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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마톨로지>를 읽으면서 약간 기묘한..

진돗개~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5.04.18 23:23:49
조회 336 추천 0 댓글 10


  근 열흘 째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를 보고 있다. 진도가 안 나간다. 그의 해체적 글쓰기란 것이 내 정신을 다 해체시킬 기세다. 그럼에도 그가 사용한 단어들의 한 구석, 펄럭이는 의식 사이로 언뜻 무언가 보이고 있다. 에크리튀르(ecriture)란 게 단순한 ‘글자’가 아니라 문자의 존재방식이란 그의 주장이, 지식의 차원에서는 아직 알 듯 말 듯 하지만, 의식의 경험이라는 차원에서는 분명히 체감되고 있다. 어제 오늘 사이에는, 그것이 또 단순히 문자의 존재방식이 아니라 그가 ‘텍스트’라고 부르는, 사실상 만물(萬物)의 존재방식이었음이 서서히 이해되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문자 언어가 음성 언어의 ‘이미지’나 ‘상징’이 아니면서도 음성 언어보다 더 바깥쪽에 있는 동시에 그 자체로 에크리튀르(문자 언어)의 일종인 음성 언어보다도 더 안쪽에 있다고 생각해야 할 때이다. 홈 파기, 판각 새기기, 그림 또는 철자 등과 연관 짓기 전에, 일반적으로 기의에 의해 또 다른 기표로 반사되는 기표와 연결되기 전에 기표 개념은 모든 의미작용 체계에 공통된 가능성으로 설정된(제도화된) 흔적의 심급을 함축한다.”    - <<그라마톨로지>>, 139쪽, 민음사, 2010, 김성도 역



  문자는 ‘기입(記入)’에 의해 존재 양상이 드러나고, 그래서 태생적으로 ‘등록’되는 것이니까, 소쉬르는 문자 언어를 언어 체계의 바깥에 있는 걸로 봤다. 그러나 데리다는 다른 이도 아닌 소쉬르의 말을 빌어, 즉 “언어 체계가 규약적 가치”라는 말을 근거로 이를 반박한다. 언어 체계를 규약으로 본다면, 그것은 곧 사회적 등록 절차로 본다는 것, 그래서 소쉬르 자신이 문자를 사회성의 타락으로 보지 않았냐는 것, 그러므로 문자 언어는 언어 체계 바깥에 존재한다고 주장했던 바로 그 논리를 근거로 삼아 ‘언어 체계 전반은 에크리튀르의 작동방식을 모방한다’는 주장을 도출한다.


  아무튼 문자는 기입이라는 생성 방식 때문에 다른 기호와의 공간적 위치 상 차이가 생기고, 기입이라는 물리적 절차(음성 언어에서 소리가 분절되는 순서에 대칭되는 것) 때문에 시간적 지연이 발생, 곧 차연이라는 개념의도입. 그리고 텍스트 이론...


  그런데 이런 발상은 시인들이 언어를 다루는 방식과 매우 흡사하다는 인상을 줄곧 받았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적지 않은 시인들은 자신의 원관념을 가능한 숨기고 싶어 한다. 마치 기표 놀이에서처럼 시인들은 자기의 기표들이 문맥과 비유의 씨줄과 날줄로 어지럽게 얽히면서, 서로 시적 의미를 자유롭게 주고받으면서, 그렇게 기표들끼리 상호의존적으로 흔적의 생채기를 남기고 늘 새롭게 갱신되는 유기체이기를 바라지 않는가.


  데리다가 해체하고자 했던 전통적 사유 방식과 같은 그런 시 쓰기라면 우리는 항상 ebs 강의의 ‘밑줄 쫙’ 해설로서만 시를 접했을 터. 열린 텍스트로서 시어들이 자기들끼리 대리보충 하면서 자기들끼리 의미를 던지고 받고 하면서, 보조관념들끼리만 열심히 재밌게 노는 그런 시. 결정론적 종착지로서의 원관념에 소속되지 않는 기표들의 놀이. 나는 그런 시를 좋아했고 그렇게 쓰기를 원했다. 이제 보니 전혀 다른 접근법으로 50여 년 전에 그걸 고민했던 철학자가 있었다니..



  참으로 기묘한 것이..내가 <기호론3>을 쓴 게 꼭 작년 이맘때였는데, 올해 그라마톨로지를 읽다가...자꾸만 이 시가 떠오르는 것이었다. 나는 그저 어렴풋한 느낌에 가까운 아이디어로 쓴 시였는데, 이런 철학적 언설은 모르고 쓴 시였는데 뭔가...올해 읽은 책의 감상문을 작년 이맘 때 미리 시로 썼다는 기분...



기호론(記號論) 3

- 자아 정체성의 시니피에






나는 수억 개의 페이지


페이지마다 빼곡히 적힌

낱말의 며칠간이 또 나이며

불현듯 고개 드는 첨언들과

명멸하는 교정부호들의 행간 또한 나이다



나는 한 권의 책으로 엮이지 않은 채

문장성분들 사이를 동여 맨

보이지 않는 끈이다

필사적으로 매달린 품사들이며

목차에서

방금 사라진 제목의

마지막 음운이다



그러므로 나는

무엇이었던 적이 없다

나의 생활상은

어간과 어미의 문법적 경계에서

영원히 활용 중이며

나의 의식은

소실된 체언을 추적하는 관형사



나는

현존하는 모든 페이지였으나

존재했던 어떤 페이지에서도

부재할 것이다


수억 개의 시니피앙

그녀가 밟아 놓은 페이지들에서

우수수 떨어지는 책갈피의 집중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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