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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 이웃집 가이드 - 4

벼와쌀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4.03.10 15:14:34
조회 2490 추천 88 댓글 33

*센티넬버스, 현대물, 엘산나 & 안넬사
*등장인물은 유러피안이나, 작가의 견문이 좁아 픽 속 여기저기 킴취적 요소가 있을 수 있음. 많이 있음. 양해 바람.











이웃집 가이드
1  2  3

 

 

4



 

안나는 고개를 숙여 노트에 쓰인 필기내용에 집중했다.

 

이 행동의 인과는 언급할 필요가 있다. 노트에 쓰인 내용에 집중하기 위해서 고개를 숙이는 게 일반적인 경우이나, 안나는 그와 반대로 고개를 숙이기 위해 필기를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안나는 공부에 집중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집중하지 '못'했다. 그녀는 맞은편에 앉은 엘사가 대화를 걸어올까봐 두려웠다. 대화뿐이랴. 안나는 그녀와 눈도 마주칠 수 없었다. 그래서 필기를 읽고, 또 읽는 것에만 시각능력을 썼다. 아마 같은 내용만 열두 번은 읽었을 것이다. (사실 읽는다기보단 '쳐다보고' 있었다.)

 

안나는 엘사로 부터─그녀와 눈을 맞출 가능성이나 대화할 여지 같은 것들로부터 도망 중이었다. 여느 도망자들 처럼, 이따금 추격자─엘사의 동향을 살피면서.

 

'미치겠네. 진짜 더워.'
도망에 지친 안나는 땀이 났다.
'망할 정전.'
망할 에어컨. 그녀는 전기가 없으면 아무 쓸모도 없는 에어컨을 원망했다. 하지만 그 보다는, 자신의 배와 등에서부터 올라오는 후끈 열기가 더 증오스러웠다. 뜨거운 체열은 안나를 태울 기세로 이글거리며 그녀가 갈증을 느끼게 했다. 안나는 몸을 일으켜 물을 마실지 어떨지에 대해 고민하다가─그냥 앉아 있기로 했다. 최대한 조용히. 마치 이 공간에 없는 사람처럼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안나는 생각했다. 엘사의 눈에 띄는 행동이나 그녀가 말을 걸만한 행동은 절대 하지 말아야 했다. 습하고 더운 적막이 안나네 부엌을 데웠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진짜... 괜찮았는데.

 

그랬다. 초에 불을 붙였을 때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좋았다. 현대에 촛불로 공부한다는 건 뭔가 바보 같고 웃겼지만 촛불의 은은한 빛은 그 푼수 같은 느낌을 압도할 만큼 로맨틱했다. 촛불은 안나를 들뜨게 했고 그녀가 "무슨 옛날 같다."며 까르륵거리게도 했다. 그건 '마치 중세 시대 사람이 된 기분이다.' 라는 의미의─헛소리였다. 안나는 그 실없는 말이 분위기를 더욱 포근하게 만들 줄은 몰랐다. 사실 결정적으로 분위기를 이완시킨 건 잇따른 엘사의 대사였지만.

 

"그러게, 둘이서 너네 집에 있는 거 오랜만인 거 같아."
엘사는 평소에도 안나의 말귀를 단박에 못 알아 들어서 안나를 약간씩 짜증 나게 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엘사의 곡해는 안나를 기쁘게 했다. 안나는 본래 전달하려던 의미보다 엘사의 해석 쪽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엘사의 말대로, 두 소녀가 같은 지붕 아래 있는 건 무척 오랜만이었다. 어릴 적엔 서로의 집을 방문하는 게 당연할 만큼 가까운 사이였지만, 어느날 모르는 사람처럼 멀어져 버렸고 마주치는 것 조차 어색한 관계가 되버렸지. 그 사실은 안나를 슬프게했다. 그런데 안나가 고등학생이 된 올해. 두 사람의 유대는 다시 시작됐다. 안나는 그게 반가웠다. 하지만 엘사는 그 반가움을 배반했고 이중인격자처럼 굴며 안나를 괴롭게 했다. 바로 오늘 낮까지도.

 

그런데 엘사가 안나네 집에 찾아와 초에 불을 붙인 이 순간. 두사람의 관계는 예전의 좋았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안나는 엘사 또한 관계의 회복세를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와, 언니 가방 진짜 빵빵하다. 사실 가출한 거 아냐? 막, 옷이랑 샴푸같은 거 싸서."
그래서 낄낄대며 농담을 던졌다. 엘사한테 악의가 없는 '진짜 농담'을 하는 게 대체 얼마 만인지. 안나는 엘사의 대답을 기다리며 '자신을 얕잡아보는 엘사'에게 저항하기 위해 그간 얼마나 유치하고 못되게 굴었는지를 생각했다.

 

"그냥 급하게 나오느라 이것저것 넣었더니... 가출한 건 아냐. 그래도 너와 네 부모님이 허락한다면, 될 수 있는 대로 오랫동안 여기 있고 싶어."
그리고 엘사의 진중하고 침착한 대답을 들은 뒤, 그 행동들을 반성했다. 저 따분할 정도로 차분하고 예의 바른 엘사가 악의를 갖고 나를 괴롭혀왔다니.대체 왜 그렇게 생각했던 거지? 그러고보면 '엘사가 안나를 얕잡아 본다.(혹은 싫어한다)'는 명제가 참인지 거짓인지 확인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엘사가 자신에게 던지는 불쾌한 유머와 그녀가 강제적으로 시도하는 끈적한 스킨십 등등을 토대로 '나를 얕잡아 보는구나.' 하고, 잠정적으로 단정해왔을 뿐. 안나는 자신의 미흡한 추리력과 비약적인 판단이 엘사와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켜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는 자신의 경계심이야말로 엘사와의 관계에 있어 '유일한' 문제점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안나는 이제 그런 소모적이고 부정적인 감정으로 엘사를 재는 건 정말 그만둬야겠다고 결심했다.

 

"당연하지! 당연히 오래 있어도 되지."
윽, 그래도 이 말은 좀...
안나는 초조해졌다. 당연하다는 말을 두 번이나 할 필욘 없었다. 아니, 그 말은 아예 말걸. '그래도 돼!' 정도가 좋았는데. 너무 갑자기 다 내어줄 사람처럼 말했잖아. 안나는 자신이 뱉은 허락의 표현이 과장되게 느껴져서 창피했다. 엘사가 어색해하면 어떡하지? 그래서 엘사의 눈치를 살피며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다행히 엘사는 고맙다고 대답했고 작게 웃기까지 했다. 안나도 그 대답이 고마웠다. 자신이야말로 허락을 받은 것 같았다. 엘사에게 좀 더 친하게 굴어도 된다는 그런.
안나는 친애하는 금발의 뚱뚱한 가방을 가리키며 농담을 덧얹었다.

 

"그전에 이 수상해 보이는 가방을 좀 검사해 봐야겠어."
수학여행 온 중학생 마냥 술 담배를 싸온 건 아니겠지? 그럼 정말 곤란한데. 안나는 자기 유머에 심취해 낄낄거리다가─후회했다.
제발 좀 침착해 봐. 엘사랑 다시 친해진 지 5분도 안 됐어! 안나 내면의 다른 안나가 호통쳤다. 오늘 낮엔 짜증 난다고, 꺼지라는 듯이 말해놓고. 지금은 엄청나게 친한 것처럼 대하잖아. 엘사가 얼마나 황당하게 느끼겠어. 부담스러워 할거라고. 안나의 이성은 그녀 자신을 풀죽게 했다.
대신 엘사의 말과 행동이 안나를 재기시켰다.

 

"그래. 난 손 좀 씻고 올게."
엘사는 그게 별거냐는 투로 짤막하게 대답한 다음, 또 한 번 웃었다. 그리고 어깨에 둘러메고 있던 가방을 안나에게 맡기고 화장실로 사라졌다. 엘사가 건넨 무거운 가방은 안나의 팔을 약간 내려앉게 하는 대신에, 그녀의 기분을 더 없이 들뜨게 했다.

 

'그래.' 래!
안나는 엘사의 두 음절 짜리 대답이 좋아서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 허례허식 없는 짧은 대답은 안나를 몹시 편안하게 만들었다. 웃음은 어떻고. 엘사의 내리깐 눈꺼풀과 날숨 섞인 웃음소리는 뭔가 무심하면서도 다정한 느낌을 풍겼다. 당연한 것처럼 안나에게 가방을 맡긴 다음, 제집인 양 안나네 화장실을 들어가는 행동도 좋았다. 그건 엘사도 안나 자신을 편하게 여긴다는 표식 같았다.

 

안나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함박웃음을 지었다. 싸웠었느냐고 하면, 그건 아니었지만─어쨌든 엘사와 화해하고 그녀와 다시 가까워진 것 같아서 행복했다. 안나는 자신의 옆자리에 가방을 놓고 발을 동동 굴리며 엘사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엘사가 돌아오질 않았다.

 

"언니!"
따분해진 안나는 화장실 속의 엘사를 불러서.

 

"응?"
"사실 똥 싸는 거지?"
또 장난쳤다.

 

푸-깔깔! / 아니거든.
안나가 자지러지며 터뜨린 웃음소리와 화장실을 맴돌며 웅웅거리는 엘사의 대답이 교차했다. 붉은 머리는 거의 흐느끼면서 식탁 위에 엎어졌다. 안나는 열일곱 살이었지만 '똥'이니 '방귀'같은 단어를 발음하거나, 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땐 꼭 일곱 살 마냥 재밌어했다. 어우, 손 되게 오래 씻네. 일곱 살 마냥 참을성이 없기도 했다.
안나는 지루해졌다. 그래서 그냥 먼저 공부를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공부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왠지 엘사랑 좀 더 시시덕거려야 공부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안나는 펼쳤던 책을 도로 덮고 턱을 괸 채 엘사를 기다렸다. 그러나 엘사는 몇 분이 지나도 나오질 않았다. 언닌 정말 깍쟁이야. 안나는 엘사가 사실은 '큰 볼일'을 보는 중일 거라고 확신하며 시간을 죽였다. 참 심심했다. 그때 엘사의 터질 것 같은 가방이 시야에 들어왔다. 안나는 아까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전에 이 수상해 보이는 가방을 좀 검사해 봐야겠어.'
'그래. 난 손 좀 씻고 올게.'

 

...분명히 '그래.'라고 했지.
가방을 검사한다는 말은 순 농담이었는데. 따분할 대로 따분해진 안나는 정말로 가방을 검사하고 싶어졌다. 안 되지, 안돼. 남의 프라이빗한 물건에 함부로 손대는 건. 그래서 그녀의 양심이 그녀를 도리질치게 하고 참게 했다. 하지만 안나의 머릿속은 이미 가방과, 그 속을 살펴보고 싶다는 욕구에 점령당해있었다.

 

그래도 보면 안 돼.
정말?
아니.

 

그녀의 양심은, 호기심과는 죽이 잘 맞는 편이었다. 안나는 양심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가방을 품 안으로 당겨 그 외관을 살폈다. 차분하고 심플한 디자인의 백팩으로 아무런 흠도, 때도 없이 깔끔했다. 지금은 뚱뚱하게 부풀어서 그 멋을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본래는 꽤 예쁜 모습일 것 같았다. 좀 비싸 보이기도 했다.
대체 뭘 이렇게 넣어온 거람. 막 1년치 공부할 거 챙겨온 거 아냐? 다음으로, 가방 속이 궁금해진 안나는 내용물을 상상하며 지퍼 고리를 붙들었다. '너무 좀 막 나가는 거 같기도 한데.' 하지만 막상 지퍼를 열자니 죄책감이 들어서 망설여졌다. 그래도 죄책감보다는 '이런 행동이 용서될 만큼 엘사와 가까워졌다'는 확신이 더 강했다.

 

와, 이 언니 은근 칠칠치 못하네. 엘사의 가방은 입을 열자마자 토악질을 했다. 필통과 노트 등이 내압을 이기지 못하고 터져 나왔다. 개중엔 무슨 쓰레기 같은 것들도 있었다. (샴푸나 옷은 없었다.) 안나는 그게 재밌게 느껴졌다. 조신한 엘사의 본모습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기 때문에. 엘사네 반 친구들은 엘사의 이런 면을 알까? 아무도 모를 것 같아. 안나는 속으로 자문자답하며 키득거렸다. 그녀는 오직 자신만이 이 가방 안을 볼 수 있다고 단정하며 정체 모를 우월감과 자부심을 느꼈다. 그래서 거드름을 피우며 쏟아진 물건들을 주워 들고 진짜로 검사하는 양 감상했다.

 

오, 필통. 시크한데. 필기구들도 심플하고... 노트 필기 진짜 깔끔하다! 글씨 되게 작게 쓰네. 이 쓰레기는 뭐, 영수증 같은 건가. 언니도 참. 안나는 혀끝을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검사 놀이'에 잔뜩 심취한 상태로, 어떤 종이뭉치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그걸 펼쳐서 내용을 살폈다. 종이엔 엘사의 작고 깨끗한 필체로 무어라 쓰여있었다. 인생계획. 제목으로 판단되는 상단의 글귀는 안나의 흥미를 자극해서 그녀가 그 아래 내용도 읽어내리게 했다.

 

계획 0. 부모님께 성 소수자 인권에 관한 비디오를 은근슬쩍 자주 보여드릴 것.

 

─이게 뭐야!
'인생계획'은 첫 문장 부터 안나를 경악시켰다. '성 소수자'라는 단어가 특히 그랬다. 안나는 성 소수자에 대해 별 편견이 없긴 했지만, 그럼에도 그 단어에는 그녀를 불편하게 만드는 마력이 깃들어 있었다. 안나는 이 글을 읽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종이를 도로 구겨서 가방에 다시 넣었다. 아니, 거의 쑤셔 박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미 읽은 내용을 잊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인생계획'의 첫 문장은 안나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계획 0. 부모님께 성 소수자 인권에 관한 비디오를 은근슬쩍 자주 보여드릴 것.

 

세상에, 내가 대체 뭘 본 건데? 성 소수자 인권에 관한 비디오? 그걸 부모님께 보여주는 게 첫 번째도 아니라, 영 번째라니? 놀란 안나가 구겨진 종이를 향해 여러 가지를 물었지만 구겨진 종이는 침묵하며 그녀의 능동적인 추리를 유도했다.

 

'...진짜로 엘사가 쓴 걸까?'
안나는 '인생계획'의 작자를 정확히 알고 싶어졌다. 이 구겨진 종이가 엘사의 가방에서 나왔다는 점. 엘사의 노트에 쓰인 글씨체와, '인생계획'의 글씨체가 거의 흡사했다는 점 등등을 미루어 볼 때─
'인생계획'은 엘사가 쓴 글인, 거겠지.
엘사가, 이웃집 엘사가 '성 소수자' 어쩌구 하는 글을 쓴 게 맞, 는 거겠지?
안나는 엘사가 '인생계획'을 '썼다'고, 단정짓기 힘들었다.(혹은 단정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인생계획'을 엘사가 쓴 거라면─부모님께 성소수자 인권에 관한 비디오를 보여드려야 하는 사람이 엘사라면. 엘사는, 안나의 묵은 추측대로 동성애자일 확률이 높았으니까!

 

안나는 언젠가 '엘사가 동성애자가 아닐까?' 하고 추측한 적이 있었다. 냉정하고 딱딱한 말투, 배려심 없고 눈치 없는 행동, 이성에 대한 무관심 등은 보편적인 '여성스러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야, 그쪽 세상 사람이라고 해서 무조건 '여성스럽지 않다'던지 한건 아니겠지만, 엘사 특유의 얌전함 언동은 내향적인 '성향' 자체에서 비롯된다기보단 '무언가 감추어야 할 게 있어서 나설 수 없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 그녀의 조용하고 차분한 행동들 속에서 이따금 새어나오는 우악스럽고 난폭한 유머들이 그 분석을 근거했다. 엘사는 언제나 뭔가 어색하게 굴었다. 그녀에겐 알 수 없고, 미심쩍은 구석이 많았다. (그리고 그것들은 안나를 짜증 나게 했다.)
물론 그런 것으로는 알 수 없는 노릇인데다, 함부로 남의 정체성을 재는 건 실례여서 안나는 곧장 추측을 관뒀다. 하지만 그 오래된 추측은 '얕은 수면'에 빠져있었고 지금 다시 깨어나 기능하려 했다. 엘사는 정말로 동성애자인 걸까?

 

안나는 추측을 초월해, 아예 가정을 세웠다. 엘사가, 엘사가 정말 도, 도, 동성애자라면? 그렇다면─ 나를 만진 것도, 나한테 잘해준 것도 어쩌면... 아, 절대 안 돼! 안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불완전한 가정을 지워냈다. 그리고 엘사와 관련된 모든 기억과 경험들이 떠오르지 않게끔 스스로를 다스렸다. 지금 그녀가 느끼는 경악감이 그것들을 왜곡하려 했기 때문이다.

 

'네가 정말 필요해.'
예를 들면, 엘사가 오늘 낮에 던진 이 말의 근간에는 우정 외의─혹은 우정 이상의─감정이 숨어있을 것만 같은... 미친, 말이 되니! 안나는 손바닥이 끝나는 부분으로 관자놀이를 눌러서 생각을 억제했다.

 

'인생계획은 엘사가 쓴 게 아닐 거야.' 안나는 그렇게 단정 짓고 정색했다가─ '아니, 엘사가 쓴 게 맞을지도.' 울상을 지었다. '글씨체를 다시 한 번 확인해 봐야겠어.' 붉은 머리는 도전적인 눈빛으로 종이를 쏘아봤다. 하지만 '다시 종이 펼쳐보기'에 정말로 도전할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한 행동들만 쳐도, 이미 너무 무례했다. 남의 가방을 함부로 뒤지는 건 도리가 아니었다. 물론 엘사가 '가방 검사'에 응하긴 했지만 그건 그냥 장난이었다. 설령 그녀가 진심으로 '가방 검사'를 허락했더라도, 몹시 사적이여 보이는 글을 주인 몰래 읽는 행동이 그 허락의 범주에 들 것 같지는 않았다. 또 어쩌면 '인생계획'에 엘사가 아닌 그녀 지인의 비밀이 쓰여있을 수도 있었다. 첫 문장 만큼 파격적인 타인의 비밀이.

 

예를 들면 이렇게 쓰여있을 수 있었다.

 

계획 0. 부모님께 성 소수자 인권에 관한 비디오를 은근슬쩍 자주 보여드릴 것.
계획 1. 그렇게 동생 앨버트의 커밍아웃을 도와주고, 좋은 누나라는 이미지를 남길 것.

 

잠깐, 엘사는 외동인데. 안나는 다른 예를 지어냈다.

 

계획 0. 부모님께 성 소수자 인권에 관한 비디오를 은근슬쩍 자주 보여드릴 것.
계획 1. 오래간 교제해 온 동성의 급우 마리안느와 성공적으로 결혼할 것.

 

마리안느는 또 누구야! 안나는 허공에 손을 저으며 자신이 든 가정을 부정했다. 아무튼 '인생계획'에 이와 비슷한 내용이 쓰여있다면 절대 함부로 봐선 안 됐다.
그럼에도 안나는 '인생계획'이 적힌 종이뭉치에서 눈을 떼기 어려웠다. 솔직히, 자신이 모르는 진실이 쓰여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당장 펼쳐보고 싶기도 했다.

 

마저 읽어 볼까?

아니, 역시 말까.

으으─그냥 살짝, 한 줄만 더 읽어 봐?

'아우, 처음부터 가방을 뒤지는 게 아니었는데...' 안나는 신음하며 후회했다. '엘사가 정말 동성애자라니...' 이어서 막연한 가정과 함께 탄복했다가 '아니. 그 한 줄로 단정할 순 없어. 실례잖아.' ─엘사에게 미안해했다. '엘사는 대체 저기에 뭐라고 썼을까? 애초에 엘사가 쓴 게 맞긴 해?' 궁금해하기도 했다. '그 잠깐이 지루해서 남의 가방을 뒤지다니!' 그리고 자신에게 실망한 다음 '가방 뒤지지 말걸!' 후회와 재회했다.

 

안나 속에서 여러 가지 감정들이 계절처럼 순환했다. 그것들은 안나에게 각기 다른 명령을 내렸다. 무례한 행동은 이 이상 하지마. 가방에서 꺼낸 물건들을 도로 넣고, 아무 일도 없었단 듯이 굴어. 미쳤어? 종이나 다시 펼쳐서 마저 읽어봐. 아니, 아주 읽지는 말고 필체만 좀 확인해봐. 그보다는 일단 엘사 한테 대체 뭐하느냐고 물어봐, 화장실에 너무 오래 있잖아. 안나는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명령들은 서로 충돌했기 때문에 모두 해내는 건 무리였다. 안나는 그냥 눈을 질끈 감고 가장 따르고 싶은 명령에 응했다.

 

그녀는 종이를 다시 펼쳤다.
난 나쁜년이야. 안나는 미간을 구기며 스스로를 비난했다. 난 진짜 천하의 나쁜년이야. 안나는 자신을 욕하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왜냐면 진짜로 '인생계획'을 읽어버리자고, 결심했으니까. 누군가 제 비밀을 음흉한 방법으로 알게 되더라도 용서할게요, 하느님.

 

안나는 다른 감정들이 내지르는 도덕적인 의견들을 무시하고, 펼친 종이의 글귀를 읽었다. 인생계획. ─모로 봐도 엘사의 글씨야. 안나는 복잡한 심경이 담긴 숨을 토하며 그 아래도 읽었다. 계획 0. 부모님께 성 소수자 인권에 관한 비디오를 은근슬쩍 자주 보여드릴 것. 붉은 머리는 '성 소수자' 라는 단어의 주술에 저항하면서 그 다음 문장으로 넘어갔다. 1. 좋은 대학에 진학한다. 뭐야, 생각보다 평범한 내용이네. 안나는 안심하면서도 실망했다. 또 다음은─ 2. 좋은 대학을 무사히 졸업하고 좋은 직장을 구한다. 고? 흠, 그리고...

 

"안나."

 

벌컥하고 화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인생계획'의 작자 되는 엘사의 음성이 안나를 습격했다. 안나는 정말 숨이 멎을 만큼 놀라서 그대로 기절할 뻔했다. 그럴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동물적인 본능이 안나의 심장이 뛸 수 있게, 안나가 상황에 맞는 조치를 할 수 있게 도왔다.
우선 안나는, 식탁 위에 쏟아진 물건들을 가방 속으로 쑤셔 넣었다. 그 행동은 '음속과 같다'는 비유가 적절할 만큼 빠르게 진행됐다. 다음으로는 가방의 지퍼를 잠갔다. 그건 초음속의… 광속의 속도로 행해졌다. (안나는 지퍼 고리를 뜯을 뻔했다.)

 

"어어!"
태연한 어조로 엘사에게 대답하는 것도 했다. 안나는 머리를 정리한 다음 곧은 자세로 의자에 앉아 엘사와 마주할 준비를 끝냈다. 완벽했다. 모든 시각적인 요소가 엘사가 화장실에 들어가기 전과 같이 제 자리에서, 원래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런 미친!
손에 쥐고 있는 종이뭉치만 빼면.

 

화장실 문과 부엌은 복도로 연결되어 있었다.
화장실을 나온 엘사가 그 복도를 걸어 부엌에 도착하려면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안나가 '태연할 준비'를 시도할 수 있었던 건 그 약간의 시간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은 거의 탕진한 상태였다. 안나는 문제의 종이뭉치를─아마도 엘사의 가방 속에 가장 먼저 넣었어야 했을 엘사의 '인생계획'을 처리할 시간이 없었다. 복도를 걷는 금발의 발걸음 소리가 부엌 가까이에서 울렸다.

어떡해, 어떡하지?

이미 잠긴 가방 지퍼를 다시 여는 건 위험했다. 가방의 주인에게 그 광경을 목격 당할 가능성이 컸다. 그렇게 되면 껄끄러운 상황이 연출될 것이다. '뭐해, 왜 남의 가방을 뒤져?' 안나는 그 '껄끄러운 상황'에서 엘사가 할 법한 대사를 상상하자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붉은 머리는 최선을 다해 머리를 굴렸다. 나 어떡해. 이 종이 어떻게 하냐고!

 

안나가 허둥대는 사이 엘사가 부엌에 등장했다. 안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스위치가 눌려진 로봇처럼 동작했다. 그녀는 종이 뭉치를 엘사의 가방에 넣는 대신, 자신의 호주머니에 쑤셔넣었다. 엘사는 그런 안나와 시선을 맞추며 가까이 다가왔다. 안나는 엘사가 보내는 시선을 받아내며 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으려고 애썼다. 눈을 피하거나, 당황한 기색을 보여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엘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안나는 엘사가 자신의 속을 읽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안나는─찔렸다. 엘사가 '너 무슨 수상한 짓 같은 거 했어?' 하는 식으로 추궁할까 봐 불안했다. 만약 그런 추궁을 받게 되면, 안나는 의연하게 '아니.'라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 안나는 엘사가 무어라 묻기 전에, 무슨 말이던 하기 전에, 자신이 대화의 주도권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아무것도 읽지 않았으며, 그저 화장실 간 친구를 기다리던 사람처럼 말이다.

 

"왜?"
안나는 엘사의 얼굴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용건이 뭐냐는 듯이 물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네.

 

"손 닦을 수건이 없어."
엘사가 젖은 손을 안나에게 내밀었다.

 

"그래서 이렇게 늦은 거야?"
난 진짜 똥이라도 싸는 줄 알았어~ 빨리 말하지! 안나는 과장된 웃음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다행이다, 아무것도 눈치 못 챘나 봐. 붉은머리는 작은 안도의 숨을 쉬며, 엘사에게 수건을 찾아주려고 일어섰다. 그런데 엘사가 안나의 몸동작을 저지하려는 듯 바짝 붙어서는 게 아닌가. 뭐, 뭐야. 안나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몸을 움츠렸다. 그러자─

 

엘사가 안나를 만졌다.

 

자신의 젖은 양손을 각각 안나의 등과 배 위에 얹고, 문질러댔다. 안나가 앉아 있는 의자에 등받이가 없었다면, 그녀는 뒤로 나자빠졌을 것이다.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엘사는 안나의 티셔츠에 손을 닦는 장난을 쳤다. 안나는 귓전에서 울리는 엘사의 웃음소리 덕분에 그 정확한 의도를 알아챌 수 있었지만, 차마 웃지는 못했다. 엘사가 취한 '장난의 동작'은 너무나 오묘해서 물기를 닦는다기보다는 섬유 위로 '몸을 만진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심지어 엘사의 손이 두어 번 섬유를 쓸면서 옷자락이 말려 올라갔고 그때 잠깐 드러난 안나의 피부가 엘사의 손가락과 직접 닿기도 했다. 그러니까, 어쩌면 도, 동성애자일지 모를 동성의 손이 안나의 속살과 접촉했다. 안나는 질겁했다.

 

엘사의 손은 이상할 정도로 차가웠지만, 그녀의 손이 닿은 부위는 타버릴 것처럼 열이 올랐다. 안나는 몸을 떨었다. 엘사의 손바닥에서 정체 모를 전하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그 알 수 없는 전하는 어떤 전류가 되어, 안나의 뇌로 흘러 들어갔다. 전기 자극을 받은 뇌는 두 가지 기억을 순차적으로 재생했다.

 

먼저 재생된 건 친구들과 나누었던 대화의 편린이었다.
때는 2년 전. 안나와 그녀의 친구들─메리다와 라푼젤─은 무리 중 한 명의 집 거실에 늘어져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마 메리다네 집이었던 것 같고, 시간은 새벽 쯤.

술을 마시지 않더라도, 분위기만 잘타면 만취한 사람 (물론 안나는 청소년이라 음주할 수 없지만) 마냥 진솔한 얘기를 떠들곤 하는데 그 때 세사람이 꼭  그런 상태였다. 가족 얘기, 연애 얘기, 개인의 흑역사 등등. 사회 문제에 대한 각자의 의견 같은 것도 심각한 얼굴로 주고받았었지. 그래서 동성애자라는 이상한 소재도 화두에 오를 수 있었던 것 같다.

 

"난 동성애자들 나쁘게 생각 안 해."
"내 말이, 걔네도 사람이잖아."
"걔네가 나 좋다고만 안 하면 되지 뭐."
"맞아, 나 좋다고만 안 하면 됨."
"근데 같은 여자끼리 사귀면 느낌 어떨지 좀 궁금하긴 하다."
"좋을지도 모르지."
"푸하하 미쳤나봐!"

 

각각 다른 사람 입에서 나온 말이었지만, 안나는 어느 게 누구의 말이었는지 정확히 떠올릴 수 없었다. 아니 떠올릴 필요가 없었다. 세 사람 다 똑같은 의견을 갖고 있었으니까. '알고보니 우린 모두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안나는 그 로맨틱한 사실만 간직하고 있었다. 안나는 친구들과 나누었던 대화를 되뇌며, 우정을 곱씹었다. 첫 번째로 재생된 기억은 안나를 약간 편안하게 했다.

 

하지만 곧장 이어서 재생된 두 번째 기억이 안나가 되찾은 평정을 탈환했다. 그 불한당의 정체를 자세히 말하자면, 거의 최근의─바로 방금 전의 기억이었다. 문제의 '인생계획'.

안나는 그걸 읽은 것을 깊이 후회했다. 또 자신의 뛰어난 동체 시력을 원망했다. '성 소수자'라는 단어? 그건 정말 별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엘사가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인생계획'이 적힌 종이를 구겨 숨겼지만, 그 찰나에 읽지 못한 나머지 내용을 읽고 말았다. 진정한 연애니, 신체적 접촉이니 하는 글귀들과─
'안나와 결혼한다'는 문장을!

 

안나와─결혼한다.

 

종이엔 분명히 저렇게 적혀있었다.
아악! 안나는 입속으로 절규했다. 심정 같아선 자신이 엘사의 가방을 뒤졌다는 사실과 그녀의 '인생계획'을 읽었다는 사실. 그리고 거기에 충격적인 내용이 쓰여있었다는 사실 모두를 없던 일로 하고 싶었지만─엘사의 얼굴을 본 순간, 엘사가 자신에게 이상야릇한 장난을 친 순간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 종이엔, 엘사의 '인생계획'엔 분명히 그렇게 쓰여있었다. 안나와, 자신과─결혼하겠다고! 그리고 안나는 그걸 읽었다. 아주 제대로 읽어버렸다.

두 개의 기억은 미친듯이 충돌하며 괴로운 파장을 일으켰다. 안나는 거의 바닥난 이성과 지성을 쥐어짜서, 재생된 기억들의 핵심 요소를 이어 붙였다. 엘사는 내 예상대로 동성애자가 맞아, 맞는 거야. 물론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평범한 성 취향을 가진 나를 좋아하지만 않는다면 문제 될 게 없다고. 그런데, 엘사가 날 좋아하고 있었어. 나랑 결혼하고 싶을 만큼 말야!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즉, 엘사가 나를 좋아하는 건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어.

 

엘사가 나를 좋아하다니... 정말 나를 좋아한다니.
안나는 아득해졌다. 그래서 자신에게 물었다. 진짜 어떡하면 좋아. 엘사를 어떻게 대해야 하지? 그건 몹시 지겨운 질문이었고, 답은 정해져 있었다.

 

일단은, 무시하자.

 

 

*
엘사가 초 심지에 불을 붙였다. 촛불이 어둠을 걷어내고, 주변을 밝혔다.

 

'안나네 집에 온 건 아홉 살 때 이후로 처음이네.'

 

모습을 드러낸 안나네 집은 엘사의 기억과 연쇄되어있어서 그녀의 심리에 어떤 작용을 했다. 엘사는 자신의 낡은 결심 위에 덮어두었던 투명한 장막이 갈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 갈라진 틈새로 죄책감이 새어 들어갔다. 지난날의 결심은 그걸 양분처럼 흡수한 다음, 이렇게 소리쳤다.

 

'너 미쳤어?'

 

엘사는 그 음성을 무시하기 위해서 미간을 잠깐 찡그렸다.
안나네 집에 온 건 아홉살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왜냐면─그래야 했으니까.
어릴 적엔 안나와 무척 친했었다. 엘사와 안나는 서로가 좋았다. 지금은 두 걸음. 그러니까, 당시에는 네 걸음 정도의 거리에 서로의 집이 있다는 게 축복 같았다. 엘사와 안나는 무엇을 하든 무조건 함께했다. 거의 매일 만나서 매일 놀았다. 그걸로도 성이 안 차서, 서로의 집에 매일 방문하기 까지 했다. 둘은 너무 가까워서, 똑같이 생긴 현관문이 둘 달린 집에 사는 한가족 같았다.

 

하지만 어느 날 두 사람의 관계는 끝이 났다. 아니, 엘사가 끝을 '냈'다.
엘사가 아홉 살이 되던 해. 즉, 안나는 일곱 살이었던 해. 엘사는 안나에게 죄를 지었다. 안나에게 끔찍한 화를 입히는 죄. 이상하게도 안나는 그걸 기억하지 못했다. 엘사와, 엘사와의 추억 같은 건 모두 기억하면서도 '그 사건 당시만' 기억하지 못했다. 꼭 기억을 조작 당한 사람 처럼 말이다. 덕분에 엘사와 안나가 계속해서 잘 지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엘사는 그렇게 뻔뻔하지 못했다. 그녀는 속죄하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의 죄 뿐만 아니라, 그걸 저지른 자기 자체와, 자신과 관련된 다른 모든 것들도 안나의 기억 속에서 지워야겠다고 결심했다. 엘사는 안나와의 유대를 끊었다. 그럼 안나와 사이가 멀어져서, 안나에게 별 의미 없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의미 없는 사람을 기억 속에 남겨두는 사람은 없겠지.


속죄의 결심을 다지고 몇 해가 지나자 안나는 정말로 엘사를 잊어버린 것처럼 굴었다. 안나는 엘사를 추억하지도, 찾아오지도 않았다. 결국 엘사와 안나는 마주칠 때마다 처음 본 사이처럼 행동하게 됐다. 마주치는 일 자체가 거의 없기도 했다. 엘사는 친구를 잃은 상실감 때문에 씁쓸했지만, 속죄를 관철했단 사실에 만족했다. 만족해야했다.

 

─그랬는데.
'안나랑 다시 가까워질 생각을 하다니. 제정신이야?'
속죄의 결심이 따지듯 물어왔다. 제정신이냐고. 그 질문은 올해가 시작하고부터, 그러니까 엘사가 안나와 다시 접촉하고부터 꾸준히 엘사를 압박해왔다. 그럴 때마다 엘사는 변명했다. 미친 짓인 건 알지만, 입시 때문에─내 미래 때문에 정말 '어쩔 수 없다'고. 이번에도 같았다.

 

'어쩔 수 없어.'
그래, 어쩔 수 없다고 말하겠지. 엘사 내면의 목소리가 그 변명을 되뇌며 빈정거렸다.
하지만 지금 네가 하는 행동은 여태까지 중에서도 꼽을 만큼 최악이야. 친한 척이 너무 심한 거 아냐? 눈이 있다면 네가 지금 어디 서 있는지를 보라고.

 

엘사는 명령대로, 눈앞에 펼쳐진 장면을 관찰했다. 자기 옆에 서 있는 안나와 그 옆의 식탁과 그 위에 놓인 촛불과 어슴푸레 밝혀진 부엌 전체를. 싱크대 위에 가지런히 정리된 접시들과 깨끗하게 닦인 가스레인지와 닿는 불빛이 적어서 부엌에 비해 어두운 거실도 꼼꼼히 살폈다.
엘사는 죄책감에 숨이 막혔다.
그녀는 안나네 집 안에, 그 부엌에 서 있었다. 당연히 그래도 되는 양 뻔뻔하게. 꼭 어릴 적처럼 스스럼없이 말이다.

 

하지만 안나네 집은 엘사가 어릴 적 봤던 모습과는 달랐다. 엘사는 그 점에 집중했다.
오랜만에 찾아온 안나네 집엔 '반갑다'고 할만한 요소가 거의 없었다. 집의 건축 구조와 추억삼아 남겨 놓은 듯한 촌스러운 머그컵 몇 개를 빼고 나면 낯선 것들 투성이였다. 벽에 붙여져 있던 유아교육용 포스터는 사라져 있었고, 베란다 창문을 덮고 있던 커튼의 행방도 묘연해서 거실이 휑했다. 가구나 가전의 배치도 생소했다. 몇몇은 아예 최신 제품으로 바뀌어 있기도 했다.
가장 괄목할만한 변화를 겪은 건 이 집에 살고 있는 인간 안나였다. 엘사는 아까 낮에도 본 그녀가 새삼 낯설었다. 안나의 이목구비는 그녀가 일곱 살이던 때와는 달리 많이 성숙해있었다. 그것들의 조화로움이 옛날과 같긴 했지만, 얼굴 조형이 풍기는 여문 분위기는 아직도 익숙치 않았다. 열일곱 나이답게 길쭉해진 팔다리도 낯설기는 마찬가지였고, 매사에 좀 더 침착해진 태도나 차분해진 말투 또한 일곱 살의 안나와는 구분됐다. 한마디로 안나는 많이 자랐다. 엘사가 아홉 살이던 때로 부터 10년치나 자라났다. 흘러간 시간은 이토록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그 일이 있고 10년이나 지난거야.' 그리고, 엘사와 그녀의 낡은 과거를 분리시키기도 했다.

 

'속죄는 충분히 했다고!'

 

엘사는 자신을 꾸짖는 내면의 목소리를 향해 처음으로 반발했다. 변명이 아닌, 반발을. 하지만 곧바로 두려워졌다. 과거로부터, 속죄로부터 너무 멀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도덕적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을 잃을 것 같아 겁이 났다. 엘사는 눈썹을 찡그렸다.

 

'...그런 짓을 해놓고 뻔뻔하게 이 집에 들어오다니. 진짜 미쳤어.'
안나가 진실을 알고 있었다면. 그랬다면 내가 이 집에 들어오는 걸 허락했을까? 엘사는 안나네 집에 서 있는 자신의 육체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이질감은 죄책감으로 변해서, 엘사를 옥죄였다. 그녀는 내장이 올라올 것 같은 기분을 꾹 참았다. 애석하게도, 그 사정을 알 리 없는 안나가 천진한 대사로 엘사를 공격했다. 엘사는 내장을 토할 뻔했다.

 

"옛날 같아!"

안나도 엘사 자신이 '10년 만에' 자기네를 방문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안나의 말은 엘사의 양심을 사정없이 찔렀고, 엘사를 괴롭게 했다. 엘사는 평정을 유지하려 발버둥 치며 응수했다. "그러게. 둘이서 너네 집에 있는 거 오랜만인 거 같아." 그 말을 들은 안나는 기쁘게 웃었다. 그녀의 웃음은 엘사의 죄책감을 가중시켰다. 엘사는 차라리 죽고 싶기까지 했다. 물론 그럴 수는 없었다. 엘사는 안나의 웃음을 흉내 내며 그녀가 느끼고 있을 행복하고 반가운 기분에 공감하려고 노력했다.

 

"와, 언니 가방 진짜 빵빵하다. 사실 가출한 거 아냐?"
그러나 이어지는 안나의 농담은 엘사의 노력을 분쇄했다. 가출했냐고? 엘사는 그 말을 농담으로 받을 기분이 못됐다. 안나에게야 농담이었겠지만, 엘사에겐 진실이었다. 엘사는 가출했다. 불량한 사정으로 가출한 건 아니었지만, 아마 부모님 눈엔 그 비슷하게 보였겠지. '발작증세' 때문에 갈 곳이 없었던 엘사는 결국 '진통제 안나'의 집으로 왔다. 공부를 가르쳐주겠느니 뭐니 하는 가짜 친절을 베풀면서. 금발은 자신의 이기심과 거짓된 행동에 이골이 났다. 그럼에도 그녀는 거짓말을 계속했다. 대신에, 염치도 약간 덧붙였다. "그냥 급하게 나오느라 이것저것 넣었더니... 가출한 건 아냐. 그래도 너와 네 부모님이 허락한다면, 될 수 있는 대로 오랫동안 여기 있고 싶어."

 

허락한다면? 당연히 허락하겠지. 엘사의 양심이 엘사의 마지막 대사를 비웃었다.


안나랑, 안나네 부모님은 네가 안나에게 얼마나 끔찍한 짓을 했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고. 그러고도, 네가 안나를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알지 못하지. 안나네 가족들이 너를 내칠 이유는 없는 거야. 너도 그걸 아니까 이 집에 찾아온 거잖아. 모르는 척 양해를 구하다니... 뻔뻔하긴.

 

"당연하지, 당연히 오래 있어도 되지."
엘사가 예상하고 있던 안나의 허락은, 자신의 가식적인 행동을 직시하게했다. 엘사는 자신이 수치스러웠고, 실망스러웠다. 금발은 부모님과 싸웠던 한시간 전 만큼이나 동요했다. 그 반증으로 그녀의 손에 성에가 끼기 시작했다. 보통사람으로 치자면─그녀의 손에서 땀이 차기 시작했다. '병'이 들키겠어. 엘사는 고맙다고 말하면서 안나를 만질 뻔했지만, 엘사의 양심이 그 말과 행동을 동시에 할 수 없도록 저지했다. 엘사는 양심에 투항했다. 그래서 고맙다고 말까지만 한 뒤 그냥 웃었다.

 

"그전에 이 수상해 보이는 가방을 좀 검사해 봐야겠어."

그래. 난 손 좀 씻고 올게. 엘사는, 수학여행이 어쩌구하는 안나의 농담을 한 귀로 흘리며 화장실 안으로 뛰어들어가 문을 잠갔다. 그녀는 불을 켜는 것도 잊고 (정전 때문에 어차피 켜지지도 않았을 테지만) 따듯한 물을 틀어 손바닥의 성에들을 씻어내는 데 집중했다.

 

나가자.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니야.

엘사가 세면대 물을 잠그며 결심했다. 그녀는 그 결심에 몰두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안나를 내 인생에 끌어들이는 것도 그만두자.'
'그냥, 이런 것 전부 다...'
'두통 때문에 그냥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그렇게 말하는 거야.'
미안하다고도 말하고. 엘사는 안나에게 건넬 말을 입속으로 연습하면서 문고리를 돌렸다. 하지만 문고리가 '병' 때문에 얼어 붙어버렸고 그녀는 화장실을 나가는 대신 얼음을 처리하기 위해 끙끙거려야 했다. 엘사는 비참한 기분으로 문고리를 더듬으며 어떻게, 어느 정도로 조치해야 하는 지 살폈다. 그러다가 눈물이 터졌다. 아직도 이 꼴인데 어떻게 집으로 돌아간단 말야! 엘사는 화장실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서러움과 비참함이 터뜨린 눈물 때문이기도 했고, 얼어 붙어버린 문고리 때문이기도 했고, 머리 위에 생긴 주먹 만한 눈구름 때문이기도 했다. 엘사는 눈물을 닦으며 변기 위에 주저앉았다. 진정해야 했다.

 

내가 있을 곳은 대체 어딜까...☆

 

하지만 진정이 안 됐다. 외려, 자신에게 던진 철학적인 질문에 감정이 북받쳐 올라 아예 오열했다. 꼬리가 잔뜩 내려간 엘사의 입은 바보처럼 벌어졌고, 입술 아래의 턱살은 호두껍데기 처럼 추하게 구겨져 경련했다. 정말 아무에게도 보일 수 없는 표정이었다. 다행히 그 얼굴을 볼 수 있는 이는 어둠뿐이었다. 그녀는 감춰야 할 것이 울음소리뿐이란 점에 안도하며 한참을 꺽꺽댔다.

 

"언니."
"응?"

미친 듯이 떨리던 어깨가 평정을 되찾을 때쯤, 화장실 밖의 안나가 농담을 걸어왔다. 사실 똥 싸는 거 아니냐고. 아니거든. 엘사는 그 유치한 농담에 반박하며 웃어버렸다. '...내가 안나랑 농담을 주고받을 자격이 있을까.' 엘사는 자기 행동의 당위성을 재며 몸을 떨다가 '아니, 이런 생각은 그만하자.' 고개를 저으며 계산을 멈췄다. 안나의 농담은 엘사의 기분을 환기했다. 엘사는 그 사실을 그냥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엘사는 눈물을 훔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래, 이제 어떡할 건데. 엘사의 머리가 맑아지자마자, 그녀의 냉정한 이성이 다음 행동을 요구했다. 그 요구는 엘사를 괴롭히는 뉘앙스였지만 엘사는 의연했다. 안나를 계속 이용할 거야. 금발이 확신에 찬 눈을 깜빡이며 다음 행동을 결정했다.
내가 있을 곳? 그야 당연히 가족의 품이었다. 생각해보면, 자신이 했던 이기적인 행동들은 다 가족과 자신을 위해서였다. '합리적인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잖아.' 엘사는 안나네 현관문을 두드리기 직전에 다졌던 결심을 떠올렸다. 병세가 진정될 때까지만, 부모님이 진정될 때까지만 안나를 이용하자고. 엘사는 그 결정에 구태여 낡은 과거를 끄집어내서 매치할 필요가 있는지를 생각했다. 아마, 없었다. 엘사가 안나에게 끔찍한 죄를 지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지금의 안나는 무사했으며 엘사를 싫어하지도 않았다. 그거면 된 거 아닐까?


너무 감정적으로 몰아붙여 져서 생각이 마비됐던 것 같아. 엘사는 오늘 밤 내내 격양되어 있던 자신이 창피해져서, 비웃었다. 어차피 이기적으로 구는 게 최선인데. 눈물과 함께 서러움, 죄책감을 모두 쏟아낸 엘사는 그녀를 지탱해주던─그러면서도 괴롭히던─ 이성보다도 훨씬 이성적인 상태가 됐다. 엘사는 바깥의 안나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만 몇 번 훌쩍인 뒤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허공의 눈구름을 없앴다. 그리고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변기에서 일어났다. 안나 한테 가자. 안전한 환경에서 만족할 만큼 공부한 다음 집으로 돌아가는 거야.

 

결정을 내리자마자, 양심이 난동을 부려댔지만 엘사는 아랑곳 않았다.

 

너 한테 안나를 이용할 자격이 있다고?
-없을지도 모르지만. 어쨌건, 지금의 우리 둘은 꽤 친한 것 같아. 손 정도는 부담 없이 잡을 만큼.

 

네 평범하지 않은 삶에 안나를 끌어들이겠다고?
-가족과 나를 먼저 생각하는 건... 충분히 평범해.

 

밖을 나가려고 다시한 번 더 문고리에 손을 뻗은 엘사는 웃고 말았다. 여름 더위가 얼어붙었던 문고리를 거의 녹여내서, 잡아 돌리기 수월했기 때문에. 이렇게 금방 녹아 없어지는 건데 울기나 하고. 해빙된 문고리는 엘사를 약간 들뜨게 했고, 고취시키기도 했다.
대체 뭘 그렇게 겁냈던 걸까. 양심? 죄책감? 그런 것들이 미래보다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까. 막말로, 안나와의 관계가 내 혈육과 나눠야 할 평범한 평화보다 중요할 수 있을까? 아니었다.

 

'과거는 잊어버려.'

그녀는 자신에게 암시를 걸면서, 당당한 표정으로 화장실을 나왔다. 

 

일단 안나랑 접촉해서, 화장실에 남은 얼음과 냉기들을 없애야 해. 엘사는 철저한 자신의 성격에 긍지를 느끼며 안나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장난을 가장한 스킨십이 실패하자마자 결심과 다짐과 긍지같은 것들이 무너져내렸다. 스킨십 자체는 성공적이었지만 안나가 문제였다. 안나는 엘사의 장난에 아무런 회답도 하지 않으며 싸늘하게 정색했다. 타인의 표정 변화에 둔감한 엘사가 알아챌 정도로. 이런 애였나? 금발은 웃지도, 말하지도 안나가 멀게 느껴졌다. 장난이 너무 과했던 걸까.

 

"미안. 손이 너무 차가웠나?"
엘사가 겸연쩍은 투로 사과했지만 안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안나는 굳은 표정을 일관하며 자기 공부에만 집중했다. 그녀는 입을 꾹 닫고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말은커녕, 엘사와 눈을 맞추는 것 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둘의 시선이 약간이라도 맞을 때면, 엘사는 발악하듯 미소를 지어보였다. 뭔가 뿔이 난 안나를 달래보려고. 그래도 안나는 엘사를 무시했다. 엘사는 불안해졌다. 왜 태도가 변했지?
확신의 에너지 같은 것들로 가득했던 엘사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안돼, 안돼 진정해. 엘사는 '병' 때문에 차가워진 손을 감추기 위해 식탁 밑으로 팔을 내렸다.

 

안나는 그냥─더우니까 짜증이 나 있는 걸 거야. 에어컨을 틀 수 없으니까 더더욱 짜증 나겠지. 내가 안나한테 잘못한 건 없을 거라고. 아까만 해도 좋았잖아. 농담도 하고, 가방도 받아주고. 날 갑자기 싫어할 이유 같은 건 없어. 엘사는 불안한 마음을 다독였다.

 

'안나가 멍청해서 다행이야. 벌써 몇 번이나 같은 내용을 읽고 있잖아. '
그리고 같은 노트를 열한 번째 읽고있는 안나를 살폈다. 지금 펼쳐져 있는 장도 마저 읽으면 열두 번 째. 좋아, 다 읽어가네. 안나가 노트를 덮었다. 엘사는 속으로 환호했다. 이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을 나한테 물어볼 수밖에 없겠지. 그럼 질문에 대답해 주면서 자연스럽게 만질 수 있어. 엘사는 자신의 계획대로, 안나의 입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안나는 그 기다림을 배반했다. 그녀는 노트를 도로 펼치더니, 밑줄까지 그어가며 다시 읽기 시작했다. 엘사는 자기 주변의 온도가 계절을 거슬러, 급감하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그 초현실적인 현상을 맞은편에 앉은 붉은 머리가 눈치챌 수 없게해야 했다.

 

먼저 묻지 않는다면, 묻게 하면 돼. 원래 모르는 거 물어보기 창피하니까. 엘사는 식탁 위에 놓인 안나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개며, 친절한 어조로 말했다.

 

"아까부터 계속 같은 내용만 읽고 있네."
침묵. 안나는 고개를 숙인 채 엘사의 말을 무시했다. 엘사는 무안했지만, 그녀에게 친절을 베푸는 걸 멈출 수 없었다. 때때로 '병'은 더 강력한 진통제를─안나와의 확실한 스킨십을 요하기도 했는데 지금이 그랬다. 엘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안나와 방금 전 처럼 친해져야했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안나를 만질 수 있어야 했다. 엘사는 안나의 침묵에 애가 탔지만, 인내를 갖고 덧붙였다. "...모르는 거 있으면 바로 물어봐." 하지만 안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또 침묵했다. 엘사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마지막 말을 덧댔다.

 

"창피해 하지 말고."
다행히, 그 말만은 안나를 움직일 수 있었다. 안나는 노트를 덮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역시! 물어보기 부끄러웠던거야. 엘사는 자신의 정확한 추리에 감탄했다. 뭔가 물어보면, 대답해주면서 아예 안나 옆자리에 앉아야겠어. 엘사는 친절함과 가벼운 영악함이 섞인 미소를 지으며 안나의 음성을 기다렸다.

 

 

 

 

 

 

 

 

 

 

 

 

 

 

 

 

 

 

 

 

──────────────────────────────────

ㅎ...ㅎ...;; 늦어서 할 말이 없다는 말밖에 할말이 업ㅂ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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