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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 잡설과 하만 피닉스 200 리뷰
이 리뷰는 세기 P&C에서 하만 피닉스 200 제품을 협찬받아 사용 후 제작되었으며 제 개인적인 의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2023년 12월 우리에겐 가장 대중적인 흑백필름 제조사 중 하나로 유명한 일포드에서 컬러 네거티브 필름을 출시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모회사인 하만 테크놀로지가 하만포토란 별도의 새 브랜드로 나눠서 출시한 것이지만, 흑백 필름 일변도의 기업이 자신들의 기술만으로 컬러 네거티브 필름을 만들어낸 것이다. 사실 일포드가 컬러 필름에 관심을 보인 건 이번이 최초는 아니다. 30년대에는 Dufay라는 브랜드를 인수하는 형태로 컬러 네거티브 필름을 낸 적도 있고 이후로도 영역을 넓혀 60년대, 심지어 90년대까지도 여러 사족이 붙긴하지만 컬러 네거티브와 컬러 포지티브 필름으로 나름의 명맥은 이어오고 있었다. 사진에서 필름의 시대가 저물어 버린지도 이미 20년은 더 넘어가는 동안 수많은 메이저 브랜드가 사라지고 점차 제품군을 단종시켜 나갔으며, 몇번의 레트로붐 끝에 더 많이 태어난 신생 브랜드들이 필름 시대 부활의 기수를 자처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기존의 코닥 VISION 시리즈나 후지 Eterna 시리즈 같은 영화용 필름, 미사용 재고로 보관만 하던 특수목적용 필름 등을 단순히 소분하거나 재가공 처리 하여 그저 필름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음을 알리기 위한 잔불에 불과했다. 물론 이 시대에 새 필름을 개발하려던 노력이 없었던 건 아니다. 멀게는 역사의 끝으로 사라져버린 폴라로이드가 The impassable Project 사의 개발로 2010년 다시 부활했고, 코닥은 한번 단종했었던 자사 제품들을 복각하거나 다른 판형의 제품들로도 새롭게 내놓았으며 ADOX나 Ferrania, ORWO 같은 옛 브랜드들 또한 상대적으로 제조가 쉬운 흑백 필름을 시작으로 컬러 필름 또한 벌써 상용화한 제품이 있거나 한참 개발 중에 있다. 그 바통을 이어받아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된 하만은 필름의 호황기가 다시 부활하기를 염원하며 이 필름에 불사조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사진들은 가장 대표적인 피닉스 200의 작례들이다. 빛이 강한 야외에선 특히 채도가 다소 높게 나오고 다이나믹 레인지가 좁아 밝은 광원과 그 외 영역 사이가 극단적으로 차이나면 색이 날아가거나 죽어버리지만 색표현이 굉장히 강렬하게 선명하고 나름 안정적인 빛 아래에선 크게 튀어 보이지는 않는 필름이다. 하지만 여기엔 몇가지 조건이 붙는다. -첫째, 감도설정과 까다로운 노출값 사실 피닉스는 감도 200짜리 필름이 아니다. 필름은 공통적인 특성상 촬영시 완벽하게 노출값을 지키지 않아도 어느정도 정상톤, 혹은 정상톤에 가깝게 나올 수 있다. 이런 필름이 견딜 수 있는 범위를 필름의 노출 관용도라고 하는데 보통 적정노출보다 어둡게 찍으면 언더, 밝게 찍으면 오버라고 표현하며 이 두가지 모두 필름이 견디지 못하는 범위까지 넘어버리면 이미지의 디테일이 깨지게 된다. 피닉스 또한 이런 관용도를 바탕으로 적절히 써야하는데 아직은 좀 더 기술적 향상이 필요해서 관용도가 좁고 실제 감도도 125 정도다. 위의 두 작례들은 처음 피닉스를 썼을 때 어느정도 관용도가 있을지 몰라 테스트했던 것들인데 윗쪽은 강한 대비를 기대하며 태양을 기준으로 노출값을 잡고 아래쪽은 노출계의 도움없이 써니 16룰을 기준으로 직감적으로 시도했지만, 둘 다 강한 빛으로 대비가 심했던 결과 명부와 암부가 함께 죽어버렸거나 빛과 관용도 모두 부족해서 하늘만 일부 간신히 살아 남았다. 필름 사진은 노출값을 잘못 측정하여 똑같이 사진을 망친다고 해도 밝기를 언더 내는 것보단 밝게 오버로 내는게 후보정으로 살리기엔 더 유리하기 때문에, 이런 실패율을 줄이기 위해선 피닉스의 실제감도와 유사하게 감도는 100으로 맞춰 찍는게 좋다. 사용할 카메라는 제대로 된 노출값을 반영하기 힘들고 스펙에 한계가 있어 그나마 해가 떠있을 때 찍는 편이 좋은 토이카메라보단 제대로 작동하는 노출계와 잘 연동시킬 수 있는 기종들, 특히 전자식 자동 SLR로 쓰는 걸 상당히 권장하고 싶다. 만약 별도의 감도조절이 불가능한 컴팩트 자동카메라 종류에 써야한다면 이런 식의 아이콘들 중 태양 표시가 된 역광보정 기능을 항상 켜서 약 1~1.5 스탑 정도 밝게 찍는 편이 좋다. 위 : 피닉스 200 아래 : 포트라 160NC 위 : 피닉스 200 아래 : 포트라 160NC 위 : 피닉스 200 아래 : 포트라 160NC 위 : 피닉스 200 아래 : 포트라 160NC -둘째, 피닉스 200에게 최적화된 스캐너 세팅. 보편적인 컬러 네거티브 필름과는 제조과정도 다르고 아직 기술적으론 실험적인 필름이기에 피닉스로 무난한 톤의 사진을 얻기 위해선 아예 이 필름 전용으로 맞춘 스캐너 세팅값이 필요하다. 이미지 자체가 안나오는 건 아니지만 기존 필름들과 다름없는 세팅값으로 스캔하면 맨 위에 있던 다른 작가들의 작례만큼 살아난 색 재현력은 나오기 힘들다. 그래서 이 차이를 알기위해 우선 피닉스 200과 유통기한은 지났지만 보존을 잘해서 크게 변질되지 않은 코닥의 포트라 160NC를 똑같은 현상소의 일반적인 세팅값과 비슷한 조건의 장소로 비교 해봤다. 일반적인 세팅으로 스캔한 피닉스 200은 붉은 색과 녹색이 잘 살아나는 편이지만 푸른 색의 경우 연보라색 수준으로 떨어지고, 성능의 한계상 특히 강한 광원이 있어 전체적인 사진에서 대비가 강해지면 암부가 많이 죽는 편이다. 실내에선 빛이 제한적인 환경일 때 노출이 크게 부족하지 않음에도 색의 틀어짐이 강한 편이기도 하다. 피닉스 200 -셋째, 강한 빛의 활용도와 선택. 무엇보다 피닉스에서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인 건 바로 이 할레이션인데, 빛을 받은 피사체의 테두리에 빛번짐이 강하게 끼는 편이다. 이런 할레이션은 호불호가 강하기 때문에 원치 않는다면 역광보단 순광, 또 균등한 빛이 깔리는 실내나 흐린 날도 좋다. 피닉스 200 이 두 사진 또한 스캐너가 강제로 색을 끌어올린 흔적이 희뿌연 회색으로 남을 정도로 노출 언더가 좀 있었지만, 흐린 날씨로 전체적인 대비가 약해지자 오히려 맑은 야외에선 극단적으로 날아가 버리기 쉬웠던 암부가 남아있고 주황빛 톤도 덜한 편이다. 피닉스 200 적응하기까지 조금 까다로운 필름이라 안된다는 말이 많아지긴 했지만 피닉스는 확실히 긍정적인 면에서 필름붐에 한 획을 긋고 있다. 아예 새로운 제품까지 개발해 나가며 꾸준히 개선된 완제품을 출시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잠깐의 유행으론 이룰 수 없는 엄청난 수요가 계산됐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이 100짜리 감도를 가졌음에도 거친 그레인과 과장된 색감은 막연히 입문자들이 필름색감이라고 하는 감성의 영역을 쉽게 표현할 수 있게끔 만들어 주기도 한다. 이 필름을 한줄로 정리한다면 돌아다니며 자동카메라로 가볍게 툭툭 찍고 싶은 필름이라고 하고싶다. ※7월 15일까지 하만 피닉스 200의 공식 유통사인 세기 P&C와 충무로의 현상소 포토마루가 협업하여 현상스캔비용을 피닉스 200에 한해 50% 할인하는 행사도 진행 중이다. - dc official App
작성자 : 찬스킴고정닉
영국군으로 복무한 홍콩인들
홍콩 군사복무단 Hong Kong Military Service Corps (HKMSC, 香港軍事服務團) 중국인들이 영국군에 복무한 역사는 꽤 오래됐다. 1857년 2차 아편전쟁 당시, 세포이 항쟁으로 인해 인도인 병사들에 대한 불신도가 높아진 영국 원정군이 광둥성에 살던 객가인들을 쿨리로 고용하여 병참부대를 운영했던 것이 시초다. 2차세계대전 때는 수백명의 홍콩인들이 영국군에 협조하여 일본군과 싸웠고 일부는 말레이 반도와 버마까지 가서 싸웠다.1945년 2차 세계대전이 종료되고 냉전이 시작됐을 때, 영국은 더 이상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 아니었다. 전후복구 때문에 군축은 확정됐고 그동안 키워온 군사력은 줄어들었다. 그 많던 식민지들은 하나둘 씩 독립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극동의 진주인 홍콩은 1997년까지 영국령으로 남아있어야 했다. 중국대륙이 공산화될 것이 확실시되자, 영국 정부는 홍콩방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중 현지 중국인들을 모병하여 전투부대를 만들자는 의견이 나왔고, 이것이 HKMSC의 시작이었다.홍콩 영주권이 있는 홍콩인들은 누구나 입대신청이 가능했다. 18주의 훈련기간을 거쳐 '대영제국의 군인'이 되는 순간부터 4년 의무복무를 해야했다. 장기신청으로 최대 22년까지 복무할 수 있었다. 이들은 구르카처럼 단일부대로 운영된 것이 아니라 카투사처럼 홍콩 주둔 영국군 각부대에 소대 단위로 배치됐다. 광둥어와 영어가 능통했던 HKMSC 대원들은 영국군이 현지인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과정에 반드시 필요했다. 특히 소요사태가 많았던 50~60년대에는 HKMSC는 홍콩주둔 영국군의 귀중한 인재풀이었다.1960년대 HKMSC의 총 병력은 약 6,000명에 달했다. (주: 참고로 당시 홍콩에 주둔하던 영국군은 최대 4~6만명에 달했다.) 이후 중공과의 화해무드가 진전되자 홍콩주둔 영국군의 규모가 점차 줄어들었고 HKMSC의 인원수도 조금씩 축소됐다. 이후 70년대를 거쳐 HKMSC 부대규모는 1,500~1,600명 가량으로 고정됐다.HKMSC는 당대 홍콩경제 수준에 비해 매우 좋은 조건의 직장이었다. 일단 병사들의 월급은 홍콩인들의 평균월급보다 30~40% 더 많았다. 대표적인 예로, 70년대에 입대한 한 기수는 18주의 훈련을 견디다 못해 일부 훈련병들이 첫휴가 때 나가서 복귀하지 말자고 모의를 했었다. 하지만 수료식과 함께 받게 된 첫 월급봉투에 담김 480 홍콩달러(주: 당시 홍콩 사회초년생의 평균월급이 350 홍콩달러.)를 보고선 'God save the Queen!'을 연창하며 유니언잭에 대한 충성심이 폭발했다고 한다.게다가 홍콩인들에게 영국군의 이미지는 엘리트집단이라는 의식이 강했다.(주: 반대로 홍콩경찰은 부패문제로 인해 인식이 좋지 않았다.) 군병원의 복지수준도 민간병원보다 훨씬 좋았다. HKMSC 전역자들은 금융권 보안업계에서 0순위 스카웃 대상이었다.하지만 이와 다르게 인지도와 입대 경쟁률은 생각보다 낮았다고 한다. 일단 홍콩인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국계 인구의 문화적 차이 때문이었다. 많은 중국인들은 자녀들이 군인이 되기 보다는 평범한 회사원이 되길 원했다. 과거 그들이 보아온 군인들, 청나라나 내전기 군벌들의 모습이 투영된 결과였다. 그들의 눈에 군인이란 사람이 할 짓이 못됐다.그리고 높은 수준의 영어실력도 필요했다. 영국군은 구르카병들에게는 명령을 이해하는 최소한의 문해력만 요구했으나, 현지 통역이 주임무였던 HKMSC 대원들에게는 중급 이상의 언어구사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HKMSC 입대 자원자들은 대부분 학교에서 영어성적이 높은 이들로 이뤄져 있었다. 보통 이정도 영어실력을 가진 홍콩인들은 금융권 같은 화이트칼라 직업군으로 갔다. 당시 학교 선생들은 공부는 잘하는데 집안 사정으로 인해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취업을 하려는 학생들에게 차선책으로 HKMSC에 입대하는 것을 권하곤 했다.HKMSC에 문제가 있다면 훈련시절이 부족했다는 점이었다. 이는 홍콩이 워낙 좁아서 군인프라 시설을 많이 확충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래서 HKMSC대원들은 상당수의 주특기 훈련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브루나이까지 날아가서 교육 받고 왔다. 일부 성적 우수생들은 사관후보생이 되어 샌드허스트 단기입교 기회도 받았다. 헌병대의 경우 런던 경시청에서, 의무 주특기들의 경우 런던 의과대에서 부검을 실습했다. HKMSC는 홍콩방위 뿐만 아니라 1990년 걸프전에도 영국군 소속으로 소수가 참전했고 키프로스에 PKO 활동을 하러 가기도 했다. HKMSC에 입대한 대부분의 홍콩인들은 매우 열성적으로 복무했다. 영국군 내부에서도 HKMSC에 대한 평판은 꽤 좋은 수준이었다.HKMSC는 1993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새로운 기수를 받지 않았다. 1997년 홍콩반환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996년 12월이 되자 HKMSC는 공식적으로 해체됐다. 일부 대원들은 다른 영국군 부대에 개별로 복무하였으나 이들 역시 1997년 6월 30일, 홍콩주둔 영국군이 완전히 철수하면서 전부 전역처리 됐다.당시 HKMSC 전우회는 영국법원에 자신들도 구르카병들처럼 영국 시민권을 취득하게 해달라는 청원을 했다. 마지막 홍콩 총독이었던 크리스토퍼 패튼도 영국의회에서 '이들도 대영제국에 충성을 바친 이들이니 부디 외면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영국국적 선발제도(BNSS)에 따라 HKMSC 전역자들 대부분은 이 국적취득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다. 1997년 당해 영국국적을 취득한 HKMSC 전역자들은 15년 이상 복무했던 노병 159명 뿐이었다. 이후로 약 10여년에 걸쳐 HKMSC 전우회는 지속적으로 HKMSC 전역자들의 영국국적 취득 캠페인을 펼쳤다. 하지만 2019년까지 고작 350여명만이 영국 여권을 발급받았을 뿐이었다. 이후 홍콩 민주화 운동을 기점으로 영국정부가 이민법을 파격적으로 개정하여 홍콩인들이 영국국적을 취득하는 절차를 간소화해주면서 HKMSC 재향군인들도 이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이 날이 오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 많은 재향군인들이 세상을 떠났고 상당수는 호주나 캐나다, 뉴질랜드 같은 다른 영연방 국가로 이민을 떠났다. 세월이 흐르면서 중국으로 반환된 홍콩에서 HKMSC 흔적은 점차 사라져갔다. 이들이 쓰던 부대병영은 헐리거나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다. 이들의 역사를 기록하는 곳은 HKMSC 전우회 말고는 아무 곳에도 없다. 이들의 경력은 현재 중국에서 제대로 된 군복무로 취급되지 않는다.
작성자 : ㅇㅇ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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