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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리뷰> 지독하리만치 계산된 섬세함, 마스터는 누구신지.

greenearth24(98.228) 2019.06.17 10:00:01
조회 2107 추천 130 댓글 30

"우리, 헤어져."

정인은 결심한 듯, 그러니 잘 보라는 듯, 지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기석과 통화 중인 전화기에 마침내 해야 할 말을 내뱉는다. 임팩트 넘치는 이 엔딩 대사 때문에 놓칠뻔했지만 정작 마음을 더 뺐겼던 건 그 순간 일어난 정인과 지호의 작은 행동에 있었다.

정인의 결별 선언에 놀라는 듯한 지호가 그 순간 살짝, 정인이 쪽으로 한 발짝 다가간다. 어쩌려고 그래 혹은 그러지 마. 정확한 의중까진 몰라도 뭔가 말리려고 하는 다급함은 느껴진다. 지호가 다가옴과 동시에 한두 발짝 뒤로 주춤, 물러서는 정인. 순간적으로 다가오는 지호를 경계하고 피하는 몸짓에는 결정을 뒤집지 않겠다는 확고함이 배어 나온다. 다가감과 물러남, 지호와 정인이의 거의 무의식적인 행동이자 순간에 스치는 속마음을 담고 있다.

궁금했다. 저 섬세함은 대체 누가 시킨 걸까. 연출이 시킨 걸까?,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배우의 연기일까? 혹은 대본에 쓰여있기 때문일까? <봄밤>이 감탄스러운 게 이런 지점이다. 지독하리만치 계산된 섬세함. 인물들의 명확한 심리가 읽히는 데 다음 장면의 쇄도와 함께 채 음미하기도 전에 스쳐 지나가 버린다. 하지만 보고 있는 우리는 쟤들이 말을 안 해도 왜 저러는지를 이미 안다. 사람이라는 게 말과 행동이 늘 일치하는 것도 아니고 속마음과 똑같이 행동하는 것도 아니다. 목적이 있으면 얼마든지 감추는 게 인간이다. 하지만 무의식은 긴장을 조금만 늦추면 나도 모르는 내 행동으로 나의 본심을 함부로 발설하곤 한다. <봄밤>은 그 사소한 무의식적인 행동들이 갖는 의미를 포착하고 극으로 구현해서 연기로 보여준다. 그로 인해 캐릭터는 더 입체화되고 공감은 극대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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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마셔요?"

도서관 동료들과 회식 중인 정인은 지호의 전화를 받고는 지호가 지켜보고 있는 걸 안다. 두리번 두리번. 곧 길 건너편에서 전화기를 들고 있는 지호를 발견한다. 그 순간 동료들이 있는 유리벽 안쪽으로 고개가 돌아가는 정인. 거의 자동적인 반응이다. 저벅 저벅 몇 걸음 더 유리벽을 지나 기둥 앞에 선다. 그 작은 몇 걸음을 왜 더 옮겨와 기둥 앞에 섰는지 우리는 안다. 안쪽에서 전화하는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길 하나의 차이만큼 떨어져 있지만 지호와 함께 마주 보고 있는 자신을 들키지 않으려 함이다. 지호를 좋아하기 때문에 숨고 좋아하기 때문에 숨기는 정인이의 속마음이 깔려 있다. 무의식은 그렇게 정인이의 몇 걸음으로 속마음을 밀고하고 <봄밤>의 카메라는 그 순간을 포착한다.

"벌써 집에도 오냐?"

지호의 집 앞에서 정인을 발견한 친구들의 반응이 재밌다. 지호는 딴청이고 두 친구는 제대로 인사를 하는 것도 아니고 안 하는 것도 아닌 상태로 말없이 고개만 까딱한다. 오셨냐고 환영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쌩까지도 못하는 친구들의 입장을 잘 보여주는 인사. 그리고 나서도 캐릭터의 성격이 그대로 나온다. 현수는 '벌써 집에도 오냐?'고 지호에게 타박이고 영재는 그런 현수를 시끄럽다며 서둘러 잡아끌고 나간다. 딱 그 상황에서 할 것 같은 어정쩡한 인사, 자기 직장 선배 여친과 연애 중인 친한 친구 놈에게 딱 할 것 같은 타박, 오랫동안 마음고생하며 살아왔던 친구에게 찾아온 사랑을 지켜주고 싶은 친구라면 딱 할 것 같은 상황 정리.

<봄밤>을 처음 봤을 때, 회차별 리뷰가 아니라 장면 장면 리뷰가 있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 이유가 이런 장면들 때문이었다. 이런 식으로 인물의 작은 행위가 앞서 등장한 에피들과 촘촘히 연결되며 순간의 감정과 깊은 속내를 담고 있는 장면은 다 언급할 수조차 없이 많다. 농구 경기 뒤풀이에서 지호의 직업을 맞추는 문제가 나오자 갑자기 사레들어 콜록거리는 정인이나 아나운서 이서인이 자매의 큰언니라는 걸 알게 된 영재의 반응이라던가. 때로는 지문 같고 때로는 연기 같고, 어쩔 땐 연출의 전지적 통제 같은 계산된 디테일. 빠진다고 해도 극 진행과는 전혀 무관할 것 같은 그 사소함이 캐릭터에 입체감을 부여하고 <봄밤>의 현실성과 일상성을 극대화한다. 이 섬세함을 만든 마스터는 누구일까. 감독인지, 작가인지, 배우인지. 어쩌면 모두 다 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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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봄밤 갤러리 [원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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