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부 판사 셋이 자장면을 먹는다. 저번에도 그러더니 한부장과 임바른은 마지막 하나 남은 단무지를 서로 먹겠다고 한다.

이번에는 바른이 양보하지 않는다. 서로 입가에 짜장을 묻힌 채, 아작 아작 단무지를 씹어 먹는 우배석의 기세에 부장판사가 오히려 약간 눌린 것 같다.

오름은 그런 바른에게 너무 그러지 말란다. 오름과 한부장의 불꽃 튀는 대결에 쩔쩔매던 임바른이었는데, 어찌 좀 바뀐 것 같다.

오름을 보자면, 법정을 떠나서는 오히려 세상의 룰에 잘 따르는 것 같다. 회식이라든지 연장자에 대한 존중, 단체생활에 대한 자세가 그렇다. 불특정인에 대한 친밀감의 표시도 그렇다. 바른이 바퀴벌레 같은 친화력이라고 표현한 그런 친화력이 오름의 어떤 부분에서 발현된 것일까? 외할머니와 함께 시장 이모들과 지내면서 갑자기 만들어진 성격일까? 어린 시절 오름을 생각한다면 그렇게 성격이 돌변했다는 것이 바른 못지않게 나도 궁금했다. 그런 오름의 세상에 대한 열린 태도가 판사가 아닌 법원 사람들의 지지를 이끌어낸다. 

한부장의 말실수에 민사 44부는  갑자기 자잘한 형사사건을 맡게 된다. 바른은 술로 인한 심신미약감형을 못마땅해 한다. 바른처럼 술을 즐기지 않는 나로서는 자의적으로 먹은 술로 인해 뭔가 잘못을 저지른다면 그건 술 때문이 아니라 자제하지 않은 사람이 문제라고 생각해 왔던 터였다. 만약, 어떤 사람이 생전 처음으로 알코올을 섭취하고 생각지도 못한 실수를 하게 된다거나, 강요에 의해 취했다고 하면 생각해볼 일이지만 말이다. 

오름과 바른은 술로 인한 범죄가 잘 일어나는 어떤 동네를 같이 가본다. 버스에 나란히 앉아가며 서울에서 오래 살았는데도 처음 가보는 동네가 많다고 한다. 강남의 한 쪽 끝자락의 오래된 임대아파트, 오름은 가난을 그렇게 거기 있는데도 일부러 보지 않는 이상 보이지 않는 것 같다고 한다.

그러자 바른이 어린 시절 이사했던 이야기를 한다. 이사를 자주 가는 것은 좋은데, 이삿짐차가 못 간다니 저런 리어카로 짐을 옮기자고 아버지가 그랬다고. 어쩌면 이 순간이 바른이 오름에게 어떤 의미로는 적극적인 구애의 시작이 아닐까 싶다. 지금까지 바른은 자기 이야기는 잘 하지 않았다. 지난번 아이들 일을 해결하면서 무척 가까워진 듯한 두 사람이었다. 아주 느리지만 이들은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바른은 오름에게 자기라는 사람을 제대로 봐 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게 싫더라고요, 어디 살든 상관없는데 저걸 끌고 가는 건. 철이 없었죠.”

바른은 “난 가난을 잘 알고 있다”고.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안에 살고 있다고 담담하게 자신을 드러내 보인다. 그리고 나도 처음부터 애어른은 아니었다고 그런다. 그런 바른에게 오름이 그런다. “애 어른이거 알기는 하냐”고. 서로에 대한 경계가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는 것 같다. 아주 조금씩. 

난 이 장면이 참 좋았다. 서로를 알아가는 사랑, 사람이 온다는 것은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함께 온다고 했던가? 철없던 시절의 가난의 아픔을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털어놓는 바름과 그런 어린 바른을 눈 앞에 그려보는 오름 같아서였다. 아무것도 모른 채 어떤 사람을 좋아할 수도, 잘 모르고도 사랑할 수도 있지만, 진정 서로를 잘 안다면 더 단단하고 건강한 사랑이 될 것 같다. 짧은 장면인데 너무 깊은 의미를 부여했나싶기도 하지만. 

어린아이들 소리가 나지 않는 동네에 몸이 불편한 아들을 데리고 나온 할머니가 두 사람을 붙잡는다. 젊은 사람과 이야기를 해 본지가 언제인지도 모르겠다면서 참 잘 어울린다고 하신다. 두 사람은 겸연쩍어 하면서 할머니가 들려주는 동네 이야기를 듣는다.

어쩌면 그들의 범죄가 나약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지, 나쁘거나 추한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그런 상황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렇다면 사회는 어떤 책임을 지는가? 바른이 물어보는 사회라는 범주 안에 우리도 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둘은 깊은 상념에 잠긴다. 법복이라는 무게를 감당하고 있는 젊은이들이 사랑타령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박차오름이 주심인 상습적 음주운전 피고인은 정신과 치료 후 다시 집행유예를 통해 실형을 면하게 되었고, 임바른이 주심인 주폭 노인은 실형(3년 6개월)을 선고받고 집행유예까지 합쳐 5년형을 받는다. 인간의 나약함도 행위의 유무에 따라 다른 판결을 내렸는데, 개인적으로 합당하다고 느꼈다.

그럼에도 크게 사회적 위협이 될 것 같지 않은 칠십대 노인에게 실형을 선고한 재판부, 특히 바른은 마음이 편하지 않다. 회식 자리에서 중앙지법 형사부가 재판중 이던 재벌에게 이례적으로 5년형을 선고했다고 뉴스가 나온다. 같은 5년, 바른은 괴롭다. 그래서 술을 청한다. 

한 잔 두 잔. 몇 잔을 마셨을까? 바른은 토하다 정신을 잃은 것인지, 그 사이 기억이 없다. 그저 쓰러지면서 편안한 엄마의 무릎에 누워 있는 꿈을 꾼다. 임바른이라는 헌법기관인 대한민국의 판사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는 무력감이 그의 이성을 잃게 했는지 모른다. 바른이 그토록 혐오한 나약함은 누구에게나 있다. 심지어 그 자신마저도 예외일 수 없다. 

슬며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엄마의 얼굴이 아니라 오름의 얼굴이었다. 마음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드러내고 거절당해 더욱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는지 모른다. 화들짝 놀라 일어나보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늘 술에 취해 있거나,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책임을 떠맡는 아버지의 나약함이 싫었던 바른은 그게 바로 죄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의지와 상관없이 또 잠에 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