걸까.
아니면 너무 늦어버린 욕심인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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