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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효자·패륜아 상속 못 받는다‥헌재 "유류분 제도 위헌·헌법불합치"
남아선호사상이 팽배했던 지난 1977년, 장남이 유산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유류분' 제도라는 게 도입이 됐습니다. 부인이나 딸의 생계도 보장을 받을 수 있도록 배우자와 자녀, 형제자매까지 유산을 나누는 비율을 아예 법으로 정해 버린 건데요. 헌법재판소가 47년 만에 유류분 제도에 위헌적인 부분이 있다면서 일부는 없애고 일부는 고치라고 결정했습니다. 연락을 끊고 남처럼 살아온 가족이나 부모를 학대한 패륜아까지 유산을 나누는 건, 지나친 재산권 침해라는 겁니다. 지난 2019년 세상을 떠난 가수 고 구하라 씨. 10년 넘게 연락을 끊고 살던 어머니가, 돌연 유산을 나눠달라며 나타났습니다. 그분이 하라를 키워준 것도 아니고 하라한테 뭘 해준 것도 아니잖아요."소송 끝에 어머니는 유산 일부를 받았습니다. 지난 1977년 도입된 유류분 제도. 사람이 숨지면 상속 순위에 따라 배우자나 자녀는 법적 상속분의 절반씩을, 부모나 형제자매는 3분의 1씩 갖는다고 현행 민법에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혼한 뒤 재혼해 남처럼 살다가, 아들이 숨지자 54년 만에 나타난 어머니도, 아들의 사망보험금 중 3억여 원을 받아갔습니다. 헌법재판소가 47년 만에 이 유류분 제도의 일부 조항은 헌법에 어긋나 폐지하고, 일부는 법을 고쳐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양육과 부양 의무를 다하지 않거나, 부모를 버리거나 학대한 패륜적 불효자까지 상속받는 건 국민 법 감정에 어긋난다"며 "이들을 배제하는 조항을 만들라"는 겁니다. 헌재는 반대로 숨진 가족을 오래 돌봤거나, 재산 형성에 기여한 가족은, 더 많은 유산을 갖도록 하는 조항도 요구했습니다. 또 형제자매까지 유산 일부를 보장한 조항은 위헌이라며 폐지를 결정했습니다. "재산 형성에 대한 기여나 기대가 거의 인정되지 않고, 이미 독일과 일본 등 해외에서도 제외되고 있다"는 이유입니다. 헌재는 다만, 사회와 가족 제도가 변해도, 유류분을 법으로 정한 제도 자체는 합헌으로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https://naver.me/GUtBMhyZ 불효자·패륜아 상속 못 받는다‥헌재 "유류분 제도 위헌·헌법불합치"◀ 앵커 ▶ 남아선호사상이 팽배했던 지난 1977년, 장남이 유산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유류분' 제도라는 게 도입이 됐습니다. 부인이나 딸의 생계도 보장을 받을 수 있도록 배우자와 자녀, 형제자매까지 유산을 나누는 naver.me- 유류분 제도 47년 만에 위헌·헌법불합치 결정, 의미와 부작용은?헌법재판소가 상속권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올 결정을 내렸습니다. 가족 모두에게 일정 부분 강제로 상속받을 권한을 주는 '유류분제도' 라는게 있는데, 농경사회를 전제로 했던 제도를 47년 만에 손본겁니다. 형제자매나 패륜 가족에게 유산을 강제로 배분하는건 헌법에 어긋난다는건데, 앞으로 어떻게 되는건지, 하나하나 따져보겠습니다. 헌법재판소는 사망한 사람의 형제자매에게 상속을 강제하는 민법의 유류분 조항이 위헌이라고 결정했습니다. 재판관 만장일치였습니다. 이 제도는 대가족이 함께 살면서 형제자매들도 가족 재산 형성에 기여하던 1977년에 도입됐습니다. 하지만 핵가족이 보편화된 지금은 형제자매에게 강제상속을 하는 건 불합리하다고 판단한 겁니다. 헌재는 또 오랜 기간 남남처럼 살거나 사망자를 학대, 방치한 패륜 가족에게 상속을 보장하는 조항 역시 헌법에 어긋난다고 판단했습니다. 형제자매에게 강제로 재산을 나눠주는 법 조항은 위헌 판결로 즉시 효력을 잃었고, 패륜가족에게도 상속권을 보장하는 조항은 내년 말까지 국회가 법을 고쳐야합니다. 헌법재판소가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국민적 공분을 샀던 여러 사건들 때문입니다. 대표적인게 가수 구하라 씨 사태였죠. 자식이나 부모를 수십 년간 남보듯하거나 심지어 학대한 사람들이 나중에 유산을 요구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번 결정으로, 그런 황당한 일은 사라질 것으로 보입니다. 가수 구하라씨가 2019년 숨지자 20년 넘게 연락을 끊고 살았던 친모가 나타나 상속권을 주장합니다. 구씨의 오빠는 물론 사회적 공분이 일었지만, 결국 유류분을 인정하는 법조항에 가로막혔습니다. 우리 민법이 가족과 담을 쌓거나 심지어 학대한 가족에게도 강제상속받을 권한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헌법재판소는 패륜가족에게 이런 권한을 주는건 헌법정신에 어긋난다고 판단했습니다. 다만 즉각 법조항을 무력화하면 사회적 혼란이 우려돼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고, 국회는 내년 12월31일까지 법을 개정해야 합니다. 부양의무를 다하지 않은 부모의 상속권을 제한하는 '구하라법'은 2021년 국회에 상정됐지만, 여전히 국회 법사위 소위에 계류중입니다. 앵커 : 이번 헌재의 결정으로 유류분 제도는 47년 만에 수술대에 오르게 됐습니다. 어떤 의미가 있고 부작용은 없는지 따져보겠습니다. 오늘 헌재의 결정 간단히 정리하면, 자격없는 사람이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재산을 상속받으면 안된다는 것이죠? 기자 : 네, 맞습니다. 재산 형성에 기여하지 않고 피상속인을 돌보지 않은 가족들한테까지 상속분을 나눠줄 이유가 없다는거죠. 구체적인 상속권 상실 사유를 정하는 것은 이제 국회 몫으로 돌아갔고, 내년 말일까지 법을 개정해야 합니다. 앵커 : 앞서 리포트에서 이번 결정의 배경이 가족제도의 변화때문이라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바뀌었다는 겁니까? 기자 : 네, 유류분 제도는 1977년에 도입됐습니다. 70년대 중반만해도 5인 이상 가구, 즉 대가족이 전체 가구의 58%를 차지했고 인구의 절반 가량이 농업에 종사하면서 함께 노동으로 공동 재산을 축적했습니다. 가족 구성원이 재산에 기여한 대가를 보장하기 위한 일종의 법적 안전장치가 유류분 제도였습니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고 핵가족제도가 보편화되면서 형제, 자매가 재산을 증여받을 타당한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겁니다. 앵커 : 그리고 또하나 중요한 것이 이른바 패륜 가족은 상속에 제한을 두겠다는 것이죠? 상속권 박탈 기준을 어떻게 정할지가 논란이 될 듯 한데요? 기자 : 이전에 추진된 구하라법 역시 피상속인에 대한 부양의무 범위를 어디까지로 볼 것인지, 그 의무를 게을리했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등이 논란이 됐었습니다. 앵커 : 해외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패륜아의 상속권을 박탈하는 제도가 있습니까? 기자 : 네, 독일 민법에선 직계비속이 피상속인의 부양의무를 악의적으로 위반하면 유류분을 박탈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스위스와 오스트리아 역시 자식의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상속을 받지 못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유류분 박탈 제도가 따로 없고요. 소송을 통해 가능합니다. 앵커 : 그렇게 되면 앞으로 상속분쟁이 더 늘어나지는 않을까요? 기자 : 유류분 반환 청구소송은 지난해 2000건을 넘게 기록해, 2012년 비해 3.5배 늘었습니다. 전체 상속 재판의 83%는 1억원 이하의 상속 재산에 대한 소송인데요. 적은 유산이라도 가족간의 다툼이 그만큼 많다는 겁니다. 물론 유류분 제도 자체가 소송을 부추긴 측면이 있지만 앞으로 부양의무을 따지기 위한 분쟁은 더 늘어날 가능성도 있어보입니다. https://n.news.naver.com/article/448/0000456541https://n.news.naver.com/article/448/0000456542 https://n.news.naver.com/article/448/0000456545
작성자 : ㅇㅇ고정닉
80,90년대 시위진압부대 백골단
https://youtu.be/KNjL3v13eSUhttps://youtu.be/_KgX-hb1amohttps://youtu.be/ooHwHu4CpXE요즘 제대한 전.의경들이진사복중대. 특수기동대 어쩌구 저쩌구 하는데요.. 제대로 말씀드릴께요..ㅋㅋ 백골단은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집권시절.. 직업 경찰관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사복부대였습니다.당시 특수기동대라는 명칭과. 형사기동대. 사복기동대라는 명칭으로 만들어졌었죠.또한 형기대는 무도1단 이상으로 의무근무3년. 사복기동대는 무도2단이상과 전의경출신자들(데모진압경험이 있으므로..)중심으로 2년조건부로 각각 채용을 했습니다.당시 말이 무도1단. 2단이지.. 대부분의 직원들은 당시 유도대.(현 용인대)출신들과 특전사 복무자(당시 제대및 장기지원경력자들 중심으로 채용..또한 전두환정권때는 공수출신들을 정말많이 채용했었구 그당시 출신들이 지금 경찰 형사계에 많이 포진되어 있으며 유도대출신들과 경합중이죠. )을 했고, 군복무시 데모진압경험이 많은 전의경출신들도 많은 수를 이뤘습니다. 이들은 하얀색 오토바이 헬멧과. 청색카바. 청바지(화염병 공격시 화염과 유리조각등으로부터 보호할수 있었다더군요)로 무장되어 있었고.. 이들은 일정한 대형등을 유지하는것이 아니라.. 데모진압시 어떠한 건물등을 목표로 (대부분100m 거리간격을 두고 뛰어나가 시위대를 붙잡고 밀어붙치는 식으로)무지막지한 진압을 시도하고 또한 붙잡혔을을시 시위대를 반 거의 죽음으로 만들정도로 공포의 부대였습니다.무조건 진격을 하니.. 데모꾼들이 아무리 강력하더라구...일단 튀기 마련이였죠..어떤분이 대답하시길 뭐 100%구속이니 뭐니 하시던데...당시 백골단이 추격을 시도하면 시위대는 도망가다가 다시 뭉쳐 공격대형을 이루기 마련인데..아님 경찰쪽을 쳐다보기 마련인데..그런점을 노려 그들이(시위대)가 지켜보는 시위대들중 가운데 가장 앞장서서 강한척 하며 난동을 부리고 선동을 하던 데모주동자들을 뛰어가 붙잡고 무자비하게 폭력적인 진압을 시도하니.. 다들 주춤거리게 되고 그러한 까닭에 더이상의 진압 중대에 더이상 다가서지 못하였다더군요. -그러한 점을 노린것이죠.-그리고 실컷 두들겨 패준후 그대로 풀어준다고 합니다. 반쯤 정신나간 사람이 시위대 길에 널부려져 있는데 시위대들은 바로 공포감이 몰입되어 패닉상태로 빠지게 되죠. 또한 진압후 다친사람 데리고 와봤자 시끄럽기만 하니까.. 수배걸리지 않는 사람만 빼곤 그냥 버스에 실고 데리고 가다가 내려주기도 하구 그랬다구 하더군요,.. 그후...93년도에 형사기동대 마지막기수가 만들어 지구..나서 정식 백골단은 97년도 연대사태까지 유지하고 없어졌습니다. 여기서.. 집고넘어가야할것은..일부 전.의경들이 백골단이였다고 말하는것에 대해서인데요.. 당시 진압효과가 뛰어나자..시위대들을 효과적으로 진압할 목적으로일부 전.의경 진압부대원들을 위와 같이 사복부대로 옷을 갈아입히구 진압작전에 내몰았습니다.시위대들은 당시 사복부대만 보면 다들 도망갈때라 그점을 노린것이였죠.. 그러나..직업경찰들과는 달리.. 명령에 복종하는 군대의 특성상 자율성이 있는 진압이 이루어 지지 않았구..(직업경찰관들은 분대별로 작전을 참 많이했다더군요. 작전명령이 좋지 않으면 따르지도 않았구 부당한 지휘를 남용하면 지휘차량을 찿아가 마구 때려부셔 지휘관들이 막 도망두 가구 그랬다네요.. 그런저런 이유로 직업 경찰관 중대는 독자적인 작전이 주로 이뤄졌죠) 이러한 과정에서 명지대 학생(강경대 였던가? 갑자기 이름이 정확히 생각이 안나네요)이 5월달이던가.. 암튼 당시 신입생이였는데.. 시위를 하다가 쇠파이프로 무장하고 백골부대처럼 사복을 입구 진압하던 전경부대원들에게사망을 당한 사건이 발생하였고.. 김영삼 정권때는김영삼 대통령이 경찰관 사복중대를(백골단)을 무지 싫어했다더군요. 전두환. 노태우정권과 싸울때 가택연금을 당하기도 했는데 당시 그 가택연금 경비를 한 중대도 백골단이였고가택연금생활당시 백골단원들한테 많은 제약등을 받자.. 자신이 정권을 잡자마나...김영삼 정권 참모진들은 더이상의 사복중대를 뽑지 않았다더군요. 그래서 93년도 형기대가 마지막기수죠.현재 그들은 대부분 일선서 형사계에 많이 포진되어 있는것이 사실입니다. 암튼. 자신이 정치를 하면 잘할줄 알았는데..당시 전대협에서 한총련으로 바뀌면서 데모가 줄지 않자 (전대협은 군사정권시설에서의 민주화를주장했구.. 한총련은 반미.북 주체사상등으로 약간의 성격이 틀려지기 시작했죠) 당황한 나머지..전. 의경중대로 데모진압을 하려 했으나 여의치 못하자.. 일선서에 있던 일부 젊은 직원들을 대상으로 순번을 정해 강제적으로 차출하는 방식으로차출하여 1년을 조건을 걸구 진압을 시켰는데 그때는 일선서에서 편안하게 생활하다가..강제 차출당해 휴일도 없이 또다시 진압을 시키구 군생활같은 단체생활을 하는터라 그들의 반발이 심했구..그런저런이유로 인해 초창기 사복중대의 위엄을 찿아볼수가 없었죠.그리고일선서에서 차출되었던 경찰관(계급은 순경)이 93년도 8.15범민족 대회때 판문점으로 가려던 시위대와 격전을 벌이다가 골목길에서 공격을 당해 쇠파이프로 머리를 수회 맞고 사망한 사건도 있었구요. 그후한총련의 96년도 연대대 사태이후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93년도 형기대 기수가 활약을 끝으로 대부분 3년조건부 근무를 마치고 일선서로 나가버리자.. 다급해진 김영삼정권에서 옛 경찰관 진압중대인 백골단을 회상하고,1997년도에 특수진압요원이라는 명칭하에 직원중대 5개 중대를 창설했죠.자신들의 정권 말기였기에 강력한 카드가 필요했구.. 이들을 중심으로 당시 대대적인 포상을 걸어97년도를 중심으로 한총련의 강력한 지도부가 검거되어 와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후..폴리스 라인이니.. 무최루탄원칙이니 뭐니 하면서 2년 조건부로 뽑던 백골단의 후예들인 2기생까지 뽑구나서.. 일선서 순경들을 대상으로 순번을 정해 의무적으로 근무를 조건으로 3개중대를 운영중이고 2007년도에는예전처럼 무도시험이 없어진 상태에서 간단한 체력시험만 거치고 진압중대를 현재 각 시도별로 경찰관을 채용하여 만들어 중앙경찰학교에서 2년 조건부로 현재 교육중인걸로 알고 있습니다.. 군대를 제대하고난후 자신이 근무한 부대의 특성과 운용에 대해 전문가가 되죠..그와 마찮가지로 군제대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던 초창기 직업 경찰관의 중대는 정말 막강했구.. 당시 직업경찰관으로 채용되었던 전.의경출신들이 각 타군출신들에게 시위진압요령. 최루탄사용요령등을 가르쳐주며 이들의 시위진압은 무패행진을 계속해 나갔구.. 이들을 지휘하던 지휘부들 사이에서 일당백이라는 말이 나왔다구 합니다. 경찰관 중대 사복 1개중대만 출동하면 광화문. 종로. 신촌일대는 시위대의 공포등으로 금방 진압이 되었다고 합니다. 일예로민주화를 요구하며 종로. 신촌 및 서울 시청방면에서 광화문까지 밀려들어온 수만의 시위대로 인해(거기서 시위대가 좀더 밀고들어가면 서울지방청. 미대사관. 기무사. 정부종합청사. 청와대. 그냥 끝입니다.) 최대의 위기로 몰리자. 직원중대인 백골단이 최후의 보류로 포진해 있다가 광화문 16차선에 포진되어 있던 가스차등이 발포하며 백골단원들이 쇠파이프등들고 중무장한채 뛰어들자..수많은 전.의경중대를 깨뜨리고 몰려든 시위대가 순식간에 이들의 위세에 놀란 시위대가 도주하기 시작해 서울시청까지 밀려들어가 길거리엔 그들이 떨어뜨린 소지품과. 신발등이 널부려져 있었다구 합니다. 그 무지막지한 군사정권때 민주화를 요구하며 목숨을 걸고 시위를 했던 모든국민과...또한 경찰관으로서 그들과 대치를 해야만했던 백골단원들.......모두가 이제는 잊혀져간 역사이자..아픔입니다. 제가 흔히 백골단이라고 불리는 형사기동대 1기생입니다. 형사기동대에 약 3년 근무하고 일반 경찰서 형사계 등 약6년근무하다가 퇴직하고 현재 사업하는 40대 후반 사람인데 인터넷을 보다가 몇자 적고자 합니다.대학을 졸업하고 특수군부대를 85년에 전역해서 태권도장(당시 4단)이나 차릴려고 하다가 경찰서 계시판에 형사 기동대 모집를 보고 지원 했습니다. 당시는 경찰에 투신하여 나라를 위해서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20대의 강한 의지가 있었습니다. 약 20대 1의 경쟁을 통해 합격 하였습니다. 경찰 학교에서 6개월간 경찰교육을 받고 126명의 동기들이 모여 1개 중대를 만들었습니다.제가 키가 170센티인데 동기들이 모두 장신들이라 제 키가 제일 적었습니다. 참고로 요즘 젊은들이 키가 크지만 80년 당시 170센티는 중키에 해당 했습니다. 형사기동대 근무는 하루 당직 다음날 휴무 다음에 일근으로 근무를 했는데 데모가 있는 날은 몇일간 집에 갈 수가 없었어요. 데모가 없는 평일에는 소매치기 전담반이 되어 중심가 사복 근무를 했습니다.소매치기도 데모도 무지막지하게 체포 햇습니다. 집해시위자에는 백골단이였지만 소매치기들에는 저승사자로 불렸습니다. 우리는 국가에 녹을 먹고 있는 공직자로서 국가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는 의지와 신념이 있었습니다. 동기들이 공수부대, 해병대 출신들이 많았습니다. 요즘젊은이들 군에 안 갈려고 하는데, 동기들은 특수 부대에 스스로 지원하여 나라을 위해 충성한 사람들입니다. 젊어서 부정 부패도 몰랐고, 월급타면 몇일 술을 먹고나면 없는 돈이였지만 우리는 젊음을 불 살랐습니다. 당시 저는 신혼 이였는데 울산에 데모 진압 한다고 파견나가 2달간 있었는데 그 때 제 아내가 많이 울었습니다. 지금은 휴대폰이 있어서 통화를 쉽게 하지만 그때는 공중전화를 통해 밤 늦게 전화를 했습니다.보고 싶다는 아내의 목소리에 그리워 말없이 눈물을 흘리곤 했습니다. 운동 했는 사람들이 강할 것 같지만 마음 약하고 정에 약합니다.우리가 운동을 해서 그런지 시민들이 날라다니다는 과장을 하고 하는데 ,우리도 뛰어다니고 때리고 했을 때 참으로 힘들고 회의를 느끼곤 했습니다.데모를 막다가 동기들 수명이 대학교 안에서 가스통에 순직한 동기들이 있었는데, 장례식때 저도 많이 울었어요, 그 동기중에 갓 결혼하여 아기가 있는 동기도 있었습니다.또 소매치기와 싸우다가 아킬레스껀이 잘리어 장애인인 된 동기도 있어요.세월이 지나서 저는 일반인으로 사업을 하지만 현재 동기들은 일선 경찰서 형사계에 많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일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세줄 요약1. 백골단은 전의경,해병대,특전사,공수부대, 유도대(현 용인대 유도학과) 출신들로 이루어진 직원 중대였다.2. 일부 전의경 중대들도 백골단처럼 백골단 복장으로 시위진압 동원되었지만 명령에 복종하는 군대의 특성상 지휘관의 지나친 개입 때문에 자율적인 진압작전이 불가능해 직원중대처럼 진압을 잘하진 못했다.3. 윗 글에 나오는 오류인데 김영삼씨때는 나라가 완전히 민주화되었었기 때문에 이때 폭동 일의킨 한총련 진압했던 백골단(형기대)는 말 그대로 민주주주의를 위해 싸운 것이고 한총련 전에 있던 전대협도 북한,중국 찬양하는 이적단체였다.
작성자 : ㅇㅇ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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