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비 100만원·주택담보대출 상환금 40만원·양가 부모님 용돈 40만원·경조사비 10만원 등이 부부 통장에 들어온다. 입금 비율은 아내와 남편 딱 절반씩이다. 월 40만원씩 넣는 공동 명의 적금은 남편이 든다. 대기업 다니는 김씨의 월급이 중소기업 디자이너인 이씨보다 많아서다. 이씨는 "서로 지고 있는 부담을 명확히 해야 가사나 육아에서 한 사람이 독박 쓰는 걸 막을 수 있다고 믿는다"며 "부부라고 서로 모든 것을 공유하고 소유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월급에서 부부 통장에 입금한 금액을 제하고 남은 돈은 각자가 알아서 쓴다. 장모님 용돈을 더 주든, 후배 밥을 사주든, 옷을 사든 서로의 지출에 토 달지 않는 것이 원칙. 휴대전화 요금까지 철저히 각자 몫이다. 김씨는 "인간은 계산적인 동물이라고, 솔직히 돈 관리를 합해서 했다면 월급이 더 많다는 이유로 가사일에 소홀하지 않았을까 싶다"며 "부부 사이를 그렇게 자로 재서 되겠느냐는 어른들 말 때문에 걱정이 많았지만, 오히려 계산해서 서로 할 일을 명확히 하니 마음이 더 편하다"고 했다.

남자가 밥을 사면 여자가 술을 산다. 1만원이라도 빌린 돈은 반드시 갚는다. 여행 경비는 각자 낸다. 연인 얘기가 아니다. 부부더라도 계산은 정확히 하자는 이른바 '더치페이 부부'다. 신혼부터 중장년, 홑벌이부터 맞벌이까지 각자의 돈은 각자가 관리한다는 '더치페이 부부'들의 이야기를 friday가 들여다봤다.

부부 10쌍 중 2쌍 "수입 일부만 합하거나 아예 각자 관리"

"결혼은 디저트다."

미국 역사학자 스테파니 쿤츠는 저서 '진화하는 결혼'에서 현대 결혼 제도를 이렇게 평했다. 과거에는 결혼이 경제적, 가정적 자립이 불가능했던 남녀의 '필수 메뉴'였지만, 혼자 살아도 충분한 현대인들에게는 '디저트'일 뿐이라는 것이다.

디저트는 먹고 싶으면 골라 먹고, 먹기 싫으면 건너뛰어도 되는 것. 결혼이 '필수'에서 '선택'이 되는 순간 부부 관계도 달라진다. 쿤츠는 부부 관계가 불완전한 남녀가 모든 것을 공유하며 서로 '종속'되는 관계에서 자립이 가능한 두 주체의 '조력' 관계로 변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그 증거는 바로 돈. 여성가족부가 지난 3월 발표한 '2016년 양성평등 실태조사'에서 전국의 부부 4884쌍을 대상으로 한 설문 결과에 따르면, 부부 10쌍 중 2쌍(18.2%)이 각각의 수입 중 일부를 합하고 나머지는 각자 관리하거나, 아예 수입을 각자 관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맞벌이 부부의 각자 돈 관리 비중은 더 높았다. 맞벌이 2385쌍을 대상으로 한 설문 결과에 따르면, 평균 10쌍 중 3쌍(31.6%)이 각각의 수입 중 일부를 합하고 나머지는 각자 관리하거나, 아예 수입을 각자 관리하고 있었다.

'집안의 돈은 한 사람이 관리해야 한다'는 공식이 깨지고 있다. 대신 결혼 생활에 필요한 비용을 남녀가 각자 내는 '더치페이 부부'가 자산 관리 트렌드로 떠올랐다. 결혼이 '필수 메뉴'에서 '디저트'로 바뀌며 등장한 새로운 부부 공식을 살펴봤다.

사랑과 전쟁(錢爭)… 답은 '더치페이'

서울 은평구에 사는 학원 강사 이희경(40)씨는 동갑내기 남편과 '비상금 전쟁'을 치르고 더치페이 부부가 됐다. 얼마 전 우연히 남편의 스마트폰에서 '비상금 통장으로 보냈으니 확인하라'는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게 된 것이다. 남편의 직장 동료가 술값 정산을 위해 보낸 메시지가 부부 싸움의 불씨를 댕겼다. "남편 앞에선 화를 냈지만 사실 이해는 가더라고요. 저도 종종 야근비를 남편에게 말하지 않고 쓴 적이 있거든요. 둘 다 마흔이 넘었는데 서로 카드 사용 내역을 까발리며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는 생활이 구차하게 느껴졌어요. 어차피 또 만들 비상금, 차라리 서로 생활에 필요한 돈만 칼같이 모으고 여가비나 노후 자금은 각자가 알아서 관리하는 게 낫겠다 싶더라고요."

전문가들은 더치페이 부부가 생겨난 핵심 원인을 여성의 경제적 지위 상승으로 꼽는다.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는 "과거와 달리 대부분 여성이 돈을 벌거나, 언제든 다시 돈을 벌 능력이 있다 보니 가정 내 지위가 높아졌다"며 "특히 자녀 수가 적어지며 부모로부터 유산을 물려받는 여성들이 많아진 것도 중요한 원인이다"고 했다.

맞벌이 부부만 더치페이 생활을 하는 건 아니다. 울산에 사는 결혼 8년 차 전업주부 우지영(31)씨는 2년 전 남편과 싸운 끝에 더치페이 부부가 됐다. 우씨가 고정적으로 버는 수입은 없지만, 남편에게 가사비와 육아비를 내라고 선언한 것이다. 덕분에 매달 50만원씩 자기 몫을 챙긴다. 우씨는 "3만원짜리 옷 하나를 사는데도 돈 관리를 하는 남편에게 허락 맡아야 하는 게 지긋지긋했다"며 "많은 돈은 아니지만 남편의 수입 중 일부는 내 몫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50만원을 '용돈'이 아니라 '월급'으로 여긴다"고 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전업주부의 하루 일과를 37개 항목으로 만들어 노동시간 대비 월급을 계산한 결과 8세 딸과 3세 아들을 키우는 37세 전업주부의 월급은 약 371만원이었다. 여성의 가사노동이 경제적 가치로 인정받으며 홑벌이 더치페이 부부도 생겨나는 것이다.

'황혼 이혼' 대신 '자산 이혼'

울산에 사는 최모(59)씨는 내년 초등학교 교장직을 퇴직하는 남편과 돈 관리를 각자 하기로 합의했다. 매달 나오는 연금과 자식들이 보내는 용돈에서 각종 세금과 생활비를 제하고 절반씩 나눠 쓰기로 했다. 최씨는 "클래식과 바둑이 인생 전부인 남편과 애초에 맞지 않는 사이였다"며 "30년 넘게 나는 집에서, 남편은 학교에서 인생을 보내며 그 격차가 더 커졌는데 부부라는 이유만으로 이제 와서 취향을 맞추는 건 어려운 일이다"고 했다.

프랑스의 미래학자 파비엔 구 보디망은 "평균수명이 늘어나며 결혼 제도도 송두리째 바뀌고 있다"고 했다. 현재 결혼 제도는 인간의 기대 수명이 50세일 때 정착된 것이기 때문에 50세가 넘은 중장년 부부들에게 지금의 결혼 시스템은 맞지 않는 옷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해 이혼한 부부 10만7300쌍 중 30.4%가 결혼 20년 차 이상 부부였다.

사사건건 인생을 공유하는 데 지친 노부부들은 돈 관리만 각자 하는 '더치페이 부부'로 살아간다. 여성가족부 설문 조사에 따르면 60세 이상 부부도 10쌍 중 1쌍 이상(12.0%)이 각각의 수입 중 일부를 합하고 나머지는 각자 관리하거나, 아예 각자 관리하고 있었다.

애초에 노후 생활을 각자 준비해야 한다는 인식도 커지고 있다. 여성가족부가 전국 남녀 7339명을 대상으로 노후 생활비 마련계획(중복 응답)을 설문한 결과에 따르면 '본인의 재산 저축 및 본인의 취업으로 노후 생활비를 마련할 계획'이라는 응답이 76.4%로 '배우자의 재산 저축이나 취업으로 노후를 준비하겠다'는 비율 19.9%보다 훨씬 높았다.

연애 때 더치페이, 결혼까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