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인사이드 갤러리

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갤러리 본문 영역

<츄파춥스>

ㅇㅇ(59.0) 2015.07.29 08:17:22
조회 159 추천 0 댓글 5

고등학교 3학년 때 미술학원에 다닌 적이 있다. 여름방학이었는데, 어디서 만화를 보고서는 나도 저런 만화를 그리고 싶다며 부모님을 졸라 입시 미술 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그때까지 연필로 글씨를 쓰는 것도 뜸했던 내가 그림을 잘 그릴 턱이 없었다. 학원에 다닌 지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서 그림에 대한 흥미가 떨어졌고, 만화를 보는 것과 그리는 것에 대한 차이를 명확히 이해할 즈음 나에겐 습관이 하나 생겼다.

그건 바로 오후 열 시에 학원이 끝나면 앞에 있는 편의점으로 가서 200원짜리 츄파춥스를 하나 사 먹는 것이었다. 일주일에 받는 용돈이 오천 원이었던 나에게 있어 츄파춥스는 합리적인 가격과 훌륭한 맛을 지니고 있었다.

부모님에게 학원에 다니기 싫다는 말을 할 용기가 안 나는 나에게 있어 지루한 학원에 있던 시간을 보상해 주는 것은 츄파춥스뿐이었다. 편의점 계산대에서 가까운 츄파춥스 통을 들여다보면 여러 색과 맛의 사탕들이 서로의 몸에 엉킨 채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츄파춥스를 물고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면 사탕이 주는 달콤함에 취해 눈이 감기다가 잠이 들곤 했다. 학원에서 집까지의 거리가 꽤 되었기에 졸다가 종점에 도착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설사 종점에 도착하더라도 집과의 거리가 가까워 네 정거장 정도를 걸어가면 되었다.

자발적으로 학원에 다니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치고 설레는 마음으로 학원에 다니기 전과는 달랐다. 나는 날마다 지루함을 츄파춥스의 달콤함이 일깨워 주는 노곤함으로 달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버스 안에서 집에 도착하려면 지금까지 온 것만큼의 정거장을 더 가야 하는 상황에서 깨게 되었다.

잠에서 깨어나니 사탕의 달콤함 때문에 오른쪽 볼이 얼얼했다. 얼굴을 찡그리며 사탕을 왼쪽 볼로 옮긴 뒤 다시 잠을 청하려 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수술 후 마취가 풀리면 고통이 몰려오는 것처럼 잠에서 깨니 그때까지는 몰랐던 더위가 내 안면으로 몰려와 얼굴을 쥐어 뜯어댔다. 숨이 막혀 창문을 열고 한껏 숨을 들이쉬고 내쉰 다음 정면을 보고 멍하니 사탕을 입에 물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에 다다르게 되었고 나는 버스의 벨을 누르고 하차를 하기 위해 문 앞으로 갔다. 거기에는 하차를 위해 기다리고 있는 또 다른 여성이 있었는데, 키는 중학생인 나보다 살짝 더 큰 키에 긴 생머리를 지니고 살짝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여성이었다.

피곤했는지 고개를 숙이고 있어 그때에는 얼굴을 보지 못했다. 아무래도 밤이란 시간대와 버스 안의 빛과 어둠을 뒤섞어 비추는 듯한 조명 때문에 더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것처럼 보였다. 곁눈질로 힐끔힐끔 인상착의를 파악하다가 문이 열렸고 나는 서둘러 내렸지만, 그녀는 내리지 않았다. 내리는 곳이 달랐던 모양이었다.

그 이후로 내 습관에 습관이 좀 더 추가되었다. 이번 습관은 불규칙적이었고, 예측할 수 없는 습관이었다. 이제는 츄파춥스를 물고 버스에 타면 선잠이 들었다가 중간에 깨는 일이 잦아졌다. 그럴 때면 더는 자려 하지 않고 하차하는 방향의 문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집에 도착할 때쯤 운이 좋으면 그녀가 하차하는 방향의 문에 나타났다. 어느 자리에서 일어났는지는 늘 보지 못했다. 액자처럼 박힌 시야에 뒤늦게 붙박이는 그녀였으니까.

그럴 때면 나는 얼마 남지 않은 짧은 시간을 이용해서 그녀를 최대한 세심히 관찰했다. 그건 마치 관음증과도 같았다. 들키지 않고 걸리지 않을, 하지만 마음이 읽히고 시선이 읽힌다면 범법의 범주에 들어갈 행위였다.

그녀를 통해서 야한 상상을 하는 게 아니었다. 그저 그녀를 세심히 관찰했다. 그건 호기심에 의한 탐구였다. 그녀의 머리는 항상 길었고 새까맸다. 염색을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항상 피곤한 얼굴 위에 안경을 걸치고 있었다. 늘 어두운 색상의 옷을 입었고 그렇기에 그녀의 피부색이 더 까무잡잡해 보였다. 그녀는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살을 내비치는 옷을 입지 않았다. 마치 그녀 혼자 초가을에 진입한 것처럼 보기만 해도 더워 보이는 옷들로 자신을 꽁꽁 싸매고 다녔다.

난 단 한 번을 제외하고 그녀의 옆모습밖에 보지 못했다. 그마저도 못 보는 날이 잦았다. 그럴 때면 나는 버스에서 내려 아쉽다는 듯 사탕만 쪽쪽 빨다가 이내 못 참고 사탕을 깨물어 없애버린 뒤 막대기를 뒤로 한 채 집으로 들어갔다.

한 달 동안 그런 날을 보냈다. 나는 학원이 끝나면 그녀가 타는 버스가 오는 시간에 늦을까 봐 허겁지겁 달려가 버스를 기다리곤 했다. 어느 날은 이게 다 무슨 짓이냐는 마음으로 사탕을 하나 사들고는 터벅터벅 걸어가 느긋이 버스를 기다리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사탕을 하나 입안에 물고선 버스에 탈 때마다 그녀를 보았던 것 같다. 그럴 때면 그녀의 한결같은 검고 긴 생머리의 오른쪽 면과 피곤해 보이는 오른쪽 얼굴과 안경을 쓴 오른쪽 눈과 어두컴컴한 옷을 입은 오른쪽 몸을 보며 다른 옷을 입으면 어떨까 안경을 벗으면 어떨까 머리에 색을 더하면 어떨까 웃는 얼굴은 어떨까 생각하며 덥고 느릿느릿 지나가던 하루를 잊곤 했다.

여름방학이 끝나가던 날이었다. 두 달이 넘는 방학의 끝에 부모님에게 이제 학원을 그만두고 싶다고 말할 용기가 낫던 날이었다. 부모님께서는 졸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네 맘대로 하라고 말씀하시겠지. 열 시가 넘은 시간이니까.

더는 그녀에 대한 호기심은 샘솟지 않았다. 마지막이 될 것으로 생각하며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건성으로 관찰하고 있었다. 혓바닥을 굴려 오른쪽 볼에 있던 사탕을 왼쪽 볼로 넘겼다.

그때였다. 평생 양면을 붙여 볼 수 없을 거로 생각했던 그녀의 얼굴이 오른쪽으로 살짝 고개를 돌림으로써 완성되었다. 그녀는 내 시야의 액자에서 갑작스럽게 구도를 바꾸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내 눈이 놀람과 당황으로 커지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가 그 후에 했던 일은 더 충격적이었다. 나를 보고 웃은 것이다!

나는 충격과 그보다 더 큰 공포로 인해 반사적으로 허리를 숙여 얼굴을 의자 뒤로 숨겼다. 그건 관음증의 법칙을 어기는 일이었다. 벽에 뚫린 구멍으로 보이던 그녀가 벽으로 다가와 그 구멍으로 날 관찰한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벨이 눌리고 문이 열리고 발걸음 소리가 났다.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서서히 고개를 들어 그녀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그녀가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그녀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내리던 곳에서 내리지 않고 먼저 내린 것이다. 아니, 그걸 내가 어떻게 확신하지? 내가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는 한 손에 있는 손가락 다섯 개만으로도 추릴 수 있었다. 내가 새롭게 알아낸 것과 새롭게 궁금해진 것은, 그녀의 웃는 모습이 퍽 예뻤다는 것과 언제부터 내가 보는 것을 알아챘느냐는 거였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나중에 이가 아파져서 치과에 갔더니 충치가 나 있었다. 그것도 네 개씩이나. 충치 한 개에 칠만 원을 쳐서 총 이십팔만 원이라는 거금을 치과의사의 아가리에 쑤셔 넣은 다음에야 치과에서 나올 수 있었다. 고통스러운 치료과정은 덤이었다.

나중에 나이를 먹고 그때 일이 생각났다. 30을 넘긴 지금도 그때 내가 왜 그랬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일이 끝나고 나서 츄파춥스 두 개를 샀다. 츄파춥스는 300원으로 가격이 올라 있었다. 그때의 버스를 기다린 다음 내가 항상 앉던 자리에 가 뜬눈으로 집까지 갔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당연하지 않은가. 11년 전의 일인데, 바보같이.

나는 버스에서 내린 다음 츄파춥스 두 개를 뜯지도 않고 버렸다.


추천 비추천

0

고정닉 0

0

댓글 영역

전체 댓글 0
등록순정렬 기준선택
본문 보기

하단 갤러리 리스트 영역

왼쪽 컨텐츠 영역

갤러리 리스트 영역

갤러리 리스트
번호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추천
설문 주위 눈치 안 보고(어쩌면 눈치 없이) MZ식 '직설 화법' 날릴 것 같은 스타는? 운영자 24/04/29 - -
95075 최저임금 [2] 흑단나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08.04 117 0
95074 우울한 남자. [2] ㅇㅇ(223.62) 15.08.04 107 1
95071 집으로 가는 길 [5] COoOI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08.04 115 1
95069 수필형식으로 쓴건데 봐주셈 [7] COoOI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08.04 242 0
95067 손에 자꾸 모기 물린다 [1] 흑단나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08.04 73 0
95066 - [3] MoonDust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08.04 96 1
95064 신춘문예에 글 보내는게 두려움 [2] ㅋㅌㅊㅍ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08.03 223 0
95059 [2] ㅇㅇ(211.36) 15.08.03 121 1
95057 저도 문학 좋아하는데 너무 부담스러워요 [5] 그늘(114.202) 15.08.03 133 0
95054 .. [1] 沙狗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08.03 65 1
95053 인생이 슬럼프다 [2] ㅇㅇ(223.62) 15.08.03 104 0
95049 문학적 슬럼프 ㅋㅌㅊㅍ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08.03 92 0
95047 여기 할일없는 것들만 모인곳같은데 [3] 할일없는 병신(211.213) 15.08.03 124 1
95044 이런 븅딱갤러리도있네 여기뭐하는곳임? [2] ㅇㅇ(211.213) 15.08.03 224 0
95041 어제 양변기 [4] (14.34) 15.08.03 137 0
95039 들어보면 (14.34) 15.08.03 70 0
95038 우울 꿈나무(1.227) 15.08.03 83 1
95037 님들 '악스트' 잡지 봤음? 위래(218.238) 15.08.03 219 0
95033 아쉬움. [2] MoonDust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08.03 133 1
95032 추천과 비추천. 나언.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08.03 80 0
95031 해뜨기 [6] (14.34) 15.08.03 117 1
95026 - [1] MoonDust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08.03 81 1
95021 시는 죽었어 [1] 흑단나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08.03 218 2
95019 글리젠 왤케 좋음? 흑단나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08.03 71 0
95018 어느 사탄숭배 뮤지션들의 쿨하고 포근한 컨츄리 송 [10] Outersider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08.03 224 0
95016 내 페이스북 타임 라인에 dishwalla 리드 보컬이 좋아요 눌러줬음 [2] Outersider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08.03 81 0
95014 피자먹고싶다 [1] ㅇㅇ(223.62) 15.08.03 80 0
95013 너무 멋진 날 [5] Outersider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08.03 126 0
95012 생일. [6] MoonDust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08.03 155 1
95010 덥다 [1] 흑단나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08.03 64 0
95009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 [1] Outersider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08.03 78 0
95008 맞닿은 살과 살, 네 걸음 내 걸음 [4] 부름(118.127) 15.08.03 130 1
95006 사진들 [2] Outersider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08.03 98 0
95003 냄새를 안 맡고 있는데 냄새가 날수가있나 [2] ㅇㅇ(221.158) 15.08.03 67 0
95000 현실에선 오히려 못생긴 사람이 더 많은데 [2] ㅇㅇ(108.59) 15.08.02 97 0
94999 인터넷, 채팅으로 말을 하는 것은 ㅇㅇ(180.228) 15.08.02 55 0
94998 황인찬 별로 [2] 흑단나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08.02 366 0
94997 남자친구 선물로 시집사줄려는데 [5] (110.8) 15.08.02 123 0
94996 윤이형의 루카 읽은 사람있어? 질문좀 하나 해도 될까 이해가안가서 [10] ㅇㅇ(221.158) 15.08.02 210 0
94995 a. [1] ㅋㅋ(203.212) 15.08.02 71 0
94994 [자작시]치매 [7] 자작필자(49.142) 15.08.02 121 1
94993 [자작시]불면증 [4] 자작필자(49.142) 15.08.02 118 2
94991 노래 추천. [1] 오래걸렸어요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08.02 53 0
94990 [자작시]수정꽃 [5] 자작필자(49.142) 15.08.02 123 0
94989 사성장군 협주곡. 황병승. [5] 나언.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08.02 363 1
94986 시좀 평가좀 해줘 [10] 배설자(219.240) 15.08.02 228 0
94985 [1] 沙狗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08.02 73 0
94984 위선자 [1] 沙狗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08.02 73 3
94982 자작시 평가좀 [3] ㅇㅇ(223.33) 15.08.02 96 1
94979 존나 돌아다니면서 경험한 새기보다 ㅇㅇ(220.88) 15.08.02 94 0
갤러리 내부 검색
제목+내용게시물 정렬 옵션

오른쪽 컨텐츠 영역

실시간 베스트

1/8

뉴스

디시미디어

디시이슈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