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만 열지 않는다면 완벽해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친구가 그렇습니다. 날 때부터 콩코드 닙은 아니었지만 약 30년쯤 전 아버지가 눌러버린 이후 방치된 이 펜은 저의 첫 만년필이자 언젠가 고쳐서 멋들어지게 사용하고자 했던 펜이었습니다.
연구소를 몰랐던 저는 이 펜의 부품을 교체해보기 위해 같은 펜을 구매해보는 등의 노력도 해보았고 결국 완전 분해가 한번쯤 필요하단 결론에 도달해 문갤에서 어깨너머로 알게된 연구소의 개방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교수님이 꽤 큰 돈이 걸린 중요한 서류를 작성하고 계시는걸 봤는데 교수님이 거기에 싸인할때도 제트스트림을 쓰시는걸 보니 불현듯 '아 이 펜은 고친다 하더라도 내가 사용할 일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저도 이미 세필이고 뭐고 만년필은 필통에서 내려놓은지 오래이고 동급의 두께에서 가장 부드러우며 어떠한 급격한 획을 긋더라도 레일로드 현상이 전혀 발생하지 않는 빠이롯트 다운포스에 아크로볼 조합을 쓰기 시작한 이후로는 만년필의 필감에 대한 환상마저 잃어 자주 기웃거리던 문갤마저 거의 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누군가는 저와는 다르게 높은 자리에서 남들보다 빛나는 펜을 꺼내서 쓸 필요가 있거나 그저 반짝이는 것을 수집하는것 만으로도 만족할지도 모릅니다. 그 사람은 의사, 판,검사 등의 사자 돌림 직업을 가졌을 수도 있고 모든것을 가졌지만 자택의 경비를 자처하는 겸손한 분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누구든 좋습니다. 그저 휘어진 닙을 스스로 고칠 능력이 되거나 모 갤러처럼 고칠 능력이 있는 사람과 친분이 있으시거나 그것도 여의치 않으시다면 수고스럽게도 어딘가에 수리를 맞길 수 있으시다면 좋습니다.

처음에는 그래도 어떻게든 고쳐서 넘겨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고치기까지 한다면 제가 계속 사용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송구하게도 현 상태 그대로 분양을 하게 되었습니다. 상태는 사진과 같이 쉐퍼 콩코드닙을 장착하고 사용감이 2일어치 미만으로 남아있으며 지진 등으로 인해 케이스 내부에서 긁힌 흔적은 약간 존재합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케이스에서 시골 방부제 냄새가 났었는데 이제는 괜찮아진 것 같습니다.

희망 소비자 가격은 택배 포함 17만원이고 이는 수리해줄 분에 대한 신뢰 그 자체의 가격과도 같습니다. 구매자분께서 반드시 살릴 수 있는 분에게 맞겨서 이 펜에 새 생명을 불어넣어 사용하시게 되길 바랍니다.


닙이 휘었을뿐 모든 부품은 정상동작을 하며 볼펜은 잉크가 다 말랐어욤.