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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1~6 [A]

시인(112.170) 2015.12.30 23:3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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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아들의 어머니가 3d그래픽으로 만든 자신의 아들이 살아움직이는 것을 모니터를 통해 본다.
그 장면을 보는 이의 감정은 악마가 조종하는 것일까, 신이 조종하는 것일까.
죽은 아들의 어머니는 게임 속 아들을 조종하여 강을 껑충 점프한다.
칼을 들어 초록색 피의 괴물을 응징한다.
하늘을 날아가 신전에서 천사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본다.
일곱 천사가 나팔을 준비하는 모습을 본다.
디지털 시대의 바벨탑.          

 

한 여자가 시장바닥 한켠에 쭈그려앉아 마늘을 까고있다. 주위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을, 시들어버린 나이다.

아직 60세는 되지 않았건만 하얗게 센 채 방치된 머리와 입 옆으로 깊게 패인 두 주름은 보는 이로 하여금 나이가 10~20세는 더 들어보이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녀는 정신을 놓은 말투로 기껏 온 손님을 내쫒아버리기 일쑤였다. 그녀의 아무 감정도 드러나지 않은 표정에는, 삶의 목적을
잃은 이의 무심함이 엿보였다.
어떤 사람이 그녀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김복자 씨, 맞습니까?]
글씨가 쓰여진 타블렛이 불쑥, 그녀 앞으로 내밀어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는 흰 마스크와 모자를 쓰고있었다. 얼굴에서 눈만이 겨우 보였는데,
퍽 아름다웠다.
"누구여?"
그는 타블렛을 들어 떨리는 오른손으로 무언가를 적은 뒤 건넸다. 그리고 그는 마스크와 모자를 벗고, 눈높이를 맞추기위해 앉았다.
입은 흉물스럽게 뒤틀려있었고, 남자치고는 긴 머리카락이 뺨을 덮었다.
[대한이 어머니 되시죠?]
끄덕끄덕, 그는 어물어물 여자의 눈치를 보았다. 그리고 말을 하려는듯 보였지만 어쩐지 잘 안되는 모양이었다.
그는 그녀의 손에서 타블렛을 가져간다. 참을성없는 보통 사람이라면 슬슬 이 과정이 짜증이 날 법하다. 말하면 되지, 싶지만 그의 뒤틀린 입과
숙연한 행동, 그리고 그녀의 가슴을 치는 오랜만에 듣는 아들의 이름에서 나오는 어떤 예감이 그녀가 그를 무시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그리고,
[대한이, 죽었습니다.]
기계적으로 마늘을 까던 무딘 칼이 툭, 그녀의 손가락 마디를 친다.
장면이 점점 멀어져, 시장 전체가 보인다. 그 부산함의 틈에서, 그들 두 인영은 어쩐지 시간의 흐름이 멎은듯했다.

 

아들이 살았다던 고시원에 가보았다.
그 장애인은 버스를 타고온 내내 소위 그 답답한 타블렛으로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것이 말을 할 수 없는 그녀의 감정에는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말라버린 눈으로 묵묵히, 그것을 읽었다. 아들은 게임회사를 다녔다고 했고, 그는 아들의 친구이자 회사동료였다고 했다. 급성 백혈병. 그것이 아들을 투병 5개월만에 저세상으로 보내버린 원수의 이름이었다.
아니, 원수는 그것만이 아니다. 죽을 때까지 연락한번 없었다. 미친놈이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도 그런 아들을 용서할 어머니는 없으리라. 추운 고시원의 열악한 반 단칸을 보게되자, 격정은 극에 달했다. 그녀는 가슴을 쳤다.
"못난 것, 못난 것."

이미 자리가 잡힌 늙은 어머니의 얼굴주름에, 더 깊은 추가 실렸다. 장애인은 주머니에서 타블렛을 꺼내 전원을 껐다.

 

 

정리를 하는동안 어머니와 장애인은 말이 없었다.
혀가 짧은 장애인이 어헤헤 웃는듯 우는듯 희한한 표정을 지으며 cd를 어머니에게 내밀었다.
"이것이 무엇이여?"
그는 손가락으로 cd 앞판을 가르켰다. 유서. 유서라고 쓰여있었다.
떨리는 손가락을 들어 그 이상하게 생긴 빛나는 것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아무런 말도 쓰여있지 않았다.
"이것, 어떻게 쓰는 것이여?"
그 장애인은 cd를 받아들어 방 한켠 아직 치우지 않은 컴퓨터로 향했다.
잠시 조작하더니, 그도 놀란듯이 눈을 치켜떴다.
cd안에는 문서파일 하나와, 이름모를 프로그램이 들어있었다.

 

엄마에게.

전 죽은게 아니에요.

cd에 어머니의 아들 김대한이 살아 있습니다.

 

써있는 말은 그것이 전부였다.
어머니는 정신없이, 눈물까지 흘리면서 비웃었다, 속으로. 뇌는 어처구니가 없다는것을 말로내어 표현하고 싶어했지만 아들이 집을 나간뒤로 굳어버린 입술은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어머니는 힘들게 입을 떼었다.
"한심한 개호로새끼같으니라구."
장애인이 움찔했다. 어머니는 걸레를 들고 화장실로 가버렸다. 콸콸, 물이 쏟아지고 다른 물이 누군가의 눈에서 역시 쏟아지고 있다는것은, 장애인은 보지 않고도 짐작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생각했다. 자신을 낳고 금이야옥이야 길러준 어머니에게, 저런 허황된 정신병자같은 일기가 자식의 마지막 말이다.태어나 열이나 되는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사랑도 받지 못한채 자라 돼지팔리듯 시집가고, 남편에게 맞고 배신당하고, 억척같이 자식하나만을 바라보며 살았는데. 세상은 자신을 철천지 원수로 보는게 틀림없다.
때가 낀 화장실 거울을 보았다. 화장기 하나없는 파리한 안색, 짙은 흰머리들, 이 얼굴로 사랑을 마지막으로 받은 때가 언제였던가.
죽자,
치사하고 비겁하게 옥상에서 뛰어내리던지 해서 이웃 힘들게 하지는 말자, 그건 내 스타일이 아니다.
김복자 스타일은 장롱에 조그마한 자기몸 하나 들일 공간만 있으면 되었다. 구체적으로 사후가 어머니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마음이 가벼워졌다. 이것이 모든걸 내려놓은 자의 여유이리라. 피부에 더럽게 말라붙은 눈물을 흐르는 물에 씻고 걸레에 손을 훔치고 나왔다.
장애인은 아직도 컴퓨터 앞에 있었다. 눈은 예쁜데 입은 일그러져있고 또 열중하고있는 모습이 웃겼다.  이 모든 게 하나의 희극같았다.
이제 가뿐하게 웃을 수 있겠구나, 마지막 단 한번만 웃어보마고 가슴을 펴는데 장애인이 돌아보았다.
"여,기... 대한이가 남긴, 유산, 있어요..."
유산? 그 cd 말인가? 컴퓨터를 켜야 겨우 보이고, 그 내용조차 별거 없던 그 유언 말하는거면 되었다라고 말하려는 찰나, 그의 뒤에 무언가 보였다.
"대,대한이 아니여 저거?"
죽은 줄만 알았던 대한이가 어머니와 같이살던 집앞 공터 그네에 앉아 흔들거리며, 어머니 마지막 기억처럼 교복을 입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어,어찌된 거여, 저게?"
복자는 말은 반사적으로 그렇게 하면서도 알고 있었다. 죽은 아들은 차갑게 식은채 병원지하 어딘가에 갇혀 이제 화장을 기다리고 있다.직접 보지 않았던가? 저 해맑게 웃는 젊은 뺨, 교복을 입은 모습은 기만이다.영상이 끝나면 다시는 볼 수 없음을, 가슴부근이 시리지만 단호하게 기억해냈다. 그런데...
그런 어머니의 노력을 무너뜨리기라도 하듯, 일이 일어났다.
모니터 안의 대한이는 그네에서 일어나 오른팔을 쭉펴 손을 뻗었다. 마치 모니터가 그저 공간을 둘로 나누는 얇은 유리막이라도 된듯, 손은 모니터에 달라붙었다. 서서히, 천천히 손은 다시 떼지고, 김이... 서렸다. 대한이를 닮은 '그것'의 눈 검은자는 정확하게 모니터 왼쪽 측면, 복자를 향하고 있었다.
녹화된 영상이 아님을, 비로소 직감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것'은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장애인이 서랍에서 종이를 한장 꺼내 플러스펜으로 그위에 재빨리 그었다. 그는 입모양만 보고도 알아들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
[대한이 예상대로라면 반년이 더 있어야 완성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유산은... (장애인은 여기서 잠시 망설이다 썼다.) 일찍 죽어버려서 대한이 목소리를 넣지는 못했대요. 대한이는 저 프로그램이 있는 한 영원히...살아있을 거라고 하는군요.]
유산?프로그램?대체 그것이 다 뭐란 말인가?
[프로그램은 게임이에요. 아, 엄마. 엄마는 제가 무엇이 가능할지 상상도 못하실걸요? 옆에 제 친구 성우가 도와줄거에요. 제 유산을 실행해 보세요.]
복자는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장애인이 다 썼음을 펜을 두드려 알렸지만, 화면, 화면만을 보았다. 우리 아들, 아들이 아닌가. 어머니만 보이는 자식의 특징들. 눈 아래 점, 어릴 때 기름이 튀어 뺨에 생긴 붉은 점. 심지어 아까 본 오른손 마디마디를. 모두 같았다. 너무도 똑같았다.
하지만 내 아들이 아니었다. 자신의 눈을 바라보며 자신의 멍한 표정을 흉내내고 있는 저 자는.

 

 

 

장례식은 별다를 것이 없었다. 집안 형편도, 인맥도 없는 집에는 친척조차 오지 않는 법이다. 그저 조그마한 읍내 장례식장에서

마을사람들이나 미덕으로써 일이나 거들어주고 국한사발 먹고가면 그만이었다.

홀로 남겨진 어머니의 어깨를 다독여주려다 평소의 서먹한 사이로 보아 주제넘은 참견이 될것임을 상기하고는 주저하고 가버리는 것이다. 아주 옛날에는
작은일에도 같이 울고 웃었지만, 아들이 가버렸던 5년이란 세월은 그렇게 길었다.
마련된 상에서 상주의 지루하고 기구한 팔자를 화제로 올리는 축들도 더러 있었지만 대개 금방 끝나버렸다. 미용실을 운영하는 창주어멈은 입을 샐쭉거렸다. 그는 그래도 복자와 근년간 친했던 몇안되는 여자들중 하나였다.
"동내 얘기는 마을 모임가서나 하지, 상갓집에서 상주얘기는 아무도 안해 어찌된게."
그러면서 꼭 동여맨 등 뒤의 아기를 다독였다. 창주어멈은 부부금슬이 좋기로 유명했다. 가장 큰 애는 지금 대학생 남자앤데 늦둥이를 본 것이다. 그는 일손을 돕는데 아기를 데려온 것이 미안한지 내내 복자 눈치를 보았다.

"창주어멈도 밥 먹었나? 애 젖도 줘야지 굶기면 쓰나? 젖은 나와?"
"아, 여자아이 앞인데 못하는 소리가 없어. 아 미안해요. 이 양반이 술만 들이키면 이리 짓궂어."
"왜 예슬이도 이제 고등학생이니 알건 다 아는 나인데."
복자는 멍한 시선을 돌려 예슬이라는 아이를 보았다. 서울에서 예고를 다니는 아이인데 방학중이라 집으로 내려왔다고 했다.
내내 불편한지 고개를 떨군채 묻는대답에 네,네만 하며 차려진 음식을 손을 대는둥 마는둥 하다가 문자가 오면 재빨리 스마트폰을 꺼내 보고는 손을 다다닥 움직였다. 긴 머리와 하얀피부가 연예인처럼 예뻐보였다.
"예, 우리 예슬이는 배우가 되고 싶대요."
창주어멈이 얼굴이 예쁘다고 칭찬하자 여자가 말했다. 복자는 생각했다. 우리 대한이도 저 나이었지. 생각하는게 괴로워지자, 복자는 일어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눈이 오고 추웠지만 남일인양 마구 떠들어대는 동네사람들 얼굴을 보는 건 더욱 괴로웠다. 복자는 방한이 될만한 목도리도 장갑도 가져오지 않았지만, 그렇게 말없이 땅만 바라보며 근처를 돌았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싶다.

"아 짜증나 죽겠다니까. 이런 시골구석."
쨍하고 울리는 목소리에 복자는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드니 아까 그 예슬이라는 여자아이가 보였다. 그 아이는 한참동안 전화기에 대고 오빠, 오빠하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다 상주와 시선이 마주치자 당황한듯 끊어, 하더니 바로 들어가 버렸다.


 

복자는 눈을 감고도 걸을 수 있는 길을 혼자 터벅터벅 걸어와 남은 음식이 든 비닐봉지를 든 두손으로 힘겹게 문을 열었다.
"대한아 엄마 왔다."
성우라는 대한이 친구가 놓고간 발전기 돌아가는 소리가 윙윙 들려왔다. 대한이 방. 그리고 그곳에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자막이 떴다.
"엄마, 다녀오셨어요?"
입모양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말. 그리고 죽은 아들의 생김새와 정확히 일치하는 '그것'
"그래...왔다."
복자는 음식을 냉장고에 넣고 바닥에 신문지를 깔았다. 광에는 내일 시장에서 팔기 위해 손질해야하는 채소들이 쌓여있었다. 윙윙거리며 돌아가는 낡은 모니터의 푸른 빛만이 방 안을 비췄다. 그 모니터가 삑삑 거리는 소리를 냈다.

[제가 어머니를 얼마나 기다렸는데 쳐다보지도 않으세요?"]

"내가 미쳤지. 어떻게 너 같은 걸 아들로 생각하겠느냐. 나는 방금 내 아들의 장례식을 마치고 왔다."

복자는 칼을 든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더라. 하나뿐인 아들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는다고."
[제가 죽지 않았으니까 그렇죠.]

"아니."

복자는 장례식을 치른 후에 자신의 마음속에서 아들이 영영 떠나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머니는 컴퓨터 인간을 자신의 아들로 인정할 수 없었다. 그는 체온이 없고 만질수도 없으며 같이 외출을 할수도 없다.

[제 장례식에 사람들 많이 왔어요?]

"그래, 용식이, 철웅이 와서 거들어 주고 갔다. 그리고 네 중학교 때 담임선생님이 많이 울었다."

대한이 생각을 하자 대한의 모니터 옆에 놓인 또 다른 화면에 연산기호가 입력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뒤 선생의 영상이 보였다.

[아...기억나요. 이분이시죠. 여자선생님. 지금은 많이 늙었겠구나. 이건 15년 전 제 학창시절의 기억이니까요.]

복자는 멍하니 그것을 보았다. 대한은 보고 웃었다.

[이런 시골에만 계셨으니 시대가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시겠죠. 이제 곧 익숙해지실거에요. 그리고 이제부터 모든 것이...]

대한은 인터넷에서 찾은 온갖 환상적인 이미지들을 모니터에 출력했다.

[변할거에요.]

갑자기 모니터가 픽 소리를 내면서 꺼졌다. 복자는 놀라서 들고있던 것을 모두 떨어뜨렸다. 아들이 화면속에서 사라진 것이다. 꺼진 컴퓨터를 조작해보려 하는 손이 덜덜 떨렸다. 컴퓨터 인간이 아들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지만 이마저도 없으면 복자는 외로워서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성우가 알려준 메모대로 컴퓨터 전원버튼을 누르고 CD프로그램을 클릭하자 영생 기업이라는 로고가 떴다. 그리고는 아들이 아까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 낡은 컴퓨터부터 바꿔야겠는데요. 조그만 동작만 시켜도 멈춰버리니. 참]

대한은 그를 지켜봐줄 어머니의 목숨이 다하면 전원이 꺼지고 영원히 부팅되지 않을 위험에 처해 있다고 계산했다.

 

-기사-

 


최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죽은 배우가 살아났다'는 제목의 동영상이 게재됐다. 게재된 사진에서는 타계한 지 20년이 넘은 원로배우 이순섭의 20대 모습과 현재 신인 배우 김영명의 모습을 비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연기할때의 버릇과 말투가 비슷하다는 점을 들어 유전자 연구에 성과가 나타난 게 아니냐는 예측도 나오고 있는 상황.

김영명 씨의 소속사는 인터뷰를 허락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방송계 관계자들은 김영명씨가 단독출연하는 영상물을 배포하는 현 활동상태로 볼 때 최근 선진국에서 나타나는 신종 3D배우임이 분명하다고 입을 모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순섭의 생전 버릇과 현재 배우 김영명씨의 행동이 일치하는 점으로 미루어봤을때 기존의 다른 연기자가 모션캡쳐방식으로 조종하는 3D모형이 아닌 새로운 인류의 출현이 아닌가하는 예측도 조심스럽게 내놓고 있다.

 


2021년 2월 21일 오전 10시 21분 송고

연예부 일간지 <허쉬>

 

CPU가 허용하는 메모리 공간 범위 내에서 대한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편리한 공간을 상상했다. 포르쉐 최신형 자동차의 안락한 운전석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휠을 손에 쥐고 시동을 걸자 포르쉐는 상상한 그 속력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온통 회색의 3차원 공간이라 달리는 재미가 없었다. 대한은 웅대한 자연속에서 달리고 싶었다. 그래서 그랜드 캐니언을 연달아 떠올렸다가 당황하여 지워버렸다. 아까와 같이 명령을 감당하지 못한 컴퓨터가 불안했기 때문이다.

회색 공간에 유럽풍의 2층 카페가 나타났다. 대한은 포르쉐 자동차의 시동을 끄고 텅 빈 카페로 들어갔다. 가장 마음에 든 2층 테이블에 앉자 커피와 샌드위치가 든 접시가 나타났다. 대한은 커피잔을 들어 향을 음미하려고 했지만 냄새를 맡을 수 없었다. 먹음직스러운 참치 샌드위치를 집어들고 입에 넣어 씹었다. 역시 맛을 느낄 수 없었다. 대한은 그저 인간의 흉내를 낼 뿐이었다.

갑자기 모든 것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커피잔을 벽을 향해 던졌다. 커피가 벽에 갈색의 흔적을 남겼고 유리는 산산조각이 났다.

대한은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복자는 늙고 지친 몸을 초라한 이불로 감싼 채 잠이 들어 있었다. 1인용 식탁에는 먹다 남긴 밥이 치워지지 않은채 남아있었고 집은 며칠째 청소하지 않아 때가 꼈다. 누런 벽지는 뜯어진 채 너덜거렸다.
컴퓨터시계는 오전 1시 10분을 표시했다. 대한은 자신이 정말로 어제 죽었고 지금 남아있는 자신은 대한이 아니라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자신이 현실에서 교도소에 갇혀 종신형을 선고받은 죄수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참함에 젖어 그는 어머니를 깨워 cd를 부수고 태워 다시는 자신을 나타나지 못하게 만들어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대한은 투명한 액체를 눈으로부터 떨어뜨렸다. 이국의 바람, 예상하지 못한 만남을 만들어 낼 자신이 없었다. 정정당당하게 번 돈으로 포르쉐를 타고 싶었고 여행도 가고 싶었다. 다시 놀이터를 불러들였다. 계산된 체중이 실린 그네의 규칙적인 진자운동은 쉬운 예상대로만 움직였으므로 대한의 불안한 심정을 안정시켰다. 대한은 상상을 더 빠르게 자신이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한은 작은 것부터 연습하기로 했다. 검은 눈동자가 귀여운 두 오누이를 만들었다. 승희, 승태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둘은 모래를 쌓으면서 사이좋게 놀았다. 작은 손들이 얽히고 모래성은 어른도 쉽게 짓지 못할 정도로 커지고 정교해졌다. 승희가 승태의 모래삽을 뺏자 승태는 승희의 머리를 때렸다. 승희는 맞고도 가만히 서있었다. 승태는 모래삽을 빼앗고 혼자서 모래성을 완성하는데 열중했다.

어느새 흔들거리던 그네도 멈췄고 승희는 마네킹처럼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승태는 자기 키의 5배가 넘는 높이의 모래성을 완성했다. 대한은 손을 들어 오누이를 한줌의 모래로 만들어 지워버렸다. 거대한 모래성은 유년기의 공간 속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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