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쯤 열렸던 광저우 아시안 게임을 기억할 것이다.
광저우의 한자는 광주(廣州)다. 한국 경기도 광주(廣州)와 한자가 똑같다.
5년 전에 JTBC에서‘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라는 프로그램을 방송한 적이 있다. 첫 번째 편이 한국에서도 유명한 중국 아나운서 출신‘장위안’의 중국 고향집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장위안의 고향은 중국 랴오닝성 안산이다. 한국에도 중앙대학교 안산캠퍼스가 있는 안산이 있는데 지명 이름이 똑같다.
경상북도에 청도군이 있고 중국에도 칭다오라고 부르는 청도가 있다.
만리포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충남 태안과 똑같은 한자 태안(泰安)을 쓰는 중국 산둥성 태안(泰安)도 있다.
전북 전주(全州)와 중국 광서성 전주(全州) 처럼 전라북도와 중국남부지방만 조사해봐도 지명이 똑같거나 유사한 지역이 많이 발견된다.
도대체 왜 한국과 중국이 다른나라인데 어째서 이렇게 같은 이름을 쓰고 심지어 한자까지 같은 지명이 이렇게 많이 존재할까?
고려는 세계 어느 곳에도 없는 찬란한 문화유산을 남긴 거대한 제국
외국에서는 한국을 코리아(Korea)라고 부른다. 프랑스어, 스페인어, 아랍어 문화권에서는 corea(코레아)라고 부른다. 코리아는 Ko(고) rea(려), 즉 고려를 서양사람들이 듣고 적은 발음이다. 서양에 우리민족이 세운 나라가 ‘고려’로 널리 알려졌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조선朝鮮(1393➰1896)이 고려를 이어 건국한 1393년 이후 고려라는 국호는 쓰이지 않았지만 조선과 멀리 떨어져 있던 나라들은 조선을 고려로 인식했고, 오늘날에도 우리 스스로가 대외적으로 대한민국大韓民國을 The Republic of Great Han이 아니라 The Republic of Korea로 표기하고 있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해 볼 때 우리민족의 역사상 고려라는 나라는 인접 국가는 물론 멀리 떨어져 있던 나라들에게도 강한 인상을 남겼음을 알 수 있다.
고려의 무역항 벽란도는 당시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과 거리가 가까웠고 수심이 깊어, 밀물을 이용하면 크고 작은 배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기에 고려시대의 무역의 중심지가 됐다. 가장 활발히 교류된 물품은 송이였다. 고려는 종이나 인삼ㆍ나전칠기 등을 수출했고, 비단ㆍ약재ㆍ서적 등을 수입했다.
이곳에서의 무역이 상당히 활발해 송나라, 일본의 상인은 물론이고 교지국, 섬라곡국, 마팔국, 대식국의 이슬람 상인들까지도 무역을 하러 왔다.
시간이 가면 항해술과 측량술이 더욱 발전하기 마련인데, 이슬람의 상인들이 고려에 빈번하게 드나들다가 갑자기 조선으로 나라가 바뀌면서 무역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우리가 국사시간에 서양인 최초의 조선방문자가 하멜표류기를 쓴 네덜란드인 하멜이었다고 배우지만, 그보다 훨씬 오래전인 몇백년 고려시대에 먼 이슬람 국가와 무역와 했었는데 갑자기 무역이 중단됐다? 상식적으로 봐도 이상한 일이다.
이해가 되지 않는 한반도 고려의 메뚜기 피해
<고려사>의 기록을 보면 고려는 황충(메뚜기)의 피해가 24회 정도가 있었다고 쓰여져 있는데 가뭄 다음에 먹을 것을 찾아 구름처럼 모여 이동하는 메뚜기떼의 피해가 있다.
풀잎과 나뭇잎, 나무껍질도 먹어버리고 그래도 먹이가 부족하면 동물과 사람까지 먹어버리는 공포의 메뚜기떼의 발생인 것이다.
고려의 황충(메뚜기) 피해기록 중 하나를 살펴보자.
인종(仁宗) 23년(1145)
[7월에 황충이 극성해 북계(北界), 창주(昌州), 삭주(朔州), 귀주(龜州), 의주(義州), 정주(靜州), 용주(龍州), 철주(鐵州), 서해도(西海道), 해주(海州) 등지에 피해를 주었다.]
대부분의 메뚜기 피해는 고려의 경기지방을 중심으로 서해도, 해주, 서북면, 북계 지방에서 발생한다는 한계가 있는데 주로 중국 황하지대 및 그 이북과 북서에서 메뚜기떼가 발생한다.
한반도의 지형는 3면이 바다로 해양성 기후의 영향을 받는 온난 다습한 지역이다. 스텝 건조기후대와 건조기후대에서 주로 발생하는 황충이 발생할 근본적인 조건과 환경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한반도에서 황충의 피해가 일어나는 기록은 조선의 역사서를 찾아보아도 기록돼 있지 않다.
고려가 한반도에 존재했다면 <고려사>의 황충 피해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혹시 고려가 드넓은 중국대륙에 존재했던 것은 아닐까?
이상한 금나라 왕의 문서
금나라의 문서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大金皇帝奇書于高麗國皇帝 [대금황제가 고려국 황제에게 글을 보낸다]
고려는 한반도에 존재했던 국가였는데 금나라 왕은 왜 고려의 왕을 황제(皇帝)라고 칭했을까?
한반도에는 없는 고려 궁궐
<고려사>에는 개경과 강화에는 대규모 사찰과 궁궐이 수십 개가 있었다고 기록했는데, 한반도의 개경(개성)과 강화에는 각각 한 곳씩의 궁궐만이 있을 뿐이고, 이 두 곳을 제외한 다른 어떤 곳에도 고려왕이 기거했었다는 건물 유적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천문기상학 관측기록으로 본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는 대륙에 존재했다
2004년 책이 있는 마을에서 펴낸 기상학자 정용석의 <고구려, 백제, 신라가 중국 대륙을 지배했다>라는 책을 보면, 삼국에서 일어난 지진 발생 기록과 기상 변화의 기록을 분석한 결과, 삼국은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서 건국된 나라라고 말하고 있다.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백제본기, 신라본기 등 고대 역사서에 나오는 일식관측 기록을 컴퓨터로 계산해 시뮬레이션 하는 프로그램을 개발, 일식 관측이 이뤄진 장소를 추적해 보니 모두 중국대륙으로 나왔다.
박창범 교수는 사서에 기록된 자료들을 일일이 교차검증하고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천문 현상, 예를 들어 일식과 큰 썰물, 혜성의 출현, 수성·금성·화성·목성·토성이 최근접하는 '오성취루' 현상 등의 천문학 데이터를 입력해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돌려본 결과 단군고사, 단군세기 등 우리 사서의 기록들이 모두 사실임을 증명했다.
천문학은 우리민족이 대륙에 존재했음을 말한다
고려가 중국대륙에 존재했음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증거가 있는데 바로 천체관측 유적이다. 천체관측은 지난날 황제의 특권이었다.
천체의 변화는 귀중한 정보였기 때문에 천체관측 정보는 왕과 특정한 사람 이외에는 접근할 수 없었다. 천문관측 자료는 왕의 특권이었던 것이다. 또한 천체관측소가 있던 곳은 황제가 살던 수도에 존재했다.
'삼국사기' 천문기록에 의한 삼국의 수도 비정도. '삼국사기'에 나오는 천문기록을 근거로 삼국의 수도를 비정한 결과 삼국의 전반기에는 모두 중국 지역에 위치했다는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박창범 교수는 '삼국사기'에 나온 천문기록을 근거로 삼국의 수도가 어디인가를 비정할 수 있는, 즉 관측자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조사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시대에 일어난 일식이 67회, 혜성출현이 65회, 유성과 운석의 낙하가 42회, 행성의 이상 현상이 40회, 오로라 출현 12회로 총 226회의 천체현상이 기록돼 있다.
연구에 사용된 일식 기록은 서기전 54년에서 서기 201년까지의 초기신라 일식 16회, 787년 이후의 후기신라 일식 9회, 백제 전 기간의 일식 20회와 고구려의 일식 8회였다. 결론은 삼국이 서기 200년 이후에 수준 높은 천체관측을 했으며 기원전부터 천체관측은 삼국이 독자적으로 수행했다는 것이다.
개개의 일식도를 보면 어느 한 일식은 식(蝕)의 정도 차이가 있지만 광범위한 지역에서 관측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혁거세 4년(BC 54년)의 일식은 식분이 서울과 동경에서 0.7, 시안에서 0.8, 상하이에서 0.9, 방글라데시의 데카에서는 1.0(개기식)이다.
그러나 특정국가가 기록으로 남긴 모든 일식은 어느 지역에서든 잘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자면 신라에서 141년에 측정된 일식은 한반도와 그 이동에서는 볼 수 없다. 또한 신라 166년의 일식은 장안 이서에서는 볼 수 없다.
따라서 특정 국가가 관측한 일식의 식분도를 모두 합해 평균하면 평균식분이 최대인 지역을 찾을 수 있고 이것을 통해 최적 관측지 즉 천문관측 현상을 관측했던 관측자의 위치를 알 수 있다.
고대 천문현상의 관측은 그 국가의 수도 근방에서 이뤄졌다는 것이 정설이므로 '관측자의 위치'는 그 국가의 수도가 어디 있었는지는 물론 그 당시의 강역이 어디인지를 찾아낼 수 있다.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가 컴퓨터로 계산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일식 최적관측지
그런데 삼국의 일식을 관측한 위치는 기존에 알려진 것과는 너무나 달랐다. 백제에서 기록된 20개의 일식 관측지는 요서 지역(발해만)이었다.
고구려의 관측자 위치는 신라나 백제보다 매우 북쪽으로 치우쳐 있는데 고구려가 광대한 영토의 여러 곳에서 천체를 관측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박 교수의 논문에서 다룬 천문현상 연구에 의한 삼국의 관측자 위치는 우리의 고대사에서 규명할 부분이 매우 많다는 것을 시사한다. '삼국사기'에 백제가 기록한 이 공백기의 일식기록으로 태백주현(224) 등이 기록돼 있다.
기상학 기록으로 본 삼국, 고려, 조선의 위치는 중국대륙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많은 부분에서 4월. 7월. 11월 등등 시도 때도 없이 우박과 서리가 내렸다고 돼 있다.
이처럼 일 년 중에 10개월 동안 서리가 내리고 7개월 동안 눈이 내릴 수 있는 지역에 삼국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인데, 그런 기후를 보이는 곳은 한반도 내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기상학적으로 대륙의 '스텝 건조기후대'에서 찾을 수 있고 삼국의 대륙 존재설이 타당해 보이는 과학적인 이유가 된다.
스텝기후 분포도.스텝기후는 한반도에는 없고 중국 북부에 주로 많이 분포하며, 중국 남부에도 일부 존재한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대수(大水)는 큰비, 큰물, 장마를 뜻한다. 삼국사기의 대수기록은 삼국마다 차이를 보인다.
신라의 경우 약 500년 이전에는 음력 4~5월에, 그 이후에는 5~8월에 큰물이 났다. 백제의 경우 5~6월에, 고구려는 5~8월에 났다. 현대의 기상관측 자료에서 이러한 기상학적인 특성을 지닌곳이 어디인가를 추적해 봤다.
삼국의 대수(大水)기록
그 결과 서기 500년 이전의 신라처럼 음력 4~5월에만 큰비가 내리는 곳은 바로 중국 양자강 유역이었다. 일식 기록으로 찾은 초기 신라의 관측지와 기상 기록의 데이터로 찾은 관측지가 같은 것이다.
백제는 큰물 시기가 초기 신라에 비해 한달정도 늦게, 고구려는 백제보다도 더 늦게 나타나는 경향을 보였다. 이 역시 백제의 최적 일식 관측지가 밸해만 근처이고, 고구려의 일식 관측지가 그보다 고위도 지역이라는 사실과 부합한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기상 데이터를 통해 살펴본 삼국의 지역적 특색은 천문기록으로 찾은 최적 관측지와 일치한다.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 대륙에 존재했던 것이다.
대륙삼국 위치도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우리 강역 옛 지명의 유래가 정확하게 수록돼 있다. 그래서 오늘날의 우리가 반도 역사와 대륙의 역사를 구분 짓게 할 수 있게끔 도움을 주고 있다. 하지만 '고서(古書) 수거령'이 내려졌던 세조 때부터 상고사를 없애려는 시도가 계속 있어왔다.
또한 일제는 <조선사편수회>를 조직하고 엄청난 예산을 들여 우리민족의 대륙 역사를 지웠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은 우리민족의 역사서 20만권을 수거해 불태우고 한민족의 대륙 역사를 한반도로 축소, 이식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조선왕조와 일제의 상고사 지우기 작업을 통해 단군왕조때 부터 드넓은 대륙을 호령했던 우리민족의 역사가 점차 희미해져 갔다.
상고사 역사서를 통해 추적한 대륙고려
한반도에는 고려 유적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고려는 세계를 감동시킬 수 있었던 문화와 그에 상응하는 국력을 지니고 이웃했던 나라들과 활발한 교류가 이뤄졌던 나라였음이 틀림없다.
그런데 오늘날 한반도에서는 화려했던 고려가 남긴 역사문화 유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나라 역사학계에서는 고려의 도읍지가 한반도 경기도에 위치한 개성이었다고 인식하고 있는데 개성에는 고려사에 기록된 내용에 부합되는 역사유적이 없다.
외성, 내성, 궁성 등 고려시대에 축조된 성곽의 자취가 없고, 궁궐이나 사찰, 그리고 사당이나 공공건물, 그리고 민가의 자취나 흔적이 전혀 없다.
고려사의 기록이 거짓이 아니라면 한반도의 개성이 고려의 도읍지 개경이라는 인식은 허구에 바탕을 둔 가설일 뿐이다.
한반도가 고려의 강역에 포함되는 주변지역이었다는 가설은 성립될 수 있지만 고려의 중심강역은 대륙에 있었고, 도읍지 또한 대륙에 있었던 건원칭제국이었다. 건원은 독자적인 연호를 세움을 뜻하고, 칭제는 그 나라의 왕을 황제라 칭하는 것을 말한다.
대륙고려를 이해하기 위한 중국지도
대륙고려의 사실을 뒷받침하는 역사유적
고려의 도읍지 송악은 하남성河南省 공의시鞏義市였고, 개경은 하남성 등봉시登封市였다.송악과 개경은 인접한 곳으로 대륙 하남성 공의시와 등봉시에는 오늘날에도 고려의 궁궐과 사당 그리고 사찰들이 남아있다. 하남성 등봉시에는 그곳이 고려의 도읍지였음을 검증하는 특징적 유적이 있다.
고려가 몽골의 침략을 피해 옮겼던 피난 도읍지 강도는 강소성江蘇省 진강시鎭江市, 송도는 강소성 남경시南京市였다. 이곳에 지금도 남아있는 궁궐, 사찰 등의 역사유적을 고려사의 기록과 대조해 보면 그곳이 고려의 피난 도읍지였음을 쉽게 알 수 있다.
한반도의 강화도에는 고려의 유적이 없다. 팔만대장경의 목판을 만들었던 선원사는 강소성 진강시에 있지만 강화도에는 그 흔적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또 강도는 강화가 아니다. 고려 때 강화는 송악과 개경에 인접한 곳으로 강도와는 엄청난 거리에 떨어진 곳이다. 강화는 하남성 의마시義馬市였다. 이곳에 고조선 때 쌓은 삼랑성과 고려 때의 이궁離宮이 있다. 강도는 송도와 인접한 곳이고, 강화는 송악과 인접한 곳이었음을 확실하게 구분해야 한다.
고려가 홍건적의 침입으로 옮겼던 임시 도읍지 복주福州는 절강성浙江省 항주시杭州市에는 아직도 화려한 건축물들이 남아있어 그곳이 고려의 황제가 머물던 곳이었음을 웅변하고 있다.
고려의 청주는 산동성山東省 임기시臨沂市이다. 이곳에는 금속활자 인쇄시설을 갖추었던 외흥덕사外興德寺가 있다.
외흥덕사는 한양漢陽(산동성 제남시濟南市)에 있던 흥덕사興德寺에 딸린 절이었다. 지금 한반도에서는 흥덕사와 외흥덕사는 그 흔적도 찾지 못했지만, 대륙 산동성에서 그 실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프랑스 군인들이 강화도에서 불법 약탈해간 직지直旨를 간행한 곳 역시 대륙의 산동성이었다.
고려의 덕수는 하남성 낙양시洛陽市이다.
고려의 궁궐과 사찰은 왜 중국에 남아있을까
고려의 최대 사찰이었던 흥왕사興王寺라는 곳이 있다. 건축물의 규모가 거대해 조선초 축조한 경복궁 건축규모의 10배 이상이었고 승려가 만 명이 넘었다고 고려사에 기록돼 있는데, 한반도에는 그러한 규모의 절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날 대륙 하남성 낙양시에 지금도 수십군데 사찰건물이 남아있고 유적을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곳이 한漢, 당唐의 도읍지였다는 것은 억지일 뿐이다. 당은 불교를 억제했던 나라였고, 기존에 설립된 사찰도 없애고 수도권 밖으로 내몰았다.
오늘 날 한반도 개성과 그 주변에는 사찰 건물이 즐비했다고 하는 흥왕사는 그 자취를 찾을 수 없고, 덕수라는 지명도 없다. 한반도로 고려를 축소조작했떤 조선왕조는 한반도 개성부근에 고려의 궁성조차도 재현시키지 못하는 형편에 흥왕사라는 거대규모의 사찰유적을 극히 일부라도 재현시키기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고려가 곳곳에 축조한 궁궐의 흔적은 대륙에만 존재한다
송악과 개경, 동서남의 삼경, 신경, 강도, 송도, 임진, 한양, 송경에 고려의 궁궐이 있었음은 엄연한 사실이며 삼소에도 당연히 고려의 화려한 궁궐이 있었다.
고려의 임시도읍지였던 나주, 복주, 청주, 덕수에도 궁궐이 있었지만 그 이외에도 고려는 여러 곳에 이궁과 행궁을 축조했다. 그 중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곳은 강화江華, 광주廣州, 백주白州, 진위振威, 그리고 봉화奉化 등이다.
한반도에 이곳과 지명이 같은 곳은 있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고려의 궁궐은 찾아볼 수 없고, 또 그 흔적조차 없다.
광주는 산동성 태안시泰安市, 백주는 산서성山西省 예성현芮城縣, 진위는 하남성 녹읍현鹿邑縣, 봉화는 강소성江蘇省 소주시蘇州市이다. 이곳에는 고려의 궁궐유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고려는 목조건축물, 금속활자, 도자기, 황칠 등 세계 어느 곳에도 없는 찬란한 문화유산을 남긴 나라였다. 전성기 때의 국토는 하남성을 중심으로 하북성, 산동성, 강소성, 안휘성, 절강성, 강서성, 복건성, 호북성, 호남성의 전지역과 산서성, 섬서성의 대부분, 그리고 한반도와 만주를 그 통치영역으로 관장했던 거대한 건원칭제국이었다.
그 문화유산은 조선이 대륙에서 반도로 이전할 때 팔만대장경판, 도자기, 불상과 불탑 등 극히 일부 옮겨온 것도 있었지만 그 대부분은 대만의 고궁박물관과 중국 각성의 역사고고박물관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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