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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00억 예산 지원 받았는데, 직원 채용은 사립학교 마음.jpg
https://youtu.be/Q8TK5g7ikcM?si=Pg4IVEiMuehqZffz 손 쉬운 사립학교 '세습 채용' 구조…절차·관리 허술 / KBS 2024.06.24.[KBS전북 뉴스7/6월 20일 : "이번에는 간부 교직원 아들을 채용한 사실이 확인되면서, 이른바 '세습 채용' 의혹까지 제기되고 있습니다."]전주 모 사립고등학교가 행정실장 아들을 채용하면서 불거진 이른바 '세습 채용' 의혹.그렇다면, 사립학교의 직원 채용 절차는 어떻게 진행되...youtu.be사립 학교 < 이번에 좀 다 때려잡아야 하는 거 아니냐..
작성자 : ㅇㅇ고정닉
한국전에서 귀환한 미군 참전용사들의 후일담
William Dewey Freeman(1928년 10월 3일 – 2022년 5월 27일)전쟁이 끝나고 알게 된 것인데, 내가 속했던 중대 인원 중 1951년 횡성 학살에서 생존한 사람은 나 포함 고작 7명이었다.내가 생존한 이유는 나도 모른다.수도 없이 내 자신에게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죽고 나는 어떻게 살았는가?’ 신의 도움 외에는 결론을 내지 못했다.당시 조지아의 내 고향사람들은 교회에서 나를 위해 무척 기도했다고 한다.난 신이 그 기도들에 응답했다고 생각한다.귀국해서 한 어르신이 그랬다. "자네는 날 모르지만 난 자네를 잘 알아. 자네가 한국에서 포로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우리는 일요일 아침과 저녁, 화요일 밤에 모두 모여 자네를 위해 기도 했었거든."http://www.koreanwar-educator.org/memoirs/freeman_william_d/index.htmDale Alfred Erickson(1931년 1월 7일 – 2022년 11월 26일)캠프 펜들톤에 도착하자 질병검사 후에 재입대를 할 거냐는 질문을 받았고 난 전쟁에서 충분히 군대를 경험했다고 생각했다.더 이상 폭력과 연관되고 싶지 않았다. 임시중대에서 기차표를 줬다. 1951년 12월 13일 미 해병대에서 제대 했고, 그때 난 스무 살이었다.기차역에는 아무도 없었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갔다. 집에 도착했지만 아무도 없었고 아무런 축하도 없었다. 내 형제를 비롯해서 친구들은 전쟁 이야기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마치 지난해에 여름캠프를 갔다온 기분이었다. 난 내 기억의 짐을 내려놓고 싶었으나 아무도 관심 없었다.더 큰 문제가 생겼다. 일주일 넘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신경이 예민했고 작은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랐다. 한밤중에 갑자기 심장 마비처럼 심장이 쿵쾅거리고 한국에서 전투하는 꿈을 꾼다.여러 직장을 전전했다. 1952년 난 미네소타-듀러스 대학에 등록해서 1년을 다녔다. 대학에 다닐 때 군 경력에 대해 아무한테도 말 안했다.다른 학생들과 섞이기 힘들었다. 그들과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밝지 못했다.http://www.koreanwar-educator.org/memoirs/erickson_dale/index.htmDavid Morris Williams(1932년 11월 17일 생)귀국명령을 받을 즈음 난 소대 전령을 하고 있었고 아마도 철의 삼각주 근처였을 것으로 기억한다. 전선의 마지막 밤은 정말로 신경이 예민했다.내가 처음 왔을 때 있었던 병사는 이제 몇 명 되지 않았다.난 전우들에게 행운을 빌며, 1951년 9월 초 한국을 떠났다. 계급은 상병. 샌프랜시스코(Golden Gate Bridge)의 금문교를 봤을 때 난 정말 감회에 젖었다.정말 집이구나 싶었다. 부모님과 형제자매들이 항구에 나와 나를 반겼다.어머니는 나를 보시고는 살짝 놀라셨다. 참전 기간동안 난 키가 5cm 넘게 더 자랐고 체중도 30파운드가 더 늘었다. 떠나기 전보다 조용한 사람이 되었고, 전쟁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누가 물어도 정확히 말해주지 않았다.한국전 경험은 날 정말 고착시켰고, 참전 이전에 비해 난 좀 더 거칠어졌다.한국전을 통해서 자기확신도 생겼지만, 남들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갖게 되었다.http://www.koreanwar-educator.org/memoirs/williams_dave/index.htmEldon L. "Ike" Stanley(1930년 9월 6일 – 2017년 9월 6일)한국이 날 변화시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완전히는 아니다.PTSD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찾아오곤 했다. 꽤 오래 갔다.난 텍사스 언저리로 가서 살기 시작했다. 나무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곳이다.한국을 잊기 위해 일부러 그런 곳에 자리 잡았고, 근처 모든 나무를 잘라 불태워버렸다. 민간인으로 돌아오는 건 어렵지 않았으나,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 난 이미 훈련된 킬러였다.한 직장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고 한 군데서 3-40년 일하는 사람이 될 수 없었다. 내가 인생에서 최고로 오래 일한 곳은 9년이다. 운송회사에서도 일했고 아서 머래이 스타일 (현대무용)의 스튜디오에서 무용교사도 1년 반 동안 했다. 거기서 여자를 하나 만났는데 당시 가톨릭 사회에서는 개신교와 결혼하는걸 멀리했었다.1953년 경에 반지와 모든 걸 준비해 청혼했으나 그녀는 반지를 돌려주며 거절했다. 이후 그 일을 그만 두고 6개월간 은둔했다.그 어떤 직업도 정착이 안 됐다. 오클라호마 시티의 댄스 스튜디오로 갔다. 거기서 로리타 로빈슨을 만나 결혼했고 장인을 위해 4년간 일했다.그 다음 정유회사에서 5년 동안 일했고, 이후 트럭회사에서 4년간 일했다.http://www.koreanwar-educator.org/memoirs/stanley_ike/index.htmHarold John Sydnam Jr.(1927년 7월 28일 – 2017년 3월 30일)민간인이 되었을 때 특별한 문제는 없었지만, 한 동안 배에 수류탄과 대검을 놓지 않으니 잠이 안 왔다.내 왼쪽 귀는 청력을 상실했었고, 1년이 지나고서야 부분적으로 돌아왔다.난 대학으로 돌아가 탄광 엔지니어링을 더 배우려고 했다.그러다 알래스카의 좋은 일자리를 얻었다. 패시픽 노던 항공 알래스카 지사였다.나의 해병대 총 근무기간은 4년 10개월 3일이었다. 알래스카에서 아내를 만나 1953년 결혼했다.1959년 항공사에서 퇴사하고 알래스카에서 주립경찰이 되었다. 주방위군으로도 참여해서 1979년에 중령 계급으로 알래스카 주방위군 부 작전관이 되었다.1983년에 은퇴해 캐나다에 정착했다.http://www.koreanwar-educator.org/memoirs/sydnam_harold/index.htmCarl Edward Bowers(1932년 10월 13일~2008년 10월 2일)1951년 5월 일본에서 미국으로 도착한 한국전 참전병 3,759명, 테네시 출신 75명 중 내가 있었다. 시애틀에 도착했는데 세 번째 한국전 참전병 combat rotation의 시기로 분주했다.난 1952년 3월 29일 육군에서 명예롭게 제대했다. 마지막으로 있던 곳은 노스캐롤라이나 포트 브래그 육군병원이었다.제대하고 90일 후 난 다시 공군에 재입대했다. 로리다 탬파의 맥딜 공군기지로 전입을 가서 외과 의무병으로 근무했다. KC-130과 KC-135 통신병도 했다.그때 아니타 에슬린을 만나 53년 7월에 결혼했다. 공군에서 2년을 근무하고 복부의 부상 부위가 좋지 않아 더 이상 근무할 수가 없었다.난 현재 한국전 전상 100% 장애인 판정인 상태다.아들 셋을 낳았고 둘째인 마이클은 이라크에 세 번이나 참전했다. 아내는 2002년 1월 1일 세상을 떠났다.올해 2007년에 난 심장마비 두 번을 겪었고, 9월에 다시 폐 수술을 받기로 예정되어 있다.글을 쓰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한국에서 겪었던 것들은 내가 잊고 싶었고 그것이 떠오르면 어떨 때 정말 나를 괴롭힌다.그러나 나는 사람들에게 한국전쟁이 어떤 것인지 말하고 싶었다.전장을 정말로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전투가 어떤 것인지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http://www.koreanwar-educator.org/memoirs/bowers_carl/index.htmRichard Cornelius Bohart(1928년 9월 4일 생)항구에 안기가 잔뜩 낀 아침에 도착했는데 아무런 행사도 없었고 크게 "WELCOME HOME!"이란 플랭카드가 보였다.배에서 내리니 커피와 도넛이 제공되었다. 미국 땅을 다시 밟는 기분은 정말 감격스러웠다.너무 감정이 차올라 목이 막힌다. 그 감흥은 3일간이나 계속 되었다.전화로 가족들에게 난 아무 문제없다고 알렸다.나는 샌디에고 신병 보충대에서 대기하다 1951년 12월 7일 정식으로 제대했다. 제대하기 전 한국에서 얻은 부상을 치료하고 신병들을 훈련시키는 교관을 했다.캔자스 대학교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며 남은 학업을 끝내고 1954년 1월 졸업했다.재입대는 꿈꾸지 않았다. 난 전쟁과 죽음을 더 이상 원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한국전을 잘못 알고 있었다. 전쟁은 길어졌지만 별로 관심도 없었다. 그들의 일상에 전쟁은 없었다.제대 후 해병대 경험은 나를 보다 모범적인 시민으로 만들었다. 약간의 문제는 있었으나 사회생활에는 문제가 없었다.그러나 밤마다 악몽이 찾아와 한국은 결코 날 떠나지 않았다. 전투가 어제의 일처럼 막 불타오른다. 술 정말 많이 마셨다.이후 화학회사에 들어가 중남미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거기서 화학회사의 거대한 시설 총괄 매니어 일까지 했고 4년 전에 은퇴했다.재혼한 아내와는 올해 결혼 36주년을 맞았고 두 아들과 딸을 낳았다. 그 이전의 결혼에서는 아이가 없었다.한국전 이후 나 자신은 힘들었다.한국에서의 전투와 죽음을 떠올리는 것도 힘들었고 밤에 찾아오는 악몽도 싫었지만, 낮에도 어떤 냄새나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예를 들어 비가 내리는 숲을 걷다가 갑자기 잊었다고 생각한 기억들이 돌아오곤 했다.그런 이유로 이번 인터뷰는 어려웠다. 어떤 질문으로 인해 갑자기 기억이 되살아났다. 잠자리에 들면 악몽으로 인해 편두통이 늘어나기도 했다.지금도 과거 전투에 대한 기억은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다.아내는 내가 인터뷰 도중 과거의 기억에 더 민감해졌다는 걸 알았다. 나와 연관된 해병 전우들에 대한 기억으로 인해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정말 내 기억을 되살릴 다양한 질문을 받았고 난 성심성의것 답변했다. 가장 컸던 것은 PTSD 프로그램에 관한 것이다.http:// http://www.koreanwar-educator.org/memoirs/bohart_richard/index.htm
작성자 : 투하체프고정닉
잔 다르크 종교재판 레전드 일화..JPG
잔다르크, 백년전쟁 때 프랑스를 구한 국민 영웅 그녀는 백년전쟁 막바지에 영국에 포로로 잡혀 종교재판을 받았는데 이 과정을 보면 잔다르크가 무학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논리 정연하게 반박을 한다, 이 글은 이 중 일부만을 발췌한 것이다 주님의 기도를 이 자리에서 외워, 그대가 독실한 신자임을 증명하라. (나도 못하는데 니가 하겠냐 ㅋㅋ) 주교님께서 먼저 입증하십쇼 그래야 나도 주교님께 말할 겁니다 (ㅆㅂ 난 못하는데...) 다른 성직자들을 불러서 암송하게 하겠다. ㄴㄴ, 너가 직접하셈 넘어가겠다. (...) <당시 성경은 라틴어로 되어있는 것이 전부라 신부,주교 중에도 읽지 못하는 자들이 상당히 많았다. 따라서 잔이 외우지 못하리라고 보고 쪽을 주려다가 보기좋게 당한것이다> 법정에서 항상 진실만을 말할 것을 맹세하는가? 저는 언제나 진실을 이야기할 것이지만, 필요하지 않은 부분에는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천사의 목소리를 얼마나 자주 듣는가 제가 필요한 때에 못 들은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대가 목격했다는 천사들이 옷을 입고 있던가? 주님께서 천사들에게 옷을 입힐 능력이 없다고 믿으시는 건가요? 성 미카엘의 몸엔 털이 나 있던가? 그럼 밀어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성녀 마르가리타는 프랑스어로 말을 하던가? 성인들이 잉글랜드의 편에 서 있지 않은데 왜 영어로 말을 하겠습니까? 그분께서 잉글랜드를 미워하신다는 말인가? 저로서는 하느님께서 잉글랜드인을 미워하는지 사랑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분께서 잉글랜드인들을 프랑스에서 쫓아내시리란 것만은 압니다. <이것도 나름의 가불기였음,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교리에서 아니라고 하면 프랑스의 선전을 위해 하나님을 판게 되고 예라고 하면 당연히 하나님의 사랑을 부정하는 것이 됨> 천사들 앞에서 순결을 맹세했던데, 만약 그대가 결혼하면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될 거라 보는가? 그것은 지금으로선 저도 알 수 없으나, 저는 우리 주님을 믿습니다. 천사들이 그대가 심판받을 것이라고 미리 위험을 경고해주진 않던가? 제가 무슨 위험에 처해 있나요? 천사들의 목소리는 재판하는 동안 제가 자유로울 것이라 말했습니다. 저의 것이 될 천국을 위해, 저의 순교에 대해 불평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지금이라도 도망칠 생각은 없는가? 문이 열려 있으면 나가야지요. 그것은 주님께서 허락하셨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왜 남자의 옷을 입고 다니는 금기를 저질렀는가? 옷보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일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왜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한낱 소녀인 그대에게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냈다고 생각하는가? 그 한낱 소녀를 쓰는 것이 그 분의 기쁨입니다. 지금까지 질문에서 보여지듯이 신학적으로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으려고 한것이 보임, 계속 안당하니까 가불기를 날려버림 그대가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고 생각하는가? 제가 만약 은총 상태에 있지 못하다면 하느님께 은총을 내려주시기를 기도할 것이며, 은총을 받고 있다면 계속 그 상태에 머무르게 하시기를 기도드릴 것입니다. <자 여기서 주교는 완벽한 가불기를 걸었음. 앞에서 굳이 천사들의 생김새 등을 논한 것도 이단이다라고 할만한 건덕지를 찾기 위해서였음 당대의 교리는 하나님만이 은총의 상태다 아니다를 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함정에 걸리는 것이었음. 만약에 있다고 하면 너가 뭔데 판단하냐, 아니라고 하면 너가 앞에 말한 것은 거짓말인가? 라는 완벽한 함정이었음 근데 잔은 이 가불기를 완벽히 논파해 내었음> 피고가 행한 일에 대해 교회가 내리는 결정에 승복하며 순명하겠는가? 저를 보내신 주님과 동정녀 성모마리아와 천국의 모든 성인의 뜻에 순명하겠습니다. 저는 교회를 사랑하지만, 당신들은 저를 심판할 권리가 없습니다. 제 말과 행동은 모두 주님과 그분의 천사들에게만 호소할 뿐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저를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 교회의 결정에 불복하겠다는 말인가? 여러분, 제가 보기엔 주님과 교회의 뜻은 하나입니다. 따라서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 문제를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은 바로 당신들입니다. <이처럼 잔은 무학인 소녀가 한 답변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완벽하게 논리를 펼치게 됨. 원래 잉글랜드는 적당히 쪽을 주고 잔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는데 도리어 자신들이 쪽을 팔게 되니까 비공개로 재판을 돌리고 고문과 협박을 계속하게 됨 심지어 수녀원에 가둔다는 약속을 져버리고 남자 간수들이 지키는 군사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어떤일이 있었을지는 뭐...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잔은 다시 남자 옷을 입었고 이로 인해 동성애의 죄목으로 화형에 처해지게 된다> 잔이 화형에 처해질 때에 민심은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었다고 전해진다. 야사에 따르면 잔이 7년 안에 잉글랜드에 큰 재앙이 닥친다고 했는데 5년 뒤에 잉글랜드는 파리에서 퇴각하고 만다 25년 뒤 잔다르크는 복권이 되었고 1910년 시복, 1920년 시성 됨으로서 성녀의 호칭을 공식적으로 회복하게 된다. - dc official App
작성자 : 환송대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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